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중인. 02 - 모디아의 사랑
달빛 머금은 꽃을 너에게
1부. 봄날의 첫 약속
2부.
달빛이 유난히 고왔던 그날 밤,
제 방 창문을 두드린 건 까마귀였어요.
새카만 날개 끝에 은빛 편지를 물고 있었죠.
이상하게도 그 까마귀의 눈동자는 사람처럼 깊었어요.
마치 오래전 제가 알던 누군가의 눈빛같이...
편지를 열어보니 낯선 글씨체로 적힌 문장이 있었어요.
'아칸더스의 빛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날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면, 보름달이 뜨는 밤 우드랜드의 경계에서 만나요.'
무엇인지 모를 편지의 잉크는 달빛에 비추면 희미하게 빛났어요.
창가에 서서 달빛을 바라보다 문득 떠올랐어요.
그때 저는 열여섯이었고, 봄은 유난히 길었죠.
-
밀레스 마을의 작은 광장,
돌계단 끝자락의 제 자리는 늘 장미 향기로 가득했어요.
매일 아침 꽃을 다듬으며 기다렸거든요.
전설 속 꽃, 아칸더스가 제 화단에 피어나기를.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서,
아칸더스는 달빛처럼 영롱한 빛을 내는 꽃이었어요.
보는 이의 마음을 비추고, 진실된 소원을 이뤄준다는...
어린 제게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죠. 그날까지는요.
"매일 이렇게 꽃을 기다리다간,
네 인생의 봄도 그냥 지나갈 거야."
처음 모디아가 건넨 말은 퉁명스러웠어요.
하지만 그의 까만 눈동자는 웃고 있었죠.
새벽이슬을 머금은 달맞이꽃처럼 맑은 눈동자였어요.
"죄송해요..."
"왜 자꾸 죄송하다고 해? 우리 동갑이잖아.
그리고 네 장미들, 정말 예뻐."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을 때,
봄 햇살이 그의 갈색 머리카락을 비추고 있었어요.
그 순간부터 제 마음속에 뭔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어요.
-
그날부터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됐어요.
모디아는 매일 제 옆자리를 차지했고,
저는 이 아이의 존재가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수줍음을 머금었죠.
그는 늘 책 한 권을 들고 와서는,
저에게 이상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어요.
"옛날에는 말이야, 이 땅에 신비로운 마법이 가득했대.
사람들의 마음도 지금보다 훨씬 맑고 순수했다고 해."
모디아의 목소리에는 늘 어떤 그리움이 묻어있었어요.
자신이 그 시대를 직접 보고 온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했죠.
어느 날 모디아가 물었어요.
"정말로 아칸더스를 보고 싶어?"
"네... 아니, 응."
처음으로 편하게 답했더니,
모디아의 눈이 반짝였어요. 별을 담은 것처럼.
"우드랜드에 있대.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야.
달빛을 머금은 꽃, 보는 사람의 마음을 비춘다는... 그리고 말이야,
그 꽃을 찾는 사람의 진심도 알 수 있다고 해."
"우드랜드요? 거긴 너무 위험하다고..."
"함께 가자."
망설임 없이 던진 그 말에 가슴이 떨렸어요.
우드랜드는 어둠의 숲이라고들 했어요. 마물들이 사는 곳이라고도 하고,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이야기도 많았죠.
하지만 모디아의 눈빛은 샛별처럼 선명했어요.
"내일 새벽에 출발하자. 아무도 모르게."
-
그렇게 우리는 새벽을 틈타 숲으로 향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과 설렘 가득한 마음을 안고서.
모디아는 책에서 읽었다며 여러 가지 준비물을 챙겼어요.
달빛을 담은 유리병, 은실로 짠 끈,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나침반까지.
"이쪽이야."
모디아가 앞장섰어요.
나무들이 점점 우거지고, 발밑의 이끼는 깊어졌죠.
시간이 흐를수록 숲은 더욱 깊어만 갔어요.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빛도 달라졌어요.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 같았죠.
"저기 봐, 로즈마리."
모디아가 가리킨 곳에는 이상한 꽃들이 피어있었어요.
푸른빛을 내는 작은 꽃들이었죠.
"우드랜드의 첫 번째 신비라고 해.
달빛등불꽃... 길을 잃은 사람들을 도와준대."
그때였어요. 갑작스러운 안개가 우리를 덮쳤어요.
순식간에 앞이 보이지 않았죠.
"로즈마리! 내 손을 잡아!"
모디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손이 닿지 않았어요.
안갯속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고...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죠.
... 다시 눈을 떴을 땐 마을 광장이었어요.
모디아도, 안개도 없었죠. 단지 제 손에 쥐어진 편지 한 장...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하지만 약속하죠.
진정한 아칸더스를 당신에게 선물하겠습니다. - 방랑하는 모험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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