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밀레스 여관방의 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소녀... 하지만 특별히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도 평소에 잠을 자는 것 보다
훨씬 개운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었던 건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침대 옆을 보니, 나의 갑옷과 무기가 가지런히 탁자 위에 놓여있다. 누군가 이리로 나를
옮겼던 것일까. 갑옷과 신발을 주섬주섬 챙겨 입은 나는 1층의 발코니로 가서 여관 주인에게
소녀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이봐요, 주인장. 나를 이리로 옮겨 온 게 누구죠?"
"모셔온 건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입니다만..."
"크... 그럼 여관 대금은 누가 지불했죠?"
"웬 소녀가... 돈 대신 이런 걸 놓고 갔습니다. "
그 주인장이 슬며시 꺼내놓은 것은 작은 반지였다. 겉 모습은 루어스성 기념품점에서 팔고 있는
녹옥반지와 같았지만, 반지의 안쪽에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반지가, 그 소녀의 정체를
밝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까?
"이봐요 주인장. 여관 대금은 다시 지불하겠습니다. 이 반지를 내게 줄 수 없겠습니까?"
"뭐. 그러십쇼. 저에겐 필요도 없는 물건이니까요. "
반지를 집어든 나는, 대륙의 마법사이자 나와 절친한 친구에게로 찾아가기로 했다.
나보다 더, 알 수 없는 힘이 깃든 이 반지에 대해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마법사 친구로부터 놀랄만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이 반지는, 심상치 않은 물건이군."
"무슨 말이야 그게, 좀 더 자세히 말해줘."
"이 반지를 어디서 얻었지? 이 반지는 나를 거부하고 있어. 거부하는 거대한 힘이 느껴져.
나는 마법사라서 마력을 다룬단 말이야. 원래, 신력(神力)은 마력(魔力)을 거부하는 법이거든.
그러니까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이 반지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
"뭐?"
"이런 물건은 도저히 인간이 만들 수 없어... 다시 말하자면 이런 물건이 존재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나 할까? 이런 걸 어디서 얻었어? 나 주면 안 돼?"
"안 돼! 이리 내!"
그렇게 엄청난 건가? 이 반지가... 그 소녀가 여관의 주인에게 나의 숙박비로 주고 갔다는 이 반지.
그 소녀와 나의 만남은, 아주 희귀한 인연이었던 모양이군.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 진 모르겠지만 - 나는 그 소녀가 나타나면 반지를 돌려주기로 하고
그 반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목줄에 메어 목걸이처럼 보관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날 이후로 그 소녀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점차 그 소녀의 일이 내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반지는 이제 나의 부적 같은 것이 되었다. 이 반지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언제나 좋은 일이 생겼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운좋게 여러번 건졌던 적도 있었고, 왕으로부터 나의 실력을
우연찮게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수십 년이 흘러, 나는 이제 명실 공히 대륙이 인정하는 최고의 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의 경력에는 중대한 오점이 남아있었다. 바로 밀레스 던전의 탐사를 미처 끝내지 못한
것이었다.
나의 몸도, 이제는 거의 기사로서의 능력을 다해가고 있었다. 그 전에 나는 내가 이루지 못했던
마지막 임무로서, 밀레스 던전의 최하층을 정복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밀레스 던전에서 나의 짧은 목숨이 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목에 두른 소중한 반지가
있었기에 두렵지 않았다. 아니,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왕으로부터 성대한 출정식을 받고, 밀레스 마을로 향했다. 밀레스 마을의 외곽에 위치한 던전.
이제는 거의 아무도 찾지 않아, 수풀로 우거진 이 던전을 보자마자 나는 ...
수십년 만에 그녀의 일을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래, 이곳에서 그...
신비한 소녀를 만났었지...
지금쯤 그녀는 무얼 하고 있을까?
아니, 안돼. 이런 잡념을 머릿속에 담아두고서는 임무를 성공시킬 수 없다. 내 자신을 채찍질 하며
나는, 드디어. 내 인생의 마지막 임무라고 할 수 있는... 밀레스 최종층의 정복에 첫 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던전에서 나는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역시, 밀레스 던전의 정복이라는 임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몬스터는 예전에 비해 더 강해져 있었고
나의 몸은 예전에 비해 더 늙어 있었다. 가장 혈기 왕성했던 나의 젊은 시절에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니 몸과 정신에 무리가 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괜찮아, 라고 자신을 독려했다.
나에겐 이 반지가 있으니까. 언제나 나를 지켜주던. 이번에도 마지막으로 내 마지막을 지켜주렴.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 하며 힘겹게, 힘겹게. 드디어 내가 수십년 전에 눈물을 흩뿌리며
돌아와야만 했던 27 층에 멈춰 섰을 때. 아-!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그래, 나는 아직도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이제 27층에서 아래로 가는 비밀의 문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최종층 까지는 얼마 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내 뜻대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 ...
3부에서 계속 [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