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품어버린 죄악만 수만.
피를 뒤집어쓰며 목숨을 앗아간 영혼들이 수천.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아무런 욕구없이, 아무런 희망없이
하루를 스쳐가는 바람처럼 살아갈 뿐이다.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아줄 사람이 있을까.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워,
모든것을 잊어버린 내게 새 삶을 줄수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유도 없는
의미도 없는
무차별적 살해의 끝에서 한 여자와 마주했다.
그녀는 전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괴물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몰라.
그러나 체온이 없다고 해도, 인간의 감정이 남아있다면 결국 사람인거지.
내가 잠시 정신을 차릴수 있었던건 그녀의 눈이 매우 슬프게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저앉은 그녀가 처절하게 울고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이 찢어지는것 같았다.
생전 타인이라면 무의식에 칼부터 먼저 나가버렸는데
처음으로 손을 내밀고 말았다.
마주 잡은 손.
타고 올라와 볼을 적시는 따뜻함.
그게 전부였고,
모든걸 내려놓고 말았다.
#2
그녀의 표정은 항상 차가운 얼음장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 차갑게 대하는 것은 물론 비아냥거리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읽을수 있었다.
모든것은 허세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진심을 담아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같은 처지였기에 통했을까.
베일것같았던 그녀의 얼음장같은 태도가 녹아내리듯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나의 진심이 닿은 걸까, 아니면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우리는 어느새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항상 그녀를 힘껏 끌어안아준다.
이렇게하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따뜻해질수 있으니까.
그럴때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나는 피냄새가 싫다고 나를 살며시 밀쳐내었다.
나도 느낄수 있었다.
그녀에게 묻어 지워지지않는 짙은 혈향.
하지만 나는 그것을 붉은 장미의 향기라고 해주었다.
그래, 그녀의 향기는 붉은 장미향이다.
달콤하게 다가와 나를 매료시키고, 그 향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봄같은 남자라 해주었다.
내 몸을 아니, 영혼까지 뒤덮어버린 지울수 없는 검은색을 보고도
그녀는 나에게 봄날같이 따뜻하다고 해주었다.
그래. 어쩌면 그녀만이 지울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피와 악으로 찌들어 검은색으로 텅비어버린 나를 그녀가 채워주는거야.
결심했다.
아니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입을 맞추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어온거야.
나는 그녀의 슬픔을 지워버릴것이다.
우리의 운명에 늘 피가 따라온다해도,
나는 그 선혈들을 아니 따라오는 모든것들을 붉은빛 장미향으로 바꾸어버릴것이다.
나에게 있어 다시는 없을 애절한 사랑.
그것이 설령 언제라도 놓쳐버릴지 모르는 환상이라도,
결국 이루어질수 없는 한순간의 유희라 해도 지켜내고 말것이다.
온 세상의 칼끝이 우리를 겨눠도,
목숨을 앗아간 수천의 영혼이 나를 죄여온다고 해도.
나는 당신의 손을 꼳 붙잡고 있을거야.
사랑해 베리얼.
나의 여자, 나의 사랑. 그리고 나의 모든 것.
후문명기 정복왕시대
루딘력 24년
어느 학살자와 어느 괴물의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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