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누군가를 이성으로서 좋아하게 된 게 처음이었던 나는 티 내기 싫었지만
내 눈은 나도 모르게 그를 쫓고 발은 그의 시야가 닿는 사정거리 안을 맴돌았다.
늘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의 중심에 있던 그가 내 마음을 눈치채지 못 할 리 없었다.
그를 쫓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눈이 마주치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럴 때면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피하기 바쁜 건 나였다.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본 적 없던 우리사이에 접점이라곤
내 시선이 그에게 향할 때마다 맞닿는 눈맞춤이 전부였다.
'또 비가 내리네.'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된 건지 며칠내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오는 날에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면 모래가 튀어 발목을 때리곤 했는데,
그 느낌이 너무 찝찝하고 싫어서 비 오는 날은 늘 별로였다.
물과 흙내음이 섞인 비릿한 냄새도 비를 싫어하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습하고 찝찝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주번으로 문단속 하느라 하교가 늦어져 학교 안팎은 한산했다.
서둘러 돌아가야겠다 싶어 우산을 펴는 순간, 누군가 우산 속으로 몸을 숙이며 들어왔다.
"으악!"
하마터면 험한 말을 뱉을 뻔 했다. 고개를 돌리니 나를 보며 뻔뻔하게 씩 웃는 얼굴이 보였다.
"…뭐야?"
쿵쿵 거리는 심장소리를 들킬 새라 일부러 얼굴을 찡그리며 한걸음 물러섰다.
내 퉁명스런 물음에 그가 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짓곤 '없어, 우산.' 이라고 말하며
나를 내려다 보았다. 뭐야, 갑자기 웬 친한 척이야.
미심쩍은 기분에 씌워 줄 마음이 없단 뜻을 비치기 위해 우산을 휙 내 어깨에 걸쳤다.
"좁아."
그가 내 말에 잠깐 미간을 찡그리는가 싶더니 다시 유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너 방금 찡그리는 거 다 봤다, 내가.
"머리만 들어가면 돼."
뻔뻔스레 말하고는 내 우산을 휙 낚아채 자기 어깨에 걸쳤다.
그러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들어와."
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진짜 어이가 없네. 다시 우산을 뺏어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내가 더 작으니까 불가능할 것이라 합리화하며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말 잘 듣네."
그가 살풋 웃으며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의 곁에 서자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두근두근.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느닷없이 다정한 그의 태도에 심장이 또 눈치없이 나대기 시작했다.
체육창고에서 만난 이 후로 말 한마디 섞은 적 없었다. 나란히 선 적 조차.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내 반응을 확인하듯 내가 피할 때까지
빤히 바라본 것 말고는….
나란히 걷는 길이 정적 속에 영원할 것처럼 이어졌다. 그게 좋으면서도 숨이 막혔다.
이제껏 살면서 대화를 이끌어본 적이 없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게 확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만 정적을 견디기 힘들었던 건지, 힐끗 그를 보자 덤덤히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내가 물어도 되는건 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사이지? 친한 사이는 아닌 듯한데…
그저 같은 반 애? 친구? 선생셔틀을 함께 한 사이?…
"넌 이 시간까지 집에 안 가고 뭐했어? 너 일찍 나갔잖아."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하다가 제법 늦은 하교를 하는 이유가 궁금해져 물어보았다.
그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그의 곁에서 걸음을 맞추던 나도 멈추어 섰다.
"?"
갑자기 멈춰 선 그가 의아해 올려다보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너 기다렸어."
뭐? 갑작스런 그의 말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