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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1993] - 흠이 아닌 존재의 내러티브
1045 2025.02.12. 20:29

1993. 07 - 흠이 아닌 존재의 내러티브
빈티지 낭만

eoin Playlist
1993 - 나얼







오래된 가게의 공기는 다르다.
진열장 유리가 시간을 굴절시킨다.

먼지는 빛을 부수고, 그림자는 물건의 윤곽을 흐린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른 속도로 존재한다.


-


칠순의 골동품상이 실내를 서성인다.

때로는 물건을 만지고, 때로는 그저 바라본다.
마치 오래된 동물원의 사육사처럼.

"여기 있는 건 전부 살아있는 것들이에요."

말을 마친 그가 책장 깊숙한 곳으로 손을 뻗는다.
시간의 지층을 더듬듯, 천천히.

가게 안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
천장까지 쌓인 물건들은 자신만의 규칙으로 늙어간다.

철제는 녹을 품고, 나무는 휘어지고, 유리는 흐려진다.
하지만 그것은 노화가 아니다.

파티나라고 부른다.
시간이 새기는 예술. 존재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

1층 진열장의 70년대 세이코 시계. 6시 15분에 멈춘 시간.
누군가의 퇴근 시간이었을까, 혹은 새벽의 출근 준비 시간이었을까.

시계공은 수리를 거절했다.

"고장 난 거예요?"
사흘 전의 대화가 되살아난다.

"아니요. 멈춘 거죠."

"그럼 고쳐야..."

"그대로 두는 겁니다."
시계공의 손이 유리면을 쓸었다.

"이 시계는 이미 완성됐어요."

잠깐의 침묵.

"완성이라뇨?"

"보세요. 이 흐린 유리도, 닳은 숫자들도, 멈춘 시간도."

노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시계는 시간만 재는 게 아니에요. 기억도 잽니다."


-


진열장 깊숙이 독일제 카메라가 놓여있다.
1940년대 라이카. 전쟁 속 풍경을 찍었을지도 모른다.

렌즈의 지문, 무거워진 셔터, 벗겨진 가죽. 결함이 아닌 흔적들.
수천 개의 시선이 덧입혀진 자리. 보이지 않는 풍경들의 집적소.

책장에는 주인모를 만년필이 잠들어있다.
1930년대 파카. 금속에는 녹이 피었고 펜촉은 굽었다.

잉크는 마른 지 오래. 일제 강점기의 편지들을 썼을까.
혹은 해방 후의 설렘을. 쓰이지 못한 문장들이 여전히 펜촉 끝에서 기다린다.

오래된 이발소 의자가 구석에 서있다. 가죽은 닳았고 등받이는 휘었다.
스프링은 느슨해졌다. 수천 명의 무게가 만든 자국들.

더 이상 앉을 수는 없어도, 그 모든 시간의 무게를 기억한다.
머리카락이 떨어지던 소리, 면도기 지나가는 소리, 수건 개키는 소리까지.


-


"빈티지와 엔틱은 달라요."
주인장이 축음기를 꺼내든다.

"빈티지는 시간이 만든 거고."
레코드판을 올려놓는다.

"엔틱은 시간을 이긴 거죠."
바늘이 내려앉는다.

잡음 섞인 재즈가 울린다. 긁힌 홈은 새로운 리듬이 되었다.
백 년 전 녹음된 음악에 시간의 결이 더해졌다.

온전한 소리가 아니어서 더 아름답다.
트럼펫 소리가 공기를 떨군다.

일제의 책장이 벽을 지탱한다. 선반은 휘었고 나사는 녹슬었다.
등받이는 갈라졌다. 식민지 시대가 나무 틈으로 스며있다.
아편의 냄새, 징용의 한숨, 해방의 함성까지. 역사가 된 상처들.

구석의 장식장 안에는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영국제 도자기, 러시아 은제품, 중국 청화백자들. 하나같이 흠집이 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딘 대가로 얻은 존재감.

"보세요."
주인장이 1950년대 거울을 들어 올린다.

"흠집 없는 거울은 그저 거울일 뿐이에요."
은박이 벗겨진 자리가 불규칙하게 빛난다.

"이건 시간의 초상이죠."

전쟁 직후의 얼굴들을 비췄을 거울.
피난민의 절망, 귀환자의 기쁨, 재건의 희망을 담았을 표면.


-


오래된 것들은 완고하다.

수리를 거부하고
닦아내도 다시 때가 타고
광을 내도 빛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그렇게 완성되어 간다.

시간이라는 예술가의 손길로
매 순간 새로워지면서
더욱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

에이징은 끝나지 않는다.

철은 계속 녹슬고
나무는 계속 휘어지고
가죽은 계속 닳아간다.

이것은 쇠락이 아니다.
존재의 흔적이다.

주인장은 서랍을 연다.
안에는 일기장과 사진, 편지와 엽서가 가득하다.

누군가의 20대, 30대, 40대가 층층이 쌓여있다.
첫사랑의 설렘, 결혼식의 떨림, 이별의 아픔이 종이 속에 스며있다.

"이건 팔 물건이 아니에요."
서랍을 매만지며 주인장이 말한다.

"보관하는 거죠."
손가락으로 나뭇결을 더듬는다.

"누군가의 시간을."


-


창밖으로 해가 진다. 먼지 속에 빛이 잠긴다.
세월의 흔적들이 황혼을 품는다.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시간은 계속 흐른다.

파티나는 계속된다.

시간은 쌓이고
이야기는 깊어지고
존재는 완성되어 간다.

주인장은 오늘도 물건들의 먼지를 털어낸다.

살아있는 것들을 다루듯 정성스레.
마치 시간을 쓰다듬듯이.

저녁 어둠이 가게를 채운다.

오래된 시계가 멈춘 시간을 가리키고
녹슨 카메라가 어둠을 담아내고
구부러진 만년필이 침묵을 기록한다.

여기, 시간의 박물관에서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완성품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