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그림자의 언약. 02
1장. 죽음이 잠든 마을
새벽 기도가 끝나자 세바스티안 주교가 커넬을 불렀다.
아벨 대성당 서쪽 회랑에서였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
성당의 첨탑만이 희미한 빛을 받아 검푸른 하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커넬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스승의 부름은 보통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
"일어나라, 커넬." 세바스티안의 깊은 목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너에게 임무를 내리겠다."
커넬은 일어섰다. 키는 높지 않았으나 어깨는 산맥처럼 넓고 단단했다.
스물넷의 나이,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백 개의 촛불을 태운 듯한 묵직한 깊이가 서려 있었다.
교단 내에서는 절벽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력으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그의 손가락 사이로는 여전히 구마의 진언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완전함을 향한 그의 갈증은 깊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교님?"
세바스티안은 잠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래비아 방면에서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카르토라는 마을이 있다.
세 달 전부터 마을 밖으로 나온 자가 없다. 들어간 행상인과 여행자들도 자취를 감추었지."
"악령의 소행일까요?"
세바스티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좋을 텐데. 이건... 다르다. 네가 가서 확인해야 한다."
커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저 같은 견습생이 혼자 가도 될까요? 정식 구마사도 아닌데..."
"네가 가야 한다." 세바스티안의 목소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네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진실을 말해줄 수 없다."
"하지만 주교님, 저는 아직 완전한 구마의식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동전 하나였다. 불가사의하게 주변의 빛을 흡수하는 듯했다.
동전의 한쪽 면에는 빛, 다른 쪽에는 어둠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균형의 동전이다. 멘트 문명 시대의 유물로, 신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담겨있다.
가져가거라. 너의 빛이 흔들릴 때 균형을 찾게 해 줄 것이다."
커넬은 동전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한기가 손끝에서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출발은 지금 당장이다. 밀레스를 지나 래비아로 가는 산길을 따라가면 된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그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카르토 마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은 험하고 떨어진 곳이라 닷새는 걸릴 것이다."
커넬은 무릎을 꿇고 세바스티안의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곧장 짐을 꾸렸다. 성수, 양초, 기도문이 적힌 양피지, 그리고 기본적인 구마도구들.
그는 주교의 명령에 의문을 품었지만,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여정이 길고 위험할 것이란 것을 알기에 몇 권의 고대 멘트어 사전과 구마에 관한 주문서도 챙겼다.
-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을 때,
커넬은 아벨 대성당의 그림자를 등진 채 서 있었다.
열다섯 해 동안 그의 집이었던 성당은 이제 그를,
아직 날개가 마르지 않은 새를 둥지에서 밀어내듯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의 전 재산이라고는 낡은 성서, 구마도구가 든 작은 가방,
균형의 동전, 그리고 한 필의 말뿐이었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무자비하게 내리쬐었다.
대성당의 첨탑에 반사된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아벨 교단의 사제들이 삼삼오오 모여 커넬의 출발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걱정과 동정,
그리고 어쩌면ㅡ그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서려 있었다.
견습 구마사가 혼자 파견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도 그가 배움을 완료하기도 전에.
"이 길을 걷기로 했다면, 커넬, "
노사제 헤르메스가 희미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의 눈꺼풀은 무거웠고,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질 듯 가냘팠다.
"자신의 눈동자를 의심하는 법을 배우게.
가장 아름다운 빛 뒤에 가장 깊은 어둠이 숨어있고,
때로는 내 자신의 그림자가 가장 위험한 악마가 되지.
불꽃이 타오를 때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는 걸 잊지 말도록."
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불안과 의구심이 일었지만, 표면에는 평온함만 남겼다.
그는 곧장 말을 몰아 아벨의 고지대를 벗어났다.
돌아** 않았다. 돌아보면 용기가 흔들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길고 위험한 닷새 길. 밀레스의 들판과 래비아의 산맥을 지나,
지도에서조차 희미해지는 어둠의 계곡까지.
말발굽이 자갈길을 두드리는 소리 속에서 세바스티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네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진실을 말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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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아벨의 평원을 지났다.
탁 트인 들판에 풍요로운 들꽃이 피어 있었다.
밀레스의 국경 초소에 다다랐을 때 해가 저물었다.
그는 길가의 작은 여객주에 묵었다.
거친 수염의 주인은 커넬의 성직자 복장을 보고 무릎을 꿇어 축복을 청했다.
"아벨 교단의 신부님." 여관 주인은 말이라기보다 숨을 내쉬었다.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그의 얼굴에서 세 번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ㅡ
경외, 두려움, 그리고 어두운 동정. "무슨 바람이 신부님을 이런 곳으로 데려왔습니까?"
"래비아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커넬이 말했다.
"카르토라는 마을에 관해 아는 것이 있으신가요?"
여관 주인의 얼굴이 촛불 아래서도 창백하게 변했다.
그의 목소리가 귀신의 속삭임처럼 변했다.
"살고 싶으시다면, 그 이름조차 입에 담지 마십시오." 그는 주변을 살폈다.
"벽에도 귀가 있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들어가되 나오지 않는 곳입니다. 살아서는..."
"그게 무슨 말이죠?"
"나그네들이 말하길, 그곳은 죽은 자들의 마을이 되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이 걷고, 말하고, 일상을 반복한다고.
삼 개월 전부터 그곳을 떠난 사람이 없었답니다."
커넬은 진심으로 물었다.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관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과장된 소문일 테지요. 하지만..."
"하지만?"
"지난달, 카르토로 향하던 행상인 하나가 여기 묵어갔습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여관 주인의 말은 커넬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설쳤다. 꿈에서조차 불안감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커넬은 일찍 출발했다.
밀레스의 평야를 지나 래비아로 향하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하늘은 맑았으나 세상은 침묵했다. 새들의 노래가 끊겼다.
길가의 들꽃들은 고개를 숙이고 색을 잃어갔다. 흙과 나무와 돌에서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정오의 태양이 하늘 꼭대기를 지나자, 산세는 가파르게 변했다.
친근한 들판의 풀잎과 꽃들은 사라지고, 돌과 뼈처럼 앙상한 나무들만이 산길을 에워쌌다.
커넬은 말의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었다.
산의 침묵은 거짓된 평화였다.
그 너머로 불현듯 도적들의 칼날이 번뜩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성직자 복장은 보이지 않는 갑옷이 되어주었다.
어느 시대에나 신성함을 훔치려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벌은 신의 분노처럼 신속하고 가차 없었다.
그럼에도 커넬이 두려운 것은 인간의 도적이 아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드리운 어둠은 도적의 칼날보다 더 예리하게 그의 영혼을 할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구마의 주문을 외우는 입술.
-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커넬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그는 구마사가 되기를 꿈꿔왔다.
아홉 살 때 고향 마을에 악령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때 아벨 교단의 구마사들이 마을을 구했다.
그들의 모습은 어린 커넬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후 그는 부모의 허락을 받아 아벨 교단으로 들어갔다.
열다섯 해가 지났다.
그는 수많은 경전과 주문을 외웠다. 주교의 조수로 여러 구마 의식에 참여했다.
하지만 아직 혼자서 악령을 쫓아낸 적은 없었다.
그는 준비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바스티안은 그를 혼자 보냈다. 왜일까?
늘 완벽함을 중시하던 스승이 미완의 제자를 위험한 임무에 내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커넬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것이 시험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시험인지,
그리고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산길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멎었다.
일순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지평선 너머로 어둠이 번져 나왔다.
그것은 구름도, 안개도 아니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엇이 서서히 세상을 잠식해 들어왔다.
커넬은 말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불안하게 울부짖는 말을 달래며 좁은 산길을 내려갔다. 목적지는 가까웠다.
이제 커넬도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앞, 계곡 너머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무언가였다.
"아직 견습생 신분으로 이런 일을 맡기시다니,
주교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가 중얼거리자 말이 흰 콧김을 내뿜었다.
말의 눈동자에 달빛이 스며들어 어둠 속에서도 은색으로 빛났다.
공포로 확장된 동공에는 인간의 눈으로는 ** 못하는 무언가가 비쳤다.
동물의 영혼은 어둠의 언어를 인간보다 먼저 읽어냈다.
커넬의 손가락이 말의 갈기 사이로 미끄러졌다.
그 순간 짐승의 떨림이 그의 뼛속으로 전해졌다.
'네가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느낀다, ' 그의 손길이 말했다.
두 줄기 까마귀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검은 그림자가 산길 위로 스쳐 지나갔다.
커넬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곳의 모든 것이 그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오후의 빛이 약해지면서 산길과 나무들이 서로의 그림자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어둠은 점점 더 깊어졌다. 이제 동이 틀 때까지는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커넬은 말에서 내려 작은 공터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작은 불을 피웠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꽃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밤 산속의 살아있는 움직임은 하나도 없었다. 세상이 숨을 멈춘 듯했다.
아무리 깊은 숲이라도 이런 죽음의 고요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의심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과장된 소문일지도. 카르토 마을은 평범한 시골 마을로,
일시적인 전염병이나 기근으로 외부와 단절된 것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교단까지 전해진 것뿐일지도.
커넬의 손이 주머니를 더듬었다. 균형의 동전.
그의 손가락이 금속에 닿는 순간, 심장 박동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익히 느껴본 금속의 냉기가 아니었다. 동전은 살아있었다ㅡ뛰고, 숨 쉬고, 속삭였다.
동전을 꺼내 불꽃 앞에 들었다.
불가사의하게도 그것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빛을 흡수했다.
동전을 바라볼 때마다 커넬은 자신의 영혼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균형... 단순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의 내면의 어딘가에서,
동전은 자신과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왜 나인가..." 그의 속삭임이 밤에 흩어졌다.
"왜 세바스티안은 나를 보냈을까?"
그러나 답을 아는 것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그는 동전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담요를 둘러쓰고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꿈결 같은 산속의 어둠 속에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인간의 목소리라기엔 너무 낮고 오래된 소리. 산 자체가 신음하는 소리였다.
-
검은 밤과 흰 새벽 사이, 커넬은 눈을 떴다.
간밤의 불안한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꿈속에서 그는 끝없이 어둠 속을 걸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무수한 눈동자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죽어 있었다. 그러나 깨어 있었다.
커넬은 동이 트자마자 서둘러 출발했다.
산길은 점점 가팔라졌다가, 정상을 넘어서자 천천히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멀리 깊은 계곡 아래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카르토.
멀리서 보아도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마을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아침 시간, 취사와 난방을 위한 굴뚝 연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건 심상치 않았다.
물레방아는 계곡을 흐르는 물살에도 돌지 않았고,
나무 건축물들은 죽은 나무처럼 회색빛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커넬의 가슴 안에서 동전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살갗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말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동물의 본능이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이제 말을 몰아붙일 수 없었다. 결국 산비탈에 말을 묶어두고 홀로 걸어 내려가기로 했다.
마을로 이어지는 좁은 길은 양쪽으로 푸른 빛깔의 잡초가 무성했다.
잡초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자라고 있었다.
마치 땅에서 달아나려는 듯, 모두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새들의 지저귐도, 벌레들의 소리도 없었다.
자연의 소리가 모두 사라진 듯했다.
커넬은 흙길을 밟았다. 발자국 소리만이 허공을 울렸다.
산비탈에서 내려다본 것보다 마을은 더 침울해 보였다.
집집마다 창문이 닫혀 있었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완전히 버려진 느낌은 아니었다.
무언가 이곳에 남아 있었다.
길 한쪽에 한 농부가 서 있었다.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살피는 듯했다. 커넬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카르토 마을로 가는 길이 맞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농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커넬은 다시 한번 외쳤으나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농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살에 닿는 순간, 커넬의 영혼이 움츠러들었다.
차가웠다ㅡ살의 차가움이 아닌, 별이 죽은 우주의 공허함 같은 한기였다.
그리고 그 살은 딱딱했다.
겨울 땅속에 묻힌 돌덩이처럼, 또는 천 년을 겪은 고목처럼.
놀란 커넬이 농부의 몸을 돌렸을 때, 그가 본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농부의 얼굴은 양초를 빚은 듯 창백했고, 그 아래로는 죽음의 검푸른 실핏줄이 가지를 쳤다.
두 눈은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다ㅡ
그것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지점이었다.
입은 마지막 말을 남기려다 멈춘 듯 반쯤 벌어져 있었지만,
어떤 의미도 없었다.
그는 죽어있되 쓰러지지 않았고, 굳어있되 무너지지 않았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이 석화된 듯, 농부의 형상은 죽음의 조각상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려던 커넬의 귀에 마을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그 방향을 바라보니, 한 여인이 빨래를 들고 마을 우물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어색했고, 한 발 내딛고 멈추길 반복했다.
피부는 창백했고,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녀도 죽어 있었다. 그러나 움직이고 있었다.
커넬은 동전을 쥔 손을 꽉 쥐었다.
이건 악몽이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마을 중심으로 걸어갔다.
마을의 돌담 입구를 지나자 죽음의 풍경이 펼쳐졌다.
카르토는 계곡 아래 원형으로 형성된 마을이었다.
가장 바깥쪽으로는 석조 농가들이 둥그렇게 늘어서 있고,
그 안쪽으로 장인들의 공방과 작업장들이 모여 있었다.
한가운데에는 작은 광장과 분수대,
그리고 북쪽으로 기울어진 성당이 자리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었으나, 색이 바랜 그림처럼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돌과 나무와 흙의 색은 쇠락하여 동일한 회색빛으로 흐려졌다.
이파리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빗물 웅덩이의 물은 유리처럼 굳어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이 그 풍경을 채웠다.
그들은 꿈속을 걷는 자들처럼 일상을 반복했다.
대장간에서 망치를 들어 올리는 대장장이의 손은 맥박도 없이 공기를 베었고,
내려치는 순간에도 쇳소리는 텅 비어있었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여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서 얼음 갈리는 소리가 났다.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긷는 아이의 눈은 말라버린 우물처럼 깊고 공허했다.
그들의 몸은 꼭두각시처럼 어색하게 흔들렸고,
눈에서는 영혼의 불빛이 꺼진 지 오래였다.
피부는 겨울 새벽의 서리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질식한 자의 색으로 푸르게 변해있었다.
시간이 멈춘 세계에 갇힌 그들은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에서 표류했다.
죽었으되 눕지 못하고, 살았으되 숨 쉬지 못하는 존재들.
커넬은 시체들 사이를 지나 마을 중심으로 향했다.
균형의 동전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시체들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둔화되었다ㅡ
마치 그의 현존이 정지된 시간의 흐름을 더욱 방해하는 듯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공포가 검은 꽃처럼 피어났다.
교단의 도서관에서 읽은 수백 권의 서적 중 어느 것도,
스승에게서 배운 어떤 구마술도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악마의 소행이 아니었다.
더 오래되고, 더 근원적인 어둠이었다.
멘트 문명의 유산, 죽음과 삶의 경계를 뒤틀어버린 고대의 힘.
그리고 그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그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ㅡ이 마을에 닿은 순간부터,
커넬의 운명은 이 죽지 못하는 자들의 운명과 맞물려 있었다.
-
작은 광장에 도착했을 때,
커넬은 미세하게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을 감지했다.
그리고 이내 알아차렸다.
이 마을의 모든 것이 정확히 멈춰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느리게,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수천 배 느려진 것처럼.
마을 중앙에는 작은 분수대가 있었다.
물은 흐르지 않았고, 분수대 물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 주위로는 몇몇 시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커넬을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현실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긴 그림자 사이로 솟아오른 성당의 첨탑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을의 다른 건물들이 죽음의 회색빛에 물들어 있는 동안,
성당만은 희미한 맥박을 간직한 채 숨 쉬고 있었다.
성당은 빛을 발한다기보다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틈새에서 한 점 진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커넬의 발걸음이 저절로 성당을 향했다.
그곳이 부르고 있었다ㅡ아니, 균형의 동전이 성당을 향해 끌어당기고 있었다.
성당 문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차가운 공기가 그를 감쌌다. 제단 위에는 검은 돌판이 놓여 있었다.
돌판이 빛을 흡수하는 듯했다. 멘트 문명 시대의 유물임을 직감했다.
돌판 위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거기 서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커넬은 몸을 돌렸다.
보이지 않던 곳에서 형체가 나타났다ㅡ빛이 물질이 되어 소녀의 모습을 빚어낸 것처럼.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살 속에서 그녀는 반쯤은 이 세계에,
반쯤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듯했다.
열두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는
달빛처럼 창백한 피부와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눈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맑고 깊은 파란 눈동자는 심연 그 자체였다ㅡ
오랜 세월을 품은 호수처럼 깊고 비밀에 가득 찬.
그녀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치 소녀의 존재 자체가 현실의 직물을 흔드는 듯했다.
"당신... 살아있네요." 소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겨울 태양처럼 따뜻했지만, 그 안에는 메아리처럼 공명하는 이중의 울림이 있었다.
하나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목소리가 함께 발화하는 듯한 중첩된 소리였다.
"너도 살아있구나.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소녀는 잠시 커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커넬이 알아차릴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제 이름은 에일린이에요.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는 아벨 교단의 구마사 커넬이다.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조사하러 왔다."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 교단이요...
물론이죠. 언젠가는 누군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신부님 혼자라니, 위험해요. 이곳에 얼마나 머무르셨나요?"
"방금 도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에일린은 주변을 살폈다. 누가 엿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그러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성당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제단 위의 것이 모든 원인이에요."
에일린이 속삭였다. "죽음의 서판이라고 해요."
"죽음의 서판?"
"네, 멘트 문명 시대의 유물이에요. 마을 장로가 산에서 발견했죠.
처음에는 이게 마을에 번영을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장로는 서판에 새겨진 문양을 해독했어요. 그것은 죽음을 거스르는 힘이 있다고 했죠.
한낱 쓸모없는 석판이 아니라 신성한 물건이라고. 하지만..."
에일린은 말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서판이 활성화된 날 밤, 마을 전체가 뒤틀렸어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뻐했어요. 몸의 통증이 사라지고, 늙어가는 것이 멈췄으니까요.
하지만 곧 그들은 변하기 시작했어요. 움직임이 느려지고, 말이 줄어들고...
그리고 어느 날, 모두가 '저렇게' 되어버렸어요."
커넬은 천천히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 위의 서판에서는 죽음의 한기가 파도처럼 밀려와 성당 내부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서판의 표면에는, 잠깐 바라보기에도 현기증이 날 만큼 복잡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무한히 꼬이고 얽히는 패턴은 쳐다볼수록 의식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손을 뻗어 서판을 만지려 했으나, 에일린이 그의 팔을 잡았다.
소녀의 손가락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불같은 열기가 숨겨져 있었다.
"만지지 마세요! 그러면 당신도 저들처럼 될 거예요.
서판은 영혼을 빨아들여요.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려요."
커넬은 손을 거두고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신부님이 구마사라면...
어쩌면 방법을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커넬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세바스티안이 그에게 준 것. 에일린은 동전을 보자 눈을 크게 떴다.
"그거... 균형의 동전이군요! 어디서 구했어요?"
"주교님이 주셨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니?"
"멘트 문명 시대의 성물이에요.
균형의 동전은 빛과 어둠 사이의 경계를 유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죽음의 서판과는 정반대의 물건이죠. 서판이 균형을 깨트리고 자연의 흐름을 뒤틀었다면,
균형의 동전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넌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고 있지?"
커넬은 에일린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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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린은 잠시 침묵했다. "할아버지가 이 마을의 지식을 보존하던 분이었어요.
그분은 멘트 문명의 역사와 유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셨죠. 저에게 그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어요."
그녀가 말할 때 눈동자 깊은 곳에서 별빛 같은 것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시간의 강을 건너 돌아온 기억처럼.
"그럼 네 할아버지가 바로 그 장로이신가?"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 할아버지는 장로가 서판을 가져오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기록이 남아 있었죠. 장로는 그것을 보고 서판의 존재를 알게 된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아있는 자의 온기와 죽은 자의 메아리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커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당 내부는 평화로웠다. 바깥의 혼돈과는 달리, 이곳은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왜 성당 안은 괜찮은 거지?"
"서판의 힘은 강하지만, 성당의 신성함이 그 힘을 어느 정도 막아내고 있어요.
하지만 점점 그 힘도 약해지고 있어요."
성당 밖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커넬의 귀를 찔렀다. 바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뒤엉킨 신음, 영혼의 합창과도 같은 비통한 외침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느꼈어요." 에일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서판이 위험에 처했다고 느껴요. 곧 이곳으로 몰려올 거예요."
커넬은 성당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느린 걸음으로 성당을 향해 오고 있었다.
죽은 눈, 굳은 입술, 무표정한 얼굴들. 그러나 모두가 한 방향을 향했다.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인형들처럼, 단 하나의 의지에 복종하며.
"서판을 정화할 시간이 없어요." 에일린이 말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요. 내가 비밀 통로를 알고 있어요."
에일린은 제단 뒤쪽으로 커넬을 이끌었다.
그곳에는 작은 문이 있었고, 문 너머로는 어두운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이 통로는 마을 뒤쪽 산으로 이어져요.
거기서 계획을 세워야 해요. 어서요!"
커넬은 한 번 더 서판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보였다.
단순한 석판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존재. 검은 돌의 심장이 미세하게 맥동했다.
표면 아래로 수많은 영혼들의 형체가 꿈틀거렸다.
감금된 영혼들의 침묵의 비명.
그는 에일린의 손에 이끌려 어두운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는 좁고 습했으며, 오래된 흙냄새가 진동했다.
그들은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는 성당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체들이 들어온 것이다.
통로는 어둠 속에서 계속 이어졌다.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며, 커넬은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악령의 짓이라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그가 배운 구마술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자연의 법칙 자체를 거스르는 마법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통로 벽의 희미한 문양들이 떠올랐다.
시간의 풍화를 견뎌낸 고대의 그림들. 사람들, 동물들, 그리고 이름 없는 존재들의 형상.
모든 형상은 내면을 향해, 안쪽으로, 더 깊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어둠을 피해 달아나는 영혼들,
또는 어둠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영혼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커넬이 물었다.
"조금만 더요. 이 통로는 마을의 모든 집들을 연결해요.
오래전 래비아가 이 지역을 침략했을 때 피난처로 만들어졌죠."
커넬은 의문이 들었다.
"아주 잘 알고 있구나. 이 마을에서 태어났니?"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여기서 태어났어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끊겼다. 통로 깊은 곳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커넬이 속삭였다.
"시체들이 통로로 들어온 것 같아요. 우리를 쫓고 있어요."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통로는 점점 좁아졌고, 천장은 낮아졌다.
커넬은 몸을 굽히며 앞으로 나아갔다. 에일린은 그 좁은 공간에서도 어려움 없이 움직였다.
그녀의 작은 몸은 이런 통로에 익숙한 듯했다.
어둠 속에서 에일린의 작은 형체가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처음에는 눈의 착각이라 여겼으나, 명백했다.
소녀의 피부 아래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진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별빛을 머금은 꽃잎처럼 은은히 빛났다.
"에일린, 넌 어떻게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렇게 되었는데."
에일린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작은 얼굴이 어둠 속에서 커넬을 향했다.
소녀의 얼굴에서 비치는 빛이 통로를 밝혔다.
인간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얼굴이 아니었다.
영혼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얼굴이었다.
"나는... 이미 죽어있었어요."
"뭐라고?"
-
에일린의 청아한 목소리가 동굴 속에 메아리쳤다.
소리는 빛처럼 어둠을 가르며 통로의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그녀의 입술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멀리서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성당 문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 부서진 나무의 비명과 쇠의 신음.
죽음에 갇힌 자들의 무언의 행진 소리가 땅을 통해 전해졌다.
시체들이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죽음도 삶도 아닌 존재들이 그들의 성물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넬과 에일린의 숨소리만이 통로 속에 살아있는 유일한 생명의 흔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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