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뒤척여도, 다시 잠을 청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이번에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어 봅니다.
눈(雪)
눈이 오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오밤중이었지만,
눈이 오고 있다는 것을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하아얀 첫 눈은 세상의 모든 어둠을 집어 삼킬 것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추운 것도 잠시 잊은 채
나는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봅니다.
자동차위에 내리는 눈, 지붕위에 내리는 눈
창을 넘어 내 얼굴위로 내리는 눈.
내리는 눈 하나하나에
아련한 옛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녀와 처음 만나던 그 날도
겨울의 이때쯤 이었던것 같습니다.
하얀 눈이 내리던 초겨울의 어느 날.
웬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겨우겨우 인파를 덜어내고
시내의 한 후미진 까페의 후미진 구석 자리에
우리는 마주 했습니다.
생전 처음, 그녀가 주문해 준
"핫초코" 라는 음료.
그녀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날 나는 무척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로 붐비는 시끄러운 커피숍 때문이었는지..
전화통을 붙잡고 놓질 않는 옆자리의 아저씨 때문이었는지..
처음 먹어본 핫초코가 맛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내가 핫초코를 쏟아서 그녀의 하이얀 코트를 다 배려놓아서였는지..
잘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나 봅니다.
단지,
당시엔 구질구질하고
이리저리 삐걱대던 내 첫 데이트는
지금의 나에게 여느 영화보다 더 이쁘고 환상적인
추억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당시의 나에게 그날의 매 순간은
짜증나고 무의미했던 장면들이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짜증나고 무의미했던 순간들은
나에게있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되어버렸습니다.
시간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 을
"대단한 일" 로 바꾸어 놓는 가 봅니다.
시간은 때로
"대단한 일" 을 "아무것도 아닌 일" 로
바꾸어놓기도 하고,
또 "아무것도 아닌 일" 을 "대단한 일" 로
바꾸어놓기도 합니다.
"스며오는 향기는 아련한 백매화향 ..."
ㅡㅡㅡ 히무라 劍心 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