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중인. 01 - 매일 아침, 검을 든다
견습기사 로이드의 기록
1부. 영웅의 그림자
2부.
3부.
낡은 서재 구석에서 무심코 건드린 책 한 권이 먼지를 일으켰다.
'전설의 기사들'.
빛바랜 표지를 쓸어내리자 어릴 적 품었던 꿈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내렸다.
열한 살 겨울밤, 이 이야기의 문장 하나하나가 내 몸을 달구던 시절이 있었다.
-
루어스 기사단의 훈련장은 새벽안개로 가득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쇠와 가죽이 부딪히는 소리, 거친 숨소리들.
스물 남짓한 견습기사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로이드. 그 검이 너보다 더 무게를 알고 있구나."
지그프리트 단장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안개 자락에서 그의 모습이 모호하게 떠올랐다.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평범했다.
빛나는 갑주 대신 닳은 가죽 갑옷을 걸치고, 금장도 보석도 없는 검을 들고 있었다.
"다시."
단순한 한 마디.
서사시 속 기사들은 천둥 같은 목소리로 병사들을 이끌었다는데.
천둥은커녕 메아리도 없었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움직임은 느렸다.
하지만 견습기사 누구도 그 검을 막을 수 없었다.
먼지 한 톨 없이 맑은 하늘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동작.
"보이나?"
동료 견습기사 마르크가 옆에서 속삭였다.
"단장님은 전설의 기사 둘라코스의 제자였다면서."
"거짓말."
"진짜야. 하지만 둘라코스의 화려한 검술은 하나도 못 배웠대.
그냥 기본동작만 수천 번 반복했다지."
훈련이 끝나고 검을 집어넣으려다 엄지를 베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니 쓴웃음이 났다. 전설 속 기사들은 검에 다치지 않았을 텐데.
"웃을 일은 아니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지그프리트가 내 어깨너머로 피 흐르는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드러난 건, 질책도 조롱도 아닌, 어떤 이해였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루딘왕의 서사시를 읽으며 불타올랐고,
현실에 부딪혀 실망했지." 그가 붕대를 내밀었다.
"하지만 영웅이란 건... 책 속에만 있는 거란다."
날이 갈수록 의문이 깊어졌다.
왜 이토록 평범한 사람이 기사단을 이끄는지.
옛 영웅들의 후예가 아닌, 그저 반복만을 아는 사내가.
그날 밤이 오기 전까지는.
-
폭풍우가 루어스를 덮쳤다.
성벽을 순찰하는 우리의 망토가 빗물을 먹고 무거웠다.
횃불도 제대로 켜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지그프리트의 창백한 얼굴만이 번개에 일렁였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평소였다면 그의 대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성벽 아래서 들린 예리한 비명이 우리의 대화를 잘랐다.
검은 형체들이 번개와 함께 드러났다.
성벽을 타고 오르는 다섯... 아니, 일곱 명의 그림자들.
번뜩이는 단검과 갈고리들. 나는 얼어붙었다.
허풍 가득한 바드들이 노래하던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그프리트의 반응은 달랐다.
그의 검이 뽑히는 소리는 천둥소리에 묻혔지만,
움직임만은 또렷했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동작이었다.
"신호를 울려라! 당장!"
그의 외침에 정신이 들었다.
종루로 달리는 동안에도 귓가에는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화려하지 않았다. 그저 정확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한 치의 낭비도, 과장도 없는 움직임.
검은 그림자 하나가 쓰러졌다.
이어 또 하나가.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보였다.
수천 번의 반복이 만들어낸 완벽한 균형. 이것이 진짜 기사의 검이었다.
경종이 울리자 곧 수비대의 발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조차 지그프리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빗물로 미끄러운 성벽에서, 세 명의 자객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의 낡은 가죽 갑옷에는 이미 붉은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쓰러지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
며칠 뒤, 부상병실에서 깨어난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전설의 기사도 아니시면서..."
"난 전설의 기사가 아니야." 그가 작게 웃었다.
"그저... 내가 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지금도 무섭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
나는 일전의 '전설의 기사들'을 다시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는 공책처럼 하얗게 비어있었다. 알 것 같았다.
진정한 영웅의 이야기는,
화려한 서사시가 아닌 저 빈 페이지에 쓰여야 한다는 것을.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이들의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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