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룡이 전장에 가세하자 치열하던 공방은 시작길드의 일방적인 우세로 뒤바뀌었다. 적절한 힘의배치,
그리고 지룡 자신이 직접 선봉에 서서 수많은 적 세력들을 꺾어 넘어뜨리는것을 보자 사람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시작" 길드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쌓여진 것이 아니었다.
청포도, 飛, 남두육성 등의 길드가 연합한 길드 연합체 [섀도우] 길드에도 위기가 찾아오는가 싶었다.
[VS] 길드의 창설을 끝마치고, 모든 길드원들의 이적 수속을 끝마친 정룡은 흘러가는 정세에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시작길드의 압승이 분명했다.
[VS] 길드는 현재 전쟁에 직접 가담하고 있지는 않지만, [섀도우] 길드가 밀리는 현 상황은
그렇게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룡은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심에 차서 말했다.
"시작길드..역시 강하다. 예상했던 것 이상이야. "
정룡의 옆에서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신시는 정룡이 이야기 했던 "그" 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편지를 보내 길드를 합병하게 부추겼다는 "그" 자도 여기까지는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 편지... 음. 그게 있었지. "
정룡은 품 안에 잘 갈무리 해 뒀던 편지를 찾아 꺼내들었다. 길드를 합병하기 전에 몇번이고 읽었었던
내용이다. 구절 하나 하나가 잘 기억이 날법도 하지만, 당시엔 길드 합병을 추진하는데에 정신이 쏠려
그 뒷 내용을 진지하게 음미하지는 못했었던 것이다.
《 ... 길드를 합병한 이후, 그 시간이라면 시작길드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소수로 움직이던 시작 길드가 집단행동을 개시하면 아마 대륙에서 그들을 막을 자는 없겠지요.
하지만, 저도 한 수를 생각해 뒀으니 마스터님은 합병 이후 공성의 계획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공성의 계획이란... 》
"한 수를 생각해 뒀다...?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군요. 하지만 그 한수가 지금의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만한 것이여야 하는데.."
"모든것이 "그" 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는것인가?"
".... "그" 는 과연 누구일까요... "
".. 음... 지금은 그러한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네. 이 편지에 적힌 내용대로 공성의 계획을 말해주지.
이 내용대로 길드원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할 것이네.."
정룡과 신시는 루어스 길드성의 지도를 꺼내 들었다.
♧ ♧ ♧ ♧ ♧ ♧ ♧
온 마을과 거리에는 사람들이 흘린 피로 흥건했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옆에 서서
전쟁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지만,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번진 전쟁의 불씨는 쉽게
사그라들줄 몰랐다. [섀도우] 길드와 [시작] 길드의 전쟁은 대륙의 최대 화젯거리가 되었다.
어떤 길드가 이기고, 어떤 길드가 지게 될까. 많은 사람들은 [시작] 길드의 우세를 점쳤다.
현실이 그랬다. [섀도우] 길드에 소속된 연합체의 사람들은 초기의 그 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소수의 그룹을 지어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뮤레칸의 신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같은 시간, 뤼케시온 마을 한 어귀에서 두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작길드가 이길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유자님."
"... 섀도우 길드에 소속된 사람들 중 내가 아는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힘든 길을 택했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 [쥬다] 길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원칙, 이었지. "
"저희 길드도 전쟁은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만.. "
"하지만 우리가 몸을 일으키지 않으면 힘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진다. 그렇게 되면 다시 전쟁이 났을때
수고를 해야 하는쪽은 바로 우리 겠지. "
"중요한 전쟁에서 중립을 지킨 우리들을 지원해 줄 길드도 없을테구요. "
"그렇다면 지금이 적기다. 흠. [쥬다] 길드는 [섀도우] 길드에 용병을 파견한다. "
"좋군요, 유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희 [센스] 길드도 [섀도우] 길드에 용병을 파견하죠."
"상위 30% 의... "
"최 정예만 엄선해서!"
♧ ♧ ♧ ♧ ♧ ♧ ♧ ♧
하루가 지나고, 날이 흘러가자 전쟁의 구도는 다시 미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섀도우] 길드는
동맹의 혈약을 잊지 않고 지원해준 [쥬다] 길드와 [센스] 길드에 감사했고, 두 길드에서 파견된
수많은 용병들은 시작길드와 새로운 전력으로 맞붙기 시작했다.
지룡은 잠도 자지 않고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복잡한 전략따윈 필요 없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몰아붙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싸움에도 조금씩 힘에서 밀리기 시작하는것을 지룡은 느끼기
시작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초기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자들이 나타나 자신들에게 맞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룡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대륙 전체가 우리 길드와 전쟁을 벌일 생각인가? 그렇다면 좋다! 우리쪽도 동맹 세력은 있다.
어디 한번 거창하게 싸워보자구"
드디어 전쟁의 구도는 완벽하게 양분되었다. [시작] 길드와 그 동맹군들. 그리고 수많은 길드들이
연합해서 만든 [섀도우] 길드. 두 길드간의 전쟁이 불꽃을 튀기고 있을때 구석에서 몰래 웃음짓고
있는자가 있었다.
"이제, 공성은 얼마 남지 않았군. 이대로 가면 "틈" 은 반드시 생긴다. "
그자는 웃음을 흘리며 어둠속으로 숨어들었다.
♧ ♧ ♧ ♧ ♧ ♧
전쟁의 끝은 어떻게 될까. 누가 이기게 될까. 대륙은 숨죽이고 그 추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시작길드가 한 마을을 쳐서 빼앗은 뒤, 다시 시간이 지나 역습을 당해 그 마을을 점거당하고
그 마을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등. 전쟁은 이제 겉잡을 수 없을정도로 커져 있었다.
전쟁과 무관한 사람들은, 셔스나 세오 등 신들이 나서서 이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지만
인간들이 벌인 일에 대해 신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룡은 한차례 전투를 끝마친 뒤,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틈을 타 루어스 길드성으로 돌아왔다.
그때, 길드성 입구를 몰래 빠져나가고 있는 자와 눈이 마주쳤다. [시작] 길드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길드의 표식인 길드마크를 달고 있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지룡이 다가가 물었다.
"자네, 어디가는건가? 전쟁이 한참인 이 와중에... "
"지룡님..죄송합니다. 저는 더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
".... ?!"
"이길지 질지도 모르는 전쟁을 언제까지 계속할 순 없습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
"멍청한 자식!!"
지룡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고, 한차례 욕설을 들은 그자는 멍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지룡은 혀 끝이 쓰려오기 시작했다. 한차례 더 이 멍청한 자에게 욕설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이런 소모적인 행동은 자신에게 득이 되지 못한다. 지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몸을 홱 돌려
흘려가는 이야기로 말했다.
"너는, 길드를 탈퇴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 의해 축출된 것이다. 전장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자는
이제 다시 전장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지룡은 그렇게 말을 끝마친 채 길드성 안으로 들어섰다. 뒤에 남겨진 남자는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서둘러 길드성을 빠져나갔다.
지룡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자, 내정 업무를 보고 있던 부길드마스터가 가볍게 목례했다.
지룡은 피로 얼룩진 망토를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 놓은 후 부길드마스터에게 물었다.
"아까 한 녀석이 길드를 탈퇴하고 나가더군. 그런 약해빠진 녀석이 우리 길드에 있었을 줄이야. "
"... 한 녀석이라구요..?"
"그래, 우리가 4차 방어까지 성공하고 나서 우리 길드에 충성을 다하겠다며 찾아온 그녀석 있잖아. "
"...마스터.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
"아아.. 나도 알아. [섀도우] 이자식들.. 우리와 비슷한 힘을 갖췄더군. 도대체 뿔뿔이 흩어진 그들을
누가 긁어모은거지? "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장부를 좀 보시겠습니까.. "
부길드마스터는 말없이 장부를 지룡에게 건네었고, 그 장부의 내용을 무심결에 훑어보던 지룡의 눈이
찌푸려졌다. 지룡은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말도 안돼!! [시작] 길드가 이런.. 이런 조잡한 전쟁 때문에?"
"... ... 그것이 현실입니다."
부길드마스터가 건넨것은 세바스찬이 관리하는 길드원 리스트였다. 전쟁 초기에 비해 그 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지룡은 그 장부를 바닥에 내팽겨치며 소리쳤다.
"어째서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지? 길드원들이 탈퇴하는 것을!"
"... 그들은 새벽 중에 몰래 세바스찬에게 가서 탈퇴 수속을 했습니다. 저희도 알 수 없었죠. "
"그래서 손실된 전력은?"
"지난 공성전 방어때에 비하면... 대략 80 %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최근 3개월 이내로
새로 가입한 길드원이 탈퇴한 비중이 대략 90% 정도입니다. "
"쳇... 기분이 더러워졌어. [섀도우] 길드놈들을 조금 주물러주러 다녀 오겠어. 그리고 자넨-
이제 루어스성의 세바스찬 집무실에서 계속 대기하게. 어차피 공성이 코앞이다. 거기까지만 잘 버티면
돼. "
"예. "
지룡은 피에 젖은 망토를 다시 뒤집어 쓰고 전장으로 향했다. 지룡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피를 봐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시작] 길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기묘한 탈퇴 현상은, 비단 시작길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섀도우] 길드도 길드원들이 빠져나가는 사태를 겪고 있었고 두 길드의 소모전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몸을 웅크린채로 힘을 키워가고 있던 [VS] 길드는 [시작] 길드와 [섀도우] 길드에서
탈퇴해 갈 곳이 없는 자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전쟁이 싫어서 전장을 떠났던 자들은, 정룡과 신시, 그리고 길드의 간부들이 설득하는 가운데
한명 한명 [VS] 길드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정룡과 신시는 그 잘 짜여진 각본이,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적 세력과 아군 세력을 동시에 흡수하는 계획... [VS] 길드는 급격하게 그 몸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를 [시작] 길드나 [섀도우] 길드 모두 눈치 채지 못했다.
[VS] 길드의 합병 소식은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고.. 전쟁에도 가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한 중립길드로서 [VS]길드의 이미지는 굳혀지고 있었다.
지루한 소모전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계획, 그리고 별도로 움직이는 [VS] 길드.
마치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려가듯, 하나 둘 씩 주인공들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성 당일 아침이 밝았다.
각 대륙의 최강 길드를 가리는 피의 축제가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6부에서 계속 [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