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가만히 내 손을 바라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 나.. "
" ...... "
" 아무도 못 만나..."
" ... "
" 내 평생을 살아도 사랑 같은 건 두 번 다시 없어.. "
" ..... "
내 손 아래에 놓여졌던 H의 손이 움직여 내 손을 덮었다. H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 ...... 미안해. "
" ..... "
" 미안해.. 정말.."
" ... 그런 말 듣자고 말한 거 아니야 "
" .... "
무언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H는먼저 입을 떼었다.
" 내가 스물 한 살 때...."
" ...... "
" 굳이 그 때가 아니어도 가능한 일과
그 때가 아니면 안되는 일이 한가지씩 있었어.. "
" ....... "
미어지는 가슴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 연애라는 건 당장 그 때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 여겼고,
내 눈 앞에 있었던 J라는 사람은 그 때가 아니면 안될 것 같았었지.."
" ...... "
" 그 후로 벌써 11년이란 시간이 흘렀나보네.. "
" ...... "
" 하지만 그 때가 아니면 안되었던 J라는 여자는 결국 날 떠나갔고
당장 그 때가 아니어도 가능할 것 같았던 연애는 정작 하지 못했어. "
" ...... "
" 이제 어떡해야하나.. 어떡해야하나..
그렇게 1년을 하루같이 J라는 여자만 그리며 살아온게 벌써 4년이야.."
" ..... "
" 그 여자를 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여자로 남기고자 했던 건 아닌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채우기엔 아직 시간이 모자란건가 싶기도하고..."
" ....... "
" 그 J라는 여자.. 지금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가끔 내 생각 하긴 할까.."
그는 고개를 돌려 내 눈물을 닦아내고는 다시 앞을 응시했다.
" ... 나... "
" 응 "
" 이제와서 니 앞에서 아무런 말도 못 해.. 너무 미안해서.. "
" ...... "
" 근데... 미 ..."
다음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그는 몸을 돌려 나를 끌어안았다.
" 미안해.. "
코끝을 스쳐 가슴 깊은 곳까지 닿은 그의 짙은 향기가
내 온 몸에 얼어붙었던 얼음장들을 녹여내리느라 바빴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향기였던가....
더 이상 용기따윈 필요 없었다.
메여오는 목을 간신히 달랜 뒤, 오랫동안 뒷켠에 밀어두었던 한 마디를 토해내었다.
" 사랑해 "
그는 아무 말없이 있는 힘껏 나를 끌어안았고
나도 그의 가슴에 모든 걸 다 맡긴 채 하염없이 울었다..
계절이 오고가고,,, 가고 또 오는 동안
우린 얼마만큼 멀리 돌아온 것일까..
굳이 이렇게 아프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 때와 같이, 그 때 처럼 우리가 사랑을 말하고 있었더라면
지금쯤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그 때의 난 뭐가 그렇게 무서웠었을까...
민아도, H도,,, 지난 십여년간 내가 가졌던 꿈은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작은 행복들이지 않았을까...
지난 세월동안 못난 나로 인해 받았을 그들의 상처보다 더 미안한 건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그들의 존재를 애써 부정해온 날들이 아닐까...
텅 비어버린 세상을 원망하며, 떠나가버린 모든 것들에 미련을 두었던 날들..
하지만 떠나간 건 그들이 아니라 나였고
사랑하는 이들이 꽉꽉 채워준 사랑임에도 그건 아니라고 울부짖었던 것도 나였음을...
꿈이 곧 행복이라 믿으며 앞만 보고 달려온 날들,
그 동안 내 곁을 스친 많은 풍경들.
그런 못난 내 옆을 늘 지켜주었던 고마운 사람들.
사랑이란 거.. 받고 있으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수도없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말들과 행동들이
다시 한 번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알면서도 외면해야했던 날들과
몰랐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무수한 날들이
머릿 속으로 빠르게빠르게 스쳐갔다.
눈을 감고 H의 어깨에 기댄 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번 주말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선물인 것만 같았다.
꿈이 주는 행복보다 삶이 주는 소소한 행복이 더 크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그런 내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아마 오늘 밤 꿈에선 아버지를 만날 것이다.
민아와 H..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평생 옛모습들만 그리워해야할 사람들일 줄 알았다.
숨을 쉬고 같은 시간 속을 살고 있음에도
우린,
아니 난.. 그렇게 지난 세월을 무심하게 살아온 것이다.
특별하다면 조금은 특별했던 주말이 지나고 있다.
어렴풋이 내 인생에 늦은 봄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봄이오는 소리에 맞추어
서른 둘, J라는 여자의 인생은
언제나 꿈꿔왔던, 지지고 볶아대는 푸근한 삶 속으로 비집어 들어가려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 The End -
모자란 경험으로 엄청스레 모자란 이야기가 된듯합니다.
그간 응원해 주신 분들께는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J라는 여성에게서 제 모습을 본 것인지
제 모습을 J로 나타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삶이기에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있어서 마구마구 흔들흔들 거렸던 것 같기도하고......
J가 어쩌면 제 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 작은 글 속에 제 바램등을 담고 있었다는 생각은
마무리 짓고나서야 비로소 가슴 깊이 깨달았습니다.
오늘도 꼬질꼬질한 이야기들로 가득찬 제 글을 찾아주시는 분들껜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며,
아무쪼록 즐겁고 평온한 봄날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