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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몽중인] - 부자노인의 건강식품
868 2025.02.23. 01:29

몽중인. 05 - 부자노인의 건강식품
새벽 서리를 삼키는 법












밀레스 던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는 일이 내 하루의 시작이다.

여명이 밝아올 때면 모험가들이 하나둘 던전으로 향한다.
대부분 풋내기들이다. 녹슨 검과 낡은 방패를 든 채, 새벽이슬처럼 불안한 발걸음으로.

내 이름은 텔리도아.
밀레스마을에서 잡화점을 운영한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삼 년째,
던전으로 향하는 길을 지켜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모험가들의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그들이 얼마나 깊이 던전을 들어갈 수 있을지 알 것만 같다.
그만큼 수많은 실패와 포기를 목격했다.

우리 가게는 던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잡화점이다.
그래서일까, 모험가들의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이야기가 매일 쌓인다.

깨진 검을 들고 와 고쳐달라며 눈물짓는 소년,
마지막 금전으로 붕대를 사가는 소녀, 동료를 잃고 술에 취해 쓰러지는 중년의 모험가까지.


-


봄이 왔다.

겨우내 얼어있던 던전의 입구가 녹으면서 새로운 모험가들이 물밀듯 몰려왔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꿈을 안고 있다.

'이번에는 해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대부분은 첫날을 넘기지 못한다. 던전 1층의 독거미 둥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요즘은 뭔가 다르다. 초보 모험가들의 발걸음이 조금 더 힘차다.
실패해도 다시 돌아온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빛이 깃들어 있다.

처음에는 몰랐다.
테이마 노인과 독거미알에 얽힌 이야기가, 이 마을의 작은 전설이 되어가는 중이란 걸.


"독거미알 다섯에 백만 전이라니, 노인네가 미쳤나봐."


아침마다 들려오는 소문이다.
몸이 불편하다는 노인이 약에 쓴다며 독거미알을 구해오는 이에게 터무니없는 보상을 준다는 이야기.

처음엔 나도 고개를 저었다. 밀레스마을에서 백만 전이라니.
농부가 일 년 내내 일해도 벌기 힘든 돈이다.

더구나 독거미알은 던전 1층에서도 구할 수 있는 흔한 물건.
노인이 치매라도 걸린 걸까 의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독거미알을 구해온 모험가들은 하나같이 달라졌다.

녹슨 검은 어느새 단단한 철검이 되어있었고,
낡은 방패는 새 가죽으로 감싼 방패로 바뀌어 있었다.


-


"처음엔 그냥 돈이 목적이었어요."
한 소년 모험가가 내 가게에서 붕대를 사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해요. 독거미알을 구하러 가면서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던전 벽에 새겨진 고대문자라든가, 보물상자가 숨겨진 장소라든가...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소년의 말이 맞았다.
독거미알을 노인에게 가져다준 모험가들은 점점 더 깊이 던전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노인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계속해서 새로운 모험가들에게 독거미알을 요구했다.

"이상하죠. 테이마 노인이 독거미알을 받고는 한 번도 먹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대신 창고에 쌓아두기만 하죠. 그런데도 계속 사겠다고 하시니..."

던전 입구에서 만난 여성 모험가의 말이었다.

그날 저녁,
테이마 노인의 집을 지나다 창고를 들여다보았다.

독거미알은 없었다. 대신 누렇게 바랜 모험가 일지 한 권이 놓여있었다.
서른 해 전의 것이었다.


'오늘도 실패. 하지만 내일은...'


일지의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 있던 문장이다.
그 뒤로는 백지였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


어느 날 술에 취한 마을 대장장이가 들려준 이야기다.

"삼십 년 전, 테이마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유망한 모험가였어.
검술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실력 있는 청년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 던전 깊숙한 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라졌다가,
혼자 돌아왔어. 다리를 절며."

봄이 깊어갈수록 이야기는 쌓여갔다.
테이마 노인의 과거를, 조각조각 맞춰볼 수 있었다.

던전 깊은 곳에서 벌어진 비극. 동료들을 잃은 자책감.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할 불구가 된 절망감까지.


-


그리고 며칠 후,
새벽녘에 진열장을 정리하다 테이마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던전으로 향하는 풋내기 모험가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안갯속에서 노인의 눈빛이 젊어 보였다. 어쩌면 슬픔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노인의 창고에서 독거미알이 사라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매주 금요일 새벽, 노인은 던전 입구의 제단에 독거미알을 올려놓는다.

모험가들은 그것을 주워 상인에게 판다.
상인은 다시 노인에게 판다. 이상한 순환이다.

"어떤 모험가는 독거미알을 구하러 갔다가 희귀한 약초를 발견하더군요."
마을의 약재상이 들려준 이야기다.

"어떤 이는 고대 주화를, 또 어떤 이는 마법 스크롤을 찾아왔죠.
하나같이 성장해 있었어요. 독거미알을 구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


여름이 왔다.
던전 입구는 이제 새벽안개 대신 아침 햇살이 비춘다.

모험가들은 여전히 독거미알을 노인에게 가져다준다.
노인은 변함없이 백만 전을 건넨다.


"노인장, 독거미알은 약으로 드시는 게 아니었군요."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노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웃음을 지었다.

"이 늙은이가 하는 장난 같은 거지."
노인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야.
성취감이지. 스스로 해냈다는."

노인은 말을 멈추고 지팡이를 짚었다. 지팡이에는 오래된 칼자국이 나있었다.
최근에 영지를 순찰하던 기사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른 해 전, 던전 깊은 곳에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맞서 싸운 젊은 모험가의 이야기.
모두를 구해내진 못했지만, 살아남은 이들을 끝까지 지켜낸 이야기.

"서른 해 전, 나도 저들처럼 이 던전을 올려다보았다네. 꿈 많던 시절이었지."
노인의 눈빛이 던전 쪽으로 향했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네. 새벽안개를 가르며 달리던 꿈을.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던 그때의 꿈을."

노인은 주머니에서 독거미알 하나를 꺼냈다.
방금 전 어느 모험가가 팔았을 것이다.

"이건 약이 아니라 꿈이라네. 저들의 꿈. 내 꿈이었던."


-


그 후로도 테이마 노인은 독거미알을 사들인다.
백만 전이라는 터무니없는 값을 매기고, 지팡이를 짚은 채 모험가들을 기다린다.

노인은 한 번도 그들에게 진심을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도 없었다.

던전 입구에 새로운 게시판이 생겼다. 초보 모험가들을 위한 정보가 가득하다.
독거미 둥지의 위치, 함정의 종류, 보물상자가 있을 법한 장소까지.
노인이 서른 해 동안 기록해 온 것들이다.

나는 이제 안다.
매일 아침 던전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인의 마음을.

실패한 모험가들이 돌아올 때면 창가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는 이유를.
서른 해 전의 슬픔을 희망으로 바꾸는 방법을.

오늘도 새벽안개가 걷히고 있다.
녹슨 검을 든 누군가가 던전으로 향한다.

테이마 노인의 창고에는 또 다른 독거미알이 쌓일 것이다.
누군가의 꿈이 된 독거미알이.

노인은 오늘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창가에 앉아 미소 짓는다. 서른 해 전 자신의 모습을 보듯이.


-


창 너머 던전으로 가는 길에 아침 햇살이 기운다.
어제의 실패자들이 또다시 검을 고쳐 잡는다.

그들은 모른다.
자신들의 용기가 한 노인의 꿈이 되어 창고에 쌓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도 장부에 적는다.


'독거미알 다섯 개, 백만 전.'


그리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덧붙인다.


'누군가의 꿈값.'















To. 녹슨 검을 처음 쥐던 그날의 우리에게
첫 모험을 앞둔 새벽을 떠올리며.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