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조용하고 만만했던 나는 선생님들의 단골 잔심부름꾼이었다.
그래서 되도록 선생님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했다.
그날은 6월 중순 치고는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햇빛만 쨍쨍한.
더워서인지 입맛이 없어 점심을 빵으로 때우고, 남은 시간을 복도에서 서성 거리고 있는데
체육선생이랑 마주쳤다. 아, 저 인간은 힘든 심부름 많이 시키는데 재수 옴 붙었다.
밍기적거리는 게 아니었는데.
"여주야, 마침 잘 만났다. 체육창고 정리 좀 도와줄래?"
제길,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고 네, 하고 웃으며 열쇠를 받았다. 만만한게 죄지.
"인득아!"
체육선생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니, 나를 대할 때랑 목소리톤이 너무 차이나는 거 아냐?
기분이 언짢아지려하는데 시야에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제 막 복도를 돌아 나오던 그가 우리 곁으로 뛰어왔다. 복도 끝인데 용케도 발견했네.
"점심 먹었니? 안 바쁘면 와서 같이 체육 창고 정리 좀 해줄래?"
"네, 먹었어요. 물론이죠."
그가 웃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그의 대답이 불편하면서도 내심 안심됐다.
혼자 하면 오래 걸렸을 텐데 다행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애써 외면했지만 약간 설레기도 했다.
약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공간(넓은 교실이지만)에 있으면서도
그와 말을 섞어 본 적 없었을 뿐더러 인사조차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단 둘이 창고정리라니.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을까, 두근거림이 가슴에 번졌다.
내 작은 기대와 달리 체육창고로 향하는 길은 매우 어색하고 불편했다.
한참을 걷는 동안 입 한번 열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
다른 애들이랑은 잘만 이야기하면서 왜 이렇게 조용한거야?
괜히 같이 가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 쯤 창고에 다다랐다.
"열어."
그가 처음 입을 뗐다. 목소리가 쌀쌀맞은 건 기분 탓인가.
"으응."
창고문을 열자 뽀얀 먼지가 흩어졌다. 그가 손으로 흩날리는 먼지를 휘휘 저으며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뜀틀 위에 올라 앉았다. 뭐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턱을 까딱하며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공들을 가리켰다. 치워. 입모양을 읽고 잠깐 얼이 빠졌다.
뭐? 먼저 치우고 있으란 건가, 아니면 나 혼자 치우라는거야?
"야. 빨리 치워."
명령조에 내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드니 그가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마음 같아선 넌 안 치우고 뭐하냐고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이제껏 나를 죽이고 살아왔기에
그럴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널브러져 있는 공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진짜 어이가 없네. 원래 저런 성격이야?
다들 속고 있네, 속고 있어. 꿍얼거리며 한참동안 용품들을 정리하고 굽혔던 몸을 세우는데
뜀틀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턱을 괸 채 나를 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누군 허리 아프게 열심히 정리했는데….
이제껏 상냥하고 젠틀한 이미지는 뭐였냐, 이미지관리한 거냐? 지가 연예인이야 뭐야.
나한테는 왜 이미지관리 안하는건데? 그럴 가치도 없다는거냐. 화가 울컥 치밀었다.
"다 했어."
마음과 다르게 고분고분한 목소리가 나갔다. 인생...
내 말에도 그는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뭐, 뭐 어쩌라고- 왜! 왜 봐. 빨리 내려와. 점심시간 끝나겠어."
집요한 시선에 괜시리 머쓱해져 목소리를 높였다.
귀가 빨개지는 기분에 얼른 교실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어차피 이제 교실로 돌아가면 부딪힐 일 없을테니까. 쟤가 저런 성격인 거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
"너, 재밌다."
그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내가 뭘 했다고.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 그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재밌어. 얄쌍한 눈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멍청히 서서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먼지 폴폴 날리는 창고 안에서 뜬금없이 눈을 접으며 웃는 그를 보고 심장이
쿵쾅쿵쾅 자기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예뻐보였다. 웃는 모습이.
모든 게 슬로우모션으로 보일 때가 있다더니…. 예쁘게 휘어지는 그의 눈이, 호선을 그리는 입매가
천천히 내 눈에, 마음에 새겨졌다. 어처구니 없게도 반해버린거다, 그에게. 얼빠였냐,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