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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순례자] - 2장. 에일린의 안식
748 2025.03.20. 12:52

순례자, 그림자의 언약. 03


2장. 에일린의 안식

















"나는... 이미 죽어있었어요."

그 고백은 터널 벽에 새겨졌다. "이미 죽어있었어요" 라는 말이 어둠 속에서 숨쉬기 시작했다.
커넬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저 말이 의미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성당 입구에서 쇠붙이가 부서지는 소리.
달그락, 달그락. 죽어서도 걷는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두르자." 손을 잡아끌었다.
소녀의 손은 물아래 오래 잠겨 있던 돌처럼 차가웠다. 생명의 온기가 없었다.

카르토 마을 지하의 이 통로는 뼈와 돌과 부패한 기억으로 만들어진 길이었다.
세오력 153년 늦봄의 밤기운과 축축한 땅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를 찔렀다.

터널 벽에서는 옛 시대의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벽면에는 굴착의 자국과 함께 무너진 뼈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천장에서 늘어진 뿌리들이 신경처럼 떨고 있었다.
날카로운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렸다.

"조심하세요." 에일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지만, 안에는 지나치게 오래된 경험이 스며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커넬이 물었다.

"마을 바깥으로 나가요. 시체들로부터 멀리."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 말이..."
말을 멈추었다. 가방에서 성수병을 꺼냈다. "잠깐만."

에일린은 발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도 얼굴은 희미하게 빛났다.
소녀처럼 보이는 형체의 눈에는 견딜 수 없이 깊은 시간이 고여 있었다.

커넬은 성수를 손바닥에 따랐다. 성수에 젖은 손으로 에일린의 손을 감쌌다.
죽은 자나 악령은 성수에 닿으면 불타오르거나 연기를 뿜는다.
에일린의 손은 그저 성수를 흡수할 뿐이었다.

"악한 존재는 아니군." 커넬이 말했다.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당연하죠. 저는... 소녀였으니까요."

소녀였다. 과거형이었다.
커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가자."

다시 걸음을 옮겼다. 터널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방울이 시간을 재는 것만 같았다.

"이 통로는..." 침묵을 깼다.

"테네즈와의 전쟁 때 만들어졌어요." 에일린이 대답했다.
"사람들이 도망칠 통로가 필요했죠. 나중엔 밀수꾼들의 길이 되었고요.
래비아와 밀레스 국경을 넘나드는 이들의 길이었어요."

커넬은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 작은 소녀가 그토록 오래된 역사를 알고 있을까?
소녀가 말한 '이미 죽어있다'는 의미가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제가 찾은 책들이 많았어요," 에일린이 말했다. 커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했다.
"할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그리고 57년은 긴 시간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기엔."

57년. 숫자가 허공에 울렸다.
죽어있으되 떠나지 못한 57년의 시간.


-


마침내 터널의 출구에 다다랐다. 비좁은 길을 지나자 열린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풀과 이슬 냄새가 섞인 공기가 달빛처럼 내려앉았다. 언덕 위, 카르토 마을의 가장자리였다.

커넬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밤벌레 소리,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까지.
생명의 소리들이 돌아온 것이다. 낮에는 이 모든 소리가 침묵했었다.

"왜 낮에는 생명의 기운이 없었지?"

에일린은 풀밭에 앉았다. 이슬이 옷을 적시지 않았다.
형체는 물리적 세계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듯했다.

"서판 때문이에요," 에일린이 말했다.
"죽음의 서판은 빛의 힘을 빌려 죽음을 거스르려 해요. 햇빛 아래서는 서판의 힘이 더 강해져요.
시체들도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자연의 소리는 침묵하죠. 하지만 밤은..."

소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은 죽음의 시간이에요. 어둠 속에서 서판의 힘은 약해지고, 자연의 균형이 조금씩 돌아와요."

커넬은 옆에 앉았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옷을 적셨다. 에일린을 주의 깊게 살폈다.
별빛 아래 존재는 물과 공기 사이를 오가듯 때로는 실체가 있는 듯 선명하게,
때로는 별빛만큼 가볍게 존재했다.

"네가 말한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줄 수 있어?"

에일린은 잠시 침묵했다가 대화를 이었다. "말보다는 보여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넬도 뒤따랐다. 언덕 위로 올라갔다.
길을 따라 몇 분을 걸었을까, 무너진 돌담이 나타났다.
그 너머에는 쓰러진 비석들이 별빛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동묘지였다.

담장을 넘어 들어서자 잡초와 들꽃이 무성하게 자란 오래된 묘지가 펼쳐졌다.
수십 개의 비석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다른 것보다 더 낡고 깨진 비석들이 모여 있는 구역이 있었다.
에일린은 그곳으로 향했다.

커넬은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을 읽었다.
토마스 베른, 마리 뒤발렌, 후베르트 듀랑... 라크샤?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예요." 에일린이 작은 비석 앞에 멈춰 섰다.
담쟁이넝쿨이 비석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었다.

커넬은 다가가 넝쿨을 조심스럽게 걷었다. 낡은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드러났다.

'에일린 라크샤. 하늘의 품으로.' 그 아래 세오력 83년부터 96년까지의 기간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세오력 153년. 57년 전의 죽음이었다.

"이곳이 내 무덤이에요." 에일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목이 메는 감각. 커넬은 비석을 바라보았다.
열세 살에 죽은 소녀의 무덤. 소녀는 지금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겨우 말을 꺼냈다.

에일린은 무덤 곁에 무릎을 꿇었다. 손이 비석 표면을 더듬었다.
자신의 죽음을 기록한 돌을 만지는 움직임에는 친밀함이 담겨 있었다.

"열세 살 때였어요," 말했다. "마을에 역병이 돌았죠. 부모님과 동생들은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나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죠."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눈빛이었다.

"조나스 영감님이 절 살리려 하셨어요. 그분은 마을의 장로였고, 저희 가족과 가까웠어요.
할아버지는 멘트 문명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서재 열쇠를 영감님께 맡겼죠.
그러다 영감님이 할아버지가 경고했던 유물, '죽음의 서판'을 찾아내셨어요."

커넬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앞으로 일어날 이야기가 예감되었다.

"마지막 숨을 내뱉으려는 순간," 에일린이 계속했다.
"영감님이 제 가슴에 서판을 올려놓으셨어요. 영혼이 육신을 떠나려던 찰나,
서판이 제 영혼을 붙잡았어요. 육신은 죽었지만, 영혼은 서판에 묶여버린 거죠."

에일린이 무덤 주변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손이 물리적인 흙을 움직이는 게 신기했다.
손가락이 흙을 헤치자 썩은 나무 관 조각이 드러났다. 그 틈에서 작은 뼛조각을 꺼냈다. 에일린 자신의 뼈.

"처음에는 사람들이 저를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미 죽은 아이였죠.
사람들은 저를 보면 무서워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마지막에는 조나스 영감님만 남았어요."

에일린은 뼛조각을 들여다보았다. 눈에는 불가해한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영감님은 제가 서판에 묶인 것을 풀어주려고 애쓰셨어요. 방법을 찾지 못했죠.
그러는 동안 서판의 힘은 마을 전체로 퍼져갔어요. 사람들이 죽지 않게 되었어요."

잠시 말을 멈추고 아랫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별빛 아래 카르토 마을은 잠든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축복이라고 생각했어요. 노인들이 오래 살고, 병자들이 회복되니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변했어요. 영혼은 점점 사라져 가고, 육신만 남게 되었죠.
죽지도 못하고, 온전히 살지도 못하는 존재로요.
결국 조나스 영감님도 그렇게 되셨어요. 저를 살리려던 마음이 너무 컸던 거죠."

커넬은 깊은 아픔을 느꼈다. 완성되지 못한 죽음의 비극.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대가였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었다. 모든 존재가 지나야 할 문턱.

"그런데 너는 왜 의식이 있지? 다른 시체들과 달리."

에일린은 뼛조각을 돌리며 대답했다. "저는 서판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요. 첫 번째 희생자였으니까요.
서판이 가장 먼저 붙든 영혼이었죠. 다른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의식이 더 흐릿해진 거고요."

커넬은 상념에 잠겼다. 그때 성당에서 보았던 시체들.
그들은 시체가 아니라 불완전한 영혼들이었다.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존재들.

"주교님이 주신 균형의 동전," 커넬이 물었다. "이걸로 어떻게 서판을 정화시킬 수 있지?"

에일린은 자신의 뼛조각을 달빛에 비추었다.
뼈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의식이 필요해요," 에일린이 단호히 말했다.

"서판이 있는 곳에서 해야 하고요.
균형의 동전은 서판과 정반대의 힘을 가진 유물이에요.
서판이 영혼을 붙잡아두려 한다면, 동전은 자연의 순환을 회복시키죠."

이어 에일린이 한숨을 쉬었다. "모든 균형에는 대가가 따라요."

"무슨 뜻이지?"

"제 영혼이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해요. 서판과의 연결이 끊어져야만 하죠."

커넬은 그 말의 의미를 즉시 이해했다.
에일린의 영혼이 완전히 이승을 떠나야 한다는 뜻. 소녀를 영원히 잃게 된다는 의미였다.

"다른 방법은 없어?"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눈빛에는 오랜 체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57년이에요,"

"57년간 저는 여기 갇혀 있었어요. 제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저를 볼 수 있는 사람도 없이...
영원한 현재 속에 갇힌 채로요."


-


에일린의 목소리에 깊은 외로움이 서렸다.

"이것이 제가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일지도 몰라요.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요. 그들도 저처럼 갇혀 있으니까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넬과 에일린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묘지 가장자리에서 움직이는 형체가 있었다.

달빛에 비친 그것은 인간의 형태였지만, 움직임은 인간과 달랐다.
너무나 느리고 기계적이었다.

"시체다," 커넬이 중얼거렸다.

"서판이 우리를 느끼고 있어요," 에일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균형의 동전이 가진 힘을 위협으로 여기는 거예요. 시체들을 통해 우릴 막으려 해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식을 준비해야 해요. 지금이 가장 좋은 시간이에요."

커넬도 일어나 구마사 가방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냈다.
성수, 소금, 성화. 에일린은 자신의 뼛조각을 들고 방향을 가리켰다.

"성당으로 돌아가야 해요. 서판이 있는 곳에서 의식을 치러야 하니까요."

묘지를 빠져나왔다.
시체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들판과 언덕 곳곳에서 형체들이 나타나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에일린과 커넬은 덤불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택해 카르토 마을의 중심을 향해 내려갔다.

"왜 시체들이 우릴 따라오지?" 커넬이 물었다.

에일린은 앞서가며 대답했다. "서판이 자신을 보호하려 해요.
균형의 동전이 서판을 위협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시체들은 서판의 지배 아래 있으니까, 서판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마을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좁은 골목과 붉은 기와 지붕의 건물들이 별빛 아래 침묵하고 있었다.
곳곳에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시체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에일린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들어보세요."

커넬은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를 다듬는 소리였다.

"저건 뭐지?"

"알베르트 할아버지예요," 에일린이 설명했다.
"그분은 마을 목수였어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손녀를 위한 요람을 만들고 계셨죠.
지금도 매일 밤 같은 일을 반복하고 계세요. 몸은 기억하지만, 영혼은 이미 망가졌어요."

커넬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끝나지 않은 일의 잔영. 멈춰진 시간 속에 갇힌 영혼들.
카르토 마을은 살아 있는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이들의 감옥이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성당 뒤편으로 향했다.
가끔 시체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움직임은 너무 느려 피해 지나가기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숫자였다. 시체들이 더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마을 자체가 의식을 가진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시체들이 많아지고 있어," 커넬이 낮게 말했다.

"서판이 초조해하고 있어요. 우리가 가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성당의 뒷문에 도착했다. 터널에서 나온 후 문은 다시 닫혀 있었다.
커넬이 문을 살폈다.

"자물쇠가 바뀌어 있어," 커넬은 초조해졌다.
"이전 방법으로는 열 수 없을 것 같아."

에일린이 벽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다른 입구가 있을 거예요. 이 성당은 테네즈 시대부터 있던 건물이에요.
비밀 통로가 있을 거예요."

벽돌 사이를 더듬다가 한 지점에서 멈췄다. 낡은 벽돌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누르자 돌이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열렸다.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지?" 커넬이 놀라 물었다.

에일린은 쓸쓸하게 웃었다.
"57년 동안 이 마을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어요."


-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습한 공기가 가슴을 찔렀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성당의 내부로 이어졌다.
제단 뒤편의 작은방이었다. 벽에는 낡은 성화들과 오래된 사제복이 걸려 있었다.

커넬은 성당 내부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낮과 달리, 밤의 성당은 더 깊고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달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와 색색의 그림자를 바닥에 드리웠다.

에일린이 앞장서서 제단으로 향했다.
중앙 제단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죽음의 서판을 다시 마주했다.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판은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서판의 표면이 미세하게 고동치는 것이 보였다.
살아있는 심장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에 커넬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것이 모든 원인이구나," 커넬이 중얼거렸다.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됐어요. 여기서 끝나야만 해요."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시체들이 성당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문이 흔들리는 소리,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 서판이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에일린이 말했다.
"의식을 준비해야 해요."

커넬은 가방에서 소금을 꺼내 제단 주위에 원을 그렸다.
그런 다음 그 원 위에 십자가 모양을 그렸다. 성수를 원 주위에 뿌리고,
성화에 불을 붙였다. 붉은 불빛이 성당 내부를 비추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에일린은 제단 위, 서판 옆에 자신의 뼛조각을 놓았다.
"균형의 동전을 꺼내세요. 함께 고대의 언어로 주문을 외워야 해요."

커넬은 주머니에서 균형의 동전을 꺼냈다.
해와 달이 새겨진 동전이 성화의 불빛에 금빛으로 빛났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당 위쪽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부서졌다.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곧이어 시체 하나가 창틀을 붙잡고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노인의 형체였다. 의복은 낡고 찢어져 있었으나, 몸은 부패하지 않았다. 눈은 생기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서두르세요!" 에일린이 소리쳤다.

커넬은 균형의 동전을 서판 위에 올려놓았다. 동전이 서판에 닿는 순간, 공기가 진동했다.
서판의 표면이 잠든 호수가 깨어나듯 물결치기 시작했다. 동전은 서서히 서판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게 정상인 거야?" 물었다.

에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전과 서판이 하나가 되어야 해요. 주문을 외워야 해요. 제가 하는 말을 따라 하세요."

에일린은 눈을 감고 고대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멘트 문명의 언어였다.

"에트라 노미스, 베르다 솔럼..."

커넬은 각 단어를 신중히 따라 읊었다. 낯선 언어였지만, 이 울림이 영혼을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입에서 나오는 각 단어가 내면에서 메아리쳤다.

더 많은 시체들이 밀려들었다. 소금으로 그린 원의 경계를 넘지 못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갇힌 듯 원 바깥을 맴돌았다.
한 시체가 손을 뻗어 원을 건드리려 했지만, 손이 닿기 직전에 튕겨 나갔다.

주문을 외우는 동안, 서판의 표면이 더욱 격렬하게 요동쳤다.
균형의 동전은 이제 절반 이상이 서판 속으로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성당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커넬이 물었다.

"서판이 저항하고 있어요," 에일린이 대답했다.
"계속 주문을 외우세요. 거의 다 됐어요."

그들은 주문의 마지막 구절을 외웠다. 성당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균형의 동전이 완전히 서판 속으로 사라졌다. 서판의 표면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에일린이 말했다. "마지막 단계예요."

소녀는 서판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두려움과 결연함이 교차했다.

"내가 뭘 해야 하지?" 커넬이 물었다.

에일린은 그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얼굴에 반세기가 넘는 시간의 무게가 서려 있었다.

"균형을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해요.
서판과 동전이 하나가 되면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 거예요.
하지만 그 균형점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요."

커넬은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제가 서판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제가 그 연결을 완전히 끊어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요.
살아야 할 자는 살고, 죽어야 할 자는 죽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커넬은 충격에 말문이 막혔다.
"그럼 네가... 의식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거야?"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눈에서 빛나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바닥에 닿지 않고 공중에 머물렀다.

"희생양이 아니에요," 에일린이 말했다. "안내자요. 저는 이미 죽은 자예요.
다만 길을 잃었을 뿐이죠. 이제 다른 이들이 그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울 거예요."

서판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균형의 동전이 서판의 중심에서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커넬이 다급히 말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세바스티안 주교님께 도움을 청하면..."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형체가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긴 시간을 기다렸어요. 저를 볼 수 있고,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누군가가 올 때까지. 이건 제 운명이에요, 커넬 신부님."

그녀가 처음으로 커넬의 이름을 불렀다. 성당 밖에서 바람이 불어와 촛불들이 흔들렸다.
시체들의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졌다. 소금의 경계선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정화의 불을 밝혀야 해요," 에일린이 말했다. "제 영혼이 서판 속으로 들어가면...
축복의 불로 모든 것을 정화해야 해요. 사람들이 평안히 쉴 수 있게요."

커넬의 목이 메었다. 성수병을 꺼내 들었다.
축복의 불을 피우기 위한 준비였다.

"에일린, 내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일린이 서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서판의 표면에 닿았다. 접촉하는 순간, 서판에서 폭발적인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은 에일린의 형체를 감싸안았다.

"고마워요, 커넬 신부님," 에일린의 목소리가 성당 전체를 채웠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반세기를 지나... 마침내 누군가 제 존재를 알아봐 주었네요."


-


형체가 빛으로 변하며 서판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눈부신 섬광과 함께 서판에 균열이 더 깊어졌다.
성당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시체들이 신음하듯 몸을 뒤틀었다. 커넬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서판의 균열이 더욱 깊어졌다. 표면 전체가 거미줄처럼 갈라지더니,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어졌다.

조각들 사이로 균형의 동전이 굴러 나왔다. 동전은 온전하지 않았다.
절반으로 나뉘어 있었고, 남은 것은 달이 새겨진 면뿐이었다.

커넬은 떨리는 손으로 동전 조각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서 따뜻하게 느껴졌다. 동전을 가슴에 품고 일어섰다.
주변의 시체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들은 머리를 들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듣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제 안식을 찾을 시간이다," 커넬이 중얼거렸다.

성수와 성화를 들고 성당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성수를 성화에 뿌렸다.
붉은 불꽃이 순간 파란색으로 변했다. 축복의 불이었다.

"생명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주여, 자연의 질서를 회복하소서.
죽음을 거부하고 생명을 붙잡아두려 했던 오만함을 용서하소서."

기도가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축복의 불을 높이 들고 천천히 돌았다.
파란 불빛이 성당 내부를 비추었다.

시체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고, 오랜 고통에서 해방된 듯한 평온함이 깃들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노인의 시체가 무릎을 꿇은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몸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편히 쉬세요," 커넬이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성당 밖으로 나가 축복의 불을 들고 마을을 천천히 돌았다.
거리에 서 있던 시체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 순간에 미소를 지었고, 어떤 이들은 고요히 눈을 감았다.
몸은 점차 흙이 되어 봄바람에 흩어졌다.

커넬은 나무 다듬는 소리를 따라갔다.
작은 작업장 안에서 늙은 목수의 시체가 계속해서 나무를 깎고 있었다.

축복의 불빛이 닿자 목수는 손에 든 연장을 내려놓았다.
얼굴에 평화로운 미소가 번졌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들던 요람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도 흙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커넬이 마을 중심 광장에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카르토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제 자연의 소리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개구리울음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가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동쪽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커넬은 지친 걸음으로 다시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내부에는 이제 서판의 흔적도, 시체들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제단은 깨끗했고, 성당은 고요했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면, 손에 남은 동전 조각은 무엇인가.

균형의 동전 절반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달이 새겨진 면만 남은 채 절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아마도 해가 새겨진 절반은 에일린과 함께 저편으로 갔을 것이다.
빛과 어둠의 균형, 삶과 죽음의 경계.

"균형," 커넬이 중얼거렸다.
"살아야 할 자는 살고, 죽어야 할 자는 죽어야 한다는 법칙."

축복의 불이 다 타들어갔다. 커넬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기도하는 동안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


아침 햇살이 성당의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금빛 패턴을 그렸다.

커넬은 일어났다. 내면에 무언가가 변화했다.
처음으로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목격한 사람의 깨달음이었다.
구마사로서의 첫 번째 시련을 견뎌낸 무게였다.

성당을 나서는 뒤로, 아침 햇살 속에 에일린의 형체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소녀도, 유령도 아닌 완전한 영혼의 모습이었다.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 이상 슬픔을 담고 있지 않았다.

"자유를 찾았길," 커넬은 속삭였다.
"그리고... 나도 네게 빚졌다."

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나갔다.
카르토 마을은 이제 죽은 마을이 되었다.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끝이었다.
언젠가는 새로운 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할 것이고, 새로운 삶의 순환이 시작될 것이다.

길가에 핀 붉은꽃을 커넬은 잠시 멈춰 바라보았다.

생명의 아름다움과 그 유한함이 가슴을 울렸다.
품속 동전 조각이 심장 가까이에서 생명을 가진 듯 울렸다.

달의 문양이 새겨진 그 조각은 잃어버린 반쪽을 기억하고 있었다.
빛은 어둠을 필요로 하고, 삶은 죽음을 전제한다. 균형은 나뉨으로써 완성된다.

동쪽 하늘에 여명이 번졌다. 세오력 153년의 봄, 구마의 첫 시험은 끝났다.
커넬은 품속의 쪼개진 동전을 다시 만졌다. 달만 새겨진 반쪽. 불완전한 균형의 증거.
그가 지불한 것보다 얻은 것이 더 컸다.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산 자의 발걸음보다 깊다."

에일린의 음성이 귓가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커넬은 이제 아벨을 향해 걸었다.
삶과 죽음, 둘 사이의 경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얇았다.
존재는 그 경계를 건너는 순간에 온전해진다.

뒤로 카르토 마을은 텅 빈 껍데기로 남았다.
바람만이 거리를 쓸며 모래를 일으켰다.

살과 뼈의 형체를 벗고,
마침내 자유로워진 그들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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