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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순례자] - 4장. 거울 속의 진실
675 2025.04.05. 04:07

순례자, 그림자의 언약. 05


4장. 거울 속의 진실
















빛을 쫓는 그림자가 어디에 닿으랴.

눈을 감았다, 떴다. 불꽃이 봉긋 피어올랐다.
커넬 주교의 주름진 손이 세 번째 촛불을 가리켰다.

투명한 빛을 품은 불꽃은 수정처럼 맑았으나,
가까이 다가서면 내부에서 무지개 빛깔이 소용돌이쳤다.

방 안은 숨 한 점 없는 고요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 촛불만은 누군가의 숨결에 반응하듯 끊임없이 흔들렸다.

"리나, 거울을 들여다볼 때 너는 무엇을 보느냐?"

그의 젊은 제자 리나는 질문의 심연을 가늠하듯 침묵으로 응답했다.

두 번째 촛불 이야기를 통해 두려움의 본질을 어렴풋이 깨달았으나,
그녀에게 스승의 물음은 여전히 해도를 건너는 격이었다.

"제 얼굴이요."

커넬 주교의 목소리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눈가의 주름이 깊게 파였고, 촛불에 그림자가 짙어졌다.

"그 너머는?"

"그 너머라면... 제 뒤에 있는 것들이겠지요."

"그뿐인가?"

리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정 같은 촛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도 무지개 색채가 어른거렸다.
단 하나의 불꽃이 무수한 색으로 빛을 나눠내는 신비로움이었다.

"주교님은 무엇을 보시나요?"

"내게 비치는 건 질문자에 따라 달라지지...
거울의 진정한 쓰임새는 비추는 게 아니란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촛불 주위에 원을 그렸다. 주문을 새기는 듯한 동작이었다.
불꽃이 그의 손길을 따라 춤추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내가 세 번째로 마주한 시험은 진실에 관한 것이었다.
진실은 때로 우리가 가장 멀리 달아나고 싶은 그 자리에 서 있지."

리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녀의 눈빛에 의문이 남아있음을 커넬 주교는 놓치지 않았다.

"두려움 없는 지혜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물음 없는 대답이 공허하듯."

그는 깊은숨을 들이켰다.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여행자의 첫 호흡 같았다.

"베르타의 조언과 포보스의 방패를 짊어지고, 나는 피에트 산맥으로 향했다..."


-


베르타의 오두막을 떠날 시간이 왔다.

창을 통해 흘러드는 희부연 새벽빛에 풀잎의 이슬이 반짝였다.
벽난로에 남은 불씨가 마지막 숨을 토했다.

밤새 타오르다 재로 변해가는 장작더미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커넬은 비좁은 침상에서 일어나 몸을 폈다. 창밖으로 안개가 마을을 감싸 안았다.

방패를 챙기는 그의 등 뒤로 베르타가 테이블 위에 작은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주름진 그녀의 손에서 오랜 세월의 단단함이 배어났다.

"피에트의 허브다. 산을 오르다 고산병이 오면 차로 끓여 마셔라.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쑤시기 시작할 때 즉시 마시되, 과하게는 말거라. 강한 환각을 부를 수도 있으니."

주머니를 열자 달콤함 뒤에 숨은 쓴맛 같은 향기가 퍼졌다.
산의 지혜가 압축된 향이었다. 커넬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하나 더." 베르타는 또 다른 주머니를 내밀었다.
"피가 멈추지 않는 상처엔 이걸 바르고, 멘트어로 '셀모스 레테라안'을 세 번 외워."

"셀모스 레테라안," 커넬이 소리 내어 발음했다. "무슨 뜻입니까?"

"피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라, 정도지. 너는 제대로 된 치유 주문을 배우지 못했으니까."

커넬은 베르타의 선물을 가방에 신중히 넣었다.
그녀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뚝뚝했으나, 깊숙한 곳에 숨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제단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더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길을 잃으면..."

베르타는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현실과 다른 차원을 꿰뚫고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텔라리스의 길은 발로만 찾을 수 있지.
멘티스로 보고, 아브라카스로 느끼는 수밖에."

커넬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늘 이랬다.
질문에 얽매이지 않고, 대답보다는 암시를 던졌다. 답답했지만, 그녀의 말은 결국 진실로 이어졌다.

베르타가 다가와 포보스의 방패에 손을 겹쳐 얹었다.
그녀의 손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듯한 열기가 전해졌다.

"포보리안이 되어라. 방패는 네 안에 있는 것을 비추고, 밖의 것들을 반사한다."

그녀의 말은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이번엔 경고의 무게가 실렸다.
다가올 위험을 예견하는 무거움이었다.

커넬이 등에 방패를 맸다. 평소보다 무거웠다. 앞으로의 길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전언 같았다.
단순한 물리적 무게를 넘어선 무언가를 지고 가는 듯했다. 과거와 미래, 가능성과 두려움의 무게였다.

문턱을 넘기 직전, 베르타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돌아오는 길에 보일 것과 보이지 않을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길."

베르타의 목소리에서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다.
하나의 임무가 아닌 영혼의 순례를 암시하는 울림이었다.

커넬은 뒤돌아** 않았다. 고개만 살짝 끄덕였을 뿐.
재회의 순간에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는 예감이 가슴속에서 번졌다.


-


하늘에서 송골매 한 마리가 날갯짓했다.

잠시 커넬의 머리 위를 맴돌며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날개로 그린 원이 유난히 완벽했다.

세 번 원을 그린 후 송골매는 피에트 산맥 방향으로 사라졌다. 구름은 맑은 하늘에 흰 선을 그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하늘은 지상과는 다른 차원의 푸른 심연이었다.

피에트 산맥으로 가는 길은 처음엔 완만했다. 마을에서 이어진 오솔길이 숲으로 깊이 들어갔다.
키 큰 참나무들 사이로 빛줄기가 스며들었다. 숲은 세상의 소음을 삼키는 침묵을 품고 있었다.

가끔 새들의 지저귐만이 그 침묵에 균열을 냈다.

숲의 끝자락을 지나자 땅이 가파르게 솟구쳤다.
마을이 점차 장난감처럼 작아졌다.

초원과 농경지가 작은 천 조각처럼 아래쪽으로 펼쳐졌다.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들은 거센 바람을 견디며 휘어져 있었다.

피에트 산맥의 정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화살 같았다.
소나무들은 모두 한쪽으로 굽어 그 자신을 한없이 산을 향해 던지고 있었다.

첫날의 산행은 순탄했다.

간간이 숨이 턱에 차는 가파른 구간도 있었으나, 여행 자체는 명확했다.
한쪽으로는 심연의 계곡, 반대편으로는 날카로운 바위벼랑.

그 틈새로 난 좁은 길을 커넬은 묵언의 수행자처럼 걸었다.
방향을 잃으려 할 때마다 송골매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를 이끌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완벽한 시기와 방향이었다.

저녁이 되자 그는 바위 아래 움푹 파인 곳에 야영지를 마련했다.
노란 들꽃이 피어 있는 곳이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베르타가 준 건포도 빵을 먹으며, 방패를 꺼내 보았다.
낮 동안에는 무겁고 어두운 금속이었으나, 지금은 달빛을 받아 비단처럼 빛났다.

자신이 방패를 이끄는지, 방패가 자신을 이끄는지 알 수 없었다.

둘째 날 아침, 커넬은 꿈에서 깬 듯했으나 악몽이었다.
전날 오른 고도가 모두 사라졌다. 어젯밤 야영했던 그 자리에 다시 서 있었다.

같은 노란 들꽃, 같은 바위 형태,
심지어 모닥불을 피웠던 재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시야의 착각일까? 아니었다.
모든 세부 사항이 말해주고 있었다ㅡ그는 출발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내내 한 방향으로만 걸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혼란에 빠진 그의 등에서 방패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반사된 것인지, 방패 자체의 빛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빛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길이 다른 느낌이었다.

둘째 날은 '길'이란 개념 자체의 허구를 가르쳐주었다.

확실해 보이던 오솔길이 절벽으로 끝나기도 했고,
길이라 부를 수 없는 바위 틈새가 유일한 통로가 되기도 했다.

모든 지도와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들. 모든 상식을 뒤흔드는 경험이었다.
길이란 더 이상 A에서 B로 이어지는 연결이 아니었다. 이제 길 자체가 목적지처럼 느껴졌다.

둘째 날 밤,
작은 산의 호수 옆에서 커넬은 잠을 청했다.

물가에 앉아 방패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방패 표면에 떨어졌다.
방패 속에 별들의 세계가 담겼다. 방패 속 하늘과 실제 하늘 중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 궁금했다.

둘 다 진실이면서 동시에 모두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세상 그 자체를 창조하는 게 아닐까?

셋째 날, 폭풍이 왔다.

소나기를 넘어선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아침부터 하늘은 불길한 회색빛으로 변해있었으나,
커넬은 그 폭풍의 속도와 강도를 예측하지 못했다.

옷이 순식간에 젖었고, 살갗에 닿는 추위는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높은 고도에서 부는 바람은 평지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살과 뼈 사이로 파고드는 얼음 조각 같았다.

그는 허둥지둥 바위 아래 움푹 들어간 곳으로 몸을 피했다.
비바람이 모든 방향에서 그를 갈가리 찢으려 들었다.

자연의 분노 앞에 인간의 나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동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호흡이 얕아지고, 손가락 끝의 감각이 사라졌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등에 맨 방패에서 온기가 번졌다.
처음엔 환각이라 생각했으나, 열기는 점점 강해졌다.

방패를 풀어 앞에 들자,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생겨나 비와 바람을 막았다.
작은 실드가 형성된 것이다. 방패 아래에서 젖은 옷을 말릴 수 있었다.

방패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모닥불처럼 그를 따뜻하게 감쌌다.

"고맙네." 그의 입술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그 감사가 향하는 대상은 분명치 않았다.
포보스를 향한 것인지, 베르타를 향한 것인지, 혹은 등에 맨 방패에게 말을 건네는 것인지.


-


폭풍은 하루 종일 계속됐다.

바위 아래 몸을 웅크린 채 그는 베르타가 준 허브를 우려 마셨다.
따스한 액체가 혈관을 타고 퍼져가며 의식이 확장됐다.

폭풍에 악의는 없었다. 그저 산의 호흡일 뿐.
방패가 만든 보호막은 거부가 아닌 받아들임의 형태였다.

자연을 막아내는 게 아니라,
자연의 일부가 되어 흐르게 하는 조화의 형태.

넷째 날, 더 가파른 절벽이 나타났다.
갈수록 험난해지는 길. 때로는 수직에 가까운 벼랑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발밑의 바위들이 굴러 떨어졌다.
몇 번이고 발을 헛디디는 위기가 찾아왔다.

한 번은 거의 추락할 뻔했다.
그 순간 등의 방패가 무게중심을 급격히 옮겨, 기적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방패는 살아있는 존재처럼 그와 함께 호흡했다.
때로는 갑자기 무거워져 그를 대지에 고정시키고, 때로는 가벼워져 등반을 도왔다.

넷째 날 정오를 지나, 그는 숨겨진 길을 발견했다.
고대에 조각된 듯한 돌계단이었다.

많은 부분이 무너졌지만, 명백히 인간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었다.
우연이 아닌 오래된 순례의 길이라고 직감했다. 베르타가 말한 텔라리스의 길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깨어진 돌계단 사이에서 이정표를 발견했다.
희미한 멘트어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포라스 엔 멘타리스, 아바타 센투리안.'

베르타에게 배운 멘트어를 더듬어 해석했다.
'두려움은 마음의 방패, 균형의 시작이다.'

이어지는 더 희미한 문장도 있었다. '엘리오스 셀레노스, 테란 메타리스.'

'빛과 어둠은 진실의 두 얼굴이다.'

그는 방패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금속 표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비친 얼굴은 낯설었다. 때로는 살아온 세월보다 늙어 보이고, 때로는 소년처럼 어려 보였다.
거울은 시간의 경계를 지우고 있었다. 순간순간 자신이 아닌 다른 얼굴들도 스쳐 지나갔다.

일렁이던 표면이 잠시 고요해지면 다시 자신의 모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얼굴이 과연 '자신'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순례길을 따라 오르며,
그는 베르타가 말해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가 직접 발견하게 한 것은 아닐까?
말로 전할 수 없는 지식, 몸과 마음으로 체험해야만 하는 것들.
어쩌면 길 자체가 가르침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섯째 날, 안개가 산을 삼켰다.

발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갯속에서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방향을 잃었다. 앞으로 나아갈지, 뒤로 물러설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서 있었다.
방패는 등에 붙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방패 역시 길을 잃은 듯했다.

그는 고대 순례자들의 마음을 상상했다.
그들도 이런 완전한 안개에 갇혀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길을 찾았을까? 아니면 길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멈춰 서서 기다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돌연 바람이 불어 안개를 걷어냈다. 이윽고 커넬은 보았다.
절벽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작은 암자를.

산허리에 매달린 듯 위태로운 암자는 수백 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낸 듯했다.
산과 하나 된 자연스러움. 동시에 매 순간 무너질 듯한 위태로움이 공존했다.

산길을 더듬어 올랐다. 안개가 다시 짙어질 때면 암자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환영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안개가 잠시 걷히는 순간마다 암자의 윤곽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실존하는 형상인지,
아니면 그의 여행을 인도하는 영적 투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


드디어 암자 앞에 다다랐다. 작은 나무문이 눈에 들어왔다.
세월의 흔적이 깊게 밴 낡은 문이었으나, 문 위의 별자리 문양만은 시간을 초월한 듯 뚜렷했다.
그가 알던 어떤 별자리도 닮지 않은 독특한 배열이었다.

빗물을 피해 허락 없이 문을 두드렸다.

응답이 없자 문을 밀었다.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발걸음이 멈췄다.

암자의 내부는 외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공간의 왜곡.

명상에 잠긴 노인이 앉아 있었다.

등불도 없이 앉아 있었으나, 노인의 주변만 은은한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자신이 빛을 내뿜는 듯했다. 노인은 한동안 커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천천히 눈을 뜬 노인은 불청객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다. 네가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다만."

노인의 목소리는 깊고 울림이 있었다. 산의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였다.
커넬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산속 은둔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노인은 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은 풍화된 바위처럼 주름이 깊게 파였으나, 눈빛만은 소년의 그것이었다.

길고 허연 수염이 가슴까지 이어졌다.
단순해 보이는 그의 의복 가장자리를 자세히 보니 미세한 수정 장식들이 달려 있었다.
빛이 닿으면 수정들이 무지개 색으로 반짝였다.

노인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공중에 기호를 그렸다.
그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잠시 파란빛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세바스티안이 보냈나? 아니면 베르타? 둘 다인가?"

이름들을 들은 커넬은 혼란이 가중됐다.
세바스티안 신부는 아벨 교단에서 그를 가르친 스승이었다.

어떻게 이 은둔자가 세바스티안과 베르타를 알고 있는지,
더구나 어떻게 자신을 그들이 보냈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도 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베르타가...
방패를 정화하려면 피에트 산맥의 제단으로 가라고 했을 뿐입니다."

"방패?"

노인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눈동자에 빛이 번쩍였다.
오랫동안 산속을 헤매던 사냥꾼이 마침내 찾던 사슴을 발견한 듯한 눈빛.

커넬이 등에서 방패를 내리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움직임에 나이를 느낄 수 없었다. 대신 태고의 위엄과 힘이 온몸에서 풍겨났다.

가까이 다가온 노인의 손바닥에는 별자리 모양의 오래된 화상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문 위에 있던 것과 똑같은 별자리였다. 방패에 손을 대자 방패가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방 안의 그림자들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오래 기다렸으나, 결국 왔구나."

"무엇을 기다리신 겁니까?"

"포보스의 방패와 그것을 들 자격을 증명한 자."

노인이 방패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방패의 빛이 줄어들었다.
완전히 꺼지진 않고, 표면에 푸른빛이 얕게 감돌았다.

"네 앞에 두 길이 있다. 방패를 바로 제단으로 가져가는 길과 먼저 진실을 보는 길."

"어느 쪽이 맞는 길입니까?"

"맞고 틀린 길은 없다. 다만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의 목소리에 확신이 깃들었으나, 경고의 색채도 감돌았다.
어떤 선택이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암시였다.

"저는... 진실을 보고 싶습니다."

커넬의 대답은 처음엔 망설임이 묻어났으나, 말이 끝날 무렵엔 확신으로 가득 찼다.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방패 정화를 위함만이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그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진정으로 갈망했던 것은 이해였다.
에일린과 포보스, 지금까지의 모든 만남 뒤에 숨은 실타래를 풀어내는 이해.

노인의 눈에 찬사가 어렸다.

"현명한 선택이다. 대다수는 도착점만 중요하게 여길 뿐,
걷는 과정 자체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지."

노인은 그를 암자 뒤편으로 안내했다.

좁은 바위틈을 지나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작은 정원이었다.
산 정상 가까운 이런 곳에 정원이라니. 일곱 가지 색의 꽃이 완벽한 동심원을 그리며 심어져 있었다.

가장 바깥은 깊은 자주색, 안쪽으로 들어가며 파랑, 연두, 노랑, 주황, 빨강이 차례로 이어지고,
중앙에는 순백의 꽃이 피어 있었다.

"여기 앉아라."

노인이 정원 가장자리 바위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일곱 개의 동심원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커넬이 앉자 노인은 그의 무릎 위에 방패를 올려놓았다.

"눈으로 보려치 말고 존재로 보아라. 귀로 듣지 말고 영혼으로 느껴라."

노인은 고대의 호흡법을 전수했다.
들이쉴 때는 빛을, 내쉴 때는 어둠을 의식하라 했다.

처음에는 일반적 명상법으로 보였으나, 몇 번의 호흡 이후 변화가 시작됐다.
주변의 소리가 멀어지고, 감각은 날카로워졌다.

꽃향기가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듯했고,
땅속 깊은 곳의 진동까지 피부로 감지됐다.

호흡이 깊어질수록 방패의 표면이 물든 듯 변화했다.

처음에는 잿빛 금속이 호수처럼 일렁이더니, 점차 거울의 광택을 얻어갔다.
평범한 거울과는 달랐다. 방패 표면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열렸다.
들여다보는 커넬의 눈동자 너머로 또 하나의 세계가 숨 쉬었다.

"거울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노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했다. 더는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커넬의 뇌 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내면의 소리, 자신의 생각과 구분할 수 없는 울림이었다.

"방패는 이미 온전하지만, 만들어낸 자의 영혼은 성장 중이다."

커넬은 방패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집중했다.

처음엔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내 얼굴이 흐려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노년의 자신, 어린 시절의 자신,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많은 다른 자아들이 거울 속에서 겹쳐졌다.
모든 가능한 자아가 동시에 존재하는 불가능한 순간이었다.

이제 그는 과거를 보았다.
열두 살 때 처음으로 구마사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문 기억,

세바스티안 신부에게 첫 축복 주문을 배웠을 때의 설렘.
과거의 기억들이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다른 현재의 모습들도 보았다.

구마사가 되지 않았다면 살았을 삶들. 땅을 일구는 농부로서의 삶,
세상을 여행하는 상인으로서의 삶, 검을 든 병사로서의 삶.

더 이상한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삶의 경로들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단편들이 지나갔다.

노년의 자신,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 한 번도 가지 않은 낯선 장소들.
미래는 단 하나로 고정되지 않았다. 무수한 가능성이 갈래처럼 펼쳐졌다.
각각의 선택, 결정에 따라 미래가 달라졌다.

"균형의 동전이 둘로 쪼개진 것은 실수가 아니라 필연이었다."

노인의 말에 커넬은 품속에서 달이 새겨진 동전 조각을 꺼냈다.
방패에서 동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균형의 동전.

카르토 마을에서 에일린을 통해 얻은 유물은 첫 번째 시험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시험이 세 번째 시험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이제야 분명해졌다.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동전은 물음이요, 방패는 대답의 절반이다."

노인이 다시 공중에 기호를 그렸다. 이번에는 더 복잡한 패턴이었다.
파란빛 흔적이 공중에 더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다른 사람처럼, 아니 훨씬 더 오래된 존재의 목소리로 변했다.

"너는 총 일곱 개의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 두 개는 이미 지났다."

커넬은 동전을 다시 품에 넣었다. 방패 표면의 빛이 점차 줄어들었다.
진동하던 푸른 광채가 천천히 사그라들며, 깊은 호수가 폭풍 후 잔잔해지듯 방패에 평온이 찾아왔다.

"일곱 개의 시험? 제가 왜 시험을 받아야 합니까?"

노인은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와 답했다.

"네가 시험을 선택한 게 아니라, 시험이 너를 선택했다."

추가 설명은 없었다. 놀랍게도 더 필요하지도 않았다.
에일린과의 만남, 포보스 신전에서의 경험, 지금 이 산에서의 시험들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모든 사건은 연결되어 있었다. 별들이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듯,
그의 삶의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바깥의 안개가 걷히고 밤이 내렸다.

암자에서 보낸 하룻밤, 그는 무수한 꿈을 꾸었다.
카르토 마을, 에일린, 포보스 신전, 라모스 마을 사람들... 그리고 베르타.

꿈속에서 이들은 같은 이야기를 각기 다른 관점에서 들려주고 있었다.
균형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둠과 빛, 죽음과 삶, 두려움과 용기가 서로를 정의하는 이야기.

마지막 꿈에서 베르타가 말했다.

"포보스는 방패였고, 방패는 거울이었지. 그리고 거울은 질문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겼다.
포보스는 두려움을 주는 신이 아니라, 모든 경계의 수호자였다.

방패는 막아내는 도구만이 아니라,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거울은 대답이 아닌 물음을 던졌다. 진정한 지혜는 항상 물음에서 시작된다는 진리.


-


다음 날 새벽, 은둔자가 그를 깨웠다.

별들이 아직 하늘에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밤과 새벽이 만나는 경계의 순간.

"제단으로 갈 시간이다."

은둔자는 준비할 것도 없이 즉시 길을 나섰다.
암자를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 험난한 길을 천 번은 걸어본 듯한 확신이 묻어났다.
커넬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산길을 오르며 커넬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은둔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앞서 걸을 뿐이었다.
그의 걸음은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가볍고 확신에 찼다.
때로는 커넬조차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빨랐다.

"당신과 베르타는 어떤 관계입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계속해서 올랐다. 길은 더욱 가팔라졌고, 공기는 점점 희박해졌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런데도 은둔자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고도가 높아질수록 활력이 넘쳤다.

"일곱 정신의 신관들이란 무엇입니까?"

마침내 은둔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에 슬픔의 그늘이 스쳤다.

"세상에 남은 비밀 중 하나다. 아직은 알 때가 아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그의 실루엣이 보였다.
천 년의 고독과 인내가 한 사람의 형상을 이룬 듯했다.

그는 평범한 은둔자가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려온 존재였다.

마침내 제단에 도착했다.

산의 정상 가까이, 안개와 구름 위로 솟은 평평한 지대가 나타났다.
아홉 개의 거대한 돌판이 세 겹의 동심원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에는 별 모양의 홈이 파여 있었다.
주변의 짙은 안개가 갈라지며 이곳에만 맑은 하늘이 열려 있었다.

돌에서 미세한 울림이 전해졌고, 공기에는 금속성 맛이 감돌았다.
번개가 치기 직전의 긴장감과 비슷했다.

"이곳은 멘트 시대에 세워졌다. 균형의 제단이라 불렸지."

은둔자가 드디어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역사보다 훨씬 오래전, 이곳에서 멘트 시대의 현자들은 빛과 어둠의 균형을 조율했다.
그들은 균형만이 세상을 지탱한다고 믿었다."

은둔자는 제단 주변을 정리하고 특별한 허브를 태웠다. 연기가 제단을 감쌌다.
그 향기는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숨이 막힐 듯 강렬했다.

그런데도 그 냄새에는 묘한 친숙함이 있었다.
오래전에 잊었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방패를 중앙에 놓아라. 별 모양 홈 정중앙에. 방향은 동쪽을 향하게."

커넬은 지시에 따랐다. 방패가 홈에 놓이자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처**터 그곳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은둔자가 멘트어 주문을 가르쳤다.

"엔 포라스 벨라튼, 셀리스 아브라스 투란."

커넬이 따라 읊자, 방패에서 미세한 빛이 퍼져나갔다.
은둔자는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들은 제단 주위를 원을 그리며 걸었다.
안쪽 원, 중간 원, 바깥 원을 번갈아가며 일곱 번의 완전한 원을 그렸다.
매번 원을 돌 때마다 주문을 한 번씩 읊었다.

"두려움이여, 네 본래 형태로 돌아가라."

주문을 일곱 번 읊었을 때, 커넬은 품에서 균형의 동전 조각을 꺼내 방패 위에 올려놓았다.
달이 새겨진 조각이 방패 위에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실제 달빛을 받은 듯 은은하게 빛났다.

"이제 네 피를 한 방울, 방패 위에 떨어뜨려라."

은둔자가 화산석으로 만든 칼을 건넸다. 날카로운 검은 돌로 깎아낸 의식용 칼이었다.
커넬은 망설였다. 이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의문이 들었다.

피의 의식은 종종 어둠의 마법에 쓰였다.
아벨 교단에서는 금지된 의식이었다.

"이건 어둠의 의식이 아닙니다. 구마사로서..."

"빛과 어둠의 경계가 이곳보다 모호한 곳은 없다." 은둔자가 그의 말을 끊었다.
"모든 치유는 상처에서 시작되고, 모든 지혜는 희생에서 피어난다."

커넬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면의 직감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방법이야말로 그가 찾던 정화의 길이라고.
결심을 굳힌 그는 손가락을 살며시 베어 붉은 한 방울을 방패 위에 떨어뜨렸다.

세상이 변했다.

방패에서 빛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불과 물, 바람과 흙이 하나로 어우러진 원소의 춤이었다.

주변 공기가 푸른빛에서 금빛으로 물들었고,
멘트어 주문이 수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대지가 맥박 치듯 진동했고,
자연의 원리마저 일순간 흔들려 커넬의 몸이 땅에서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의식은 확장됐다. 그는 더 이상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느끼고 있었다.
시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커넬은 보았다.

포보스의 진정한 모습을.

한 손에 방패, 다른 손에 등불을 든 수호자의 형상이었다.
포보스는 두려움의 신이 아니라 경계의 신이었다.

경계를 지키고, 어둠 속에서 길을 비추는 자.
두려움은 적이 아니라 도구였으며, 지혜의 시작점이었다.

멘트 문명의 흥망성쇠도 보았다.
처음에는 균형 잡힌 사회였으나, 점차 두려움에 지배되어 갔다.

너무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은 두려움 자체를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포보스 신전에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두려움을 맡겨 안식을 얻었으나,
점차 그것을 악용했다. 자신의 두려움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고, 두려움으로 타인을 지배했다.

자신의 미래 가능성들도 보았다.

삶의 경로들이 갈래를 치며 펼쳐졌다.
모든 선택의 결과들. 자신이 구마사로 성장하는 모습, 주교가 되는 모습,

그리고... 다른 길들도 있었다. 어둠에 굴복하는 모습, 균형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랐다. 어떤 선택이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었다.

의식이 절정에 달했다.
방패가 완전히 정화되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균형의 동전 조각이 방패 표면에 녹아들며 새로운 문양을 만들어냈다.
방패 중앙의 포보스 문장이 변형되어, 이제는 달과 태양이 융합된 형태로 바뀌었다.

은둔자의 얼굴에 경이로움이 번졌다.

"이런 일은 처음 보는군. 방패가 너를 선택했다."

그의 목소리에 경외감이 실렸다.
그조차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의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화 직후, 예상치 못한 현상이 일어났다.
방패 표면이 다시 거울로 변했다.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두려움이 아닌 다른 종류의 환영이 비쳤다.

이번엔 더 심층적이고 근원적인 영상들이 펼쳐졌다.

커넬의 과거가 화폭처럼 펼쳐졌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추억, 아벨 교단에 입문하기로 한 결정,
첫 구마 의식을 배웠던 날까지. 기억의 재생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각 사건 속에 감춰진 비밀스러운 의미를 읽어냈다.

어린 시절 느꼈던 두려움은 사실 세상에 대한 경외였다.

구마사가 되기로 한 결정은 세상을 치유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됐다.
첫 구마 의식을 배울 때 느낀 거부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다른 모습들도 보았다.
구마사가 되지 않았다면 살았을 삶들.

이번에는 단순히 다른 삶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가능성이 이미 자신 안에 존재함을 깨달았다.

농부로서의 자신은 인내와 자연과의 조화를 상징했다.
상인으로서의 자신은 탐험 정신과 연결의 욕구를 대변했다.

병사로서의 자신은 용기와 결단력의 표현이었다.
모두 자신의 다른 측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이었다.

미래의 단편들. 노년의 자신, 다른 제자들, 한 번도 가** 않은 미지의 장소들.
그는 미래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만들어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자체였다.
삶은 도달해야 할 종착점이 아니라, 매 순간 경험하고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정보, 너무 많은 가능성, 너무 많은 진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지만 점차 질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는 깨달았다. 이 모든 모습이 자신의 일부임을.
선택한 삶도, 선택하지 않은 삶도 모두 그의 가능성이었음을.

그가 본 무수한 자아는 실제로 모두 '자신'이었다.
진정한 자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임을.

우리는 우리가 내리는 선택의 총합이면서,
동시에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해했다.

"두려움은 내가 아닌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일부다."

"그렇다." 은둔자의 목소리가 그의 깨달음에 화답했다.
"두려움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커넬의 내면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마는 악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행위다."

"정확하다." 은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한 치유는 제거가 아니라 회복이다. 균형을 되찾는 것이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마지막 진실을 받아들였다.
"거울이 보여주는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지식이다."

카르토 마을에서 에일린이 남긴 마지막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산 자의 발걸음보다 깊다." 이제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과 두려움은 단절이 아닌, 연결의 다른 형태였다.
죽은 자의 지혜는 우리 안에 남아 계속해서 우리를 인도한다.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


의식이 끝나고, 방패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세상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커넬에게 세상은 이제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더 강렬하게, 더 깊게, 더 의미 있게 보였다.

그들은 암자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려오는 길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순탄했다.
산이 길을 열어주는 듯했다. 은둔자와의 진중한 대화가 이어졌다.

"당신과 베르타는 어떤 관계입니까?"

은둔자는 창밖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세월의 무게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일곱이었다. 일곱 정신의 신관들. 이제 남은 건 우리 둘뿐."

그의 목소리에 천 년의 슬픔이 스며있었다.

"일곱 정신? 멘탈로니아의 신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신이라... 그들은 신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지.
우리가 그들을 신이라 불렀을 뿐이다."

커넬은 이 대화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역사와 비밀에 닿아있음을 직감했다.
아벨 교단에서도 멘탈로니아의 일곱 정신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로만 취급되었다.
실제로 그들을 섬기는 신관들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 방패의 마지막 수호자는 누가 되어야 할까요?"

"그 결정은 네가 내려야 한다."

커넬은 깊이 생각했다. 방패의 의미가 이제 더 분명해졌다.
의식을 통해 방패의 진정한 목적을 체감했다.

"이 방패는 인간의 두려움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두려움을 지혜로 변화시키는 도구입니다."

은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패는 보호하는 게 아니라, 보는 이에게 진정한 자아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정화된 방패는 모든 이에게 같은 힘을 주지 않는다. 그 사람의 본질을 강화할 뿐이다."

커넬은 세 가지 선택을 놓고 고민했다.
방패를 자신이 가져가기, 베르타에게 돌려주기, 또는 은둔자에게 맡기기.

아벨 교단에 방패를 가져간다면, 더 많은 이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교단의 권력 구조에서 방패가 본래 목적과 다르게 쓰일 위험도 있었다.

은둔자에게 맡긴다면? 그는 분명 방패의 의미를 깊이 이해했다.
그러나 이미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방패는 세상 속에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은둔자의 경고가 이어졌다.

"방패는 권력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이어서 그는 베르타의 과거와 희생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그녀가 평생을 포보스의 진정한 뜻을 지키며 살아왔는지.

어떻게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평안을 희생했는지.
그녀는 포보스 신전의 마지막 진정한 신관이었으며, 방패의 의미를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었다.

"베르타는 한때 일곱 신관 중 하나였다. 포보스의 신관. 그녀는 선택했다.
산에 은거하는 대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세상의 두려움을 직접 마주하기로."

은둔자의 눈에 존경의 빛이 어렸다. 오랜 동료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이 드러났다.

커넬은 결정했다.

"방패는 베르타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녀가 진정한 수호자입니다."

그의 결정은 권력 대신 지혜를, 지배 대신 인도를 택한 것이었다.
베르타는 평생을 포보스의 참된 정신을 지키는 데 바쳤다.

방패를 그녀에게 돌려주는 행위는 소유권의 문제를 넘어,
방패가 원래의 존재 이유를 되찾도록 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은둔자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오래 기다려온 순간이 마침내 온 듯했다.

"지혜로운 선택이다. 이제 네 앞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덧붙였다.

"베르타에게 이 말을 전하거라.
'텔라카 모레다 센투리안.' 그녀는 이 말의 뜻을 기억할 테니."

커넬은 그 말을 기억했다. 의미는 알 수 없었으나,
정확히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제단을 다시 찾았다.

은둔자는 마지막 의례를 행했다. 방패를 커넬에게 건네기 전, 방패 뒷면에 작은 상징을 새겼다.
조각칼로 정교하게 새긴 문양은 일곱 별이 원을 그리는 형상이었다.

"이 문양은 일곱 정신의 약속을 상징한다. 방패는 정화되어 본래의 목적을 되찾았으니,
이제 두려움을 지혜로 변화시키는 도구로 쓰일 것이다."

은둔자와 작별할 시간이 왔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모든 길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커넬은 제단에 작은 돌탑을 쌓았다. 감사의 표시이자, 다음 순례자를 위한 안내였다.
떠나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어왔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희귀한 새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세 번 원을 그리며 하늘을 돌았다.
좋은 징조였다.

하산은 오르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길은 분명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지나온 모든 장소가 다른 얼굴을 보였다.
처음 보는 듯 생생하면서도, 오랜 벗처럼 친숙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변했다. 이제는 아름다움 이면의 본질이 보였다.
방패가 없이도 내면의 균형은 더 단단해져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서 목동들과 나무꾼들을 만났다.
그들과 대화하며, 커넬은 자신의 변화를 체감했다.

이제 사람들의 말에 담긴 두려움과 희망을 더 명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을 판단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무섭지 않으셨습니까? 피에트 산은 위험하다고 들었는데요."
젊은 나무꾼이 물었다.

"두려움도 있었죠. 하지만 두려움 자체가 적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은 때로 우리를 지키는 방패가 되기도 하니까요."

나무꾼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커넬은 괜찮다고 여겼다.
모든 깨달음은 각자의 시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


베르타의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커넬은 방패를 내밀었다.

"이 방패는 원래부터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베르타의 눈에 감동이 어렸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벗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방패를 받았다.

"네가 올바른 선택을 했구나. 방패는 사람이 아니라 균형 자체에 봉사해야 하는 법이지."

그녀는 방패 뒷면의 상징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다.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일곱 별의 약속... 그가 아직도..."

"은둔자께서 말씀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텔라카 모레다 센투리안'."

베르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 듯했다.

"고맙다. 네가 있어 참 다행이구나, 커넬."

그녀는 방패로 포보스 신전을 원래 용도에 맞게 복원할 계획을 밝혔다.
이제 신전은 다시 경계와 균형의 장소가 될 것이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곳이 아니라,
두려움을 지혜로 승화시키는 곳으로 거듭날 것이다.

"네 앞에는 더 많은, 더 어려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너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커넬은 아벨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신의 깨달음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했다.

표면적 구마와 진정한 균형 회복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바스티안 신부는 이해할까, 아니면 이단으로 여길까?

커넬은 이런 걱정들을 접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배운 진실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었다.

커넬은 마지막으로 밀레스 북부의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새로운 여행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딛으며, 거울 속에서 본 무수한 가능성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든 길이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는 진리는 이제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닌,
그의 존재 자체에 새겨진 깨달음이 되었다.


-


커넬 주교가 세 번째 촛불 주위로 손을 둥글게 움직였다.

수정같이 맑던 불빛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사라졌다.
방 안에 남은 네 개의 촛불이 그의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리나, 거울이란 우리를 비추는 도구가 아니란다.
거울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존재지."

리나는 숨을 고르며 조용히 물었다.

"그럼 방패는 어떻게 되었나요? 아직도 베르타와 함께 있나요?"

커넬 주교의 눈이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네. 그녀와 방패는... 방패는 스스로의 운명을 찾았을거야.
모든 존재에게는 각자의 운명이 있는 법이니까."

"주교님께서는 방패 속에서 무엇을 보셨는지요?"

"나는 내가 될 수 있었던 모든 자아를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지.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임을.
진실은 때로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는 것을."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이해의 빛이 어렸다.

"다음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요?"

커넬 주교는 네 번째 촛불을 가리켰다.
깊은 자주색 불꽃이었다.

"다음은 공감에 관한 이야기란다.
이야기는 가장 어두운 밤, 잊힌 한 저택에서 시작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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