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큭큭큭큭. "
테네즈라 불린 사내는 잠깐 웃어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 나를 알고도 찾아왔다니 세상이 멸망이라도 하지않고서야 제 정신인게냐? "
아까보단 꽤나 유쾌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궁정마법사는 웃음기 없이 대답하였다.
"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는 테네즈.
그와 그녀의 눈동자가 마주치고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궁정마법사는 갑자기 온 몸에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휘청였다.
" 바.. 방금 그것은? "
" 너의 기억을 읽었다. 뭐 보다시피 갇혀있는 신세라 할 수 있는게 이 정도 뿐이로군. "
테네즈의 말에 그녀는 매우 동요하였다.
마스터에서도 아주 높은 수준에 오른 자신이 아무것도 못하고 순간 정신지배를 당했던 것이었다.
" 역시 과거 최강의 흑마법사답군요. "
" 크크큭 칭찬인가? "
그때 궁정마법사는 무릎을 꿇고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당신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대체 그 사악한 존재가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요. "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낮은 한숨을 내뱉은 테네즈가 입을 열었다.
" 이거 좋지않은 기억을 들춰내야 하는군. "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고개를 위로 들더니 슬며시 눈을 감는 테네즈.
악의 화신이었다던 그의 이미지와 다르게,
붉은 색 머리카락이 어깨너머까지 내려오는 그는 매우 뛰어난 미모를 가진 청년의 모습이었다.
" 너가 만난 그 악령. 그러니까 그 여자의 이름은 이자벨라다. "
이자벨라라는 이름이 생소하였던 그녀는 되물었다.
"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요? "
" 아, 너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겠군.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니까. "
" 아주 오래전..? "
" 오랫동안 깊은 잠에만 빠져 무료했던 내게 즐거움을 주었으니 어디 이 정도는 선물로
줘보도록 할까? "
순간 테네즈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진한 황금빛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궁정마법사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궁정마법사는 온 몸에 오한이 드는 느낌에 눈을 떴다.
" 이 곳은..? "
고개를 돌리자 옆에는 아무것도 구속되지 않은 채 서있는 테네즈의 모습이 보였다.
" 이제 깨어났군 애송이 마법사. 여기는 나의 정신으로 구축된 세계. "
" 서..설마 저의 정신을 당신의 사념속으로 끌어들인 것입니까? "
그 말에 테네즈가 씩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 역시 마법사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군. 귀로 백번 듣는것보다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이 좋겠지.
이 기억은 내가 뮤레칸님의 종이 되었을 때, 그분께서 직접 보여주신 기억이다. "
순간 주위의 공간이 그림장을 빠르게 펼쳐 넘기듯 전환되었고,
방대한 양의 기억이 궁정마법사에게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
.
.
이자벨라.
그녀는 멘트문명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태초의 신이었다.
당시에는 빛의 대지와 어둠의 대지, 두 곳의 영역으로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던 시대였다.
평화로웠던 빛의 대지와 달리 어둠의 대지는 늘 전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결국 지배자의 자리를 놓고 세명의 신이 대치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세명이 바로 뮤레칸, 하데스, 이자벨라였던 것이었다.
대치하던 그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세력을 거느리고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특히나 뮤레칸과 이자벨라의 싸움이 매우 치열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끝날 것 같지 않던 어둠의 전쟁이 막을 내렸고 지배자의 자리에 뮤레칸이 오르게 되었다.
당시에 포로의 격으로 잡힌 이자벨라와 하데스의 처분에 대해서 의견들이 많았는데
지배자로 빠르게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한 하데스는 그의 수하가 되었고,
이자벨라는 끝까지 뮤레칸을 인정하지 않아 영원히 봉인되는 수모를 겪었다.
궁정마법사가 이 모든 기억을들 다 받아들였을즈음, 테네즈는 기억의 흐름을 거두었다.
" 자, 이제 너의 의문은 모두 풀렸겠지? "
" 이..이럴수가. "
" 나도 그 지독한 계집이 어떻게 봉인을 깨고 현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정녕 그 계집이 맞다면
우리 주인께서 현신하지않는 이상 이 세계는 멸망하고 말거야. "
그의 말에 궁정마법사는 다시 한번 주저 않았다.
범상치 않은 대단한 악령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과소평가였다.
뮤레칸과 대등한 위치에 있던 태초의 신이라니 이아라도 강림시키지 않는 한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그때 테네즈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 뭐 그렇게까지 쫄거 없어. 방법이 아예 없는건 아니니까. "
" 방법이라고요? "
그는 싱긋 웃어보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 내가 본 너의 기억으로는 그 계집의 힘이 그리 대단하지 않던데, 아마 온전히 현신하지는 못했을거야.
지금있는 그 육체에 일부 강림한 네크로맨서의 격이랄까. "
" 그렇다는 것은?! "
순간 공간이 다시 뒤틀리기 시작했고, 원래의 지하감옥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대지는 강한 파동에 의해 흔들리고, 마나가 깃든 테네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 나는 뮤레칸님의 첫번째 심복 테네즈다! 나보다 강한 자는 이 대륙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궁정마법사는 혼백이 달아날것만 같은 표정으로 주저 앉아 그저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나를 풀어주거라. 내 직접 나서서 그 계집을 심판하리라. "
콰 콰콰콰 -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주변에서 강력한 마나의 폭풍이 일어났다.
분노에 찬 외침에는 그녀로서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강대한 힘이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