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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께 보내는 편지 세오
[애루]백발의사제-어둠의계약자
626 2011.01.05. 13:14

스크롤의 압박의 예상됩니다.

-

Chapter 1 어둠의 계약자(Contract of Darkness)

내 이름은 프레이엘 세이프리스.
이 곳 마이소시아 태생으로, 20여년을 살아왔다.

나는 이아님을 모시는 사제로서, 이아님을 모시게 된 그 날부터 일정한 거주지는 없이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마이소시아 태생으론 굉장히 드문 일이다.

왜냐고?
이 곳 마이소시아에는 심심치 않게 여행자들을 찾을 수 있다.
그 여행객들의 대부분은 일명 ‘어둠의 계약’을 맺고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칼로 베어서 죽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그들이 죽어도 계약에 따라 명계의 왕 뮤레칸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살아나는 곳은 그 자신이 정할 수도 없다고 한다.
계약이 깨지거나, 늙어 죽을 때까지 그들은 수십 수백 수천 번을 죽여도 죽지 않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론 그것은 절대로 축복이 아니다.
그들의 말로는 환생의 순간에는 굉장히 강렬한 고통을 느낀다고도 하고,
살아나며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무언가를 분명히 하나 둘씩 잃어간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나는 너무나도 많은 환생을 겪은 나머지 몸도 마음도 모두 망가져버린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꿈도 희망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오직 고통만을 호소했다.
.....

얄랑한 동정심이었을까?

나는 왜 이 일을 시작하였을까?
나도 모를 일이다.

노란 후드가 달린 로브, 약간 헝클어진 주황빛 머리칼.
눈에 익은 모습을 한 한 소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선 천천히 걸어왔다.

로메디스

마법사 지망생으로 그도 역시 ‘어둠의 계약자’이다.
그는 내 후원을 받고 있는 내 의동생이다.

“안녕하세요, 형님.”
“안녕, 로메디스. 그런데 왜 만나자고 한 거야?”

로메디스는 박수를 딱 치며 말했다.

“아, 최근에 한 사람으로부터 예전에 잃어버렸던 한 물건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요.”
“그래?”
“네, 뭐 그래도 수 십 년 전 잃어버린 물건이라 찾을 수 있을지...”
“그러니까 부탁이겠지.”

이곳 남쪽 숲은 사람의 발길이 없다시피 했다.
왜인지는 나도 잘은 모르지만...
하지만 이 넓은 숲에서 있을지도 모를 선물 상자 찾기라니.. 조금은 귀찮게 되었다.

-

얼마나 사람이 뜸했는지 숲에는 아예 길조차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나무가 그리 많이 빽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갑자기 멈춰선 로메디스가 가슴 앞에 양손을 모으며 나직하게 알 수 없는 말들을
-아마도 주문 - 토해내었다.
그의 가슴 앞에 모은 양손 사이에서 희미한 하얀 광구가 나타났고,
광구는 순식간에 밝아지더니 마침내 새하얀 빛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그 빛이 정점에 달한 순간 로메디스는 양손을 위으로 뻗어내며 시동어를 풀었다!

“마레노!!”

하얀 광구는 하얀 빛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허공으로 튀어 올라가 물에 녹는 설탕처럼
공기 중에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마귀를 거대화 시킨 듯 한 괴물, 맨티스의 흉부를 수압이
만들어낸 예리한 칼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쮜이이이--!!!!!!

맨티스가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스러져갔다.
아... 저 녀석이 한방이란 말이지? 어이쿠 이런...

“무서워, 그런 마법.”
“헤헤..... 뭐, 그래도 아직 2~3발 쏘면 한동안 쉬어야 하니까요.”

로메디스는 겸연쩍은 듯 자신의 볼을 긁으며 땅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강한 상대는 나오지 않아서 나는 단지 로메디스의 뒤를 쫒으며 땅을 바라보는 게
고작 이었다.

사실 이 넓은 숲을 뒤진다는 거. 하루 이틀 만에 끝날 거라곤 생각 안했지만-

“어디쯤에 흘렸다고 했어?”
“글쎄요... 그리 많이 깊은 곳은 아니라고 했어요.”
“후....”

나는 작게 한 숨을 쉬었다.

그 때 였다.

“꺄아아아-"
"?!"

어디선가 들려온 하이톤의 비명소리에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순간 로메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가자!”

달렸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 비명소리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주황색 민소매의 블라우스를 입은 적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양팔을 올리고 서있었다.
그리고- 맨티스의 앞발이 그녀의 팔을 베어나간다-

“꺄앗-”
“로메디스!”

소녀는 앞 팔을 **고는 뒤로 그대로 넘어졌다.
치명상은 아닌 것 같지만 그리 무시할만한 상처는 아닌 것 같다.

내 스태프, ‘성스러운 달’을 가슴 앞에 정렬시키고 재빨리 회복주문을 외웠다.

“쿠로!”

하얀 빛이 그녀의 몸 위에 나타가 그녀의 몸속에 빨려 들어가고,
그녀의 벌어진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그리고 - 맨티스의 몸통에 박혀 들어가는 로메디스의 물의 칼날!

스팟!

물의 칼날은 버터를 베어나가는 버터나이프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맨티스를 세로로 동강내었다.

소녀에게 달려갔다.
나보다는 조금 어린, 16에서 18쯤 되어 보이는 소녀다.

“괜찮나요?”
“......”

소녀는 내말을 들은 채도 안하고,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방금 베였던 부위를
놀란 표정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재차 물었다.

“괜찮아요?”
“.......”

소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평범한 외모.
그러나 어딘가 끌리는 면이 있는 소녀였다.

“아....?”

그녀는 잠시 동안 멍하게 있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선 말을 이었다.

“그..그..... 고맙습니다.”
“왜 여기에 혼자 계세요?”
“그게... 길을 잃어서.”

소녀는 고개를 가로 휘휘 젓고는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저기.. 마을까지 데려다 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이죠.”

“어라...이게 뭐지?”

소녀 옆에 서있던 로메디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주저 않으며 소녀 뒤의 작은 바위 뒤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어 올린 건 작고 낡은 상자였다.
원래의 포장지는 꽤나 고급이었던 것 같지만, 수십 년 간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제 색을 잃은 채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이게 그 ‘선물 상자’인가?”
“네... 그런가본데요?”

로메디스는 선물 상자를 들어 귓가에 대곤 살짝 흔들어 보았지만,
충격완화를 위해 짚이 들어있는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묵직한데요?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가볼까?”

-

서쪽 숲의 입구로 나온 셋.

앞장서고 있던 나는 몸을 돌려 멈춰섰다.

“로메디스, 어디로 갈 거야?”
“일단, 저는 로톤 마을 쪽으로 가려고요.”
“그럼 당신은?”
“........”

소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침묵. 이 상황을 어찌해야할까 조금씩 걱정되어 가는 순간 소녀가 입을 열었다.

“저, 아무런 기억이 없어요. 단지 정신을 차려보니 이 숲 안.
나갈 길을 찾고 있었는데 저 괴물을 만났고- 그리고 당신들을 만난거지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 어쩌면...
어둠의 계약자일지 모르겠다.
어둠의 계약자들과 똑같다.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자신이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이곳 마이소시아였다는.

로메디스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한 거겠지.

단순히 일시적인 기억장애라면 좋겠는데...

“그럼 어떻게 하실래요?”
“어떻게 할 거냐고 하셔도....”
“그럼, 일단 저를 따라 오세요. 밀레스 마을로 가겠습니다.”

그것이 나와 그 소녀의 첫 만남이었다.

-

남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맑은 밤하늘에는 별이 점점이 박혀있었고,
허공에 홀로 떠있는 달은 쓸쓸하게 창백한 빛을 대지에 흘리고 있었다.

늦은 밤.

밀레스 마을로 통하는 다리를 건넜다.
소녀는 나보다 반보 뒤쳐져서 나를 따라 오고 있었다.
밤이 늦었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

마법의 불빛을 사방으로 퍼트리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그 빛은 달빛만도 못하게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여관 앞에 도착하자, 문득 나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보았다.

“....?”

나는 여관 문을 열었다.

대부분의 여관들이 그렇듯, 이 밀레스 여관도 1층은 주점 겸 식당,
2층부터는 숙소가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테이블 곳곳에는 술병들이 올라와있고, 각자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다.
확실히 우리들에게는 그리 좋은 분위기는 아니다.

카운터로 약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연신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데 정신이 없었다.

“1인실 2개. 있나요?”
“아?”

그녀는 나의 등장에 조금 놀라고선 장부를 잠깐 뒤적이더니 말했다.
그 사이 소녀는 내 옆에 와서 카운터에 기대어 섰다.

“203,204,206,302,306호실이 비어있어요.”

다행이다. 자리가 있다.

“204,206호실로 하죠.”
“그렇다면 이 숙박부를 작성해주세요.”

그녀는 그리 크지 않은 두 장의 종이를 나에게 내주었다.
나는 한 장을 소녀에게 넘겨주고 서류를 작성 시작했다.

이름. 프레이엘 세이프리스
나이. 19
보호자. 미성년자일 경우니까 나에겐 해당하지 않는다.
성별. 남
호실. 204
기간. 일단은 1박으로 적어두자.

현 거주지야 불확실 하니까. 센스 있게 작대기 하나 그어주고.

옆을 흘끗 보니 그녀는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그저 끙끙대고 있다.
옆구리를 살짝 찌르니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근 거렸다.

“......내 이름, 기억나지 않아요. 나이도..기억나지 않고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름까지 잊었다니?

이름 란은 일단 공백으로 넘어가고.
나이는 눈대중으로 17.
아차- 미성년.
보호자에다가 내 이름을 갈겨쓴다. 프레이엘...세이프리스.
성별. 여
호실. 206
기간. 1박.

이름..이름...?

흘끗 여관 주인을 보니 그녀는 여전히 거울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이를 잘못 쓸리는 없다.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소근 거렸다.

“이름..일단 제 마음대로 적을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남매지간으로 속여보자. 그럼 성은 세이프리스.... 이름은...?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이름. 나는 표정을 살짝 구기면서 이름을 적었다.
여자이름 하면 생각나는 이름이 그 사람의 이름 하나 뿐이라니!

리사 세이프리스.

다음 순간 표정을 지우며 나는 주인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서류를 받고 열쇠를 받아들고는 소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무 계단이 삐걱 거렸다.

2층으로 올라왔다.

1층과는 대조적으로 2층은 조용했다.
나는 소녀에게 206호실 열쇠를 쥐어주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부터 대책을 세우죠.”
“네...”

그녀가 206호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뒤에, 나도 내 숙소로 들어갔다.

문의 맞은편에 있는 작은 창문. 그리고 작은 책상과, 작고 둥근 테이블.
한 평도 채 안되어 보이는 이 좁은 여관방이 1인실이었다.

나는 방한구석에 내 스태프를 세워두고, 테이블위에 램프에 불을 붙이고는
창문에 커튼을 쳤다.

정적. 싸늘하게 식은 공기만이 날 반긴다.
조용하다. 역시 이 방엔 나 외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몇 개월간 홀로 다녔지만 이 기분은 언제나 기분 나쁘게, 거의 매일 밤 나를 찾아왔다.
고독. 외로움... 이 생각이 떠오를 때면 무언가를 무던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침울해져 버리니까. 자꾸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니까.

방 한 쪽에 걸려있는 거울로 걸어갔다.

짙은 회색의 로브를 걸친, 백발의 청년이 거울 너머에서 나를 보고 있다.
로브를 벗어, 옆에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똑똑

“누구세요?”
“저..저기..”

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녀의 목소리. 나는 문가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겠다.

“왜요?”
“저기... 씻는 건 어디서 하죠?”
“아....오늘은 너무 늦게 와서.. 세면실이 문을 닫아버렸어요.”
“이런...”

소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는 잠시간 있더니, 뭔가가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아참..그리고 저...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그녀는 고개를 다시 푹 숙이고는 블라우스의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약간이지만 그녀의 치마에는 붉은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뭐, 별 수 있나.
내 옷을 빌려 줄 수도 없는데.

“음.....일단 오늘만 견뎌보세요.”
“네에...그렇군요.”

그녀는 왠지 힘없어 보이는 말투로 말했다.

“잘 자요..”

-

아직은 조금 이른 아침.

그럼에도 여관의 1층 식당은 아침식사를 드는 여행자들로 분주했다.
우리도 물론 그 여행자 중 하나였지만.

둥근 테이블 위에는 얇게 저민 **컨 몇 조각과 빵 몇 조각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나는
스튜가 두 접시 있었다.

소녀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식사를 했다.

나는 빵을 한 덩이 꿀꺽 삼키고는 마악 스푼을 스튜에 넣는 소녀에게 물었다.

“뭔가 기억나는 거, 있어요?”
“.......?”

소녀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에 그 말뜻을 이해 한 듯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

소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스푼으로 접시 안에 든 스튜를 천천히 휘저었다.

“휴....”

말을 그만 둬야할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이것 하나 만큼은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저.....”
“네?”
“제가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되죠?”
“아?”

소녀의 손이 딱 멎었다.
그리고는 스푼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

또 한동안 침묵.
내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녀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네?”

너무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앞말은 듣지를 못한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리사 세이프리스!”

그리고는 다음 순간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스튜만 휘젓는다.
리사라면.. 내가 어제 그녀의 숙박카드에 적은 이름이구나..

-

어색함 속에 식사를 마친 나와 리사는 체크아웃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근처의 방어구 상점에 들렀다.

대머리에 빳빳한 검은 턱수염을 아무렇게나 기른 중년 남성이 카운터 너머에 서있었다.

로건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은 밀레스 마을에서 손꼽는 장인으로
실력 있는 대장장이지만 그 이상으로 의상 쪽으로 조예가 깊었다.
그가 만든 옷들은 값싸고, 입기에도 편하고 무엇보다 가격에비해 내구성이 강했다.
내구성 쪽으로 따지면 뤼케시온의 후치 쪽이 더 강하지만.. 그쪽은 바가지라고 할 정도로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어서오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로건은 외모와는 다르게 사근사근한 면이 있는 남성으로
들어온 우리에게 인사했다.

그의 든든한 등 뒤로 그의 동업자인 셔트가 달구어진 쇠를 망치고 치고 있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이 아이에게 맞는 옷을 구할 수 있을까요?”
“으음....잠시만요.”

로건은 카운터 뒤편의 문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몇 벌의 옷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이 정도라면..”

예전에 비해 품목이 줄어든 것 같았다.

“리사 씨, 마음에 드는 게 있나요?”
“.......”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의 옷과 디자인이 거의 비슷한 블라우스를 집어 들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치맛자락의 한곳에 분홍색 천으로 한줄 들어가 있다는 것뿐이랄까.

로건은 방 한구석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에서 갈아입어보세요.”

그녀는 탈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자, 로건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두 분, 무슨 사이죠?”
“아....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면 꾸며서?
어제는 무심코 거짓말해버렸지만 거짓말이라는 것은 원래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사제란 자가 거짓말을 해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뭐 솔직히 말해야겠지?

“글쎄요... 단순히 기억을 잃었는지, ‘어둠의 계약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쪽 숲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것을 구해줬더니 이렇게 되 버렸죠.”
“하아..어둠의 계약자라.”

로건- 그도 마이소시아 태생이고, 어둠의 계약자는 아닐 것이다.
그가 말을 하려 입을 연 순간, 탈의실의 문이 열리며 리사가 나왔다.

“몸에 맞아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커요.”

나는 로건을 바라보았고, 로건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다른 사이즈가 없다는데....”
“.....할 수 없지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팔을 빙빙 돌려보았다.

“얼마죠?”
“뭐..어차피 찾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가져가세요.”
“하아?”
“만든 지도 오래됐고.. 더 이상 팔릴 것 같지도 않은데요.”

로건은 가슴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그럼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맞춰 리사도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

밀레스 마을 중심가.

마이니소시아의 가장 붐비는 마을인 밀레스 마을.
그 중심가에는 사람들이 들끓는다고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리사와 나는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 콘을 든 채 여신상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하늘...

“리사 씨”
“네?”
“이제 어떻게 하실 거 에요?”
“으음...”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바라보았다.
내심 내가 불러 한입 못 먹은 것이 미련이 남나보다.

“제 생각을 말해볼까요?”
“네.”

그녀는 바로 대답하고는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았다.

“제 생각엔.. 리사씨는 ‘어둠의 계약자’인 것 같아요.”
“?”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길지만.. 당신이 어떠한 이유로 인해서
‘어둠의 계약’을 했어요.“
“에...전 그런거 안했는데요.”

이 아가씨, 아무래도 이해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처**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음....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예?”
“심심풀이로 들어두세요. 들어두면, 이 마이소시아에 빠르게 적응하실 수 있을 것이에요”
“흐음..”

“아주아주 먼- 옛날에 아주 발전한 고대 문명이 있었다고 해요.
한마디로.. 이상 세계였죠. 마이소시아의 7정신 즉, 신들에게서 통치권을 받은 왕이 세상을 다스렸고.
사람들은 모두 옳은 가치만을 추구했죠.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을 자연이 주었고 그래서 모든 것이 넉넉해서 아무도 욕심을 가지지 않았죠.
또한 이들에게는 천재지변도 병도 사고도 없었으며, 모두 천수를 누리고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하늘의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고 해요.

그렇게 꿈같은 1000년이 지나고... 어느 날 갑자기, 그 사건이 찾아왔죠.”

리사는 내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사건인데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긴장이라도 했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으로, 한 청년이 거리에서 쓰러져 죽었어요.”
“하아?”

뭔가 커다란 걸 기대했나보다.

“별로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 할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인간들은 궁금했겠죠.
길거리에서, 그것도 늙지도 않은 청년이 죽었으니 말이죠.
아무도 그를 몰랐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언제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명복을 빌었지요. 그리고 가슴속에 조금씩 의문을 품었죠.
왜냐하면 그들은 이전에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 젊은이가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의문에 사람들은 삶과 죽음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고 이는 자연의 이치와 그 흐름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죠.

마법이 발견되고 그 마법은 점점 발전해갔고, 마법을 포기한 자들은 기구를 만들고
발전해갔죠. 짐승을 잡고 식량을 생산해냈고..

그 과정에 자연은 무언가 균형을 잃어갔고 그 깨어진 균형 때문에 이전에는 없던
천재지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영혼은 타락해버려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어요.

지혜를 가진 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민중들은 기득권층의 횡포에 못 이겨 황무지로
도망 나와 땅을 개척했고, 그들 중에 현자를 발견하면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죠.”

“새로운 수많은 권력자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은 사람들의 타락을 더욱
가속화 했고, 이들은 잃어버린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재건하리라 꿈꾸며 그를 위해
다른 세력을 누르길 원했고, 그것은 더욱 강력한 힘, 군비 증강과... 강력한 어둠의 마법을
개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죠.

다른 곳을 정복하고, 정복한 적을 노예로 만들어 자신들의 편의를 꾀하고,
다른 사람의 불편 속에 자신만은 행복하려는 비인간적인 생각이 그들의 신앙이 되었죠.”

“그런....”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에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강력한 힘을 위한 어둠의 마법은 세상을 크게 어지럽히는 ‘금단의 마법’
즉 창조계 마법까지 가차 없이 범했죠. 그러나 그 마법은 그 마법의 술자의 생명에게까지
위협을 가하는 마법이었기에.. 왕들은 마법사들에게 스스로 번식하는 마물들을 만들 것을 바랬고,
그것이 실현 되고.. 그것은 이 세상의 혼돈을 더욱 부채질 했어요.

그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증오와 슬픔의 수많은 감정 속에서 마이소시아의
‘8번째’ 정신이 탄생했어요.”
“누구죠 그게?”

나는 침을 삼키고서 말을 이었다.

“암흑의 왕, 뮤레칸.”
“.......”
“그 존재를 알아차린 빛의 신 ‘칸’은 자신 이외의 6정신의 힘을 모아
뮤레칸을 없애기 위해 싸웠죠. 마이소시아의 시간으로 3일 동안 계속된 그 싸움은
결국은 빛의 힘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들은 뮤레칸을 죽이지 못했지요.

왜냐하면 제 8의 존재인 뮤레칸도 다른 7존재들처럼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패배한 뮤레칸은 깊은 어둠 속- 우리가 흔히 저승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떨어져
그 곳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지요.

그러나, 더 큰문제가 있었지요.

거대한 정신 세력들이 싸우자.
그 여파는 천재지변이 되어서 마이소시아 대륙을 덮쳤던 것이죠.

엄청난 홍수. 거대한 해일. 대 지진. 그리고 하늘에서는 불의 비가 내렸지요.

이 엄청난 재앙으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어요.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암흑으로 - 저승으로 - 흘러 들어가 결국 뮤레칸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주었고, 마이소시아 7정신은 잠시간 이 세계에 영향을 끼칠수
없게 되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여기까지는 신의 신탁을 받아 알 수 있지만, 그 이후의 내용은 거의 알 수 없어요.
신들이 이 세상에 간섭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몇 십 년 전에 대 화재로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불타버렸거든요..

하지만 알 수 있는 건 멸망을 겪었음에도 인간은 다시 한번 타락했고,

그때 있던 10개의 세력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마침내 지친 10개의 세력의
왕들은 전쟁을 종결하는 ‘루어스 조약’을 맺었지요.
그러나, 야심가였던 ‘테네즈’라는 왕은 그 세력을 이용하여 무한한 권력을 얻고자 했고,
그 무한한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뮤레칸과 알 수 없는 계약을 했고,

그 사실을 알아챈 ‘루딘’이라는 왕은 그에게 반기를 들었어요.
다시 한번 전쟁은 일어났죠. 테네즈는 자신의 땅인 래비아와
피에트, 타고르, 오랜, 마사이, 사라센의 6개 지역을 연합하여 루딘과 전쟁을 일으켰어요.
개전 초기에 절대적인 열세에 몰려있던 루딘은 상대 연합군을 분열시켰고,
서로의 꼬인 이해관계에 의해 테네즈의 동맹은 힘없이 무너졌죠,
루딘은 재빨리 피에트와 오랜을 자신의 동맹으로 끌어들인 뒤에 테네즈를 무너뜨렸죠.

루딘은 당시에 미개척지였던 대륙의 중앙 대평원에 수도 ‘루어스’를 건설하고
그 곳의 황제가 되었죠.

하여간, 황제가 된 루딘은 다른 이에게 권력을 넘기고 모험을 찾아 떠나고..

사람들은 그를 ‘정복왕 루딘’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그리고 어느 순간.. 마이소시아의 7정신은 다시 이 세계에 간섭할 힘을 얻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거에요.”

“후.... 긴 이야기네요.”
“대략적인 흐름만 알 면 돼요.”
“그럼, 그 ‘어둠의 계약자’가 다시 나타난 때는 언제인가요?”
“왕궁에 있던 대 화재 전후해서지요. 뭐 그래서 어떠한 식으로든 연계가 있지 않는가..
하는 말들이 있지만...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요. 아앗!”
“?”
“아이스크림이...”

마이소시아에 대한 역사를 말하다보니 어느 새 내 아이스크림은 거의 다 녹아
있었다. 나는 표정을 찡그리며 그것을 힘겹게 먹었다.

그 동안 리사는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갈 때 즈음 리사는 나를 불렀다.

“프레이엘 씨.”
“네?”
“이곳, 마이소시아에 온 이상... 제가 ‘어둠의 계약자’인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겠죠.”
“네...”
“하지만...”

리사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쩌죠?”
“글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험을 찾아 떠나죠...
그리고 더욱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해요.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사는 한손으로 턱을 괸 채 잠시간 생각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그럼 저도 모험이 라는 거, 해볼 레요!”
“하아?”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알 때까지 프레이엘 씨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리사는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 예.”

-

“마이소시아의 대부분의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호신을 가지고 있어요.
그중엔 ‘어둠의 계약자’들도 그렇게 하지요.”
“흐음...”

밀레스 남쪽으로 뻗은 길을 나란히 걸으며 리사에게 설명을 한다.

수호신.
마이소시아의 위대한 7정신 중 빛의 신 칸, 보호의 신 세오를 제외한 다섯 신들은
세토아,메투스,이아,로오,셔스는 각각 전사,무도가,성직자,마법사 그리고 도적의 수호신으로
자신의 ‘수호신’으로 계시를 받아 각기 그들의 가호를 받아 그들의 기술을 익혔다.

참 인간적인 면이 있는 신이랄까.

아차, 이런 생각은 불경스러운 생각이다.

물론 나의 수호신은 이아님 -
어떠한 병이나 저주도 풀 수 있다는 분이시다.
나도 - 이 사제의 길에 들어 설 때 그 분의 목소리를 단 한번 들었다.

밀레스 남쪽에 있는 신전에 일정한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그 신전에 들어가면
그 신전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나 같은 경우도 이아님의 목소리를 들었었고.

하여간 그렇게 신의 목소리를 들은 자들은 각기 전사,무도가,성직자,마법사,도적의
길로 나아간다는 말이었다.

어느 새 ‘신전’에 도착했다.

새하얀 석조 건물이 그 웅장한 위용을 떨치며 서 있었다.
열려 있는 거대한 문 - 그 사이로 보이는 신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어둠을 밝히는, 수많은 횃불들과 신전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뿐.

나는 신전의 바로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여기는?”
“마이소시아의 7정신을 위한 신전입니다.”
“들어가요, 그럼!”

리사는 내 손목을 잡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계단 올라섰다.
하얀 돌바닥에 닿은 신발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발을 헛딛을 뻔 한 리사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전 들어 갈 수 없어요.”
“예? 왜요?”

리사의 물음에도 나는 단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 말만 반복 할 수 밖에 없었다.

“저는... 들어 갈 수 없어요.”
“..........”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혼자서 들어가세요. 별 일은 없을 거 에요.”
“.........”

리사는 눈 꼬리를 내리며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고,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린 내 손은 허망하게 허공을 갈랐다.

리사는 힘없어 보이는 걸음걸이로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홀로 가든 둘이서 가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단, 그것은 일반적인 이야기. 나에겐 통용 되지 않는 것이다.

리사는 계단을 올라 신전의 좌우로 열려진 거대한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신전을 올려다보았고, 내 시선도 그녀의 시선을 쫒는다.

벽에 조각 되어있는 것들- 아마 마이소시아 태평 시대와 뮤레칸과의 전쟁을 나타낸 것이리라. -
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살짝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허공에서 마주치는 시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 서야 리사는 신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미움 받고 있으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다시 상기시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얼굴을 들어 내었다.
눈이 부셔왔다. 얇게 뜬, 찡그린 눈 사이로 햇빛의 새어 들어왔다.

눈을 감고 손을 허공에 뻗었다.

그리고 한걸음, 계단에 올라섰다.
그 순간- 내 손 끝에 와 닿는 무언가, 마치 두껍고 매끄러운 유리를 만지는 기분이랄까?

눈을 뜬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 손은 허공에 손을 댄 채 그대로 멎어 있었다.
살짝 힘을 주어 밀어**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구름이 다시 드리워지고, 지상은 다시 그 그림자에 묻혔다.

나는 작게 한 숨을 쉬며 그곳에서 신전의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얼마나 지났을까?

신전의 입구에서 익숙한 모습의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조금 서두르는 듯, 빠른 걸음으로 내려와서는 내 옆을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가요”
“.......”

그녀의 걸음 페이스를 쫒기 위해 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왜냐하면 리사가 꽤나 빠른 속도로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흘끔 옆으로 훔쳐본 그녀의 모습은 - 뭐랄까, 조금 흥분해있다는 기분이었다.
얼굴에 살짝 뜬 홍조, 걸음에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적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녀가 걸음을 멈춘 것은 - 마을 외곽에 한 호수 주변이었다.
그녀는 벤치에 앉더니 그대로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녀와 한 사람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사이를 둔 거리에 앉았다.

누구를 만났을까?

벤치에 편안히 기댄다.
딱딱하고 차가운 기분이 등에 퍼졌다.

잔잔한 호수의 수면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살짝 곁눈질로 리사를 보니 그녀는 마치 세수를 하듯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얼굴을 손에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말을 걸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얼굴을 들어 올린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딴 곳으로 옮겼다.

“우우.....”

반 쯤 우는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난 리사는 내 앞을 좌우로 걷기 시작했다.
좁고 느릿느릿한 걸음에서 차츰 보폭이 커지며, 점점 걷는 속도가 빨라졌다.
마침내, 성큼성큼 걷다가 에잇! 하는 소리를 내며 발을 쾅쾅 굴렀다.

“왜 그래요? 도대체?”
“.......”
“......!”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구나!!
그녀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성큼 다가와서는 팔짱을 끼며 묻는다.

“프레이엘 씨!”
“네..네에...”

엉겁결에 놀라 한쪽 팔을 들어올렸다.
리사가 들어 올린 팔을 툭 쳐서 치우며 허리를 숙여 내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곤 고함을 쳤다.

“도대체 내 어디가 튼실하단 말이에요?!”
“하아?”

나는 무슨 소리인가하고 가만히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허리를 펴고는 팔짱을 낀 채 부루퉁한 얼굴로 다른 곳에 시선을 보냈다.

“누가.. 그랬는데요?”
“세토아라는 시커먼 자뻑증 심한 중년 아저씨요!”
“학-! 큰일 날 소릴!!”

나는 순간 비틀거리며 말했다.

마이소시아의 위대한 7정신중 하나인, 세토아를 ‘멋없는 중년 아저씨’라니!
더군다나 자뻑증은 또 뭐야?! 이거, 어쩌면 길가다 벼락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흥!”

나는 팔짱을 낀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솔직히, 저 몸이 튼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가는 팔, 비쩍 마른 몸. 흔히 말해 가냘프다는 - 거기다가 소년스러운 체형인 그녀가 -
어딜 봐서 튼실하다는 건가?

이런, 나도 천벌 받겠는데.

그나저나, 세토아라면...

“...전사?”
“.........”

솔직히, 저런 가는 몸으로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그렇지만 자신의 적성에 제일 맞는 수호신이 그녀를 선택하는 것 일 텐데...

글쎄... 혹시 신들에게도 우리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행정상의 오류’를 범한 것일까?

“어쨌건....”

나는 말꼬리를 늘였다.
리사가 나를 찌릿 흘겨봤기 때문이다.

아까 전사라는 말에, 조금은 화나 났나보다. 이런...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크흠, 흠. 하여튼 한번 정해진 수호신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어쩔 수 없어요. 리사 씨.”
“아아아~~ 그러니까아!! 나는- 나는!!”

양 팔을 들어 올리고선 포효하듯 외친다.
어쩌면, 세토아 님의 선택이 틀리진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진 몰랐는데, 이 아가씨 굉장히
사나운 성격일지 모르겠다. 아, ‘전사는 성질 급하다’라는 거. 역시 편견이려나?

“나는-!”
“.......”
“....마법사가 되고 싶었는데..”

한 숨을 푹 쉬며 고개를 푹 숙이며 팔을 늘어뜨리며 흐느적거린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자리에 푹 늘어져서 앉으며 중얼 거렸다.

“그것도 아니면 성직자라던지...”
“자... 그럼.”

나는 스태프로 땅을 짚고 일어서서는 말했다.

“?”

리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가요, 우리 여 전사님”
“.......”

못 마땅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

“그러니까 - 전사도 멋져요. 다른 사람보다 앞서 달려 나가서,
적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 적을 베어 눕히는 거죠!”
“별로, 하나도 안 멋져요.”
“자기의 몸을 희생해서 동료를 구한다던지-”
“그럼 제가 아프잖아요!”

밀레스 대장간을 나서며 나는 리사에게 ‘전사의 멋진 점’에 대해 토로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녀는 불뚝불뚝 퉁명스러운 말투로 불만을 토로할 뿐-

음.. 뭐랄까.
역시- 이전까지의 행동은 이미지 관리요, 이쪽이 진짜 성격이라는 건가?
뭐,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는 더 이상 없어서 좋다.

“하아~ 그럼 도대체 어디가 싫다는 거에요?”
“- 몰라서 물어요?”

그녀는 앞서가다 뒤로 돌아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전방에 서서 괴물들의 발톱에 다쳐가면서, 온 몸에 괴물의 체액을 뒤집어 써야하고,
무거운 칼! 무거운 갑옷! 이 갸날픈 몸에 들기도 힘든 걸 휘둘러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외쳤다.

“그런 무거운 걸 들다보면 근육이 울퉁불퉁! 생각하기도 싫어요!”

눈가에 눈물까지 맺어가며, 리사는 말했다.

아... 확실히. 그러면 좀 그렇겠다.

“그건 그렇네요.”
“물론이고말고요! 저는 여자라고요-!”

리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슬쩍 훔치며 말했다.
..그게 눈물을 흘릴 정도로 억울한 건가?

“못 생긴 중년 주제에-”

장담하건데 저런 불같은 성격으론 오래 못 살 거다.
이런, 나도 천벌 받을 짓을 했군.. 남을 저주하다니.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우리 둘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나 있었다.
석양에 물들어 제 색을 잃어버리고 검게 보이는 나무와 풀.

풀밭 사이로 난 흙길을 따라 걷는다.

리사의 마지막 투덜거림을 끝으로 정적이 주변을 감돌았다.
한 블록 너머의 밀레스 중심가의 웅얼거림이 산들바람에 눕는 풀 소리에 묻혀간다.

-

왁자지껄- 하지는 않지만 나름 소란스러운 식당의 분위기.

이곳은 밀레스 마을 여관이다.
사람들로 붐비는 여관인 만큼 꽤나 크다.
나는 리사와 함께 한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이소시아 정식. 덧붙여, 정식에 딸려 들어오는 와인은 빼달라고 했다.

‘술이 라는 건 마음을 흐리게 만든다.‘라는 게 내 지론이다.
옛 친구 중, 미성년자 주제에 술을 마치면 왠지 마법 위력이 증강 된다며 술에 취한 채
마법을 난사 해대던 녀석도 있지만. 싫은 기억이다.

리사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다리를 까닥거리며 앉아 있었다.

내가 방금 그녀에게 사준 것은 움직이기 편한 반소매의 튜닉.
남색 바탕에 노란색으로 자수가 들어가 있다.
꽤나 질긴 소재로 만들어져 있어 가볍게 몸을 움직일 수 있지만..
가벼운 만큼 방어력이 떨어지는 게 흠이랄까.

그리고 지금은 풀어놓아 테이블에 기대어 세워 놓은 것은 검신이 얇은 에페.
다른 검들에 비해 조금 짧긴 하지만 가볍기 때문에 다루기에 쉬운 검 종류이다.
하지만 검신이 얇아 쉽게 검이 꺾여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 둔 나무 방패.
조금 작긴 했지만.. 그녀의 근력을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벅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들지 않으면 나중에 다른 방패는 무거워 들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프레이엘 씨”
“네?”
“열 아홉 살이라고 하셨죠?”
“네.”
“그리고 저는.. 열 일곱 정도로 보여요?”

그녀는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네.”
“그런데 왜 경어 쓰세요?”
“하아? 뭐 그거야... 습관이랄까요?”
“이상한 습관이네요.”

“이상하지 않아요.”

서빙을 하는 웨이트리스가 접시 2개를 우리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주문하신 적포도주를 뺀 마이소시아 정식 2세트가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정식이라고 해도 코스요리 따위가 아니다. 여러 손님들이 있는데 괜히 코스 요리를 했다간
시간만 낭비 - 금방 먹고 나가고 싶어 하는 여행객들에게도 코스요리는 귀찮을 뿐.
그렇다고 스튜만 먹고 나가기는 싫고.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이 한 그릇에 전체 요리와 메인 디쉬, 빵 몇 조각이 나오는 이 ‘정식 셋트’이다.

구성물은 스튜와 샐러드, 부드러운 빵과 버터, 그리고 메인 디쉬로 주문 한 것.
스튜와 샐러드, 메인 디쉬는 종류를 선택 할 수 있고, 메인 디쉬 같은 경우엔
2~3개도 주문할 수 있다.

나는 메인 요리로 스테이크 한 접시를 주문했고 리사는 잘 구운 거위과 삶은 감자와
감자튀김.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스푼을 드는 소리가 들린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한차례 나고 멎는다.

나는 조용히 눈을 뜨며 말했다.

“아멘.”

스튜에 스푼을 넣은 채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는 리사가 눈앞에 있었다.

“괜찮아요, 다**턴 저 무시하고 그냥 먼저 드세요.”
“에...그렇지만...”

뒷말은 웅얼거리며 삼키는 그녀.
그게 싫다면야.. 나는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게 싫다면, 미중년 세토아님께 기도를 드리시면 되요.”
“- 싫어어어!!!”

꽥 하고 비명을 질러버리는 리사 씨.

식사를 하며 이리 저리 생각을 했다.

언제까지나 그녀를 부양 할 수는 없다.
나에겐 목적이 있으니까..
최소한 그녀가 로메디스 정도로만 독립해도 편할텐데...
저대로는 길나갔다 괴물들에게 잡혀죽기 쉽상 일테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일부터 북쪽 숲에서 수련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네?”

그녀는 텅 빈 수프접시를 옆으로 살짝 밀며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예에-? 왠 수련이요?”
“당신은 강해져야만해요.”
“어째서요?”
“그대로는 불안해서 리사 씨 옆에서 못 떨어질 것 같아서요.”

- Chapter 1 End -

긴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스스로 읽으면서 부족함이 보여 많이 부끄럽군요..
-애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