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1)>
- 모험가 -
아주 큰 정원이 있다. 이 정원은 다른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답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한
정원이었다. 정원은 실제로 존재한다.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지는 곳에 있다.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쭉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럴 것이며 동쪽에서 해가 뜨는 지금 이순간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어김없이
정원에 아침이 찾아왔다.
밤새 꽁꽁 얼어붙은 대지는 아침 해가 내뿜는 따뜻한 열기로 은은하게 남아있는 한기를 밀어냈고, 다시
찾아올 밤을 대비하여 온몸으로 햇살을 받아들인다. 얕게 쌓인 서리가 녹아 만들어진 물빛은 눈부시게
반짝였고 뿌옇게 쌓였던 안개가 모두 걷히자, 마침내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정원의 모습이 들어났다. 그러나 정원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많이 것이 변했다. 온 세상의 색을 다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꽃들로 가득했던
정원이 이제는 개척되지 않은 황무지처럼 메말라 버렸고, 아름답던 풍경과 그윽한 향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정원의 크기만큼이나 찾아왔던 많은 손님들과 이곳에 머물렀던 수많은 사람들. 이른 시간부터 바쁘게
움직이던 정원사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만발했던 꽃들도 이제는 다 시들어, 꽃을 지켜주던 울타리만이 녹이 슨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르고
갈라져 생기하나 없는 땅 위로 다시 한번 꽃이 피길 기대하는 사람들만이 정원 깊숙한 곳에서 오래 전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을 뿐이다.
화려한 시절은 지나가고,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남지 않았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동쪽으로 지길 수없이 반복하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는 언제나 동쪽에서 뜨며, 우리는 그걸 아침이 온다고 표현한다. 정원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지만, 정원의 아침은 항상 밝다.
이른 아침, 꽃이 있던 자리를 가시 돋친 선인장이 대신하고, 마지막
한 명의 정원사만이 남아있는 이곳에, 오래 전 그 시절. 그윽했던
꽃 향기에 이끌린 한남자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저희 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여기가 마이소시아 정원인가요?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요.”
“네. 이곳은 마이소시아 정원입니다. 다시 한번 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남자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정원사에게 말했다.
“정말 많이 변했네요. 원래는 꽃이 엄청 많았었는데...”
“꽃은 다 시들었지만 선인장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판매 기간이 아닙니다.”
“네? 판매요?”
“지금은 선인장을 판매하는
기간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 번에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전 선인장을 살 생각이 없어요. 그냥 오랜만에
꽃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렇습니까?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원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몇 차례 더 질문을 했지만 정원사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황당함을 뒤로하고 정원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허무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기대심에 부풀려 설레었던 벅찬 감정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런
남자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한 듯 정원은 쓸쓸함이 가득했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낼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좀더 들어가볼까? 다시 돌아갈까? 생각을 굳힌 남자는
정원사에게 걸어갔다. 그때였다.
“그만하게. 그것은 정원사가 아니야. 인형이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남자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지만
자신에게 향한 발자국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환청? 귀신? 남자가 상대의 정체를 기억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구시죠? 일단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아, 미안미안. 하이드 중인걸 깜박했네.”
하이드가 해지되는 순간은 정말 신비롭다. 찰나의 순간을 기점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고 의식하던
공간에 하이드로 가려진 몸이 들어나는 순간, 당연히 그 자리에 서있던 거라고 의식의 찬반이 뒤바뀐다. 이런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하이드 사용자와 정원을 모험할 땐 반드시 파티라는 계약을 맺었던걸 남자는 기억해냈다.
“자네는 뉴비가 아니군. 장난 좀 치려 했더니, 허허. 사과하겠네.”
버섯모자에 귀마개를 쓴 독특한 차림새 남자는 머쓱히 고개를 약간 숙이며 이해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자신을 도적의 길을 걷고 있는 모험가라고
소개했다.
“아닙니다, 모험가 씨. 오히려 고마워요. 사실 너무 답답했거든요.”
“그 기분 이해하지. 나도 처음엔 그랬거든.”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거죠?”
“아, 이 정원 말인가?”
모험가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정원을 쭉 둘러봤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 정원은
정말 오래됐다네. 한때는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오래되고 낡은 정원일 뿐이지. 자네가 기억하는 정원으로 돌아간다 한들 이미 세상엔 훨씬 멋진 정원들이 가득해.”
“그건 알지만…”
“이만한 정원을 찾을 수 없었겠지. 어떤 정원을 가도,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해도, 이곳에서 지냈던 시간보다 행복하지 않았을 거야. 좋은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좋았겠지만, 이미 자네는 여길 찾아와버렸군.”
“네, 맞아요. 그리고 이것 때문에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꽃 한 송이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올려놓은 꽃을 모험가에게 내밀었다. 모험가는 남자가 보여준 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라피드 꽃이군! 다 자랐는걸?”
“잘 아시는군요.”
“물론이지. 나도 한 개 가지고 있거든.”
그는 자신이 가진 라피드 꽃을 보여줬다. 남자가 가진 꽃은 보라색인 반면 모험가의
꽃은 분홍색이었다. 처음 보는 꽃의 색깔에 남자는 감탄했다.
그는 몇 번이나 자신의 라피드 꽃과 분홍색 라피드 꽃을 번갈아 봤다.
적당히 보여줬다고 느낀 모험가는 꽃을 다시 품 안에 넣었다.
----------------------------------------------------------------------------
글이 길어 용량 문제로 두번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험이 나를 부른다."
- 모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