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의 블라인드아이즈가 빛을 내며 서로가 돌격하려던 그 때,
하벨이 입을 열었다.
" 크윽.. 뭐지? "
어느새 이마에 새겨졌던 붉은 문양은 한단계 희미해져 연주황빛을 내고 있었고,
퀭했던 하벨의 눈동자는 미약하게나마 본연의 빛을 내고 있었다.
악령이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루체가 차고 있던 목걸이의 탓인지 하벨은 절반쯤은 제정신을 되찾고 있었다.
" 이게 무슨.. "
그러자 맞은 편의 루체가 잠시 멈춰서곤 입을 열었다.
" 아아, 정신이라도 든건가. 나를 알아보겠어? "
그러자 여전히 하벨은 혼란스러워하며 대답했다.
" 그대는? "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게 얘기하는 루체.
" 그래, 얼마전에 네가 죽인 리체의 동생이다. "
" 아아, 리체... 크아아악! "
그 때 과거의 기억이 편린되어 그의 머릿속을 찌르듯,
하벨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잡고 고통스러워했다.
" 어차피 속죄해도 용서해줄 생각은 없어. "
싸늘하게 내뱉곤 다시금 하벨로 향하는 루체.
그리고 어느새 하벨도 자신의 검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 죽여주마 "
잠시나마 악령에 세뇌에 벗어난듯 싶었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는지 일종의 '반각성'상태에서 루체를 상대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시점으로 보면,
통상적으로 같은 수준의 도적이 전사를 이길 수 없었다.
막강한 무장을 자랑하는 전사의 방어력을 도적의 기술로는 파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사고는 할 수 있었던 하벨은 그대로 돌진했다.
어차피 같은 전사의 클래스에도 자신을 꺽을수 있는 자는 전무했다.
서로가 마주하기 직전,
루체가 사용한 무언가의 스킬에 주위는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찼다.
도적의 고유스킬인 연막을 사용한 루체는 순식간에 하벨의 등 뒤를 점하고 차분하게 말하였다.
" 너 꽤 자신감에 차있구나? "
그리고 하벨이 이어 외쳤다.
" 너같은 도적따위가 감히 나를 이길수 있을것 같으냐! "
전방으로 마스터급 전사의 기술인 메가블레이드를 사용한 하벨.
그러나 잿빛의 연기속에 몸을 감춘 루체에겐 도달하지 않았다.
그 순간,
찰나의 빠른 속도로 루체의 블라인드아이즈는 푸른 빛을 내뿜으며 하벨의 가슴에 박혔다.
픽 -
윗층의 괴물에게서 시전했던 '습격'이었지만, 하벨이 걸친 두터운 갑옷을 뚫지 못했다.
" 크하하하. 도적이여 보았느냐, 너희의 그런 얄팍한 기술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
모든 도적들이 비통할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루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기세를 이어나가 그대로 하벨에게 암살격을 시전하며 그의 무기를 찔러넣었다.
팟 - !
새빨간 빛무리가 새어나가며 스킬은 적중했으나,
그 역시 하벨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는 듯 그는 여전히 굳건히 서있었다.
" 암살격이로군. 지금껏 만나본 도적녀석들과는 수준이 다른 공격이야. "
과연 하벨의 말이 과장된 것은 아닌지 도적이 시전한 암살격치고는 매우 화려하고 강력했다.
마치 전사의 매드소울과 비교될법한 기술이었다.
루체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나지막하게 답하였다.
" 역시 암살격으로는 씨도 안먹히나, 검왕답군. "
자신의 필살기가 먹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루체는 아직 여유로웠다.
" 이봐, 검왕. 그대는 암흑투사대전이라고 알고 있는가? "
" 버러지들의 싸움말이냐? "
하벨의 대답에 루체는 비웃으며, 대답했다.
" 네 놈이 그렇게 무시하는 그 대회말이야. 온갖 녀석들이 가득하다. 금지된 기술을 쓰는가하면,
그냥 평범한 반칙은 아무것도 아닌 수준으로 말이야. "
잠시 블라인드아이즈를 내려놓고 머리를 쓸어넘겨보이던 루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나는 그 지옥같은 전투장에서 너같은 놈들을 질리도록 만나봤지. "
더는 듣기 싫은 듯, 자신의 거대한 검으로 자세는 다잡는 하벨을 마주하고, 루체는 입을 열었다.
" 보여주마. 도적의 정점이 무엇인지. "
" 말이 많군! 죽어라 도적! "
그말과 함께 돌진 스킬을 사용하며, 루체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가는 하벨.
그러나 그 순간,
다시 한번 루체는 연막 스킬을 사용했고, 분개한 하벨은 크게 외쳤다.
" 쥐같은 녀석. 어디있는가! "
그러자 아까와는 다르게 즉시 하벨의 앞에 나타난 루체는 무언가 중얼거리며 하벨에게 손을 뻗었다.
" 적갑옷 해체 "
무언가 이상한 느낌과 함께 하벨은 자신의 무장이 해체되는 것을 느꼈다.
" 무슨..? "
그 때, 루체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무장 해체 후 습격 "
그 순간 거대한 두개의 검격이 하벨에게 향했고,
강력한 방어력과 막대한 체력을 지닌 하벨이 순식간에 피를 내뿜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 커헉.. 대체 어떻게? "
믿을수 없다는 듯 하벨의 눈동자는 루체에게 향했고, 그는 천천히 답하였다.
" 이게 도적의 궁극적인 스킬 '기습'이다. "
어둠속에 안광을 드리운 채 웃는 루체의 모습은 도적 그 자체였다.
" 이렇게 사용하면 크래셔따위보다 훨씬 강력한 데미지를 줄 수 있지. "
그동안 강력함의 대명사로서 자부하던 전사의 완벽한 패배였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건지, 루체는 무기를 내려놓고 브레이슬릿에 대고 말하였다.
" 미안하게 됬지만, 너희와의 약속은 지키지못했다. "
수정체를 통해 이 모든 전투를 지켜보던 왕실은 경악으로 물들었고,
이내 슬레이터가 장중의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 그를 해방시켜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것이오. 수고했소 루체. ]
그 말을 끝으로 희미한 미소와 함께 몸을 돌리려던 찰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크흐흐흐흐. 응큼한 도적녀석이 제법이로구나. "
도저히 산 자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음성에 루체는 순식간에 뒤돌아 전투자세를 취하였다.
수정체에 비친 그것의 모습을 확인한 궁정마법사는 탄식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 타고르교회의 악령..! ]
그 말에 루체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지었다.
" 저게 그 악령.. "
악령이 손을 뻗어 힘을 가했지만, 루체의 목걸이가 빛나며 사악한 힘에 저항하는 듯 했다.
" 으흐흐흐. 천박한 신계의 계집의 물건이로군. "
그러자 악령은 하벨에게 손을 뻗어 그를 조종하는 듯 하였다.
하벨의 이마는 순식간에 선명한 붉은 빛의 문양이 자리했고, 천천히 루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미 전투에서 체력을 많이 소진한 루체에게 희망은 없었다.
[ 루체님! ]
수정체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궁정마법사의 외침을 무시하고,
루체는 씁쓸하게 웃어보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 죽는 모습따윈 보여주기 싫은거다. 다만, 보여다오. 오늘 있었던 전투를 모든 도적들에게. "
그 말을 끝으로 루체는 팔찌를 끊어내었고, 왕실과의 통신은 그 자리에서 끊겼다.
이 날 왕실소집회의에 참석했던 도적 길드의 대표를 통해,
루체와 하벨의 전투는 모든 도적들의 가슴속에 새겨지게 되었다.
그 이후로 어디에서든 전사들이 도적을 괄시하는 행태는 사라지게 되었다.
하벨과 루체의 전투가 있고 2주 후,
궁정마법사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들고, 왕실지하감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그녀는,
여전히 커다란 사슬에 봉인되어 있는 사내를 보고 낮게 읊조렸다.
" 약속대로 그대를 봉인에서 풀어드립니다. "
그리고 황금빛의 강렬한 눈빛을 가진 사내는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사내의 기운에 압도된 궁정마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 테네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