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도배에 가깝군요.
아니. 도배군요.
하지만 ... 이 모든 걸 한 게시물에 내리 적어버리면 정말로 수습할수 없을 정도로 길어지기에,
부득이하게 챕터별로 끊어서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
Chapter 4. 황금의 전사(the Golden Warrior)
“형은 어디로 가실 거 에요?”
“이 마을에 남아 있을래.”
“음... 무슨 볼일이라도?”
“아니야. 단지, 쉬고 싶어서 말이야.”
-
......
무기력했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아무런 의욕도 나지 않았다.
이곳은 밀레스의 한 여관방.
... 아무런 힘도 나지 앉았다. 식욕도, 수면욕도 전혀 나지 않았다.
적막 그리고 고요.
고개를 힘겹게 돌려 창문을 보았다.
아무렇게나 쳐진 커튼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외로웠다. 쓸쓸했다.
이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 이 기분은 너무나 익숙한 기분이었지만,
매번 느낄 때마다 소름 돋도록 싫었다.
“...엄마...”
희뿌연 안개가 낀 듯 떠오른 그녀의 모습은 희미했다.
그 뒤로 미소 짓는 작은 소녀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녀는 언제나 웃었고, 자신의 긴 머리칼을 언제나 그 검은 끈으로 묶어 다녔다.
그들을 잃었을 때, 세상을 저주했고, 무기력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세상에 홀로 버려졌을 때, 그분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들어갔을 때,
외로울 때, 괴로울 때, 그들을 원망했다. 왜 먼저 죽었냐고.
왜 나를 이 지옥 속에 버려두고 떠났냐고.
그러나 내 기억속의 그들은 언제나 미소 지을 뿐 말이 없었다.
세월이 지나며 깨달았다.
그들은 살아있다고. 이 내 마음속에, 고동치는 심장 속에 그들이 함께 숨 쉬고 있다고.
살아야했다. 살아가야했다.
내 목숨에 걸린 것은 비단 나 하나의 생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이 세상에서 그녀들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으로,
이 넓은 세상 속에서 오직 이 좁은 가슴 속에서만 그들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들 몫의 삶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아무리 세상이 더럽고 힘들지라도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 지옥에서 살아가기로 했다.
나처럼, 가족을 잃는 이가 없도록.
손을 꽉 쥐었다.
“그래. 그랬었지.”
잊고 있었다. 내 삶의 목적을...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기가 몰아쳐왔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살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내 몸을 끌어안았다.
“...외로워.”
따뜻한 미소가 그리웠다.
따뜻한 체온이 그리웠다.
“...누나.”
눈가가 뜨거웠다.
내려다본 내손은 흐릿하게 보였고. 곧, 소리 없이 추락한 물방울은 달빛을 한껏 머금더니,
손등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손등에 뜨거운 감촉이 전해져왔다.
“......”
문득, 그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하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다른 여성의 얼굴이 겹쳐져간다.
“리사...씨.”
주먹을 다시 움켜쥐었다. 헛 웃음이 나왔다.
“큭...큭...크흐흐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눈으로부터는 쉴 세 없이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바보.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깨닫지 못했잖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것을. 사랑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리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부터, 그때부터 자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는 더한 행복을 위해 떠났다.
듀르크스. 그는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가 다친 뒤에 회복시켜 줄 수 있지만 듀르크스는 그녀가 다치지 않게 해줄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강했고 나보다 더욱 멋진 남자였다.
“쿡, 쿠흐흐흑!!”
나는 한 번 죽으면 죽는다.
그러나 리사는 그렇지 않다.
내가 죽는다면 그녀는 상처 입을 것이다.
그러나 듀르크스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함께 죽더라도, 함께 살아난다.
“......”
달은 아름다웠다.
-
홀로 지낸지 8개월.
물론, 그동안 여러 사람들과 팀을 이루고, 충실히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그들은 ‘팀’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 의외의 소식을 접했다.
그것은 로메디스와 헤르미카의 결혼 소식이었다.
내 참. 8개월 만에 약혼도 아니고 결혼이라니.
더군다나, 언제부터 로메디스가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지, 아니 그 이전에 언제 합류한 거지?
섣부른 판단이 아니길 생각하며 청첩장을 읽어 내려갔다.
-
아벨 마을. 밀레스 마을을 제하고는 상거래로 가장 발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을이다.
게다가, 하얀 백사장은 휴양지로서의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마을 외곽 해안에서는 몬스터가
자주 출몰했기에, 모험가들에게도 인기 있는, 활기차고 번화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거리 하나만 넘어가면 아벨 마을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진다.
왜냐하면, 아벨 마을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현재 마이소시아의 단 두 명밖에 없는 대주교인, 란셀 주교님과 커넬 주교님이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아벨 마을에서 관광 산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상주인구의 90% 이상이 종교와 관련된 직종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독실한 신자이기도 했다.
마이소시아 왕국의 종교적 수도의 면모를 보이는 구시가지와 상거래와 관광업이 붐을 이루는
신시가지. 이런 어울리지 않는 아벨의 모습은 결국 상권으로서의 구획과 종교 도시로서의 구획으로
분화를 불러왔다. 그 결과가 이 곳 아벨의 상거래지구였다.
아벨의 상거래지구, 일명 ‘상거래의 거리’라고 불리는 이 곳.
아벨 마을의 입구로부터 아벨 마을의 여관까지 이르는 거리는 은행에서부터 시약상점, 대장간
심지어 의상실과 미용실까지 이르는 각종 잡다한 상점들이 2열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사이로 난 대로에는 물건을 파는 노점과 그 노점을 돌아다니며 흥정을 하는 사람,
물건을 옮기는 인부, 마을 외곽으로 가는 모험가들 - 마을 외곽으로 가려면 이 거리를 반드시
지나야했다! - 등으로 평소에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런.”
여관까지 가는 길이 상거래의 거리인건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외곽 몬스터가 출몰지로 통하는 길이나 백사장, 여름에만 개방하는 캠프장과
팬션촌으로 가는 길까지 죄다 이 상거래의 거리를 통하게 해 놓았다니!!
이건 엄청난 상술에다가 고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지금이 비수기이기에 망정이지 성수기였으면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일 테니!
이래서야 차라리 조금 빙 돌더라도 구시가지 쪽으로 가는 게 나았는데!
“휴우...”
한숨을 쉬며 인파 속으로 몸을 던졌다.
“세토아님의 힘이 깃든 반지를 싼 값에 처분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올 크리스마스에 연인에게 인기 만점!! 이 머리띠를 선물하세요!”
“신비의 시약 엑스쿠라눔을 상점가보다 싼 가격으로 ...”
“읏...”
이리저리 사람을 피하며 걸어갔다.
아벨 은행. 이제 반 쯤 왔군.
“아얏!”
“으앗-!”
열린 은행 문으로 뛰어나온 한 사람과 부딪친 나는 비틀거렸다.
그러나 곧 중심을 잡고 나에게 부딪친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익숙한 적갈색 머리칼, 익숙한 얼굴, 익숙한 목소리.
“아야야야... 죄,죄송...?!”
뻗은 내 손을 잡고 고개를 든 그녀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프!프레이엘 씨!”
“리사 씨.”
“에.”
“어서 일어나세요.”
동요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평소의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가볍게 잡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에...에... 아! 안녕하세요?”
헤르미카의 결혼이니 당연히 그녀와 만날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다. 프레이엘.”
“안녕하세요. 듀르크스 씨.”
듀르크스도- 내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내 표정을 알아챌까봐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그는 내 어깨를 한 번 툭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덜컹...
침대에 몸을 던졌다.
듀르크스 그리고 리사와 함께 있는 것은 정말 바늘방석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휴-.”
청첩장을 받은 뒤 일부러 꾸물댄 것도 사실 시간을 딱 맞춰 결혼식만 보고 가려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풋.”
상황이 좀 웃겼다. 지금 내가 이런 짓을 왜 하는 거지?
하지만 그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자꾸 갑갑해진다.
“아무래도 좋겠지.”
때로는 나도 회피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가슴에 묻어 뒀다가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니까.
쳇, 이런 소리 잘도 하는 군 역시 아직 수련이 부족한 것인가.
울적한 마음에 눈을 살짝 감았다.
“후우-.”
역시나 심란하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무 의미 없이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성의 물건.
나는 그것을 집어 올렸다.
은빛 십자가. 그냥 단순하게 주조하고 사포로 다듬은 십자가다.
거리의 노점상 등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십자가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성직자가 되던 첫 날, 주교님께 직접 받은 물건이었다.
그것을 손끝에서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보니 문득 묘책이 떠올랐다.
“좋아.”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비록 지금 당장은 털어내지 못하겠지만 마음의 짐을 덜 만한 곳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
아벨의 상업지구인 신시가지를 한 구획 벗어나자, 거리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끊겼다.
무슨 방음 마법이라도 걸어놨나?
저녁 식사 시간인지라 거리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 어둑어둑해지는 거리에는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고 있었다.
역시 겨울 해는 짧단 말이지.
오래지 않아 나는 아벨 구시가지 광장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광장너머로 아직 어둠에 완전히 잠식당하지 않은 군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검게 물든 교회가 보였다.
아벨 교회였다.
마이소시아 국교인 “7신교”의 세력은 마이소시아 황제에 맞먹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대한
세력이었다. 표면적으로 이곳 마이소시아 인들은 - 계약자들을 포함해 - 모두가 이 7신교의 신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신도들을 움직일 수 있는, 7정신 중 제일의 지위를 가진 빛의 신 칸에게
그 권위를 인정받은 - 수십 년 전 이야기지만 - 두 대주교는 실로 엄청난 권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정하기는 싫지만 신도 중 과연 “네 목숨을 바쳐라.”라고 하면 기꺼이 스스로 자결할 자는
몇이나 있을까 하겠지만.
더군다나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녔다는 ‘칸’보다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능력이나 무예를 배워서
쓰는 우리들에겐 하위 5정신에게 더 신답게 와 닿는 면도 없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교회는 빛의 신 칸만을 위한 건 아니라도 분위기상 ‘칸’님을 주로 섬기기 때문이었다. 단, 그 성질상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항상 인간을 도우시려는 사랑의 여신 이아님은
예외였지만.
또한, 내가 섬기는 신이기도 하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교회에 닿은 나는 계단을 오르며 건물을 우러러 보았다.
예배당 내로부터 스며져 나오는 빛이 스테인 글라스에 부딪쳐 색색들이 빛을 머금고 허공으로
흩뿌려져갔다. 스테인 글라스가 나타내는 그림들은 대부분이 빛의 신 칸에 관한 내용이었다.
예배당의 커다란 문 앞에 닿은 나는 예배당의 문을 밀었다.
문으로부터, 정면의 단상까지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고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가로로
긴 의자가 카펫을 중심으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무도 없는 실내에는 양초를 아끼기 위함인지
단상 주변을 제외하고는 주변을 밝힐 최소한의 촛불만 켜져 있었다. 때문에 실내는 적당히 어두웠고
그 덕에 촛불의 노란 빛이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
카펫을 따라 단상 쪽으로 걸어가던 나는 맨 앞 열의 의자 사이에서 우뚝 멈춰 섰다.
조금 곤란한데? 애초에 목적한 바는 란셀 주교님을 뵈는 것이었는데...
식사하러가셨나.
내가 저녁식사는 물론 점심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
뭐 상관없다. 그 분이 없더라도.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맨 앞 열의 의자에 앉아 손을 모아 쥐었다.
일순간 떠오르는 여러 생각의 홍수에 휩쓸린 나는 잠깐 넋을 놓았다.
... 이럴 때가 아니지.
보통, 기도를 할 때는 그 대상에게 자신의 간절히 원하는 바를 기원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하는가?’ 란 생각이 들었다.
글쎄 나를 어둠의 계약자로 만들어주세요? 피식.
아니면 내 기억을 지워달라고 빌어야하는 건가?
...아니면...‘그녀를 다시 보게 해달라고.’
피식.
나는 또 다시 쓴 웃음을 흘렸다.
이런.. 이거 분명히 벼락 맞겠는데?
... 로메디스와 헤르미카에게 축복이나 빌어 줄까나?
안 그럼 듀르크스와 리사에게 축복을 빌어줄까?
훗.
“기도하면서 피식피식 웃다니.. 고놈. 허파에 바람이라도 났느냐?”
“?!”
오랜만에 듣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예. 주교님.”
“하하하... 그나저나, 이제 여행은 익숙한가?”
“물론입니다. 이젠 노숙도 곧잘 하는걸요.”
“하하하...”
“...”
이 분은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 얼굴만 보아도 내 고민 따윈 한순간에 녹아 사라지는 듯 한 기분이었다.
“...무슨 고민 있는가?”
“예...?”
“그대의 얼굴이 말해주고 있네.”
“..그건...”
“자, 내가 제일먼저 식사를 마쳤으니 당분간 여기엔 아무도 오지 않을 걸세.
더군다나 오늘 저녁미사는 이미 끝나서.”
그는 내 어깨를 짚고 내 옆에 앉았다.
“에휴, 역시 늙으니 몸이 말이 아니군. 뭐하나? 어서 앉지 않고.”
“네...”
나는 살포시 앉았다.
“젊은 건 좋은 거라네.”
“...?”
“그렇게 고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 쯤 되면 보통 고민 따위 접어두기 바쁘지.”
마치 길가의 노점상 주인 같은 말투였다.
“내가 주교라 어려운가?”
“그건...”
“그래, 우리는 신을 섬기는 자지.”
“...”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야하네...”
“...”
“하지만, 사제이기 이전에 우린 인간이지 않은가?”
... 주,주교님이 이래도 되는 거야?
“... 마음이 어지럽고 흔들릴 수도 있는 걸세. 만약, 그런 상태로 있다면 그게 과연 정말로
경건한 마음으로 삶을 사는 것일까? 난 그건 아니라 보네.”
“...”
그래. 어차피 목적은 이거였다.
들어줄 사람. 그것이 필요했다. 나에겐...
“한 여성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건 의미에서도 젊은 건 좋다는 것이겠지.”
“..제가 바라는 건 그녀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저와 함께 한다면 그녀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그 사람을 지킬 자신이 없거든요.”
“...”
“하지만, 그녀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녀를 지켜줄 능력이 있습니다.”
“...”
“그래서 저는 포기했는데,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런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걸 해** 않아 모르겠네만.”
“....”
“뭐, 간단하게 포기하게”
“그건...”
사랑도 해** 않았다면서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어?
“그럼 포기하지 말던지”
그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내 눈을 지그지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거 아닌가?”
- !
그런 건가.. 역시 포기할 수 없다는 건가 내 마음은 ...
-
늦은 오전, 나는 북적거리는 아벨의 길거리의 한 노점에서 싸구려 홍차를 시켜놓고 서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말간 하늘을 배경으로 가을 햇살이 쨍-하니 내리쬐었다.
“커피 한 잔 주세요. 크림이랑 설탕, 스프 아무것도 안 넣고요.”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남자나 입을 듯 한 슈트를
차려입은 훤칠한 키의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윤기 나는 흑발을 허리께까지 가지런히
늘어뜨려 놓았다. 내가 아는 여성 중에 이런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면...
“루시엘라 씨?”
“안녕하세요? 프레이엘 씨.”
그녀는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살짝 들며 가볍게 인사했다.
저런 옷 입고 이런데서 커피라니... 고급 카페에 않아서 고독을 *을 것 같은 복장이건만.
“홍차 나왔습니다.”
노점의 주인이 내민 싸구려 찻잔을 받아든 나는 설탕을 한 스푼 넣고는 그 내용물을 티스푼으로
휘저었다.
“곧 있으면 결혼식인데. 안 가세요?”
그렇게 말하곤 나는 스푼으로 살짝 홍차를 떠마셨다.
음. 좀 싼 티 나는 맛이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다.
내 주제에 비싼 홍차를 마실 수야 있나.
그 사이에 커피를 받은 그녀는 컵 위에 입김을 한번 후 불었다. 진한 커피향이 그녀의
숨결을 타고 나에게로 흘러들어왔다. 그녀는 내 시선을 묵묵히 무시하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후음- 사돈 남 말하시네요.”
...할 말 없군.
“그럼, 빨리 마시고 가는 게 좋겠군요.”
“그렇군요.”
쳇, 아무리 싸구려지만 빨리 마시기엔 아까운데. 저렇게 납득해버리면 어떻게 해?
한 동안 말없이 차를 홀짝인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컵을 비웠다.
“가볼까요?”
“네.”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오늘따라 묘하게 붐비지 않는 거리를 걸어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행인을 보기 힘든 조용한 거리. 내 발소리조차 크게 들린다.
하늘은 높았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문득 고개를 내려 나보다 한 보 앞서 걷는 루시엘라의 뒷모습을 보았다. 스무살이라고 했던가?
겨우 나보다 한 살 많구나. 그러나 약간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차분함과 큰 키,
굴곡 있는 몸매, 그리고 성숙미가 넘치는 외모를 지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나이와 괴리감을
줄 정도로 그녀를 어른스러워 보이게 했다.
그녀가 나를 살짝 돌아보더니 걸음걸이를 늦춰 내 걸음속도와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시나요?”
“네?”
“몇 주 뒷면 연말 연휴 시즌인거요.”
“네. 올해도 이제 몇일 안 남았군요.”
“그래요.”
한 동안 말없이 걷다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12월 24일.”
“네?”
“리사의 생일이에요.”
“아...네.”
“그날. 파티가 있으니까 날짜 비워두시고 꼭 오세요.”
“......”
“홀로 오랫동안 지내면 마음에 병이 생긴답니다.”
생일이란 말이지. 아마 문서상의 생일인가?
또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만이 내 청신경을 자극했다.
그녀는 또 문득, 지나가듯 말했다. 마치 한숨을 내쉬듯.
“리사도 당신이 꼭 오길 바랄 거 에요.”
휴... 그녀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무거워진다.
사실 무엇을 보기만 해도 그녀가 떠오른다. 식사하려고 숟가락만 들어도 그녀와 함께 먹던
식사가 생각나고 코마디움을 집어 들어도 그녀의 굳은 표정과 너무 놀란 나머지 시약병도
잡지 못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숟가락을 들었고
수없는 코마디움을 사용했고 나 자신이 그 대상이 되어보기도 했지만 어째서 그녀만 떠오르는 거지?
족쇄처럼 얽매여서 내 목을 조금씩 조여가고 내 가슴을 새카맣게 태워버리는데 왜 나는 스스로
그것을 떠올리는 거지? 나는 자해라도 하는 걸까?
갑자기 눈앞이 확 트였다.
아벨 교회가 있는 구 시가지의 광장이었다.
광장 너머로 아벨 교회가 보였다. 밤의 교회가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교회의 모습을 신을 찬양하는 건물이라는 웅장하고 엄숙한 기분을 주었다.
교회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하객들이 많군요.”
“그렇군요.”
“...좀 늦은 거 같은데요?”
나 스스로 큰 형이라고 해놓고 인생의 중대사를 앞둔 동생과 말 한번 못하다니.
그것도 겨우 내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깔끔하게 면도도 하고 머리칼을 빗어 넘기고 하얀 턱시도를 차려입은 듀르크스가 면사포를
쓴 헤르미카의 손을 슬며시 잡아 이끌고 있었다.
“저대로도 어울리는 한 쌍인데.”
“...역시 프레이엘 씨도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전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네. 어떻게 보면 남매지간인 것이 아까워요.”
아깝지. 그래.
만약 그가 그녀와 결혼한다면 나는 리사 씨와... 난 또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례는 커넬 주교님께서 맡고 계셨다.
커넬 주교 님 앞에 헤르미카가 도착하자, 주교님은 말했다.
“신랑 입장!”
...옷이 날개군.
평소의 더부룩하던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하얀 턱시도를 입은 로메디스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이 서려있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하객들을 훑어보았다.
그중에 나랑 눈을 마주쳤고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로메디스의 긴장 된 표정이
조금 완화되었다. 그는 당당하게 의자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갔다.
로메디스는 곧 듀르크스와 헤르미카의 앞에 도착했고 듀르크스는 그녀의 손을 로메디스의
뻗은 손에 인도했다. 로메디스는 그녀의 손을 천하에 둘도 없는 보석처럼 소중하게 받았다.
듀르크스는 옆으로 걸어 조용히 퇴장했다.
로메디스는 헤르미카와 한 번 눈을 맞춘 뒤에 그들 앞에 있는 작은 단에 올라섰다.
그때 연주가 멎었고, 둘은 아쉬운 듯 천천히 손을 놓았다.
마이소시아의 결혼 관습이 언제 적부터 내려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의식의 시작은 신부의
첫마디부터 시작된다.
“결혼하고... 싶습니다.”
평소의 헤르미카와는 다른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커넬 주교는 관습적인 문구를 뇌까렸다.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헤르미카 하스빌리온입니다.”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그대의 평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로메디스 세이프리스입니다.”
그와 의형제를 맺으며 그는 문서상으로 세이프리스 가의 사람이 되었었다.
헤르미카의 말을 들은 커넬 주교는 이번에는 로메디스에게 물었다.
“신랑에게 묻겠습니다. 그대의 이름이 로메디스 세이프리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로메디스는 조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헤르미카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신랑에게 묻겠습니다. 그대와 평생을 함께할 그녀의 이름이 헤르미카 하스빌리온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커넬 주교는 고개를 들어 신랑과 신부를 찬찬히 뜯어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것은 결혼에 대한 말이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문득 내 시선이 향한 곳에는 리사가 있었다.
그녀는 로메디스와 헤르미카를 거의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 것입니다.”
커넬 주교님은 잠시 한 박자 쉬고는 다시 젊은 한 쌍의 남녀를 번갈아 보았다.
이 순간이 바로 결혼식의 절정이다.
맹세의 언약.
여기서 언약을 맺지 않는다면 결혼은 성립 될 수 없다. 이 ‘맹세의 언약’이라는 것은 대단히
신성한 행위로서, 이 순간만큼은 설사 마이소시아 제국의 황제라고 하더라도 이 의식을
중지시킬 수 없었다.
즉 반역자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국가가 사법권을 행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신랑, 로메디스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신부 헤르미카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로메디스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예,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신부 헤르미카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신랑 로메디스를 사랑 할 것을
맹세합니까?”
헤르미카도 거침없이 대답했다.
“예,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신을 대신하여 이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엄숙히 선포합니다!”
와아아아-!!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로메디스는 천천히 헤르미카의 면사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열광하는 사람들.
...과...과격하게 하는데! 헤르미카!!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주교의 헛기침 소리에 겨우 떨어진 헤르미카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이 새빨개진
로메디스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자신의 부케를 던질 준비를 했다.
“흐음...”
헤르미카는 부케를 양손으로 꼭 쥐고 몸을 살짝 움츠렸다.
부케에 반쯤 가린 그녀의 얼굴 - 장난기로 가득 찬 푸른 두 눈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이거... 타겟을 노리는거 아냐?
하객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노리는 불손한 움직임이 보였다.
몇몇의 선수들은 그런 그녀의 낌새를 알아채고 불안해했다.
그러던 헤르미카가 갑자기 몸을 좌로 틀자 몇몇 선수들은 그 것을 낚아채기 위해
그쪽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그러나 그 순간...
...훌륭한 훼이크다!
그녀는 앞으로 집어 던질 듯하다가 그대로 손을 위로 올려 소위 말하는 ‘빽샷’을 시전 했기 때문이었다.
허공에 깨끗한 호적을 그리며 날아간 부케는 -
툭.
“...아앗!”
적갈색 머리칼을 한 소녀의 품속으로 정확히 들어갔고 엉겁결에 그것을 어느새 뒤로 돌아선
헤르미카는 크게 고함쳤다.
“빨리! 결혼해야해! 알았지? 리사-!”
부케로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옆에는 머리를 빗어넘긴 듀르크스가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 가슴 한 켠이 시큰 했다.
나는 슬그머니 예배당의 밖으로 나갔다.
-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뭐 짐이라 해봤자, 배낭과 모포를 넣는 작은 가방, 잡다한 물건을 넣는 크로스 백 하나.
그리고 이 스테프면 끝나지만... 어라?
여벌로 들고 다녔던 옷이 없어진 것을 알아챈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분명히 여관에 딸린 세탁실에 맡긴 거 같은데.
어제 저녁에 맡겼으니 지금은 룸서비스로 방안에 있어야 정상일 텐데?
팁까지 지불했는데 서비스가 너무 한 걸!
나는 문을 열고 세탁실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세탁실은 1층에서 뒷문으로 나가면 있었던가?
점심시간이라 사람으로 미어터질 듯 한 식당을 힘겹게 빠져나가 세탁실로 들어갔다.
세탁실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젊은 사환이 장부를 기록하고 있었다.
“어서옵쇼!”
“205호 실에서 맞긴 세탁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요?”
“아...언제 맡기셨죠?”
“어제 늦은 오후요.”
“잠시만요... 흐음...”
사환은 한동안 장부를 뒤적이더니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미 가져다 드린 걸로 나와 있는데요?”
“그럴 리가...”
“음, 혹시 그 옷 셍즈 였습니까?”
“네.”
사환은 긴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기, 그 옷은 방안에 계시던 여자 분께서 받으셨습니다만.”
“...?”
여자라니?
“인상착의... 기억하시나요?”
“에... 몸이 좀 말랐고, 키가 좀 작은 여자이이였는데요?”
“......”
“머리는 별로 안 길었고, 적갈색 머리칼이었지요.”
“네, 알만하군요. 그럼...”
나는 세탁실의 문을 열고 식당으로 갔다.
뭐야... 도대체... 내 옷을 왜 가져 간 거지? 리사 씨는....
문득 오후에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끼니를 걸렸음을 기억해냈다.
...어제 점심부터 3끼를 굶었군.
...피로연에 가기는 늦었으니, 여기서 사먹어야겠다.
까짓, 셍즈 하나 버리는 건 상관없을지라도...
왠지 이번 일의 저의를 알고 싶은 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라 그런지 음식을 주문한지 한참 지나서야 왔고, 나는 내 몫의 빵과
스프를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빵과 스프를 다 먹고 스테이크를 거의 다 먹어갈 무렵 내 눈에 식당으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리사의 모습을 모았다. 나는 재빨리 남은 고기를 찍어먹고는 내 옆의 웨이트리스에게 급히
계산을 하고는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정말 무슨 목적으로...
계단을 서둘러 올라갈 때-
“우앗!”
“꺄앗!”
우당탕-
아이고, 다리야- 어제도 그렇고 왜 자꾸 사람이랑 부딪치는...?
“아...”
“......”
...리사 씨군.
그녀는 어제처럼 엉덩방아를 찢은 채 옆으로 넘어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들고 있는 그건 분명...
“아...앗!”
그녀는 당황하며 내 셍즈를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그리고는 잘못한 어린아이처럼 숨소리를 죽이며 눈을 내리 깔았다.
“리사 씨.”
“에...넷!”
“괜찮아요?”
문득 듀르크스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속이 울컥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일으키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제부터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네.”
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뻗은 내손을 힐끔 보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아웃...”
“......”
그러나 손이 닿자마자 그녀는 마치 뜨거운 것에 손을 댄 것처럼 손가락을 황급히 뒤로 뺐다.
“으읏...!”
“......”
나는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어 그녀를 끌어 일으켰다.
“자아, 다친 데는 없어요?”
“......”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렇게 뒤로 숨긴다고 숨겨질 물건도 아니니 그렇지만...
“그런데...”
“......”
“제 옷을 왜 가져가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 그, 그건.”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뭐,뭐얏?
“미,미안해요.”
“...앗! 리사 씨!!”
그녀는 내 옷을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도망가 버렸다.
나는 잠시간 멍하니 있다가 내 옷을 줍고서는 그녀를 쫒았다.
그리고 마침내 거리 밖으로 나섰을 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진짜... 무슨 일이지?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하얀 태양이 말간 햇빛을 눈부시게 쏟아내리고 있었다.
“추워.”
본격적으로 겨울이 다가오는지 여민 레더로브의 틈 사이로 한기가 뭉클뭉클 새어 들어왔다.
아 진짜 춥네...
몇 일 뒤면 크리스마스-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송과 구슬,리본,별 등등으로
꾸며진 나무 등으로 치장된 거리는 이미 축제 분위기 였다.
25일 0시에 시작되는 6일간의 축제는 마이소시아의 가장 큰 명절이기도 했다.
인구가 제일많은 밀레스는 그 명성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
여관은 이미 만원이며, 민박집도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하고 빈자리를 찾기 힘든 것이다.
뭐.. 나야 고아원 쪽에서 일을 도와주고 머무르고 있지만.
“우아아아- 악!”
“사람살려!”
“꺄아악!”
무슨 일이지? 갑자기 앞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사람들이 뒤로 뛰기 시작했다. 원래 방향으로 진행하던 사람들과 부딪쳐서 넘어지고 난리였지만
그래도 뒤로 뛰는 사람들은 사색이 된 채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웃....
“괴물이다!”
“꺄아아악-!!”
괴물?
“우아아아아-!!”
마 맙소사. 난 갑자기 내 앞으로 날아온 사람을 얼떨결에 피했다.
그는 길가에 쌓인 상자더미에 부딪쳤다. 안에 과일이 들었는지 색색의 과일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어지러이 움직이는 인파를 헤치고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
“....맙소사.”
땅에 엎어진 그를 힘겹게 뒤집어 본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플레이트 아머의 흉부가 그의 흉부의 일부와 함께 잡아 뜯겨졌기 때문이었다.
상태의 심각성을 안 나는 손을 허리 뒤로 가져갔다.
“아차!”
평소대로 라면 그곳엔 코마디움을 비롯한 시약들이 담겨있는 작은 가방이 할 테지만,
그 가방은 지금 내가 묵고 있는 방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었다!
“젠장..마을 안에서 이런 일이!”
나는 회복주문을 외웠지만 그의 상처는 그런 회복마법으로 회복하기엔 너무나도 깊었다.
“......”
“쿠로!!”
젠장! 죽으면 안 돼! 나는 회복 마법을 한 번 더 외웠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동공이 천천히 풀려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의 목에 맥박을 재었다.
....제길, 죽었군.
그과 그의 소지품은 하얗게 빛나더니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계약자였군... 그나마 다행이다.
문득, 나는 주변이 어두워 졌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주변이 너무 지나치게 조용 하다는 걸 느꼈다.
아니, 조용하지는 않았다. 박쥐 따위가 훼를 치는 듯 한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잿빛의 박쥐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크기는 비교할 수 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날개.
묘한 광택을 띈 회색빛의 피부, 그리고 터져 나갈 듯 팽팽한 근육, 피가 뚝뚝 떨어지는
끝이 날카로운 5개의 손가락. 뱀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 잔혹한 성격을 드러내는 듯한 그 눈,
흰** 대신 핏빛으로 물든 붉은 눈과 붉은 액체가 잔뜩 묻은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이마에
난 뾰족한 한 쌍의 뿔.
“크흐흐흐흐흐..... 이제야 알아채다니 둔하군! 크하하하하하!!”
그것은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고는 나에게 말을 건냈다.
저것... 이전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의 피와 살을 탐한다는 식인 악마.
“쿠훗. 얼어 버린 건가... 인간.”
모...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넌 별로 맛이 없을 것 같으니...”
그의 날카로운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뻗은 손끝에 푸른 기운이 맺혔다.
기분 나쁠 정도로 시퍼런 빛을 내뿜은 그것은 곧 빠직빠직하는 방전음을 내는
푸른 전격이 되어 그의 손에 맺혔다.
쳇. 이렇게 죽는 거 군.
주마등? 그 딴 건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이 순간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듯하고,
‘저 번개에 맞으면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이상한 생각만이 떠오를 뿐이다.
푸르른 섬광이 더욱 강해지고 그의 손이 정점에 닿았다.
이제 내치기만 하면, 저 푸른 전격은 내 온 몸을 휩쓸겠지!
죽어도 깔끔해서 좋군!
제길!!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프레이엘 씨이이이이--!!!!”
챙!!
익숙한 목소리, 나는 놀라 눈을 떴다.
그곳에는 적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식인 악마의 팔목을 검으로 내치고 있는 리사의 모습이 보였다.
체중이 실려 있는 검. 파르르 떨리는 가는 손목, 휘날리는 옷자락, 굳은 의지로 빛나는 그녀의 눈,
휘날리는 머리칼. 그녀는 아름다웠다.
파지지지직-!!!
엉뚱한 곳으로 뿜어져나간 푸른 전격은 한 노점에 날아가 부딪쳤고,
노점은 그 강렬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눈 깜짝 할 사이에 새까맣게 탄화되어버렸다.
“가소로운!!”
“엘씨!! 도망가요!!”
그녀는 바닥에 착지하더니 악마와 내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악마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런 그녀의 양어깨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서요! 엘씨!! 난 이 녀석을 죽일 수 없다고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나!
“나..난!”
“어서요!!”
내 목소리는 크게 외친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크큭, 너에게선 맛있는 냄새가 나는 구나. 죽어라, 인간 계집!!”
“리사 씨!!”
악마가 한번 크게 훼를 쳐 한 번에 십여 미터를 튀어 오른 뒤 맹금류처럼 손톱을 세워 급강하 했다.
리사는 이미 피하기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최대한 틀며 방패를 발톱에 가져다 댔다.
“으웃!!”
콰지지직!!!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는 악마의 다섯 손톱에게는 가죽으로 주변을 두른 나무 방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산하는 방패의 조각들 사이로 붉은 피 보라가 허공을 수놓았다.
그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그대로 회전시키며 악마의 명치에
그녀의 검을 찔러 넣었다.
챙!
칼과 피부가 맞닿았다고는 생각 할 수도 없는, 마치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듯 한 날카로운
소리가 공간을 찢어발기며 내 고막을 뒤 흔들었다.
순간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책의 구절.
식인 악마의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것!
악마의 다른 쪽 손이 그녀의 하복부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그녀는 재빨리 검을 회수하며 그것을 쳐내려 했지만,
챙!!
“꺄악!!!”
“리사 씨!!”
너무나도 강력한 힘에 그녀의 검 손잡이가 그녀의 손바닥을 찢어버리고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거칠 것 없이 휘둘러진 악마의 손톱은 무참히 리사의 복부를 찢어발겼다!
그녀는 마치 폭풍에 휩쓸린 한 장의 낙엽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녀가 날아가는 궤도를 따라 흩뿌려지는 붉은 피. 나는 내 정신이 아득해 짐을 느꼈다.
그녀는 곧, 퍼억 소리를 내며 땅을 굴렀다.
“크크크큭....”
허공으로 튕겨져 나간 그녀의 검이 그녀와 악마 사이의 정중앙에 팍하는 소리를 내며 땅에 꽂혔다.
악마는 검에 찔렸던 자신의 명치를 슬슬 쓰다듬더니 리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체념한 인간보단 저항하는 인간이 맛있는 법이지. 그럼... 식사 시간인가? 크하하하하하!!!”
쒜엑!!
“크윽!”
무언가 허공을 찢고 날아가 악마의 허리에 박혔다. 악마는 피부에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큰 충격을 받은 듯 허공에서 잠시 비틀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악마는 포효하듯 외쳤다.
“왠 놈이냐?!”
“거기까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것에는 전신을 황금빛 갑주를 두르고 한 손에 가이아두스를 거머쥔 전사가
붉은 빛 망토를 휘날리며 악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크으으...”
“...마이소시아 제국 제5대 황제 슬레이터 폐하의 명에 따라 너를 처단하겠다.”
“웃기고 있군.”
“...각오해라.”
전사는 양손으로 검 자루를 잡고 하늘 높이 치켜들더니 허공을 세로로 내리 그었다.
스팍!!
파공성을 흘리며 바람의 칼날이 악마에게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악마는 손을 뻗어 바람의 칼날을 깨트린 후 전사를 공격하려고 손을 쳐들었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전사가 망토를 휘날리며 악마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가듯 아래에서
위로 검을 쳐 올렸다.
“쿠악!!”
카가강!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는 듯 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악마의 배꼽으로부터 명치에 이르는
피부가 찢겨 나갔다. 찢겨나간 살 틈으로 검은 핏방울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악마는 비명을 지르며 들었던 팔을 전사의 머리를 노리고 내려쳤다.
전사는 몸을 틀어 그 손을 피한 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악마의 정수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챙!
둘의 전투 중에 리사에게 도착한 나는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그녀를 바로 눕히고
내 꿇은 무릎위에 그녀의 머리를 얹고 상처를 살펴보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상처는 예상대로 굉장히 깊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복 마법을 외워 보았지만, 역시나 회복 마법은 아무런 효과를 ** 못하고
그저 허공에서 사그라들었다.
젠장! 코마디움이 없다고!!
"리사 씨!“
“으...으....”
회복 주문을 다시 외워도 역시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순간, 내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한 사람의 모습.
수많은 죽음과 환생을 겪은 뒤에 삶에 대한 아무런 의욕이 없는, 꿈과 희망을 가지지 못한 그 자의 모습!
그렇게 만들 순 없어!
안 돼!
나는 그녀의 허리에 매어져 있는 가방을 열어 뒤졌다.
제발....
아...!
손끝에 와 닿는 차갑고 매끄러운 시약병의 표면!
나는 재빨리 그 시약병을 꺼냈다!
“빙고!!”
코마디움!
재빨리 마개를 비틀어 뽑은 뒤에 상처 부위 위에 난폭하게 코마디움을 흩뿌렸다.
이제까지 수백 번도 더한 일, 이 정도 쯤이야!!
흘러내린 살구 빛의 액체는 허공에서 기화하며 노란 빛 무리가 되어 그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흑!”
혼수상태에서 빠져나온 리사는 복부에서 올라오는 지독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헛숨을 삼시며
그녀의 손에 잡힌 내 손목을 꽉 그러쥐었다. 그녀의 손톱이 내 살을 파고 들어간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러나 난 이미 회복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그녀는 한 결 편안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떴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더니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도망가라고 했잖아요.”
“......”
“당신은 한 번 죽으면 죽으면서, 어째서... 잊었어요?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고요.”
하지만.... 하지만!!
“쿠아아아아-!!”
악마의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마악 악마의 복부에 칼을 박아 넣는 전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발버둥치는 악마의 복부를 걷어차 그 반동으로 검을 뽑은 뒤, 땅에 착지한 순간 다시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그의 정수리를 노리고 검을 세로로 내리 그었다.
“끝이다!!”
“크아아아아아---!!!!”
악마는 엉겁결에 팔을 들어 올려 그 검을 막아 보려했지만, 전사의 검은 그의 팔을 거침없이
베어 나갔다.
“크오오오오~!!! 건방진!!”
악마의 잘려진 팔의 단면에서 검은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 나왔다.
악마는 비록 오른 팔을 잃었지만, 그 대가로 목숨을 보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사는 다시 한 번 그의 가슴팍에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이번에야말로!!”
그 순간, 악마의 눈이 검은 눈동자마저 붉게 물들어 붉은 빛을 내뿜었고,
그의 양 뿔에서 빠직빠직하는 전격이 맺혔다.
“위험해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악마의 양 뿔끝에서 푸른 번개가 튀어 나왔다.
“흐음!”
푸른 번개가 섬광처럼 그에게 뿜어져 나온 순간! 전사는 그가 잡은 검을 놓았다.
“아닛!!”
전사의 검은 마치 피뢰침처럼 전격을 빨아들였다.
그 순간 착지한 전사는 땅에 꽂혀 있던 리사의 검을 뽑아들고 도약했다.
악마가 그것을 알아 차렸을 때는 늦어 이미 그의 몸은 리사의 검에 의해 수직으로 베어나가고 있었다.
“끄으워어어어-!!!!”
반 토막 난 악마는 절단면으로부터 신문지에 불이 번지듯 단숨에 화악 타올라 재가 되어
허공에서 흩날려 내렸다. 땅에 착지한 전사는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검 쪽으로
걸어가서는 땅에 널부러진 자신의 검을 집어 들고서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리사 씨, 괜찮으세요?
“...네.”
나는 그녀를 부축해 상체를 일으켰다.
“......”
옆을 보니 황금 갑주를 입은 전사가 그녀의 검을 내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전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휘젓더니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이런, 얼마 안 봤다고 벌써 내 목소리를 잊었나?”
“어...”
“어레?”
황금빛의 머리칼, 푸른 눈 강인해 보이는 인상의, 조각 해놓은 듯 한 남자.
“듀르크스 씨?!”
“그래. 프레이엘.”
하...하... 이거 완전히 졌군.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게 더 괴롭다.
나는.... 그녀를 지키지 못했는데. 오히려 나 때문에 그녀가 위험해 졌었는데...
“리사, 괜찮나?
“예, 그럭저럭.”
그는 갑자기 그답지 않은, 바보 같은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 대로에서 언제까지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을 거지?”
그녀와 나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
“아......”
이런.
-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리사의 생일이라고 했던가.
땅거미가 내려앉은 마을은 크리스마스의 전야제 준비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내가 인파를 뚫고 지나가는 건지, 내가 인파에 떠밀려가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나는 힘겹게 여관 문을 밀고 들어갔다.
1층 식당은 늦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계단으로 가야하는데 그 계단은 이 인파를 뚫고 가야만 갈 수 있...다니...!
“여기다.”
“어?”
두리번거리며 어떻게 하면 반대편 계단으로 쉽게 넘어 갈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던 차에
내 손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다.
“듀르크스 씨?”
“너같이 비실비실한 녀석이 인파에 묻혀 버릴까 봐 내가 직접 온 거다.”
“...고마워요.”
듀르크스는 앞장서 길을 뚫었고 나는 그의 손에 반쯤 끌려가듯 걸어갔다.
마침내 계단에 도착한 그는 내 손을 놓았다.
“자, 놀러가자.”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아서 인지 조금씩 삐걱거리는 계단을 걸어올라 갔다.
나는 앞장선 그의 넓은 등판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와 만나 지금까지,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리사의 모습도.
나도 모르게 나는 그에게 물었다.
“리사씨를 좋아하세요?”
“물론.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녀는 매력 있는 여성이다.”
후, 아직도 나는 미련을 못 버렸나?
자괴감과 열등감이 뒤섞인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내 가슴속에서 격렬히 휘몰아쳤고,
그 감정의 폭풍 속에서 대상 없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넘실거렸다.
아마,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인정 하긴 싫지만 시기 혹은
질투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감정 중의 하나일까?
어느새 그와 나는 복도 끝의 한 방에 도착 할 수 있었다.
512호. 내 기억에 따르면 이 방은 특이한 구성의 방이었다.
한 번에 다수의 사람들을 재우기 위한 방으로, 마치 하나의 독립 주택처럼 거실과 2개의
침실이 딸린 꽤나 호화로운 방이었다. 우리 같이 늦은 시각까지 파티할 사람들에겐 더욱 좋은 구조겠지.
“네가 두드려라.”
“네.”
나는 문을 노크하고는 말했다.
“우리 왔어요!”
“오셨어요?”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루시엘라 씨일까?
“어서 오세요.”
곧 문이 열리며, 머리를 묶은 루시엘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루시엘라 씨.”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녀의 뒤로 ,
“안녕하세요. 프레이엘 시숙님!”
시...시숙이라니?!
(주 - 시숙(媤叔) : 남편의 형제. 아주버니.)
“안녕하세요! 형님!”
“호오... 새 신랑! 새 신부! 어때? 신혼 생활은?”
“닭살이에요. 주변 사람들을 정말 닭으로 만들어 삶아먹을 심산이라니까요.”
약간 투덜대는 말투로 로메디스 커플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리사였다.
“안녕하세요, 리사 씨.”
“안녕하세요, 프레이엘 씨.”
“그럼, 모일 사람은 모였으니, 파티를 시작해요!”
헤르미카는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선 외쳤다.
아..언제나 힘이 넘치는 군 이 아가씨는...
“헤헤, 자 모두 와서 앉아요!”
헤르미카를 따라 거실에 들어왔다.
성대한대?
방 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탁이 있었는데, 원탁에는 케이크를 비롯한 이 겨울에 어디서 구했을지도
모를 싱싱한 과일들과 여러 과자 사탕 등등...
먹을 것들이 그득하게 쌓여있었다.
아무리 봐도 6인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나는 빈자리에 앉았다.
리사의 반대편이군. 고개만 들면 딱 눈이 마주치겠는 걸?
“..이..이걸 어디서 다 구한거야?”
“헤르미카와 제가 마련했어요. 형님.”
“앗! 너무해!”
로메디스의 옆에 딱 붙어있던 헤르미카는 갑자기 고개를 홱 반대쪽으로 돌렸다.
로메디스는 갑자기 얼굴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그녀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선 말했다.
“아앗, 미..미안해..자..자기야!”
“흥!”
“자기라고 부를게~ 자기!!”
“흐응!”
“미안, 미안 자기야!”
헤르미카는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로메디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사랑하는 거 맞지?”
“으..응...”
“얼마만큼?”
그녀는 자신의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대고서는 물었다.
“그...그러니까....”
로메디스는 단어를 찾지 못 하는 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얼,마,만,큼?”
그녀의 양 미간이 서서히 굳어가고, 그녀의 얼굴에 피어있던 은근한 미소가 점점 사라져갔다.
무..무섭다!
“하..하늘만큼 땅만큼!!”
로메디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이해해... 쪽팔리겠지.
“아핫~정마알? 나두, 나두! 자기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 응~?”
헤르미카는 로메디스의 주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고양이 마냥 그에게 몸을 밀착 시키며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사..살려 줘!
“크흠.”
참다못한 듀르크스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으나, 헤르미카는 허공을 핑크빛 하트로 수놓으며
로메디스의 몸에 자신의 볼을 부비적댔다.
“꺄악~꺄악~!”
“그만!!!”
투칵!!!
“아얏!”
마침내 참다못한 듀르크스의 눈길을 받은 루시엘라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주먹을 내질렀고,
정의의 꿀밤에 직격 당한 - 그래, 말 좋다. 정의의 꿀밤!! - 헤르미카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이마를 감쌌다.
“히잉... 좋아서 하는 건데. 그렇지, 자기야?”
“으..응.”
잘못하다간 정말로 닭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 증거로 내 팔은 이미 닭의 살가죽처럼 소름이 쫙 돋아있다.
위험해.. 위험해..
“자아~ 그럼!”
헤르미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분위기를 만들어 볼까요?”
로메디스가 케이크에 꽂은 촛불에 불을 붙이는 동안 헤르미카가 손을 딱 튕겼다.
그러자 방안의 조명들이 차츰 사그라 들었다. 방은 빠른 속도로 어둑해졌다.
“...그것도 마법이야?”
“네, 시숙 님!”
그 시숙 소리 좀 그만 해주면 안 될까나? 늙어 보이잖아...이런...
어쨋든 마법이란 건 다용도군. 편리해 보이는데.
뭐 이런 마법은 없나? 밥 대신 먹여주는 마법이라 던지 윽.. 게으름도 큰 죄 중에 하나인데!
방은 빠른 속도로 어두워졌다.
촛불의 불빛은 어슴푸레하다.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그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면 너울 대는
불꽃은 매혹적인 한 송이 꽃처럼 어느새 사람의 마음을 가져가 버린다.
어둠이라는 바다에 휩싸인 하나의 작은 섬처럼, 넘실대는 불꽃-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쓸려나가는 짙은 어둠.
우린 그 자태에 빠져 한동안 불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노래...부를까요?”
루시엘라가 약간 머뭇거리며 말했고, 다음 순간 우리 모두는 정신을 차렸다.
헤르미카는 곧 박자를 맞췄다.
“하낫, 둘, 시~작!”
모두 함께하는 노래.
“생일 축하 합니다~.”
그녀와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 노래를 부르는 이 순간까지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루어 질 수 만 있다면.
“생일 축하 합니다~.”
이루어 질 수 만 있다면!
“사랑~ 하는-”
이것이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고백이었다면!
순간, 그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리사의~”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그러나 나는 결코 기쁜 마음으로 치지 못했다.
단지, 바보 같은 나에게 화가나 내 손을 서로 후려칠 뿐이었다.
“후우우우~~”
리사는 촛불을 불었고, 다들 각자 축하의 말을 외쳤다.
그사이 불을 켠 헤르미카는 싱긋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물 증정 시간!”
“에...그런 걸 준비 했어?”
리사는 순간 당황한 듯 손을 내 저었다.
“그래-! 모종의 이유로 우리 축의금도 안 준 너! 괘씸하지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마음으로
특별히 준비했다고!”
헤르미카는 눈을 한번 찡긋하더니 방구석에 놓아 둔 자신의 가방으로 걸어갔다.
“에...”
리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때, 듀르크스가 방구석에 세워 두었 던 천으로 싼 물건을 리사에게 내 밀었다.
“에... 듀르크스 씨.”
“검이다. 받아라.”
“...이런...”
안 본 사이에 그들은 많이 친해져 있었다.
나만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다.
“리사! 우리 선물도 받아! 나랑 우리 자기랑 루시 언니가 고생해서 구해온 거라고!”
헤르미카가 내민 것은 한 권의 책만한 포장지로 포장한 선물 상자였다.
“우...이...이런 거... 받아도 되나? 나.. 아무 것도..”
“쉿! 이해해, 이해해! 그래, 모.종.의. 이유가 있으니까. 그죠? 시숙님?”
“아...응.”
나는 그녀의 질문에 무심코 답했다.
모종의 이유? 그게 뭐지?
“아아아아~~!!”
리사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자,자! 하지 말고! 선물부터 풀어보라고!”
“우으..”
리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선물 상자를 풀었다.
리사의 주변에 모두 모인 그들을 보니 가슴 한 구석이 더욱 아려왔다. 저곳에.. 내가 낄 자리는 없구나.
그녀는 그 사이에 무리의 핵이 되어 있었다. 보살핌 받는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존재로. 하하...
“이...이건...”
“각각 화염, 바다, 대지, 바람을 뜻하는 4색 자수정 목걸이지! 매일 매일 기분마다 바꿔 쓰라고 준비했지!”
“...예쁘다! 고마워요!”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감추어 두었던 종이가방을 꺼냈다.
“리사 씨. 제 것도 받아주실래요?”
“에엣, 프레이엘 씨도...”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녀에게 종이가방을 건냈다.
“꺼내어 봐도 되요?”
“물론이죠.”
“흐음...”
그녀는 종이가방을 열어보았다.
옆에서 헤르미카가 그녀의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는 가방 안을 보았다.
“헤에~ 구하기 힘든 옷인데 이거, 용케 구해오셨네요 시숙님? 우와, 더군다나 신품이네!”
그녀가 가방 안에서 꺼낸 것은 오렌의 라미아의 숲 깊숙이 숨겨져 있는 대장간에서 구해온 옷이었다.
꽤나 구하기 힘든 옷이긴 하다.
“고..고마워요. 프레이엘 씨.”
그녀는 기쁜 듯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내 가슴을 더욱 후벼 팔 뿐이었다.
이루어 질 수 있다면...
“천만해요.”
내 가슴은 산산이 찢겨나가는 듯 아파왔지만 내 얼굴은 단지 그녀와 같은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젠장!
“자아~ 그럼 시식해 볼까요?”
헤르미카는 두 손을 마주치며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
밤은 깊어져 갔지만 파티는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자정 무렵. 듀르크스는 밖에 나가서는 커다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 들은 내용물을 가장 먼저 본 헤르미카가 말했다.
“에에~그거, 술 아녜요?”
“맞다.”
“듀..듀르크스 씨!”
이 사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마이소시아 제국에서는 미성년자는 의료 행위에 사용하는 약주를 제외하고는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뭐가 문제란 말이지? 이 방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프레이엘?”
“리..리사 씨요.”
“흠. 이상하군. 그녀도 오늘 부로 성인이 아닌가? 아무런 법적 하자도 없지 않은가?”
“그..그건.. 그렇지만.”
하하... 뭐, 잘 됐을지도.
“꺄앗! 술 판이다!”
“......”
“술...이라니?”
루시엘라가 병을 하나 꺼내더니 병의 코르크마개를 오프너를 이용해 능숙한 솜씨로 뽑아냈다.
한 두 번 한 솜씨가 아닌 걸?
“에엣! 언니! 술 안마시는거 아니었어요?”
“오늘은 리미트 해제. 리사가 성년이 된 경사스러운 날이니까.”
“우~! 내 생일 땐 그런 거 안 했으면서!”
“더군다나 내일부로 축제 기간이니까.”
듀르크스도 능숙한 솜씨로 병을 따더니, 나에게 술을 권했다.
“자. 우리도 한 번 마셔볼까? 잔을 받아라.”
“....네.”
은은하게 퍼지는 과일 향속에서 간간히 톡 쏘는 느낌이 코를 간진다.
듀르크스는 로메디스의 잔에도 술을 채우고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부었다.
루시엘라는 헤르미카와 리사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음. 원래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에게 순을 따르는 게 아닌가?
“자.. 우리 한번, 건배 해볼까?”
“그렇게 해요!”
“재미있겠네요.”
군중심리.
“자! 다가올 새해에 행복하게! 건배!”
“건배-!!”
...나는 술이 약하다.
그럼에도 나는 취함을 걱정치 않고 마구 들이켰다.
반대쪽에 앉은 리사를 힐끗 보니 그녀는 술이 영입에 안 맞는지 한 모금 삼키고는 표정을 찡그린채
더 이상 마시려 하질 않는다.
“하아-”
“우와~ 시숙님! 보기보다 터프하게 술을 마시시네요!”
목을 타 넘어간 차가운 술이 위장으로 쓸려 내려가는, 차가운 것이 차츰 화끈하게 변하는
묘한 기분을 즐기며 포도를 한 알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한잔 따라서는 마신다.
취함을 걱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취하고 싶은 것일까?
위장에 퍼지는 화끈거리는 묘한 기운은 차츰 온 몸으로 퍼져나가고, 마침내는 온 몸이 뜨거워진다.
술은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한다.
게슴츠레 한 눈으로 장래를 본다.
듀르크스와 루시엘라는 연신 술을 들이 키고, 로메디스와 리사는 처음 받은 잔을 비우지도 못한 채
깨작거리고, 어느새 취기가 올랐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된 헤르미카는 로메디스와 리사에게 빨리
마시라며 격려하고 있었다.
이성은 현실 깨우쳐주고 현실의 굴레는 언제나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그러나 이성이 마비되어가는 지금, 현실의 굴레는 내 어깨 위에서 사라지고 없다.
“......”
나는 술을 한잔 더 따랐다. 그리고 이번에도 단숨에 들이킨다.
“하핫.”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웃겼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를 다른 생물체의 위에 군림시키는 인간이 고작.
고작, 이런 한 줌도 안 돼는 액체를 마시고 헤헤거리며 그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다른 ‘짐승’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든 그 소중한 ‘이성’을 헌신짝처럼 집어던져버린다니?
인간이 스스로를 깨닫게 된 그 순간, 스스로를 깨우친 그 순간, 그 자신을 제3의 입장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순간부터, 인간은 현실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그 무거운 것을 지었던 게
아닐까? 사실, 신의 축복을 받아서 가지게 되었다는 그 자아는 사실은 영원한 저주의 굴레가
아니었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사고의 홍수와는 별개로 온 몸에는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치고,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느껴진다. 사고의 홍수는 육체의 기분 좋음에 묻혀 차츰 나와는 멀어진다.
하...하... 나는 눈이 조금씩 무거워 짐을 느꼈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잠드는 것도 낫겠지.
“에엘~ 벌써 쓰러지려고?”
“으왓!”
목덜미에 와 닿는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입김에 잠이 화들짝 깨는 걸 느꼈다.
앉은채 뒤를 돌아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 햇다.
“루..시엘라 씨?”
“사내자식이 겨우 한 병도 못 마시고 퍼 잘 생각이야? 엉?! 이건 음료수라는 맥주보다 쬐끔,
아주 쬐~~에끔 쎈 술이라고? 엉?”
자..자기가 취한 주제에!!
오...이런. 이건 평소의 루시엘라가 아니잖아!
평소에 총기가 흐르던 눈은 흐릿해지고, 그녀의 눈빛은 묘하게 젖어, 상대방을 유혹하는 듯 흔들렸다.
“이! 누나가! 술을 가르쳐줄테니까-.”
“..루..루시엘라 씨!”
그녀는 나를 밀쳐서 의자에 공간을 확보하고는 내 옆에 딱 붙어 앉아 의자에 반을 차지해버렸다. 음. 이...이거 위험한 거 아냐?
나는 술에 대해 일장 열변을 토하려는 그녀를 애써 무시하며 눈을 돌렸다.
화장실로 갔는지 자리에 없는 로메디스와 식탁에 엎드린 채 이미 응답이 없는 헤르미카.
그리고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올려놓고, 재미있다는 듯 나를 관찰하는 듀르크스!
야!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얄밉네! 그리고... 나를 노려보는 리사?
“...그러니까! 술은 천지개벽 사상 가장 위대한 물건이라니까!”
예이, 예이.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 마셔! 누!나!가 직접 따라 줄테니까!!”
루시엘라는 자신이 마시던 술병을 기울여 내잔에 술을 채웠다.
이...이 사람이!!
그리고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팔을 내 목에 어깨동무하듯 두르고는,
“자아~ 마셔!”
“루..루시엘라 씨!”
“뭐야~? 싸게싸게 안 마셔?”
“으...”
“뭐야? 컵이 마음에 안 들어? 에이, 비싸긴... 그럼...”
그녀는 자신의 술잔에 들어 있던 술로 채운 내 술잔을 들어서는 입을 댔다.
아... 마시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는 술잔을 테이블 위에 두고는 고개를 돌려 갑자기 그윽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눈 꼬리가 올라가고, 흔히 말하는 ‘관능적인’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볼이 살짝 부풀어 있는 걸로 봐서는 술을.. 입에 머금고 있는 건가?
잠깐, 컵이 마음에 안 들어? 엑?! 설마!!
그녀의 얼굴이 지척에 다가왔음을 느낀 것은 바로 다음 순간 이었다.
피할 수 없었다는 건 단지 내 변명에 불과할까?
으악! 안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빼앗기는 건가?!
아...!
닿았다...
입술 끝에 와 닿는 건 의외로 딱딱했다
어레?
실눈을 떠보니 내 입술 앞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닿아 있음을 알아챘다.
손? 그 손의 주인은..
“언니이이---!!”
아름다웠다. 허공에 흩뿌려진, 일정한 모양이 없이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는 호박 빛의 액체의 구는.
그 물방울은 매 순간 빛을 산산이 부서뜨리며 허공을 날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루시엘라의 입안에 머금어져 있던 술 이었다!!
“리..리사 씨!!”
이 상황을 보던 턱이 쩍 벌어진 듀르크스는 내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루시엘라에게 다가갔다.
그가 마루에 완전 큰 대자로 뻗어버린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하는 동안,
나는 루시엘라의 아래턱에 어퍼컷을 먹인 그 자세 그대로 서있는 ‘무서운’ 리사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괘..괜찮아. 잠시 충격으로 기절했을 뿐이야.”
마...맙소사.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주먹을 자신의 무기로 삼는 무도가를 맨손으로,
그것도 단 한방에 때려눕히다니!
아 경우가 다른가? 어찌됐건 난 또 다른 이유로 그녀가 무서워졌다.
“엘 씨!”
“네? 네!”
그녀는 홱 돌아서서는 내 옆에 의자에 거칠게 앉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내잔에도 술을 따라TEk.
"같이 마셔요.“
“아...전....”
.... 다른 의미로 피하고 싶은 사람인데!
“......”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한번 흘겨 본 뒤 자신의 술잔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어레? 아까까지만 해도 술을 깨작깨작하던 이 아가씨가!
리사는 단숨에 반잔을 비우고는 한동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안 마셔요?”
“...으음...”
마지못해 술을 두어 모금 들이 킨 나는 컵을 내려놓기도 전에 그녀의 무언의 시위를 받아 그녀가 마셨던 만큼 더 마셨다.
“......”
“...엘씨는.”
그녀는 한동안 우물쭈물 대더니 괜히 화를 내며 술을 몇 모금 더 마셨다.
“저는...에...그러니까...”
“......”
나는 그녀의 눈이 흐릿하고, 혀가 꼬여 발음이 잘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힐끗 아까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보니 꽤나 많은 병이 처참하게 비워져 있다는걸 알아챘다.
언제 저렇게 마셨지?! 그녀는 이미 한계다.
“에이이~”
“...리사 씨!”
다시금 술병을 잡으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에...왜요?”
그녀가 술기운이 도는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욱..술 냄새. 지독하군. 나도 이 정도는 풍기려나?
“그만 마셔요! 저도 술이 센 건 아니지만 지금의 리사 씨는 꽤나 취했다고요!”
“그럼 말리지 마요, 나... 나... 취할 거라고요.”
“......”
“그러니까 놓아 줘요오....”
그녀가 비척 됐지만 이미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지 그녀는 허공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안돼요.”
“우으... 하지만, 이거 놔요.”
그녀가 천천히 비틀거리며 일어나다가..
“꺄앗!”
“아이쿠!”
나는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그녀를 간신히 붙잡은 뒤에 일어서서 그녀를 부축했다.
“아...아... 엘 씨이...”
“......”
“더 마실 수 있다고요!”
“자아..자아..”
완전 애군.
난 그녀를 부축해서 어렵사리 그녀를 여자들이 사용하는 침실로 질질 끌고 갔다.
그녀는 고개를 뭐라 뭐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고개를 홱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엘씨는 치사해요.”
“......”
“자기는 취하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긴. 지금도 어질 거린다고.
“내 취한 모습 보려 한 거죠?”
“...그럴 리가?”
술에 취하는 게 이런 거라면 다시는 안 취하길 바라는 게 내 심정이다!
“아아아~”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휘청거리며 주저앉는 그녀를 반쯤 껴안아 일으키고는 다시 질질 끌고갔다.
도대체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술을 사온 의도가 뭐야?! 듀르크스?!
“엘씨이...”
방문으로 통하는 코너를 돌았다.
침실 앞이라 그런지 불도 안 켜져 있고, 코너를 돌아서 그런지 거실의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어둡군. 안아 일으킨 이후로 흐느적거리지만 비척비척 스스로 걷고 있던 그녀의 발걸음이
갑자기 뚝 멈췄다.
하..또야?
이 짧은 거리를 오는데 세 번이나 멈췄어?
“가요, 리사 씨.”
“....여기 들어오려구요?”
“어레? 그..그런.”
갑자기 그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광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약간 무섭다.
“음흉하셔라~ 사제라면서요...”
“아니..그런..”
“흥! 엘씨는 벼~언태!”
그녀는 날 살짝 밀치고는 비틀거리며 침실의 문을 열고서는 어두운 방안으로 사라져갔다.
...문은 닫으라고.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문을 닫았다.
나도 취기가 많이 올랐는지 어질어질하다.
여기있는 사람들중 아마 제일 술을 많이 마셨을 당사자, 듀르크스는 아직도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루시엘라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무슨 일이?”
저 사람. 술을 마시면 사람이 확 변하나보다. 기억도 안나고 말이야.
앞으로 조심해야지.
“뒷처리 부탁해요 듀르크스 씨.”
“안 할 건데.”
남자 방으로 들어온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빈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이불로 몸을 감았다.
아..옷 따위.
-
...으으...
눈을 뜨기도 전에 느낀 건 머리가 반 토막 날 것 같은 고통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커튼을 젖히고 하늘을 보았다.
해의 높이를 보아하니 오전 10시는 지났군.
아우...
이 방을 3일 동안 빌렸다고 했던가? 다행이군. 체크 아웃시간은 아직 멀었으니까.
아우으...
“....아....”
방밖으로 나가서 내가 본 건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
두통이 더 가중되는 듯하다.
룸서비스고 자시고 이건 너무했다. 좀 치워야겠군.
“에휴.”
일어난 건 나뿐인가?
아이고 내 팔자야...
-
다 치우고 이제 좀 쉴까 생각 하며, 간단한 세안을 할 수 있도록 갖추어져 있는 화장실 겸
세면대에서 얼굴과 손을 대충 씻은 나는 어제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몸을 좀 움직이고 나니 조금 괜찮아 진듯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무겁다.
그 때, 복도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리사가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칼이 젖어있고, 목에 젖은 수건이 둘러져 있는 걸 보니 그녀가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나보다 많이 마셨으면서.
일찍 일어났으면 나 좀 도와주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리사 씨?”
“네. 그런데.. 어제 그걸 혼자서 다 치우셨어요?”
“네.”
나는 뒤돌아, 테이블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녀는 내 왼편에 의자를 하나 끌고 와서는 그 의자에 앉았다.
......
잠시간 정적이 우리 사이를 지배했다.
“프레이엘 세이프리스 씨.”
“네?”
갑자기 왠 풀네임?
“저기, 손 좀 줘봐요!”
“네?”
“손 좀 보여달라고요!”
“아...네.”
그녀는 머뭇거리던 내 왼손을 낚아채오는 눈 앞에 두고는 유심히 관찰했다.
“......”
“이 손으로 기도하면서 주문을 외면, 다친 사람이 낫는 건가요?”
“네. 그렇지요.”
이제는 막 조물락 대기까지 한다.
...뭐 하자는 거야? 조금 민망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응?
내 손가락에 가만히 와 닿는, 체온으로 덥혀진 금속의 느낌...
그것은 내 네 번째 손가락 앞에서 잠시 머뭇대더니 곧 깊숙이 들어왔다.
“아...”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반지를 끼우는 손가락엔 각각 그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왼손 네 번째 손가락, 약지의 의미는...
앗!
“...이...이런 건, 원래... 남자가 하는 거지만!”
“에...”
“에...엘씨!”
“......”
“나..나랑 결혼해 주세요!”
마지막 말과 함께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눈가에는 살짝 이슬이 맺혀있었다.
아...
“엘씨! 전 당신이 좋아요! 당신과 헤어져있기 싫어요!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다고요! 그..그러니까.”
“......”
이건 꿈인가?
나는 내 집게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대었다.
이을 말을 찾던 그녀의 입술이 멈추었다.
“리사 씨.”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두 눈망울이 내 눈 가득 비친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4년 전에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4년, 그 성숙의 기간 동안 나는 더 넓고도 좁은 의미로,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해요. 나도.”
“......!”
가슴 속에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림을 느꼈다.
“...흑, 흐흑...흑...”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 졌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점점 커졌다. 눈가에 매달린 눈물은 위태위태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갑자기 내 품으로 뛰어 들었다.
“우..우에에엥-!!”
그녀는 내 가슴에 파묻힌 채 울었다. 그녀의 눈물이 내 옷을 적신다. 나는 그녀에게 왜 우는 지 묻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살짝 끌어안았을 뿐이다.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 오해.
뱉어내지 못하는 독. 그것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의 마음을 수없이 찢어 발겼겠지.
그리고 아마 그 독은 지금 이 순간 눈물이 되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겠지.
“나...나...무지 걱정했다고요! 흑...”
“왜요?”
“....당신이 날 싫어하는 줄 알고요!”
“그럴리가요.”
“하지만... 우리랑 만나는 것도 꺼리고! 저를 피해 다녔었잖아요!”
그녀는 눈물이 맺힌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씻었던 깨끗한 얼굴이 다시 망가지다니... 이거 좀 미안하네.
난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미소 지었다.
“저는 리사 씨가 절 피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러지 않았어요! 절대요!”
난 이 여자를 사랑한다.
역시, 그 시작은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였겠지.
그래서 아마, 내 첫사랑 이었던 ‘리사’의 이름을 그녀에게 지어 준 것이 아닐까?
이기적인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잖아?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
“결국 이렇게 됐군.”
“잘 됐지요?”
방의 문을 닫은 듀르크스는 중얼거렸고, 그 옆에서 뒷짐을 진 루시엘라는 맞장구쳤다.
“아..정말 바보 같으니라고. 정말 둘 다 숙맥이라니까요.”
“그렇지.”
“그럼, 우리 건배 할까요?”
루시엘라는 뒷짐 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제의 과일주가 2병, 그녀의 손에 잡혀 있었다.
“좋지.”
- Chapter 4 End -
에필로그, 첨부합니다.
- 에필로그 (Epilogue)
- 3개월 뒤. 어느 봄 날.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신랑 프레이엘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신부 리사를 사랑 할 것을 맹세 합니까?”
“예. 하겠습니다.”
“그럼, 신부 리사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없이 신랑 프레이엘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맹세합니다.”
“그럼. 신의 이름으로서, 이들이 부부가 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와아아아---
행복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뒤돌아서서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의 미소를 지었다.
...하얀 머리칼이 나풀거리는 것이 보였다.
또 다른 ‘리사’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은 채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엘...”
하객들의 박수와 환호소리 속에서, 속삭이는 리사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이 세상 제일의 미녀가 있었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은 붉었다.
“......”
“......”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그녀는 얼굴을 가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부케..던지지 않아?”
“에...으응.”
그녀는 부케를 잡았다.
그리고는 흘끔 나를 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잇-!!”
...훌륭한 훼이크다.
분명 팔의 궤도는 뒤를 향하고 있었지만, 부케는 이상하게 돌며 이상한 궤도로 누군가의 품으로 빨려 들어가듯 날아갔다.
“...나?”
그 곳에는 긴 검은 머리칼을 가지런히 늘어뜨려 놓은 루시엘라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언니 차례야!”
리사는 혀를 쏙 내밀고는 갑자기 내 손목을 낚아챘다.
“엘! 우리 달려요!”
“에-?!”
“언니는 화나면 무섭다고요!”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 하고는 달리기 시작했고, 뒤늦은 웨딩마치가 울렸다.
-
“허허.... 아직 퇴장도 외치지 않았는데.”
란셀 주교는 책을 덮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 Epilogue END -
여기까지가 본편 내용입니다만.... 외전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 애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