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시간정도가 지나고 루체는 잠복해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슬레이터는 곧바로 고위간부를 소집해 리시나와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체는 하이드 스킬을 사용하고 최대한 기척을 죽인 뒤 교회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궁정 마법사는 입수해온 타고르 마을 교회 지도를 단상에 펼쳐보이며, 입을 열었다.
[ 루체님. 제1 궁정 마법사입니다. 제 목소리도 들리시겠죠. ]
" 그렇다. "
짧게 끊어 대답한 루체는 무심하게 타고르 마을 교회의 2층 난간을 살펴보았다.
[ 전에 알려드린대로 입구는 닫혀있기에 2층에 비밀입구를 통해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
고개를 끄덕여보인 루체는 빠른 몸놀림으로 건물 벽을 타고 2층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벽의 일부가 허물어져 드러난 틈새사이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찌르듯 엄습해왔다.
하지만, 루체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자세를 낮추고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 2층으로 들어왔다. 탐색을 시작한다. "
수련을 통해 마스터에 오르고 일정한 경지에 다다르면, 육감이 예리해져 굳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어느정도 주변 사물이나 지형에 대해 탐지가 가능하다.
이러한 감각은 특히 도적과 무도가의 클래스를 가진 사람일수록 두드러지는데,
때문에 어둠이 도사려있어도 루체가 이동하는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던 루체는 벽에 다다랐음을 깨닫고, 옆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다.
"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군. "
그말에 지도를 살펴보던 궁정마법사가 답하였다.
[ 2층 메인홀로 이어지는 계단이군요. ]
" 그렇군. 내가 감지한 것으로는 이 앞에 생명체의 반응이 있다. "
루체의 말에 전해듣던 왕실 회의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슬레이터는 궁정마법사에게 일렀다.
" 루체정도면 강한 자의 기운을 능히 감지할 수 있을터, 하벨인지 물어보시오. "
왕의 명령을 받은 그녀는 곧장 루체에게 물었다.
[ 루체님. 혹시 그 반응은 하벨님의 것일까요? ]
" 판단할 수 없다. 생명체라고 하기에 어이없을정도로 약한 반응이지만, 장난질을 해놓은 것 같군. "
[ 그 말씀은..? ]
" 이질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어 힘의 표층만 느낄수 있단 말이다. "
슬레이터의 말대로 루체정도의 실력자면 근처에서 충분히 하벨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령의 기운 탓인지 통상의 경우처럼 쉽게 탐지할 수 없었다.
" 확인하기 위해서 접근해보겠다. "
계단을 내려가기위해 몸을 옆으로 트는 순간 정체불명의 물체와 가깝게 마주쳤다.
아주 높은 수준에 오른 자신이 기척도 못느꼈다고 생각해 당황한 순간,
루체는 산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초록빛의 기괴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틀림없는 괴물이었다.
순간 루체는 순식간에 위로 떠올라 괴물의 뒤쪽으로 내려앉았고,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하단을 두번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괴물이 뒤로 돌려고 하자, 다시 한번 빠르게 움직여 괴물의 등 뒤를 점하고
그대로 단도를 찔러 박아넣었다.
그의 단도가 푸른빛으로 번쩍이는가 싶더니 몸에 큰 구멍이 파여버린채 괴물은 천천히 쓰러졌다.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완벽한 '습격' 이었다.
전투의 소리가 마법의 수정체너머로 들려오자, 왕실 회의실에 있던 일동은 당황하였다.
[ 루체님 괜찮으신가요?! ]
궁정마법사의 다급한 외침에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 잠깐 정체 불명의 것과 전투가 있었다. 상대는 쓰러진 상태고.. "
바닥에 축 널브러져있는 시체를 살펴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 사람의 형태를 한 괴물이라고밖에 할 수없는 존재로군. "
[ 조심하세요. 루체님. 이전에도 악령에 깃든 시체들이 출몰했던 곳입니다. ]
루체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몸을 일으켜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하이드를 한 상태인데도 저 괴물은 내게 접근해왔다. 더 신중히 움직여야겠군. '
마음을 다잡고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그는 마침내 2층 메인홀에 도착했다.
그 곳은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둠에 차츰 적응되었는지 어느정도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쩝 쩝 - 으적 -
무언갈 *어대는 불쾌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자세히보니 놀랍게도 녹빛의 안광을 가진 괴물들이 사람의 시체로 보이는 것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매우 기괴하며 일반 사람이 보았다면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괴물들을 넘어 메인홀 끝쪽에 1층으로 향할수 있는 복도가 보였다.
' 하벨은 여기에 없는거같고, 1층으로 가려면 저 괴물들을 지나쳐야하는데 이를 어쩐다.. '
이때 브레이슬릿 너머로 리시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체님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효과의 발동이 늦었지만, 들어가기 전 입구에 뿌려주신 성스러운 세계수의 잎사귀 덕분에 어느정도 탐지가 가능해졌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루체는 입을 열었다.
" 하벨의 위치는? "
[1층에 거대한 힘이 느껴집니다만, 다행히 그 악령의 것은 아닙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 악령은 현재 교회 내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
[ 힘의 크기로 보아 그 곳에 하벨님이 계실 확률이 높습니다. ]
그러자 느닷없이 루체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 그랬다는 거지? "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악령은 이 자리에 없었고, 하벨은 1층에 있다.
바로 그가 가장 원하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더 눈치 볼 것도 없는 것이다.
루체는 품속에 손을 집어 넣어 하벨에게 걸려고 했던 목걸이 자신의 머리위로 올려 목에 걸었다.
그 모습을 수정체를 통해 지켜보던 리시나가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 루체님 무슨?! ]
" 닥쳐 "
루체가 목걸이를 착용하자마자 주위가 빛으로 인해 밝아졌고,
인간의 살점을 먹던 그것들의 시선은 일제히 루체로 향했다.
그 누구라도 주눅이 들어버릴 상황에서 루체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아니 그것은 심지어 오만함에 더욱 가까웠다.
" 조신하게 슬금슬금 기어가는 것도 이걸로 끝이다. "
그 말을 끝으로 괴물들은 루체를 덮쳐왔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루체의 돌발행동에 왕실 내부 회의실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이보시오. 궁정마법사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요? "
아연실색한 표정의 슬레이터가 궁정마법사에게 따져물었고 그녀의 표정 역시 경악으로 물들었다.
" 도적이 저렇게 강했단 말이오..? "
수정체를 통해 보이는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빠르게 공격해오는 괴물들에게 루체는 단 일격도 허용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죽여나가기 시작했다.
" 우려하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루체가 저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단독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
사실은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루체는 마이소시아의 공식적인 범죄자였고, 당연히 신뢰할만한 자가 아니었다.
전투의 순간들을 지켜보던 슬레이터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할줄은 몰랐군. "
그러나 왕은 좌절하지 않은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실력만큼은 확실한 듯 하니, 내 더는 말은 안하겠지만 부디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하벨에게 자유를 주고 싶소. "
이번 작전을 진행하기전에 루체의 단독행동은 모두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문제는 그의 실력이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것이었는데, 지금의 전투로 모두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죽은 형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하벨에게 겨눠도, 그의 목숨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검왕, 최고의 검객이라는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악령의 속박을 끊어내려 한 것이었다.
픽 -
간결한 동작으로 루체가 뒤로 물러서자 녹빛의 안광을 내뿜는 괴물들은 하나 둘 쓰러져가기 시작했다.
지크프리트가 믿을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 저 자가 무슨 술수를 쓰는 것이오! 그저 뒤로 물러섰을뿐인데..! "
그러자 세간에 경험이 많던 궁정마법사가 대신 답하였다.
" 백스텝이군요. 최상위 마스터 도적만 사용하는 기술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매우 놀랍습니다. "
몇십이 되던 괴물들은 채 20분도 안되서 전부 쓰러졌다.
비공식이라지만, 최강의 도적이란 타이틀이 결코 무색하지 않은 전투였다.
그 때 루체의 목소리가 수정구를 통해 들려왔다.
" 별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내 행동에 대해 어느정도 수긍하는 것 같군. 아래로 내려가겠다. "
루체가 1층 메인홀로 들어섰을 때,
과연 그의 앞에 거대한 체격의 전사가 검을 잡으며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훗 마중나온건가? "
피식 웃어대며 입을 여는 루체의 말에 하벨은 대꾸하지 않았다.
전과 마찬가지로 피부는 검은색이었으며, 이마에는 여전히 붉은색의 각인이 빛나고 있었다.
루체는 지금까지 사용하던 크리샤오르를 품속에 집어넣고, 무언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 오랜만에 꺼내보는걸 "
마법주머니를 한참이나 뒤적이던 그는 거대한 붉은색의 무기를 꺼내었다.
형상이 특이하였는데, 표창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도 거대했다.
큼지막한 검날에는 휘갈기는 글씨체로 무언가 적혀있었다.
' 메카닉 유적을 끝까지 완수한 강자에게 '
' 블라인드아이즈 '
새로 꺼낸 무기를 꽉 움켜쥔 루체는 살기어린 눈빛을 담아보내며 입을 열었다.
" 복수의 시작이다. "
그렇게 루체와 하벨은 서로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