어려서부터 몸이 날래고, 주먹질 하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초로의 노인이 그를 제자로 삼아 기술들을 전수해주었다.
어렵지않게 5써클에 경지에 달한 남자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반면,
노인의 가르침 탓인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는 소년으로 성장했다.
마을로 가끔 내려오는 몬스터를 퇴치하는 일.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주정꾼을 제압하는 일.
그 외에도 사소한 일에도 발벗고 나서서 마을사람들을 도와주곤 했다.
천부적인 재능탓인지 혹은 그동안의 수련이 빛을 발하는 것인지
남자는 어렵지 않게 승급시험을 통과했고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다.
세상에 헛되이 이름 나는 법은 없다.
남자의 인품과 실력은, 곧장 입소문을 타서 마이소시아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고
귀족들사이에서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왕은 그를 루어스성으로 초대하여 지내게 한다.
그곳에서도 왕의 근심거리였던 몇가지 일을 손쉽게 처리해내자, 그는 금방 왕의 신임을 샀다.
남자는 얼마지나지 않아 기사로써 더 바랄 것도 없는 명예인 ' 최고기사 ' 라는 작위를 수여받는다.
그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옳곧고 한결같은 그의 인품이 크게 작용했다.
고작 스무살이란 나이로 마스터에 올라서고 명예로운 기사자리까지 얻은 것이다.
그러나 늘 좋게만 풀리던 그의 운도 거기까지였다.
어느 날 대규모 몬스터 토벌에 나섰던 그가,
배후를 알 수 없는 세력들에 의해 납치되어 세뇌가 된 채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마을 곳곳이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그를 처단하기위해 많은 경비병들이 동원되었지만, 흑마법의 힘으로 더욱 강력해진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살육을 이어나가던 그는 자신이 죽이려던 어린아이를 보고 괴로워하다 쓰러졌고,
그걸로 무서울정도로 파괴를 이어가던 그의 행보도 끝이었다.
본래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나,
그간 그가 보여준 선행과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죽음은 간신히 면할수 있었다.
그러나 평생 루어스왕성에서 떠날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 최고기사 ' 라는 직위도 박탈당하였다.
사람들을 죽인 죄책감에 몇년을 폐인처럼 지내던 그가, 광대를 자처한 것은 그리 오래지나지는 않은 일이었다.
" 여기까지가 저의 이야기입니다. "
무언가 엄청난 것을 들어버린 듯, 흑의의 사내는 어안이 벙벙한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조커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리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를 도와주려는 당신을 속일수는 없었습니다. "
잠시 침묵이 흐르고, 흑의의 사내는 입을 연다.
"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
" . . . "
" 근데 왜 갑자기 광대를 자처한 것인가요? "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놓기도 하고,
괜스럽게 안주를 휘적거리던 그가 대답했다.
" 그녀를 위해서요. "
" 그녀라고 하면 . . 혹시 라나씨인가요? "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조커.
분명 미소를 짓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다.
" 라나씨가 바로 제가 미쳤을당시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이입니다. 그리고 . . .
저는 그녀의 부모를 죽인 사람이죠. "
말문이 막힌 흑의의 사내를 바라보다, 조커는 멋쩍은 듯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 그녀는 그 일이 있고나서 웃음을 잃었어요. 물론 저에게 희생당한 사람은 그녀말고도 많았지만,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더군요. 돕고 싶어서 수차례 찾아간 적이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반응 뿐이었습니다. . .
어찌할 수 없었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녀에게 보이지않게 뒤에서 지켜보며 기회를 찾는 것뿐.
저때문에 지워진 웃음과 희망을 주고 싶었거든요. 그러던중 어느 날 밀레스마을에 서커스 공연단이
공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보았죠,
희미하고 미세하지만, 웃고있는 그녀의 모습을요. 그 뒤에 결심했습니다. 광대가 되서 그녀의 웃음과
행복을 찾아주자고요. "
갑자기 말을 멈추는 조커.
그는 술병을 들어 앞에놓인 잔에 술을 가득 붓고는, 단숨에 입으로 털어넣는다.
"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만. . 그녀가 밀레스주점에서 춤을 추고나서부터는 조금씩 밝은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물론 웃음까지도 말이죠. 사람들은 그런 그녀가 슬픔따위는 모를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알 수 있습니다. 결코 지금 웃는 모습이 진실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
그렇게 밤은 깊어갔고, 술에 취한 조커를 부축하여 데려다준 흑의의 사내는 사색에 잠겼다.
더이상 재미를 위해 가볍게 시작했던 퀘스트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도와주고 싶어진 것이었다.
' 일단은 그녀와 가까워지는게 우선이겠군. '
마음을 다잡으며 여관으로 향하는 흑의의 사내.
다음 날 -
사내는 오후가 되서야 밀레스마을에 도착했다.
그의 손에는 아주 아름다운 꽃 한다발이 달려있었는데, 이전에 죽음의 마을에서 구해놓았던 꽃이었다.
거침없이 밀레스 주점에 들어선 사내는 빨간머리의 소녀를 찾았다.
" 우리 초면이 아니죠? "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는 흑의의 사내.
라나는 그를 쳐다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다.
" 좋아하던 색깔을 물어보던 사람이군요. "
" 사람이라니, 저도 엄연한 이름이 있는데 서운한걸요? "
라나는 춤을 추듯, 그 자리에서 우아하게 턴을 하고는 입을 연다.
" 조금 억울하네요. 당신은 내 이름을 알고있지만 저는 모르잖아요? "
미소를 지어보이는 흑의의 사내의 입에서 이윽고 그의 이름이 나온다.
" 저의 이름은 '지향' 입니다. "
" 그래요 지향씨. 손에는 아름다운 꽃을 들고 있군요? "
" 참 아름답죠? 이 꽃의 주인공은 당신이고, 제 역할은 선물을 전달해드리는 전령입니다. "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라나.
" 선물이요? "
" 당신 앞으로 온 선물이죠. "
말을 마치고 손을 뻗어 꽃다발을 건넨다.
잠시 받을지말지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꽃다발을 받아든다.
향기를 맡아보곤,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여는 그녀.
" 향이 정말 좋군요. 누가 보내신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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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