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중인. 04 - 퀘스트 도우미, 미로의 인도자
음유시인 욘의 기록
1부. 나비의 증언
2부.
겨울 끝자락,
피에트 잡화점 유리창에 죽은 나비가 붙어있다.
날개는 반투명하고 푸르스름한 빛을 낸다.
이상하게도 나비는 숨을 쉰다.
유리창 위로 시간이 흐를 때마다 날개가 미세하게 떨린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시간을 거스르며.
-
작업실 안쪽에서는 자명종이 울린다.
서른 개의 시계가 서른 개의 다른 시간을 알린다.
어떤 시계는 앞으로, 어떤 시계는 뒤로 간다.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는 없다. 단 하나도.
이곳에서 시간은 원하는 대로 흐른다.
물처럼, 바람처럼.
작업대 위 유리병들. 병 속에서 푸른빛 나비들이 날갯짓한다.
죽어서도 시간을 만드는 나비들.
먼지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시계추는 옆으로 움직인다.
현재라는 착각이 만들어낸 중력은 이곳에서 무의미하다.
"첫 번째 나비는 선물이었습니다."
낡은 회중시계를 닦던 손이 멈춘다.
옅은 흉터가 손등을 가로지른다.
"자이언트 맨티스가 마을을 덮쳤을 때...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작은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죽은 나비들의 노래.
자이언트 맨티스의 독침이 시곗바늘처럼 기억을 꿰뚫는다.
푸른빛 독이 마을을 물들였다.
죽음의 색이었다.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모든 시계를 부숴버렸다. 마을의 시간도 함께. 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맨티스가 오기 전으로, 푸른 독이 퍼지기 전으로.
"그분이 찾아왔습니다. 맨티스의 시체가 아직 따뜻할 때였죠.
나비 한 마리를 건네주셨어요.
'시간은 죽지 않아요. 형태를 바꿀 뿐이죠.'
그 말을 남기고 사라지셨습니다.
나비는 날개를 펼쳤고... 시계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모두 다른 시간을 가리키며."
첫 번째 유리구슬이 탁자 위로 굴러온다.
미로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구슬 속에서 안개가 피어오른다.
-
'미로에는 괴물이 없었어요.'
목소리가 울린다.
메아리처럼, 꿈처럼.
'미로 자체가 괴물이었죠. 길 잃은 자들의 절망이 만든 미로.
매일 밤 형태를 바꾸었어요. 두려움을 담아내며, 고통을 새기며.'
미로 입구의 돌 의자. 수천 개의 종이배가 공중을 떠다닌다.
중력의 법칙은 이곳에서 잊힌 속삭임이 되었다.
종이배들은 미로의 벽을 스치고 지나간다.
벽에는 깊은 균열이 나있다. 환상처럼 보이는 균열들.
'킹 아크퍼스를 기억하시나요? 수백 명의 모험가가 목숨을 잃었죠.
절망이 만들어낸 괴물. 한숨이 비늘이 되고, 절망이 이빨이 되었어요.
무기로는 죽일 수 없었죠. 무기는 우리의 상처만 더할 뿐이었으니까.
그분은 달랐어요. 아크퍼스의 눈을 들여다보셨어요.
괴물의 눈이 아닌, 슬픔에 잠긴 영혼을 보신 거죠.
이제 아크퍼스는 아벨 해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어요.
더는 괴물이 아닌, 안식을 찾은 영혼으로.'
두 번째 유리구슬이 빛난다.
깊은 흉터가 새겨진 손이 구슬을 든다.
-
"에리얼을 쫓던 시절이었소. 바다의 폭군, 폭풍을 삼키는 포식자.
살아있는 절망이었지. 전신은 번개로 만들어졌고, 울음소리는 천둥이었소.
많은 사냥꾼이 목숨을 잃었지. 나도 팔을 잃었고."
구슬 속에서 폭풍이 피어오른다.
기억의 소용돌이.
"수천 개의 화살을 쏘았소. 창으로 찔렀고, 함정을 팠지.
소용없었소. 에리얼은 바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분은... 무기도 없이 왔소.
폭풍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더군. 에리얼의 언어로 말을 걸었소.
알고 보니 에리얼은 폭풍에 쫓겨 고향을 잃은 영혼들이었소.
수천 년 동안 떠돌며 슬픔이 바람이 되고, 분노가 번개가 된 거요.
이제 에리얼은 바다 위에서 편히 쉬오.
더는 복수의 메아리가 아닌, 안식의 노래가 되어."
세 번째 구슬은 붉은빛을 낸다.
동쪽 경계의 목소리. 수정 속에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친다.
-
"네 개의 봉인이 있었어요. 분노, 공포, 배신, 광기...
우리가 감당할 수 없었던 감정들이 만든 마물들이었죠.
봉인이라 불렀지만, 사실은 도망친 거예요. 우리 자신과 마주하기가 두려워서."
수정구슬 속 안개가 형체를 만든다. 일곱 걸음을 걷는 모습.
"첫 번째 봉인, 분노의 마물.
전쟁터에 버려진 아이들의 원한이 뭉쳐진 거예요.
마을은 불타고, 들판은 피로 물들었죠. 복수를 위해 살아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구원을 갈구하는 외침이었어요.
두 번째 봉인, 공포의 마물. 흑사병이 할퀴고 간 자리에서 태어났어요.
수만 명의 비명이 하나로 뭉쳐져서. 죽음이 삶을 삼키는 순간의 공포가 실체가 된 거죠.
세 번째 봉인, 배신의 마물. 서로를 등진 형제들의 증오가 만들어냈어요.
신뢰가 무너지고, 사랑이 증오로 바뀐 순간... 그 어둠이 괴물이 된 거예요.
마지막 봉인, 광기의 마물... 신들에 대한 우리의 실망이 만들어냈죠.
버림받았다는 분노, 외면당했다는 상실감. 그 모든 것이 뒤틀려서..."
구슬들이 하나둘 깨어진다.
안개처럼 흩어지는 목소리들.
"봉인을 풀 때마다 말씀하셨어요. '이건 봉인이 아니라 상처'라고.
치유해야 할 건 마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라고.
네 개의 봉인이 풀릴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이해했어요.
우리가 만든 괴물은 우리 자신의 그림자였다는 걸."
-
네 번째 구슬은 깨어진 채로 왔다.
오렌 미궁의 마지막 목소리.
"라미아의 독이 벽을 녹였어요. 미궁의 심장부에서...
글자가 새겨졌죠. 누군가의 마지막 편지였을까요?"
'신들에게,
당신들은 왜 우리를 모른척했나요?
괴물은 우리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고통으로, 절망으로
불완전한 우리를 벌하셨나요?
아니면 무관심했나요?
괴물을 죽일 순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일부니까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때
비로소 괴물은 잠이 듭니다
이제 저는 떠납니다
모든 이의 고통을 안고서
끝없는 미로 속으로
일곱 걸음이면 충분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에는
- 당신들이 모르는 자가'
-
피에트 잡화점의 죽은 나비가 유리창에서 떨어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벽의 시계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두 다른 시간을 가리키며.
유리병 속 나비들의 노래가 들린다.
어디선가 일곱 번째 발걸음 소리가 울린다.
작업실의 문이 열린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종이배 하나가 바람을 타고 들어와 책상 위에 내려앉는다.
펼쳐보니 글자가 적혀있다.
'우리는 모두 길 잃은 아이들
미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요
일곱 걸음의 거리에
새로운 시간이 기다립니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당신의 괴물은 어떤 모습인가요?'
시계들이 멈춘다.
겨울의 마지막 날, 봄을 기다리며.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