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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1993] - 도자기
801 2025.01.16. 11:30

1993. 01 - 도자기, 불 속에서 빚어진 관계

eoin Playlist
Sea, Swallow Me - Cocteau Twins & Harold Budd







깊은 밤, 도예가의 가마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숨결.

불길이 어둠을 가르고 피어오를 때마다 검은 하늘이 심장처럼 뛴다.
아마도 1300도 이상, 숫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온도가 있다. 도예가의 눈동자에 붉은 불길이 춤춘다.

삶이란 이런 것이었나.
누군가 말했다. 관계에는 적당한 온도가 필요하다고.

처음에는 그 말이 진리처럼 들렸다.
상처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약속이 달콤했으니까.

하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가슴 한편이 무거워진다.
살아있다는 건 불가피한 상처를 의미하는 걸까. 우리는 왜 이토록 서로의 온기를 찾아 헤매는 걸까.


-


오래된 도자기가 손바닥 위에서 빛을 낸다.
푸른 유약 아래로 미세한 균열이 별자리를 그린다. 도예가의 목소리가 깊다.

"실패가 아닙니다. 불길이 새긴 생명이죠."

그 말에 가슴이 흔들린다.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깊이 빛나는 것들이 있다.

불길만이 도자기의 심장을 깨운다.
고온의 뜨거운 숨결이 유약을 녹이고, 그 속에서 비로소 고유한 빛이 피어난다.

낮은 온도는 허상만을 만든다. 시간이 흐르면 바스러지는 가짜 도자기.
진실은 불꽃 속에서만 태어난다.

한때는 불꽃처럼 사랑했다.
서로의 온기에 녹아내리던 순간들. 영원할 것만 같던 불길도 꺼졌다.

잿더미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다. 차갑지가 않다.
무너진 폐허 속에서도 따스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식어가는 도자기의 심장처럼.


-


사람들은 말한다.
진정한 관계란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불길에 데었던 기억을 잊으라고.

그들의 말을 따랐다. 안전한 거리, 미지근한 온도. 상처받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왜 몰랐는가. 심장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을.

불은 파괴하면서 동시에 창조한다.
무언가를 태워버리면서도,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관계는 어떠한가. 뜨거운 불길은 기존의 형태를 무너뜨리지만,
그 속에서 전에 없던 모습이 태어난다. 불에 데어본 적 없는 영혼은 단단해질 수 없다.

우리는 늘 안전한 쪽을 선택한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계산된 말을 주고받는다.

깊이 들어가면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진정한 두려움은 다른 곳에 있다.
평생 미지근한 물속에서 살다가, 문득 깨닫는 순간. 단 한 번도 진짜로 살아내지 못했다는 사실.

불꽃은 순간적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강렬함이 영원을 만든다.

도자기는 천 년의 시간을 견딘다. 영원의 불길이 남긴 흔적들.
상처가 아닌. 삶의 증거다. 우리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뜨겁게 살아냈다는 증거.


-


도자기를 만지다 보면 알 수 있다.
차가운 표면 아래로 전해지는 미세한 온기를.

완벽한 도자기는 없다.
모든 도자기는 불 속에서 조금씩 뒤틀리고, 갈라지고, 변형된다.

하지만 그런 흠집들이 도자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불꽃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망설이는 순간 식어버린다.

한때는 그 불길이 두려웠다. 뜨거워서, 아플까봐서.

지금은 안다.
진짜 아픈 건 불꽃을 피하고 산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도예가의 가마 앞에 서면 온몸이 떨린다.
이제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시간은 흐른다. 불꽃은 식어간다.
하지만 진정한 열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도자기 속에는 여전히 그날의 불꽃이 살아있다.

관계도 그렇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내 안에는 그 뜨거웠던 순간들이 숨 쉬고 있다.


-


도예가의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보았다.

관계란 도자기와 같다.
불꽃 속에서 단단해지고, 균열 속에서 아름다워진다.

완벽한 형태란 없다. 존재는 오직 진실뿐.
뜨겁게 살아갈 것인가, 차디찬 한기 속에 살아갈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나는 불꽃을 선택한다.
깊은 밤, 도자기를 빚어내는 저 도예가처럼.

그 뜨거운 마음으로,
오늘 다시금 불을 지핀다.

불꽃이 스러져도 그 흔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살아있었다는 증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