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허공에 공을 던져본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우스운 분장과 함께
멀리서 보면 희극인듯,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절망 뿐인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나는 오늘도 새빨간 색으로 물든 공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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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소시아 곳곳에서의 퀘스트 의뢰가 담긴 게시판 앞에 한 사내가 서있다.
'거대한 몬스터를 토벌해주세요.'
'세력길드와 맞서 싸울 용병을 구합니다.'
'메데니아 대륙을 함께 탐험할 그룹원을 모집합니다.'
대부분이 굉장히 모험적이고 흥미를 불러 일으킬만한 내용들의 의뢰였다.
그러나 앞에 서있는 흑의의 사내는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빠르게 읽고 넘길 뿐이었다.
그러던 중, 자세한 내용도 없이 그저 한 문장만 나지막하게 적혀있는 곳에 시선이 닿는다.
'예쁜 목걸이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우악스러운 내용들 사이에 금방이라도 구겨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작은 의뢰는
의미없는 토벌과 모험에 지쳐있던 사내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광대.
그것도 아주 화려한 색조의 화장과 의상으로 치장한 우스꽝스러운.
소문을 듣자하니 과거에 큰 죄라도 저질렀는지,
루어스 왕실에서 온 종일 붉은 공을 던지는 곡예를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 당신이 조커입니까? "
사내의 물음에 광대는 던져내었던 공을 거두고 그의 앞에 섰다.
잠시간 그를 응시하더니 희한한 동작으로 턴을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 뭐야, 이 광대. '
우스꽝스러운 춤을 마친 광대는 주먹을 쥔 채 사내 앞에 서서 흔들어보았다.
펑 - !
그리고 주먹을 펴자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들려있었다.
" 저를 찾아오신 손님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
피식 -
별거아닌 재롱에 웃음이 새어나와 버렸다.
경계심이 한껏 풀어진 표정으로 흑의의 사내는 입을 열었다.
" 의뢰를 도와 드리려고 왔습니다. "
그러자 광대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화답하였다.
" 잘 오셨습니다. 용사님! "
내용을 듣고 보니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죽음의 마을과 카스마늄 광산의 몬스터를 처치하고 재료를 얻는 것이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
기대에 찬 조커의 물음에 흑의의 사내는 대답하지 않은 채 광대를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미없는 단순한 의뢰 따위에는 신물이 났으니까.
" 혹시 목걸이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
그러자 광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화려한 색채로 어우러진 얼굴과 대비되는 쓸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서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전보다 무거워진 목소리로 광대는 입을 열었다.
" 밀레스 마을 주점의 춤추는 라나를 만나 뵙고 오시겠습니까? "
밀레스 주점의 무희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항상 붉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인.
한낱 광대인 그와 무슨 사연이 있을까로 이어진 생각의 연속과 함께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밀레스 주점 앞까지 도달하였다.
생기 없는 꽃.
선명한 색채를 품었으나, 말라 비틀어져 희미한 향기만 남아버린.
그녀를 처음 본 그의 감상이었다.
수려한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지만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는, 마치 서있는 채 죽은 사람인 듯 싶었다.
" 당신도 저 여인에게 관심이 있수? "
초라한 술상에 홀로 앉아있던 초로의 노인이 껄껄거리며 말을 건네왔다.
" 포기하는게 좋을게야, 아름다운 탓에 많은 젊은이들이 껄떡대곤 하지만, "
술로 가득찬 잔을 비워낸 후 노인은 말을 이었다.
" 말을 걸어도, 선물을 줘도, 뭘해도 대답도 없이 같은 표정으로 그저 춤만 추고 있을 뿐이니까. "
그녀를 만나고 조커에게 돌아온 흑의의 사내는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알고 싶다고 들춰낼 수 없었던 것이다.
" 죽음의 마을에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
짧막한 말만 남기고, 사내는 곧장 마인마을로 향했다.
좀비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이미 5써클에 올라선 무도가였으니까.
간결하지만 힘이 실린 동작으로 내지른 발차기에 좀비들은 무참히 쓰러져갔다.
" 빠르게 다녀오셨네요. "
전보다 한결 밝아진 그의 표정에 흑의의 사내는 안도했다.
" 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지도 몰라요. 드라코는 광산의 주인이자 강력한 몬스터입니다. "
그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다.
5써클의 파티가 들어서야 겨우 토벌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한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그저 광대일뿐인 자가 왜 이렇게 잘알고 있는거지?
마치 과거에 상대해본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 저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
호기롭게 조커에게 내뱉었던 것과 달리, 드라코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혹독하게 훈련하며 배워둔 '금강불괴'와 '반탄신공'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또 다시 등장한 드라코와 졸개들을 보며 사내는 마음을 다잡았다.
' 이걸로 네마리의 비늘을 얻었으니, 이제 남은건 저 놈 뿐인가. '
그렇게 경신공으로 다시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 큭! "
방금 전 있었던 전투에서 오크 병사에게 타격당한 여파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리 금강불괴가 있다 한들, 드라코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룹따위 필요없이 항상 혼자서 해낸다는 그의 아집이 이런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드라코와 그의 졸개들이 눈앞까지 다가온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한 남자가 매서운 발차기로 졸개들을 날려버렸다.
그가 일전에 사용한 선풍각과 비슷해보였지만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 당신은? "
" 용사님, 고전하고 계셨군요. "
비록 겉모습은 달랐지만 낯익은 목소리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조커씨? "
분장을 지우고 모험가의 행색을 한 그는 더이상 한낱 광대가 아니었다.
언뜻보아도 탄탄한 몸과 수많은 흉터 자국은 그가 싸우는 전사임을 대변하고 있었다.
" 한번씩은 전하께 허락을 받아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조커는 주먹을 쥐어보이며, 전투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 오늘 나오기를 잘한 것 같군요. "
그렇게 다시 전투는 시작되었다.
조커가 합세한 탓인지 어렵지 않게 드라코를 처치할 수 있었다.
싸우는 도중에도 그가 보여준 기술과 기운에 흑의의 사내는 확신했다.
' 이 자는 나조차는 비교도 할 수도 없을만큼 높은 경지에 있는 무도가다. '
이내 타격을 입은 드라코가 쓰러지는가 싶더니, 마지막 힘을 다해 브레스를 발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장 흑의의 사내에게로 매서운 기세로 향하였다.
" 이런, 위험합니다! "
본능적으로 내던진 몸놀림은 자신의 의뢰를 도와주고 있는 사내를 지키는 선택이었다.
대신 맞은 브레스에 조커는 나뒹굴며 쓰러졌고, 힘을 소진한 드라코 역시 쓰러졌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조커를 등에 업은 채, 치료를 위해 흑의의 사내는 터질것만 같은 가쁜 숨을 참아가며 뛰고 있었다.
그때 조커가 간신히 입을 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쿨럭, 용사님.. 천천히 들어주십시요. 사실 저는, "
어려서부터 몸이 날래고, 주먹질 하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한 노인이 그를 제자로 삼아 기술들을 전수해주었다.
어렵지않게 5써클에 경지에 달한 남자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반면,
노인의 가르침 탓인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마을로 가끔 내려오는 몬스터를 퇴치하는 일.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주정꾼을 제압하는 일.
그 외에도 사소한 일에도 발벗고 나서서 사람들을 도와주곤 했다.
천부적인 재능탓인지 혹은 그동안의 수련이 빛을 발하는 것인지,
남자는 어렵지 않게 승급시험을 통과했고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다.
세상에 헛되이 이름 나는 법은 없다.
남자의 인품과 실력은 곧장 입소문을 타서 마이소시아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왕은 그를 루어스 성으로 초대하여 지내게 하였다.
그곳에서도 왕의 근심거리였던 몇가지 일을 손쉽게 처리해내자, 그는 금방 왕의 신임을 샀다.
남자는 얼마지나지 않아 기사로서 더 바랄 것도 없는 위치인 최고기사라는 작위를 수여받는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옳곧고 한결같은 그의 인품이 크게 작용했다.
고작 스무살이란 나이로 마스터에 올라서고 명예로운 자리까지 얻은 것이다.
그러나 늘 좋게만 풀리던 그의 운도 거기까지였다.
어느 날 대규모 몬스터 토벌에 나섰던 그가,
배후를 알 수 없는 세력들에 의해 납치되어 세뇌가 된 채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마을 곳곳이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저지하기위해 많은 경비병들이 동원되었지만, 흑마법의 힘으로 더욱 강력해진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흉포한 채로 자신이 살던 집까지 이르러 그의 아내를 마주하고 나서야 멈출수 있었다.
그걸로 무서울 정도로 파괴를 이어가던 그의 행보도 끝이었다.
본래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나,
그간 그가 보여준 선행과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죽음은 간신히 면할수 있었다.
그러나 평생 루어스 왕성에서 떠날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최고기사라는 직위도 박탈당하였다.
비극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내를 마주하여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의 아내는 그날로 웃음과 기억을 잃어버렸다.
수많은 죄책감에 몇년을 폐인처럼 지내던 그가 광대를 자처한 것은 그리 오래지나지는 않은 일이었다.
" 이것이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이고 밀레스 주점의 라나, 그녀가 제 아내입니다. 쿨럭! "
엄청난 것을 들어버렸지만, 우선 조커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사내는 애써 그를 말렸다.
" 곧 교회에 도착합니다. 그때까지 말을 아끼시고 안정을 취하세요. "
" 아닙니다. 반드시 용사님께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전에 목걸이를 왜 만들어야하냐고 물으셨죠? "
연신 기침을 해대는 와중에도 조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사라져버린 그녀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습니다만, 전부 소용이 없더군요.
근데, 딱 한번 그녀가 잠깐이지만 저를 알아봐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그녀를
찾아간 날이었죠. 쿨럭! 그녀는 화려한 색깔을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그날로 저는 광대가 되어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때마다 그녀 앞에 서서 재롱을 부리며 노력했습니다. 기억과 웃음을 되찾아주기 위해서요. "
연신 말을 이어나가던 조커가 잠시 침묵하고, 등 뒤에서는 따뜻한 축축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그 목걸이는 제가 그녀에게 청혼할 때 주었던 목걸이입니다. 보면 혹시라도 저를 기억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
기침과 흐느낌이 뒤섞여 들려오는 목소리는 서글픔을 품은 채 작아져가기 시작했다.
" 부탁드립니다. 목걸이를 만들수 있게 도와주세요. "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성직자의 치료를 받은 조커는 의식을 차릴수 있을만큼 회복하였으나, 더이상 예전처럼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무도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을 잃은 그는 개의치 않는 듯 웃음기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 공만 던질수 있다면, 절뚝거리는 정도야 괜찮습니다. "
그가 치료하는 와중에 수오미 보석상에 재료를 전달하고 목걸이를 수령할 수 있었다.
새빨갛게 빛나는 보석이 달려있는 그 목걸이는 밀레스 마을 주점의 무희, 라나와 너무나도 잘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느정도 몸을 회복한 조커와 같이 밀레스 마을로 향하게 되었다.
늘 그랬듯 형형색색의 분장을 하고, 광대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던진 붉은 공들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시선을 끌었고, 춤을 추던 그녀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서게 된 한쌍의 부부.
과거에는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러나 지금, 그녀는 생기없는 표정으로 얕은 호기심만을 보일뿐이다.
하지만 오늘을 위해서 준비하지 않았던가.
조커는 자신의 작은 공연을 마무리하듯, 우스꽝스러운 턴을 해보이며 전처럼 다시 한번 주먹을 쥐어 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폭죽과 같은 가벼운 경쾌함은 없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펼친 손에는 아름다운 붉은색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사랑의 언약을 맺었던 그날처럼, 소중한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
" 다시 한번 받아주겠어. 라나? "
그러자 표정없던 그녀의 눈동자가 일순간 커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서서히 입을 열었다.
" 조커, 당신.. "
아아, 얼마나 고대했던 순간인가.
특별할 것도 없는 단순한 이름,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의 입으로부터 사무치게 듣고 싶었다.
그녀가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대고,
그 순간 무어라 할거 없이 두사람은 서로를 꼭 안아주었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흐르기 시작한다.
모진 세월을 맞아가며, 담아둔 감정의 둑이 터지며 북받쳐 오른다.
그 와중에 간절히 기도한다.
지금, 그토록 기다렸던 이 순간이, 시간이 고장난 듯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그 바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 으으.. 꺄악! "
라나는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더니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다시 기억을 잃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춤을 추었던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끝을 알 수 없는 메마른 춤사위를 시작하였다.
일주일이 지났을까.
루어스 왕실에서 조커 앞에 다시 마주하였다.
" 용사님, 고생하셨습니다. 의뢰를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흑의의 사내는 멋쩍은듯 머리를 긁적였다.
" 그러고보니, 용사님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
그러자 사내는 자세를 다시 잡고 정식으로 인사하듯 말을 건넸다.
" 저도 신세를 졌습니다. 제 이름은 지향이라고 합니다. "
" 지향.. 좋은 이름이군요. "
조커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곤 검은색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펜을 꺼내들어 정성스럽게 무언갈 적기 시작했다.
" 가져가세요. "
그에게 받아든 것은 발톱이 달린 건틀렛이었다.
" 조커씨, 이것은? "
" 용의발톱이라고 합니다. 제가 쓰던 것인데, 이제는 지향님에게 더 어울릴 물건이죠. "
자세히 보니 휘날리는 글씨체로 남긴 조커의 메세지가 보였다.
' 꿈을 안고 앞으로 나아갈 무도가 지향에게 '
그렇게 무언의 악수와 함께 두 사내는 각자의 길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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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허공에 공을 던져본다.
우스울지언정, 희망이라는 다색의 색채를 담은 분장과 함께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녀에게 반드시 웃음을 되찾아 주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나는 오늘도 새빨간 공에 기적을 바라며 공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