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스케치북,
눈(雪) 위를 걷고 있었다.
눈 내리는 날씨 치고는, 제법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이내 내 몸을 움츠리게 만들고
나는 이내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을 외면하듯
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편안하고
그리고 안락할 뿐.
최근들어 나에겐 이렇게 눈을 감고있는
시간이 길어져 있었다.
눈을 감은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보았다.
눈을 감았을때처럼
아무 것도 없는 공허(無)를
기대했건만,
내 작고 힘없는 하얀 손에는
작은 물체가 하나 들려 올라왔다.
참 이쁘고 화려한 형형색색의 원색으로 이루어진
6알의 알약이 들어있는 약봉지였다.
의사선생님은
그저 단순한 항우울증 치료제라고 말씀 하셨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와 동시간대에 진료를 받는 다른 환자들은
이 비슷한 약을 2알, 많게는 4알 까지만 먹는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이야기 하기 보다는
나의 부모님(보호자)과 대화하는 시간이 더욱 길어진 의사 선생님의
태도를 바라보면 지금의 내 상태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 역시 말이다.
솔직히 나는 이 약이 무서웠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
약을 먹은 후,
속이 더부룩해지거나, 바보처럼 머리가 멍해지는
육체적 부작용은 어느정도 견딜 수 있었지만
내가 마치 새사람이 된것처럼 무언가에 막 도전하고 싶어지고
색다른 일을 경험해보고 싶어지고
하는 등의 내 정신을 조종하는 이 약의 정신적 작용은
정말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그런 느낌'
약을 복용한 이후부터, 나는 더 이상 나일 수 없었다.
"스며오는 향기는 아련한 백매화향 ..."
ㅡㅡㅡ 히무라 劍心 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