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그림자의 언약. 04
3장. 두려움의 신전
흔들리는 촛불 앞에서 커넬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두 번째 불꽃의 춤이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리나는 스승의 주름진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알아챘다.
"신부님?"
"기다려 주게," 커넬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움의 기억은... 시간도 지우지 못하는 상처를 남기지."
노인의 눈동자가 창밖 어둠으로 향했다.
리나는 스승의 시선이 현재가 아닌,
시간을 거슬러 과거 속 먼 기억을 더듬고 있음을 직감했다.
"두려움은 날카로운 칼날이야. 이 경계를 넘으려면 상처를 입는 건 불가피하지.
내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장소, 포보스 신전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
세바스티안 주교의 집무실에 침묵이 무게를 더했다.
주교는 창가에 서서 등을 돌린 채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 꼿꼿했던 어깨는 이제 세월을 견디지 못해 조금 굽어 있었다.
멀리서 수녀들의 저녁 성가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토 마을의 죽은 자들이 마침내 안식을 찾았다 하더군."
세바스티안의 차분한 음성이 방 안에 울렸다. 커넬은 고개를 들었다.
돌아온 지 이틀. 보고서 작성과 잠의 순환 속에서 체험한 일들을 정리했으나,
머릿속은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주교님."
"보고서를 읽었네. 상당히... 놀라운 내용이었어."
세바스티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빛에 새로운 표정이 스며들었다. 존중과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
"마을 주민들을 구해낸 과정을 직접 들려주겠나."
커넬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에일린과 함께했던 의식, 그녀의 희생, 이 모든 것은 너무도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제 공은 미미합니다. 다만..." 가슴팍에 걸린 작은 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었다.
주머니 속 반으로 쪼개진 동전에 손가락이 닿았다.
"길을 찾아냈을 뿐입니다. 에일린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자였습니다."
세바스티안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에일린. 보고서에 언급된 소녀로군. 수십 년 전에 죽었다던."
"맞습니다. 에일린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요."
세바스티안이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손가락이 나무 표면을 불규칙하게 두드렸다.
"동전을 보여주겠나."
커넬은 주머니에서 반쪽 동전을 꺼냈다.
달의 형상이 새겨진 은빛 조각이 주교의 책상 위로 내려앉았다.
세바스티안은 동전을 집어 들고 유심히 살폈다.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균형의 동전이... 반으로 쪼개졌군." 동전 조각을 빛에 비춰들었다.
"예상치 못한 변화야. 카르토 마을에서 이렇게 되었나?"
"네. 서판을 정화한 시점으로 기억합니다."
"나머지 반쪽은?"
"에일린과 함께... 무덤으로 돌아갔습니다."
커넬의 목소리에 떨림이 실렸다.
세바스티안은 긴 호흡을 내쉬며 동전을 돌려주었다.
"갈라진 균형은 새로운 균형의 시작일 수 있다네, 커넬."
커넬은 동전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세바스티안은 일어나 창가로 돌아갔다.
"새 임무를 맡기겠네."
"이렇게 빨리 말입니까?"
"회복이 필요하다면..."
"괜찮습니다." 커넬은 서둘러 응답했다.
수도원의 담장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에일린의 마지막 순간들,
희생의 장면이 끊임없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세바스티안은 서랍에서 낡은 양피지 지도를 꺼내 펼쳤다.
손가락이 밀레스의 북부 산악 지대 위에 멈췄다.
"포보스의 신전. 들어본 적 있나?"
커넬은 고개를 저었다.
"멘트 문명 시대의 유적이지. 두려움의 신에게 바쳐진 장소."
세바스티안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신전 주변에 괴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네. 환영에 사로잡힌 사람들,
자신의 살을 베는 사람들. 벽화에서는 피가 흘러내린다고..."
"믿기 힘든 일이 또다시..." 커넬의 눈이 커졌다.
"직접 확인해 보게. 이상 현상의 근원을 찾고, 가능하다면 해결하게.
자네의 성과를 보건대, 이번에도 잘 해낼 것으로 믿네."
세바스티안이 잠시 침묵했다가 덧붙였다.
"경계하게, 커넬. 두려움은 영혼의 가장 깊은 틈새로 파고들어 우리를 지배하려 하니."
커넬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책상 위 지도를 바라보는 순간, 에일린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스쳤다.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산 자의 발걸음보다 깊다.‘
그녀가 남긴 말의 온전한 의미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이 말이 새 임무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
밀레스 북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벌써 열흘째 길 위에 있었다. 첫 닷새는 넓은 평원을 가로질렀고,
다음 사흘은 낮은 구릉지대를 지났다. 이제 산이 본격적으로 그를 맞이했다.
달밤에는 늑대 무리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산간 마을에서는 포보스 신전에 대한 소문이 흘러나왔다.
"저주받은 곳," "미치광이들의 성지," "돌아오지 못한 자들의 무덤."
마지막 마을에서는 아무도 그를 안내하려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혼자 가셔야 합니다," 농부 하나가 말했다.
"충고 하나 드리죠. 해가 지면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마세요. 어떤 소리가 들려도."
오늘 아침, 가파른 산길이 시작됐다. 말은 조심스레 자갈길을 올랐다.
발굽을 내디딜 때마다 돌멩이들이 아래로 굴러떨어져 메아리쳤다.
바람은 때로 따뜻했다가도, 갑자기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불규칙한 기온 변화가 산이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가에 선 돌무더기들은 과거 순례자들이 쌓아 올린 것처럼 보였다.
어떤 돌무더기에는 희미한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수도원에서 보았던 멘트 문명의 글자와 유사하다고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바위 절벽 사이로 난 작은 쉼터에서 말에게 물을 주었다.
발아래로 깊은 계곡이 펼쳐졌고, 멀리 안개 사이로 작은 마을들이 보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는 맑았지만 묘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끼, 흙, 바위 냄새 너머에서 낯선 향기가 감지됐다.
오래된 문서가 타는 듯한, 아니면 금속이 부식되는 듯한 냄새였다.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냄새라 확신했다.
말이 불안하게 발굽으로 땅을 긁기 시작했다. 말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달래듯 말했다. 오랜 여행을 함께한 동반자였지만,
지금 말의 눈빛은 공포로 가득했다. 카르토 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을까.
다시 길을 오르던 중 갑자기 트인 공간에 도달했다.
좁은 산길은 넓은 고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포보스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현무암 기둥들이 반원을 이루고 있었다.
각 기둥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와 도안이 새겨져 있었고,
기둥 사이 좁은 통로는 중앙의 둥근 건물로 향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하늘을 바라보는 거대한 눈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돌기둥들은 깨지고 갈라졌으며, 이끼와 덩굴식물이 곳곳을 덮고 있었다.
신전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커넬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신전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압박감을 느꼈다.
귀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렸고, 피부는 따끔거렸다.
말은 완강하게 더 이상 나아가길 거부했다.
"이봐, 함께 가자." 부드럽게 말했지만,
말은 두 발을 땅에 고정시킨 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기다려 줘, 내 오랜 친구야. 물과 먹이는 충분히 남겨둘게."
말은 공포에 차 있었지만, 눈에는 커넬에 대한 걱정도 깃들어 있었다. "돌아올게, 약속하마."
-
신전 주변의 식물들은... 이상했다.
가시나무는 비정상적으로 크고 뒤틀려 있었고, 들꽃들은 계절에 맞지 않게 피어 있었다.
더 기이한 것은 색채였다. 자연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검푸른 색조와 어두운 적색이 뒤섞인 톤.
피부에 멍이 든 듯한 병적인 색감이었다.
신전 입구에 가까워졌을 때, 커넬은 발걸음을 멈췄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강한 느낌.
천천히 돌아섰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목소리가 고원의 적막을 깼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바람만이 기둥 사이로 휘파람처럼 불어왔다.
입구로 향했다. 돌계단을 올라 현무암 기둥 사이로 들어서려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거기까지."
커넬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신전 옆 작은 바위 뒤에서 한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끗한 머리카락과 깊게 팬 주름, 유독 빛나는 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노파였다.
낡고 퇴색한 짙은 청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신전은 모든 이를 받아들이지 않지." 노파가 지팡이에 의지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적어도 준비되지 않은 방문객은."
"실례합니다만, 당신은...?"
노파는 커넬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시선이 가슴팍에 걸린 아벨 교단의 상징물에 머물렀다.
"베르타." 그녀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지. 그리고 너는 구마사로군. 아벨에서 왔나?"
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넬입니다.
세바스티안 주교님의 명으로 신전에서 벌어지는 이상 현상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노파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이상 현상이라. 그래, 이상하지. 포보스는 늘 이상했어. 두려움 자체가 이상한 것이니까."
베르타는 신전과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멀리 언덕 아래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내 거처로 가자. 해가 곧 저물 테니." 목소리에는 거절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었다.
"포보스의 신전은 어둠 속에서 처음 마주하기엔 너무 위험하니까."
커넬은 신전을 다시 돌아보았다.
해가 기울면서 기둥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검은 손가락처럼 그를 향해 뻗어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오두막으로 가는 길. 베르타는 말이 없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졌으나 짧게 응대하거나 무시했다. 신전만 뒤돌아 응시할 뿐.
"여기서 오래 사셨습니까?" 마지막 시도였다.
베르타는 걸음을 멈추었다. 눈에 비친 측정할 수 없는 세월.
"시간은 이곳에서 다르게 흐르지." 신비로운 속삭임.
"내가 있었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테니."
-
베르타의 오두막은 바깥에서 보이는 것보다 안이 넓었다.
벽에는 말라버린 약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중앙의 화로에서는 무언가 끓고 있었다.
밤이 되자 창문으로 보이는 신전의 윤곽이 달빛 아래 더욱 음산해 보였다.
"배고프지?" 베르타가 물었다.
커넬은 고개를 저었지만, 베르타는 그의 대답을 무시하고 그릇에 뜨거운 죽을 담아 내밀었다.
죽에서는 낯선 향이 배어 나왔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말해보렴. 왜 포보스의 신전에 관심을 두게 됐지?"
커넬은 주교가 전해준 소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환각, 공포, 벽화에서 흐르는 피. 베르타는 묵묵히 듣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의 웃음이라기보다는 젊은 여자의 웃음에 가까웠다.
"피? 아니, 피가 아니야. 저건 포보스의 눈물이지."
"눈물이라니요?"
베르타가 화로 불꽃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포보스는 원래 두려움의 신이 아니었어. 경계의 신이었지. 인간들을 보호하는 방패였어."
손가락이 공기 중에 원을 그렸다. "두려움은 창이 아니라 방패였다.
위험을 알리는 신호, 우리를 지키는 본능. 인간들이 변질시켰지. 공포와 증오로 포보스를 오염시켰지."
베르타가 일어섰다. 낡은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죽끈에 매달린 검은 돌 부적.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돌이었다.
"목에 걸어. 내일 신전에 들어갈 때 도움이 될 테니."
"무슨 부적입니까?"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식을 위한 것이지. 두려움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줄 거야."
베르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내일 아침에 신전을 살펴봐. 나는 잠시 마을에 다녀올 일이 있어.
해질녘에 돌아올 테니 그때 네가 본 것을 이야기해 주렴."
커넬은 부적을 목에 걸었다. 돌은 차가웠지만,
곧 체온을 받아 따뜻해졌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커넬이 물었다.
베르타는 창밖의 신전을 바라보았다. 옆모습이 달빛에 예리하게 드러났다.
"나도 한때는 너처럼 구마사였다." 미약한 음성.
"포보스는 나에게도 한때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어."
-
아침 안개가 고원을 덮고 있었다.
커넬은 오두막을 나와 신전을 향해 걸었다.
밤새 곱*어 보아도, 베르타의 말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았다.
정말 구마사였을까? 교단의 기록에는 그런 이름이 없었는데.
목에 걸린 부적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부적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신전 계단을 올랐다.
햇살 아래 보니 신전은 전날보다는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기이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현무암 기둥 사이로 들어서자 서늘한 그늘이 감쌌다. 내부는 예상보다 넓었다.
천장은 높고 둥근 돔 형태였으며, 중앙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한 줄기 빛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벽은 정교한 부조와 벽화로 가득했다. 그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열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방패를 든 인물이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방패는 군중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벽을 따라 이동할수록 인물의 방패는 점점 작아지고, 대신 창이 손에 들려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인물이 창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벽화에서는 정말로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붉은 액체. 커넬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져보았다.
끈적하고 따뜻했지만, 피는 아니었다.
수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무에서 흐르는 진액 같았다.
신전 중앙으로 나아가자 압박감이 점점 강해졌다.
무거운 담요가 어깨를 내리누르는 듯했다. 숨이 가빠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목의 부적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커넬은 중앙 제단 앞에 서서 천장의 빛이 내리쬐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주변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첫 환각은 희미했다. 신전 구석에서 움직이는 형체.
눈꼬리로 본 형체.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이어서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벽 자체가 숨을 쉬는 듯했다.
갑자기 커다란 환영이 덮쳤다.
다시 카르토 마을에 있었다. 죽은 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들이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에일린은 없었다. 혼자였다.
시체들의 손이 뻗어 왔다.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넌 우릴 배신했다." 모든 죽은 자들이 입을 맞춘 듯 속삭였다.
"우리를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커넬은 뒤로 물러섰다. 발이 걸려 넘어졌다.
비틀거리며 제단에 부딪혔다. 차가운 돌이 등을 쳤다.
'실제가 아니다'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환영은 너무나 생생했다.
시체들의 냄새, 썩어가는 살점, 공허한 눈동자.
목의 부적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현실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커넬은 부적을 꽉 쥐었다. 그 순간 환영이 물안개처럼 흩어졌다.
다시 빈 신전에 홀로 서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질 것 같았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안 돼... 이건..." 숨을 몰아쉬며 뒷걸음질 쳤다.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통제할 수 없는 공포가 휘감았다.
거의 도망치듯 신전을 빠져나왔다.
바깥의 신선한 공기가 폐를 채웠다. 신전 계단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환영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양 떼를 몰고 가는 목동의 휘파람 소리가 산기슭 마을의 아침을 깨웠다.
커넬은 여관의 창문으로 밀레스 북부의 전형적인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포보스 신전에서의 불쾌한 경험 후, 근처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베르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그녀를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두려웠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왜 자신을 신전으로 보냈는지.
마을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커넬은 천천히 다가갔다.
검은 로브의 젊은 남자가 오자, 몇몇 사람들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벨 교단에서 온 커넬입니다."
"아벨 교단?"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허리는 굽어 있었고,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누군가 왔군요."
노인은 자신을 마을 원로 토마스라고 소개했다. 그는 커넬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토마스의 집은 작고 소박했지만 정갈했다. 그의 아내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시작됐습니까?" 커넬이 물었다.
토마스는 주름진 이마를 문질렀다. "한 3개월 전부터일까... 처음에는 사소했어요.
사람들이 악몽을 꾸기 시작했죠. 시간이 흐르며 증상은 심해졌어요.
이제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환영을 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어떤 환영입니까?"
"각자 다르지만... 대부분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본다고 하더군요."
토마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주 전, 대장장이 알라르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괴물로 변했다고 믿고 망치로..." 말을 끝맺지 못했다.
커넬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리고요?"
"알라르는 자살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마을을 떠났고요.
사람들은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해요. 잠들면 악몽이 오니까... 어떤 이들은 며칠째 깨어 있어요."
토마스는 창밖을 가리켰다. 광장 저편에는 몇몇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몸은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저들은 '깨어 있는 자들'이라고 자신들을 부릅니다.
잠들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대요."
커넬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른 마을들은 어떻습니까?"
"더 심한 곳도 있어요. 북쪽 골짜기의 라벤 마을에서는... 모든 우물물이 말라버렸어요.
서쪽 라모스 마을에서는 집단 자살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두려움보다 죽음이 낫다'라면서."
커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모스 마을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반나절 거리에요. 하지만..." 토마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혼자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저희 마을도 충분히 위험한데, 라모스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가봐야겠습니다." 커넬은 결심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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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모스 마을로 가는 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야 했다.
말을 타고 가는 내내 커넬은 포보스 신전에서의 환영을 떠올렸다.
그리고 베르타의 말들.
'두려움은 창이 아니라 방패였다.'
숲에서 나오자 라모스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이라기보다 유령촌에 가까웠다.
문들은 모두 닫혀 있었고, 거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이 공기를 채웠다.
마을 중앙 광장에 도착했을 때, 커넬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광장에는 기이한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 기둥이 땅에 박혀 있고,
주위로 장작이 둘러싸여 있었다. 화형대였다.
"누구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커넬은 돌아섰다.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눈은 깊게 움푹 들어가 있었고,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저는 아벨 교단의 커넬입니다. 도움을 드리러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속삭였다. 한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손가락은 피로 흥건했다. 손톱을 물어뜯은 흔적이었다.
"우리에겐 도움이 필요 없어요. 해결책을 찾았어요." 그녀가 화형대를 가리켰다.
"내일, 우리는 모두 함께 불속으로 들어갈 거예요. 불은 두려움을 정화합니다. 영원히."
"해결책이 아닙니다." 커넬이 말했다. "도피일 뿐입니다."
"도피?" 여자가 비웃었다. "당신은 모르는군요. 우리가 본 것들을...
우리 아이들이 겪은 일들을... 짐승들이 모두 미쳐버렸어요. 새들은 스스로를 나무에 내던졌고,
개들은 자기 꼬리를 먹어치웠어요. 어떻게 살아남으란 말입니까?"
커넬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도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포보스 신전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저는 신전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포보스?" 노인 하나가 침을 뱉었다. "저주받은 이름! 우리 조상들은 그를 숭배했지만,
우리를 배신했어. 두려움이 우리를 삼키고 있어!"
커넬은 한 걸음 다가갔다.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이틀만요.
신전으로 돌아가 문제의 근원을 찾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의심스러운 눈길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처음 말했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당신에게 주는 시간이에요.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획대로 할 겁니다."
커넬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의 공포를 이해했다. 신전에서 그가 본 환영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을 테니까.
-
해가 저물 무렵, 커넬은 다시 베르타의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노파는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간에 서 있었다.
"결국 돌아왔군." 목소리에는 질타가 아닌 이해가 담겨 있었다.
"들어오렴."
오두막 안은 여전히 약초 향으로 가득했다. 커넬은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댔다.
자신이 본 것, 그리고 라모스 마을의 상황에 대해 모두 이야기했다.
베르타는 묵묵히 듣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군."
"무엇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까?" 커넬이 물었다.
"부패. 포보스의 부패." 베르타가 화로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멘트 문명 시대에 사람들은 포보스를 경계의 신으로 숭배했어.
자신의 두려움을 맡기고, 대가로 보호를 받았지. 일종의 계약이었던 거야."
손가락으로 공기 중에 원을 그렸다. "상상해 봐. 두려움이 우리를 마비시키지 않고,
위험으로부터 경고하는 역할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유용하겠나?
포보스는 그런 존재였어. 방패의 신. 두려움을 짊어지고 경계심만을 돌려주는."
"그럼 무엇이 변했습니까?" 커넬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인간의 마음이 변했지." 베르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우리가 서로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어. 이웃을, 낯선 자를, 다른 모든 존재를...
두려움은 점점 증오로 변했지. 포보스에게 맡겨진 두려움이 너무 많아지면서,
더 이상 방패가 아닌 창이 되었어."
베르타가 일어섰다. 낡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대리석 조각이었다. 거기에는 방패를 든 남자가 새겨져 있었다.
"포보스의 거울을 보았나?" 그녀가 물었다.
커넬은 고개를 저었다. "신전 깊숙한 곳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거울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공포의 얼굴과 용기의 얼굴."
베르타의 손가락이 대리석 조각을 쓰다듬었다.
"네가 본 것은 거울에 비친 너 자신의 두려움일 뿐이야.
거울의 또 다른 면을 보면... 네 안의 용기를 볼 수 있지."
커넬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절반으로 쪼개진 균형의 동전을 꺼냈다.
"이것이 도움이 될까요?"
베르타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뭐지?"
"균형의 동전입니다. 멘트 문명의 유물이죠. 카르토 마을에서 얻었습니다."
"보여주렴." 베르타가 손을 내밀었다.
커넬은 망설였지만, 이내 동전을 건넸다.
베르타는 동전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균형... 그래, 이것이 열쇠가 될 수 있어." 동전을 돌려주었다.
"포보스의 거울 앞에서 동전을 들어 올려 보여줘. 거울은 반응할 거야."
"어떤 반응을요?"
"그건... 내가 말해줄 수 없어." 베르타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각자의 이야기는 다르니까."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알려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어.
피에트 산맥의 고대 제단. 만약 포보스의 거울을 정화하려면, 그곳으로 가야 할 거야.
제단은 멘트 문명의 성스러운 장소였어. 균형을 회복시키는 힘이 있지."
"피에트 산맥이요? 여기서 얼마나 먼가요?"
"사흘." 베르타가 말했다.
"먼저 거울과 대면해야 해. 그리고 네 안의 두려움과 마주해야 하지."
베르타는 다시 서랍으로 가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멘트어로 쓰인 보호 주문이야. 신전 안에서 읽어. 완전한 보호는 아니지만,
최소한 네 정신이 산산조각 나지는 않을 거야."
커넬은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당신... 정말 구마사였습니까?"
베르타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 일이지...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조차 희미해진 일."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가봐. 내일 아침에 다시 신전으로 가렴. 기억해,
두려움은 네 적이 아니라 일부분이라는 것을."
-
새벽녘, 고요한 안갯속에서 포보스의 신전이 어둡게 솟아 있었다.
커넬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이번에는 어제와 달리 결의에 찬 걸음이었다.
목에 베르타의 부적을 걸고, 주머니에는 멘트어 주문과 균형의 동전을 넣었다.
신전 안은 여전히 서늘했다. 벽화에서는 붉은 수지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커넬은 어제보다 더 깊숙이 들어갔다. 중앙 제단을 지나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는 아래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으로 이어졌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어둠이 짙어졌다.
커넬은 작은 등불을 켰다. 고작 몇 걸음 앞만 비출 뿐이었다.
계단 벽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의 포보스는 더 이상 방패나 창을 들고 있지 않았다. 거울을 들고 있었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원형의 방이 나타났다.
방 중앙에는 돌로 된 제단이, 그 위에는 커다란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거울의 프레임은 검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표면은... 액체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커넬은 조심스럽게 거울에 다가갔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목의 부적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것. 흐릿한 형체가 점점 선명해졌다.
세바스티안 주교가 그를 응시했다.
"넌 실패할 거야." 거울 속 세바스티안이 말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커넬은 뒤로 물러났다. 거울 속 이미지가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에일린이었다.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눈에서는 검은 눈물이 흘렀다.
"당신은 날 버렸어." 그녀가 속삭였다.
"내 희생이 헛되었어."
다음은 커넬의 어머니였다. 그가 아주 어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난.
"내가 널 지켜볼 수 없어서 미안하구나. 넌 항상 혼자였지."
이미지들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카르토 마을의 시체들, 라모스 마을의 자살을 준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커넬 자신의 모습.
하지만 그가 알던 자신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질린 눈, 창백한 얼굴, 떨리는 손.
'이건 내가 아니야.'
커넬은 속으로 되뇌었다. 의심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만약 진짜 모습이라면? 만약 정말로 이렇게 약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존재라면?
베르타의 말이 떠올랐다.
'두려움은 네 적이 아니라 일부분이라는 것을.'
커넬은 주머니에서 멘트어 주문을 꺼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낯선 언어의 단어들을 읽기 시작했다.
"엔 포라스, 엔 샤브라스, 벨리스 투란..."
주문을 읽을수록 목소리는 더 강해졌다.
거울 속 이미지는 더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지만,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문이 끝나자, 커넬은 균형의 동전을 꺼내 들어 올렸다.
"나는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너는 나의 일부분이다."
동전이 갑자기 거울을 향해 날아갔다. 자석에 이끌리는 쇠처럼.
거울 표면에 닿자마자 빛을 발했다. 액체 같던 거울이 이내 단단해지더니,
안의 형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거울 속에는 밝은 빛 속에 서 있는 다른 커넬의 모습이 보였다.
평온했고, 강인했으며, 두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뒤로는 수많은 얼굴들이 있었다.
그가 구했던, 혹은 앞으로 구할 사람들의 얼굴.
"이것이..." 커넬이 속삭였다.
"이것이 진짜 나인가?"
거울 속 형상이 미소 지었다. 그때, 거울 표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균열은 거울 전체로 퍼져나갔다. 파괴가 아닌 변형이었다. 거울이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점점 더 밝은 빛이 방을 가득 채웠다.
커넬은 눈을 감아야 했다. 귀에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종소리가 뒤섞인 듯한.
빛이 서서히 가라앉자, 커넬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거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는 둥근 모양의 은빛 방패가 놓여 있었다.
방패의 표면에는 그가 본 모든 얼굴들이 미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커넬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예상보다 가벼웠다.
방패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차가운 금속 느낌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깨달았다. 포보스는 두려움 그 자체가 아니라,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존재였다.
방패는 우리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적절히 활용할 때 형성되는 보호막이었다.
커넬은 방패를 들고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신전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방패에 반사되어 벽화에 닿았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벽화에서 흘러내리던 붉은 수지가 멈추었다.
벽화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새로 그려진 것처럼.
포보스가 방패에서 창으로, 다시 방패로 변화하는 과정이 이제는 완전한 순환으로 보였다.
두려움은 보호가 되고, 보호는 용기가 되고, 용기는 다시 적절한 두려움으로 이어지는.
커넬은 신전을 나왔다.
바깥세상은 들어갔을 때보다 밝고 조화로웠다.
방패를 들고 베르타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
베르타는 오두막 앞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은 커넬이 들고 있는 방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공했군." 그녀가 말했다. 질문이 아닌 확인이었다.
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이... 방패로 변했습니다."
"방패." 베르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포보스의 진정한 모습이지. 경계의 신. 보호의 신."
방패를 내려놓고 베르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베르타님, 당신은 분명 평범한 노파가 아닙니다. 누구십니까?"
가만히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수천 년의 세월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기억하는 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멘트 문명의 마지막 기록자. 내가 보고, 경험하고, 알게 된 것들을 보존하는 것이 나의 임무지."
"그럼... 포보스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군요."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한때 그의 신관이기도 했어."
베르타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누구보다 젊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포보스에게 전달했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두려움이 달라졌어. 더 어둡고, 더 독성이 강해졌지.
서로를 향한 두려움, 증오로 변질된 두려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포보스는 오염되었어. 방패에서 창으로."
"그럼 제가 얻은 이 방패는..." 커넬이 물었다.
"포보스의 정화된 형태지." 베르타가 방패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이제 다시 본래의 역할을 할 수 있어. 완전한 정화를 위해서는 피에트 산맥의 제단으로 가야 해."
"제단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의식을 거행해야 해. 균형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의식을." 베르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건 내일의 일이야. 오늘은 네가 이룬 성취를 기뻐하자."
둘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베르타는 특별한 약초차를 끓였고, 그들은 조용히 앉아 차를 마셨다.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방패의 표면에 부딪혔다.
빛은 방 안 가득 무지개 빛깔로 퍼져나갔다.
"라모스 마을에 돌아가야 합니다." 커넬이 말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자살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줘야 해요."
"그렇지." 베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방패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거야.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르타는 생각에 잠겼다. "방패를 들고 마을 중앙에 서. 사람들의 두려움을 들어줘.
모든 사람의 두려움을. 방패가 받아들일 거야."
"그들의 두려움을 받아들인다고요?"
"포보스의 본래 기능이 그거였어. 인간의 두려움을 짊어지고, 그 대신 용기를 돌려주는 것."
베르타가 설명했다. "방패는 이제 네 것이야. 너를 통해 포보스의 본래 기능을 다시 수행하게 될 거야."
-
다음 날 아침, 커넬은 방패를 들고 라모스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화형대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미 불을 지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커넬이 방패를 들고 그들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방패를 들어 올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방패가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분, 저는 약속대로 돌아왔습니다." 커넬이 말했다.
"신전에서 포보스의 방패를 얻었습니다. 방패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커넬은 방패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었다.
"여러분의 두려움을 말해보세요. 이 방패가 받아들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한 어린 소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는... 어둠이 무서워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방패에서 한 줄기 빛이 나와 소녀를 감쌌다.
소녀의 얼굴에서 공포가 사라지고, 평온함이 퍼져나갔다.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내 가족을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려워."
또 다른 빛줄기가 그를 감쌌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했다.
각각의 고백마다 방패는 빛줄기를 내보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둘씩 안도감이 번졌다.
마지막으로, 화형대를 주도했던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얼굴은 여전히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커넬은 방패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방패가 알 테니까요."
방패를 그녀의 가슴 앞에 들었다. 가장 밝은 빛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몸을 떨더니 커넬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
"이제 괜찮아요." 커넬이 위로했다. "두려움은 우리를 해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거예요. 중요한 건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죠."
의식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화형대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새로운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커넬은 그들에게 일주일 후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피에트 산맥의 제단에서 의식을 마치고 나서.
-
다시 베르타의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노파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했어." 그녀가 말했다.
"이제 남은 건 제단뿐이야."
"베르타 님," 커넬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저... 이 방패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단에서 의식을 마친 후에요."
베르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 선택이야. 교단으로 가져갈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요?"
"아니면 내게 맡길 수도 있지."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나는 이곳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킬 거야.
방패가 있으면 포보스 신전을 원래의 목적대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커넬은 방패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자신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동시에, 이것이 자신의 여정의 끝이 아님을 알았다.
더 많은 유물들, 더 많은 비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식 후에 결정하겠습니다." 마침내 대답했다.
베르타는 미소를 지었다.
"현명한 선택이야. 서두르지 마. 길은 아직 멀고, 너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까."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 산맥이 저녁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들고 있었다.
"포보스의 방패는 네 안의 두려움과 마주할 용기를 주었어.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걸 잊지 마."
커넬은 자신의 주머니 속 균형의 동전 조각을 만졌다.
나뉜 균형은 새로운 균형의 시작이라는 세바스티안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그는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겠습니다." 커넬이 말했다. "피에트 산맥으로."
베르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거울 속의 진실과 마주하게 될 거야."
커넬은 방패를 들어 올려 마지막 햇살에 비추었다.
방패 표면에 새겨진 무수한 얼굴들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맞서 싸운 이들의 얼굴.
그리고 그 중심에, 커넬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
리나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커넬의 이야기가 끝나자 촛불들이 허공에서 춤추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깐의 침묵과 더해, 방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방패는 어떻게 되었나요?" 리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커넬의 눈동자에 어둠이 깃들었다. "그건...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네."
앞으로 몸을 기울여 촛불을 가리켰다.
"거울 속의 진실은 나를 피에트 산맥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더 깊은 비밀과 마주했단다."
리나는 책상 위의 촛불들을 살폈다.
스승이 처음 켰던 일곱 촛불 중 하나는 카르토 마을의 이야기를 마친 밤에 이미 꺼진 상태였다.
이제 포보스 신전의 서사가 끝났고, 두 번째 촛불도 임무를 마칠 때가 되었다.
커넬 주교가 손을 뻗어 두 번째 촛불을 향했다.
첫 번째와는 달리, 손바닥으로 빛을 감쌌다. 불꽃은 손길에 응하듯 점점 작아져 사라졌다.
"두려움이여, 그대를 기억하노라."
목소리는 바람보다 가벼웠으나, 울림은 방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리나는 스승의 회상마다 달라지는 촛불과의 작별 의식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구마사의 비의일까, 커넬 주교만의 사적인 의례일까.
궁금증은 입술 사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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