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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은 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동안에도 계속 욕을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
눈에서는 쉴 세 없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나쁜색기, 나쁜색기, 나쁜색기!!
평소에는 나보고 천천히 좀 걸으라며 투덜거리던 녀석이,
힐 신은 여자 걷는 속도 배려도 안해주는 무심한 놈이라고 구박하던 녀석이,
오늘은 그렇게 높고 뾰족한 구두를 신었으면서도 턱턱 앞으로 잘도 걸어간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준건지,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끌고가는 건지 헷갈릴 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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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술집,
이 술집이 마음에 드는 건, 여타 다른 술집처럼 클럽노래를 빠방하게 틀어놓는다거나,
아이돌들의 댄스곡을 귀아프게 틀어놓지 않고, 잔잔한 발라드와 감미로운 노래들을
틀어놓는다는 점이다.
요즘 추세와는 다르기때문인지, 손님도 많지 않아서 감미로운 노래들을 밟고 걷도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없기에 더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그곳에서 펫과 나는 흥분된 기분을 조곤조곤 달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펫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지,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흐느끼지도 않고,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고, 술을 마시면서도 멈추지 않고 그냥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은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흐느낌보다도, 대성통곡보다도, 그녀의 슬픔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그 색기가, 그 나쁜색기가, 내가 테이블에 가서 오빠 얘기좀 해. 이러니까 뭐라는지 알아?
할 얘기 있음 내 여자친구 의심 안하게 여기서 해. 내 여자친구도 듣게.
이딴 식으로 말하는거야,
그녀는 한마디 한마디 내게 구구절절 이야기하면서도 눈은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서, 오빠, 내가 지금 여기서 다 말해도 후회 안해? 지금 여자친구한테 안미안하겠어?
이러니까, 그 색기가, 그런게 걱정되면 그냥 가지? 데이트 방해하지 말구. 이 ㅈ.ㄹ 하는거야..
나 정말 순간적으로 열이 빡 뻗쳐 오르는데, 그 색기 여자친구가 왠 정신나간 여자 보듯이
처다보는게 너무 기분 나쁜거야.
참..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로 이미 마스카라와 기본 메이크업들은 모두 씻겨져 내려가
펫이 얼룩말과 인간의 혼혈인가 할 정도로 줄무늬가 삐뚤빼뚤하게 죽죽 그어져 있었다.
까만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옷 여기저기에도 까만 물방울 무늬가 통통 튀어있고,
발광의 영향으로 머리는 산발이 되어있었다.
내가 저 괴물의 손을 잡고 시내 한복판을 걸어다녔다니, 라고 생각하고 있는찰나
그녀는 이야길 계속 했다.
그래서 내가 흥분해서 소리쳤지, 야 이 간나야 니 남자친구가 아직도 나 좋아한데,
니랑 헤어지고 나한테 돌아온다면서 기다리랬어, 오빤 나 더 좋아하니까 니가 그만 끄져!!
이랬는데, 나이도 21살밖에 안되는 그 어린게 내 눈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러는거야.
언니 하는거 보니까 언니가 우리 오빠 훨씬 좋아해서 쫓아다니는거 같은데요?
지금은 제 남자친구니까 언니가 저보고 이래라 저래라 할 상황은 아니네요.
짠-
말하다가도 열이 받는지 금방이라도 다시 그 술집으로 쫓아가 난장판을 만들 기세로
외쳐대길래, 가볍게 짠- 하고 술 한잔 하며 진정을 시켰다.
펫이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하지만, 뭐. 그 다음 상황은 내가 본 상황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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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흥분한 탓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술을 먹고 말았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한 채, 비틀 비틀 거리며 구석 구석을 누볐다.
아!!!!!!!!!!!!!!!!!!!!!!!!!!!! 정말 좋다. 이렇게 힘들때 옆에서 이렇게 코 삐뚤어지게
같이 술 먹어주는 친구가 있다는게 좋아!!
펫은 날 보며 실실 웃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어깨동무를 풀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앞서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소리쳤다.
나는 지금까지 ㅂ.ㅅ이었다!!!!!!!!!!!!!!!!!!!!!!!!!!!!!!!!!!!!!!!!!
난 이제 다 잊는다!!!!!!!!!!!!!!!!!!!!!!!!!!!!
잊자!!!!!!!!!!!!!!!!!!!!!!!!!
그리곤 내게 쫄래 쫄래 뛰어온다.
나는 왼팔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나의 팔 밑으로 쏙 들어와, 내 오른쪽 옆구리에 손을 끼웠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았다.
잊겠다고, 있었다고 그랬다.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평생 못잊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온갖 정이 다 떨어질 수 있는 모습 보여줘서
다행이다. 이 나쁜색기야.
펫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손에는 벌써 술 두어병과 김치에 볶으면 간단하게 훌륭한 안주가되는 참치한캔이 달랑거리며
딸려오고 있다.
어짜피 술 다 마시지도 못할게 분명했다. 이미 너무 많이 마셨다.
집에가자마자 우린 뻗어버릴게 분명했지만, 왠지 우리는 술을 더 마시고,
필름이 끊겨버려 아팠던 기억만 모두 사라지길 원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술을 샀다.
그리고,
역시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불위로 쓰러졌다.
펫은 내게 꼭 안겨 쿨쿨 잠을잔다.
내일 아침에 내가 일어날 시간이 되어도 더이상 그 색기의 문자가 와 있지 않겠지.
그래도 난 괜찮을 수 있을까?
그녀의 잠들기전의 말이 너무 슬펐다.
-An Optimist 낙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