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 삼라만상처럼 펼쳐진 끝없는 "소유" 의 길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법정 스님의 말씀대로 "무소유"의 경지에 이르르는 그런 금욕의 삶을
살아야할까.
아마 내 생각에는 우리가 가장 지향해야할 삶의 지표는 "소유"를 "무소유"로
만드는 길보다,
"소유"가 올바른 "소유"가 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함이
맞을 것이다.
"소유" 란 무엇인가가 나에게 속한다는 것이지
내가 그것에 속한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소유"의 원뜻인 "어떠어떠한 것이 나의 것이 된다" 는 말을 되새겨,
소유가 "무엇인가를 꼭 가져야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것을 잃어선 안된다"
는 집착이 되어서는 절대 아니된다.
즉, 소유는 소유일뿐 그것이 집착이나 욕심이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말이 틀렸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문학의 한 종류인 수필의 특징답게
법정스님은 자신 주변과 신변잡기에서 일어나고 뉘우친 일들을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내신 것이기에
아마 불가에 몸담고 계셨던 법정스님은 자신이 갖은 모든 것들을
무(無)로 돌리는 무소유의 단계가 그에 맞는 "소유"의 단계였을 것이다.
속세에서 많은 것들을 알고 갖은 우리들까지 그 극단의 무(無)소유의 단계를 고수할 필요는
없다. 또 아마 너무나 많은 것을 갖은 우리에게 그 무소유의 단계는 이미 실천 불가능한
꿈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정말 "소유" 다워지는 옳은 "소유"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만 무소유의 가르침을 따르면 된다.
아마 법정스님이 말씀하고 싶으셨던 "무소유"도 그런 일종의 "소유"의 한 단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시인은 말하였다.
"많은 것을 알고있는 사람일 수록 더 불행해진 사람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갖고 있고,
충분히 그에따라 피곤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비록 다른사람들보다 적은 것을 갖으셨고,
속세의 사람들보다 많은 쾌락과 풍요를 누리시진 못하셨지만
결국에는 궁극의 "무소유"의 단계를 이룩하고 이세상을 떠나신 법정스님이야말로
정말 행복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 질문을 법정스님이 떠나신 3월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넌지시 던져본다.
"스며오는 향기는 아련한 백매화향 ..."
ㅡㅡㅡ 히무라 劍心 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