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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순례자] - 5장. 미쳐버린 저택
641 2025.04.11. 17:42

순례자, 그림자의 언약. 06


5장. 미쳐버린 저택





















울림이 멎지 않았다.

포보스 신전을 떠난 지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귓가에는 비명소리가 맴돌았다.
커넬은 처마 밑에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교회의 담장 너머로 빗줄기가 도시를 씻어 내렸다.

푸른빛 돌담이 젖어들고,
성스런 글자들이 빛을 잃었다.

누군가 다가왔다. 세바스티안이었다.

그의 손에는 포도주가 담긴 주전자와 두 개의 잔이 들려 있었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와 같은 간격으로 커넬에게 다가왔다.

"거울 속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커넬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줄기 빗물이 지붕에서 떨어져 작은 물웅덩이에 동심원을 그렸다. 시간의 파문.

"집이 보였습니다."

세바스티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놀라움과 의구심 사이의 무언가.
그는 포도주를 따랐다. 붉은 액체가 잔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모습은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네가 태어난 곳?"

"아니요. 제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게 제 집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흥미롭군."

포도주만이 그들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스승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포도주 속에 비친 얼굴처럼, 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선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대는 변했다, 커넬."

"알고 있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조금 웃었다. 웃음은 커넬이 알던 것과 달랐다.
더는 스승이 제자에게 짓는 웃음이 아니었다. 서로를 인정하는 구마사 사이의 웃음에 가까웠다.

"래비아의 서부 지방에 베일라드 저택이라는 곳이 있다네.
루어스 건국 이전부터 지금까지, 그곳에는 시간이 얼어붙은 채로 있다더군."

"얼어붙은 시간이요?"

"그래. 움직이는 가구들, 스스로 연주되는 악기들,
어떤 이들은 유령 무도회까지 보았다고 하지. 언제나 항상 황혼인 그곳에서."

커넬의 손가락이 포도주 잔 테두리를 맴돌았다. 그의 손끝에서 잔이 미세하게 울렸다.
곡조 없는 노래.

"가보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임무가 아니네. 네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네 방식대로 가보기를."

세바스티안은 품속에서 작은 자수정 펜던트를 꺼냈다. 보랏빛 돌은 깊은 바다처럼 빛을 삼켰다.
은사슬에 매달린 그 장신구에는 미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베일라드 가문의 문장으로 알려졌다는 저울 모양이었다.

"베일라드 가문은 저울을 문장으로 삼았지. 균형과 정의의 상징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 의미가 비틀어졌다고 한다."

커넬은 팬던트를 받아 들었다. 차갑고 묵직했다. 자수정 속에서는 작은 안개가 맴도는 듯했다.
손에 쥐자 희미한 온기가 퍼져 나왔다.

"자수정 속 저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영혼을 재는 것 같군요."

"예리한 관찰이다."

세바스티안은 빈 잔을 들어 빗물을 받았다.
투명한 액체가 붉은 포도주의 자국을 씻어 내렸다.

"베일라드의 마지막 백작부인이 있었지. 다이애나라는 이름의.
그녀가 금지된 정서 마법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있어. '기억의 감옥'이라는 마법을."

"그런 마법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마법이지." 세바스티안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멘트 문명의 유물을 사용한다면..."

그는 말을 끊었다. 커넬은 끊긴 이야기 속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았다.
스승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커넬이 스스로 발견하길 바라는 무언가를.

비가 작은 시내를 이루어 돌계단을 따라 흘러내렸다.

커넬은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기억의 감옥.
그 세 단어가 그의 마음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래비아의 서부 지방은 안개로 유명했다.

산과 계곡 사이에 흐르는 안개는 시간이 응결된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유령의 호흡'이라 불렀다.
커넬은 말을 타고 길 없는 산비탈을 올랐다. 등 뒤로 두고 온 마을 아드렌은 이미 안갯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제 만난 아드렌의 여관 주인은 베일라드 저택에 대해 경고했다.

"당신이 구마사라 해도 가지 마십시오.
저택엔 악마가 아닌 슬픔이 있으니까. 당신도 쫓아낼 수 없을 겁니다."

그 남자의 눈에는 두려움보다 더 깊은 감정이 스며 있었다.
공포도, 경외도 아닌... 연민에 가까운.

커넬은 웃었다. "슬픔은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입니다."

여관 주인은 잠시 커넬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다른 구마사들과는 다르군요.
그래도 소용없어요. 그곳의 슬픔은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깊으니까."

그가 창문을 닫자 마당의 닭들이 갑자기 소란을 피웠다.
특별한 이유 없이. 햇빛은 창틀을 비추었지만, 방 안은 온통 그늘로 채워졌다.

그날 밤, 커넬은 마을 변두리에 사는 노파를 찾아갔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그녀는 초라한 오두막에 홀로 살고 있었다.
노파의 집 근처에 이르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오래된 자장가였다. 커넬이 문을 두드리자, 노래는 끊어졌다.

"들어오지. 기다리고 있었다만."

노파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희미한 빛을 머금고 있었지만, 몸은 이미 반쯤 죽음에 잠식당한 듯했다.

"기다리고 계셨다니요?"

"당신처럼 저택을 찾아가는 이들은 항상 먼저 나를 찾아오지.
오래된 이야기는 그렇게 전해지는 법이거든."

노파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더듬었다.

다이애나가 래비아에서 가장 빛나던 때였다. 아름답고도 철의 의지를 지닌 여인.
베일라드 가문의 마지막 피를 이어받은 그녀는 조상의 유산을 지키고자 했다.

"다이애나의 결혼식 날, 래비아 전체가 들썩였네. 조나단 백작과의 혼인이었지.
사랑은 없었어. 정치적 거래였지. 그녀의 재산과 명망, 백작의 군사력과 정치적 수완이 맞물린..."

노파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조나단은 배신자였어.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
그는 다이애나의 등 뒤에서 베일라드 가문의 적들과 손을 잡았지.
그리곤 단 하룻밤에 모든 것이 무너졌어."

노파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집 아래 지하에 빈 공간이라도 있는 양.

"무도회. 베일라드 저택의 마지막 무도회. 래비아의 모든 귀족들이 초대받았지.
그날 밤, 조나단은 다이애나의 모든 소유권을 빼앗는 계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어. 그녀가 거부하자..."

노파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치 눈앞에서 그 광경을 다시 보는 듯했다.

"조나단은 그녀 앞에서 다른 여자와 춤을 추기 시작했어. 자신의 새 애인이었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이애나의 완벽한 굴욕. 그녀의 마음이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고들 말하지."

노파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커넬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톱이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날 밤 이후, 아무도 다이애나를 찾지 못했어. 저택은 폐쇄되었고, 문은 굳게 잠겼지.
그러나 매년 그날이 되면, 저택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

커넬은 무심결에 물었다. "그날이 언제죠?"

노파의 손이 더 단단히 그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이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오늘."


-


멀리서 저택이 보였다.

안개가 걷히며 드러난 그 모습은 시간이 멎은 듯했다.
숲 너머로 첨탑이 솟아 있었고, 붉은 기와가 황혼빛에 물들어 있었다.

커넬은 말을 세웠다. 붉은 하늘이 저택 위에 떠 있었다.
커넬의 눈앞에서 해는 지고 있었지만, 저택 주변만은 영원한 황혼에 사로잡힌 듯했다.

시간이 멈췄다. 아니, 구겨졌다.

저택은 죽은 게 아니었다. 잠들었다. 그러나 잠이 아닌 다른 무언가.
첨탑은 부서졌고, 창문은 깨졌으며, 기둥들은 덩굴에 감겼다.

그러나 베일라드 저택은 과거의 영광을 놓치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안갯속에서 날아온 까마귀 한 마리가 저택의 지붕에 앉았다. 새의 울음이 침묵을 찢었다.
그 소리에 저택 안의 무언가가 응답하는 듯, 창문 하나가 저절로 열렸다 닫혔다.

커넬은 말에서 내려 대문 앞에 섰다.

녹슨 쇠창살이 길게 신음했다.
그가 손을 대기도 전에 대문은 스스로 열렸다.

정원은 한때 아름다웠을 것이다. 지금은 엉클어진 덤불과 가시나무가 뜰을 점령했다.
마른 분수대, 깨어진 대리석 조각상들, 죽은 장미덩굴 사이로 그는 걸어갔다.

갑자기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 커넬은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소리가 들렸다.

먼지를 일으키며 그가 남긴 자국을 따라 무언가가 걸어온 흔적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를 따르고 있었다.

현관에 이르자 저택의 진정한 크기가 드러났다.
루어스의 수도원보다도 컸다. 무너진 벽 사이로 내부를 엿볼 수 있었다.

입구의 대리석 바닥은 오랜 세월의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아래의 화려했던 문양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베일라드 가문의 문장ㅡ균형의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

"정의의 여신."

누군가가 그의 말을 받는 것 같았다. 다섯 번의 메아리가 돌아왔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다른 목소리였다.

굵은 남자의 목소리, 앳된 아이의 목소리, 쉰 노파의 목소리, 들뜬 젊은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자신의 목소리.

저택은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중앙 홀에서 세 개의 계단이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고,
무수한 방과 복도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수십 개의 초상화가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베일라드 가문의 조상들.
그들의 눈동자가 모두 커넬을 *는 것만 같았다. 한 인물의 초상화 앞에서 커넬은 멈췄다.

창백한 얼굴에 강인한 눈빛을 지닌 여인. 금관을 쓰고 균형의 저울을 들고 있었다.
초상화 아래의 명패에는 '다이애나 베일라드'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복도를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갔다. 어느 순간 저택 안의 빛이 달라졌다.

창문 밖은 여전히 황혼이었다. 해는 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듯했다.
그러나 저택 안의 공기는 이미 밤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이상하군."

커넬이 중얼거렸다. 그때,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돌아보려는 찰나, 오른쪽의 거대한 거실 문이 스스로 열렸다.

나를 초대하는 것인가? 커넬은 저항하지 않았다.

거실은 저택의 다른 곳보다 훨씬 보존 상태가 좋았다.
커다란 벽난로 위의 초상화, 장식장의 도자기들, 피아노, 소파와 의자들.
단지 모든 것이 먼지와 거미줄로 덮여 있었을 뿐이었다.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아벨의 교회에서는 종소리가 시간을 알려주었지만,
이곳에서는 하늘이 변하지 않았다. 그는 피아노 옆에 앉아 기다렸다. 뭔가 일어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촛대가 먼저였다. 은으로 된 팔이 천천히 구부러졌다.
죽은 관절이 움직이는 것처럼. 팔을 뻗어 그 끝의 초에 불을 붙였다.

그다음은 거실의 양탄자였다. 스스로를 들어 올렸다. 마루의 먼지를 떨어내려는 듯,
혹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몸을 뒤틀어 펴는 짐승처럼.

피아노의 건반이 저절로 움직여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소리는 없었다. 현실의 공기가 아닌 기억 속의 공기만을 진동시키는 유령의 음악.

이어 옷장이 열리고, 그 안에서 드레스가 떠올랐다. 몸 없는 드레스.
붉은색 벨벳이 공기 중에 부유하더니 춤추기 시작했다.
한 벌, 두 벌... 점점 더 많은 옷들이 나와 홀 가운데서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형체 없는 시종들이 잔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픔의 만찬."

커넬이 중얼거렸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요, 아주 오래된 슬픔의 잔치죠."

돌아보니 소년이 서 있었다.
열 살쯤 되어 보였다.

창백한 피부, 짙은 갈색 머리카락. 평범한 아이였다.
다만 발밑에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기 사람들은 모두 누구지?"

소년은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에는 미소가 없었다. 죽은 웃음이었다.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여기 있어요. 항상.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걸 봐요."

"살아있는 사람들?"

"가끔요. 대부분은 당신처럼 궁금해서 오죠.
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아요.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소년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커넬은 고개를 돌렸다.
계단 위에 그림자가 서 있었다. 여인의 형상.

"다이애나?"

소년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 이름을 말하면 안 돼요!"

바로 그 순간, 저택 전체가 진동했다.
거실의 가구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천장을 향해 날아갔다.

소년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커넬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소년을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는 것은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 빛이 돌아왔을 때, 거실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낡고 먼지 쌓인 공간이 아니었다. 바닥은 윤이 났고, 촛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였다.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의 형상이 있었다.
반투명한 형체들. 귀족복을 입은 남자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 무도회였다.

그들은 커넬을 ** 못했다. 그에게 부딪혔을 때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계단을 향해 있었다.

이윽고 순간적인 침묵. 그리고 유령 악단이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느리고 우아한 왈츠. 그 선율이 커넬의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음표들이 그의 영혼에 상처를 냈다.

계단 위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다이애나.


-


그녀는 달랐다.
다른 유령들은 연기처럼 허물어졌지만, 이사벨라는 얼음 조각처럼 단단했다.

쉽게 깨어질 것 같으면서도, 결코 녹지 않을 것 같은. 검은 드레스가 바닥을 스치며 흘렀고,
그녀의 눈에서만큼은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눈동자.
그 얼굴의 고요한 절망이 커넬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왔다.
무도회장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키 큰 남자, 어깨에 금색 견장을 단 군인. 조나단 백작인가?

다이애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둘의 움직임은 점점 일그러졌다.

남자의 표정이 냉담해졌고, 다이애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갑자기ㅡ남자가 그녀의 손을 놓았다. 다이애나는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에게 다가갔다.
곧이어 그녀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이애나를 향한 비웃음, 그 여인을 향한 열정. 모든 것이 명백했다.
저 남자는 조나단 백작이다.

모든 시선이 다이애나를 향했다. 수치심, 조롱, 동정, 냉소가 뒤섞인 시선들.
다이애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군중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회오리처럼 돌았다. 원을 그리며.
모두가 다이애나를 둘러싸고,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음악은 더 빨라졌다. 춤추는 사람들의 형상이 부자연스럽게 꼬이고 늘어났다.
얼굴들이 일그러졌다. 지옥도.

조나단과 그의 애인이 군중 사이에서 다가와 다이애나 앞에 섰다.
그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계약서였나?

다이애나는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조나단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그는 다이애나의 손목을 잡았다. 강제로 서명을 시키려는 듯.

커넬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의 손은 다이애나를 통과했다.
환영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갇혔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저 목격할 뿐.

조나단의 손아귀에서 다이애나가 몸부림쳤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멈추었다.
깊은 분노가 그 자리를 채웠다. 격정에 몸을 떨며 그녀는 조나단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언가를 소리쳤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입술의 움직임은 분명했다.

"영원히 기억하라."

순간 저택 전체가 뒤틀렸다. 마룻바닥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벽이 안으로 구부러지고, 천장이 낮게 내려앉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음악이 끊겼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뒤엉켰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췄다.

저택이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춤추는 사람들도, 조나단도, 그의 애인도 사라졌다.
커넬 앞에 다이애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어붙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녀의 목소리는 깊은 바닷속에서 오는 듯했다.
어둠에 잠긴 메아리.

"커넬입니다. 아벨 교단의 구마사입니다."

"또 구마사군요." 그녀의 입술이 비웃음처럼 일그러졌다.
"많은 구마사들이 왔다 갔어요. 쫓아냈죠.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십시오."

다이애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은 필요 없어요."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커넬의 주변이 휘청거렸다. 그는 갑자기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저택의 도서관이었다. 벽면 가득 책들이 놓여 있었고, 중앙에는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살아있는 다이애나. 그녀의 앞에는 두꺼운 책과 양피지,
그리고 기이한 형태의 장치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은색 원반을 조각하고, 그 위에 글자를 새기고,
붉은 액체ㅡ피ㅡ를 떨어뜨렸다.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는 절박했다.

커넬은 다가가 그녀가 만드는 것을 보았다.

멘트 문명 시대의 문자들. 그가 아는 마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주문들.
그러나 중심에는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기억의 감옥'

커넬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그런 마법은 없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마법이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의식을 치르는 이사벨라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노와 결의의 눈물이었다.

순간, 문이 열리고 여러 명의 경비병이 들어왔다.
그들 뒤에는 조나단 백작이 서 있었다.

"당장 중단하시오, 부인!" 조나단이 외쳤다.
"당신의 미친 계획은 여기서 끝이오."

다이애나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단지 더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내가 당신 가문의 모든 것을 가져간 것으로는 부족했나?
마법 금지법에 저촉되오. 처벌받을 것이오."

다이애나는 이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인간의 감정이 사라졌다.

"당신이 빼앗은 건 재산과 명예뿐이 아니에요. 내 영혼을...
하지만 기억만은 앗아가지 못할 거예요. 내 슬픔은 영원히 남을 거예요."

조나단이 경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체포하라!"

경비병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늦었다. 다이애나는 이미 의식을 완료했다.
은빛 원반이 붉게 빛나더니 폭발적인 빛을 내뿜었다. 빛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장면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조나단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공포로 가득했다. 침대 옆에는 의술사가 서 있었다.

"그는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술사가 말했다.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뿐..."

시간이 다시 휘청거렸다.

또 다른 장면. 조나단의 애인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늙어가기 시작했다.

피부가 주름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눈이 움푹 들어갔다.
비명을 지르며 거울을 내던졌지만, 모든 거울이 같은 모습을 비추었다.

다음 장면에서는 무도회에 있던 귀족들이 하나씩 등장했다.

어떤 이는 광기에 사로잡혀 벽을 두드리며 비명을 질렀고,
어떤 이는 자신의 살을 뜯어내며 괴성을 질렀다.

또 다른 이는 끝없는 악몽에 시달리며 잠들지 못했고,
또 다른 이는 그림자에게 쫓기며 미쳐갔다.

조나단과 함께했던 모든 귀족들이 하나씩 미쳐가거나,
병들거나,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들. 커넬은 말없이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저택의 무도회장으로 돌아왔다.
이사벨라는 무도회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저택에 혼자 남겨진 여인.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저주했군요," 커넬이 말했다.

다이애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눈물이 없었다.

"저주가 아니에요. 기억이죠. 내가 한 일은 그들이 그날 밤을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 것뿐이에요.
나를 배신한 사람들이, 내 슬픔을 기억하게 한 거예요."

"하지만 당신도 여기 갇혔습니다. 이 저택에, 그 순간에."

다이애나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슬프고도 공허한 미소.

"선택이었어요. 내 슬픔이 영원히 남도록...
내가 그들에게 한 일이 영원히 기억되도록..."

다이애나의 형상이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수면 위에 떠 있는 얼굴처럼 일렁였다. 그녀는 한 걸음 커넬에게 다가왔다.

"당신은 다른 구마사들과 달라요. 당신은... 이해하려 하는군요."

"당신의 슬픔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다이애나는 웃었다. 비통한 웃음이었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내 슬픔의 깊이를 알지 못해요. 아무도 몰라요."

커넬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보여주세요."

다이애나의 눈이 커졌다.
의심, 두려움, 그리고 희미한 희망이 그 눈에 스쳤다.

"정말로 그걸 원하세요? 내 슬픔을 느끼길?...
위험해요. 당신을 집어삼킬 수도 있어요."

그의 영혼을 꿰뚫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 없이는 도울 수 없고요."

다이애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커넬의 손에 닿으려는 순간, 저택 전체가 흔들렸다.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모든 벽에서 울려 퍼졌다.

유리창이 깨져 파편이 날아들었다.
촛불이 일제히 사그라들었다.

"안 돼!" 다이애나가 외쳤다.
"그가 오고 있어요. 당신을 보호할 수 없어요."

"누가?"

"조나단! 그도 이 감옥의 일부가 되었어요. 그의 영혼은 내 슬픔만큼이나 강력해요.
그는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벽이 갈라지고 바닥이 흔들렸다. 커넬은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문득 세바스티안이 준 펜던트가 생각났다.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이애나의 얼굴에 공포가 스쳤다.
"도망치세요! 지금 당장! 그가 당신을 죽일 거예요!"

커넬은 다이애나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물러났다.

"안 돼요! 내 슬픔이 당신을 집어삼킬 거예요.
저주는 감정을 먹고살아요. 새로운 희생자를 갈구하죠."

천장에서 석고가 떨어졌다. 유리창이 깨졌다. 벽에 걸린 모든 초상화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멀리서 사나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깊고 어두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다이애나, 내 사랑... 영원히 여기 있어야 해..."

"가세요!" 다이애나가 절규했다. "그는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커넬은 물러서지 않았다. 커넬은 목에서 자수정 펜던트를 풀어냈다.
자수정 속의 저울 문양이 강렬한 자주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당신을 도울 방법이 있을 겁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약속합니다."

이사벨라의 눈에 믿음과 불신이 교차했다.
"돌아오지 마세요. 위험해요."

"돌아오겠습니다. 당신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커넬이 자수정 펜던트를 움켜쥐자 자줏빛이 번쩍였다.
그는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저택 밖으로 내던져졌다.

정원 잡초 위에 나뒹굴며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밤이었다. 별빛 가득한 진짜 밤. 저택 주변만 황혼에 갇혀 있을 뿐.

그의 손에는 여전히 펜던트가 꽉 쥐여 있었다. 가슴속엔 무언가 무거운 것이 내려앉았다.
이사벨라의 슬픔 한 조각이 그에게 옮겨온 듯했다. 심장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숨이 가빠졌다. 눈물이 그의 시야를 흐렸다.

커넬은 천천히 일어났다. 저택을 바라보았다.
창문들이 모두 환히 밝혀져 있었고,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도회는 계속되고 있었다.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의 순간.

그리고 그 창문 하나에 다이애나의 형상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아드렌 마을로 돌아온 커넬은 여관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자수정 펜던트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은사슬에 매달린 보랏빛 돌 속의 문양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균형의 저울. 희미한 불꽃.

그는 창가에 앉아 저택 방향을 응시했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으로 세상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슬픔이란 무엇인가. 세바스티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슬픔은 가장 깊은 마법의 원천이다. 분노는 강렬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진다.
두려움은 날카롭지만 직면하면 무너진다. 그러나 슬픔... 슬픔은 영원하다."

베일라드 저택에는 슬픔이 응결되어 있었다. 다이애나의 슬픔, 그리고 조나단의 고통.
두 개의 강력한 감정이 서로를 붙잡아두는 쇠사슬이 되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멘트 문명 시대에 가장 강력한 마법사들은 감정을 물질로 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쁨은 빛이 되고, 분노는 불이 되고, 두려움은 얼음이 되고...
그리고 슬픔은? 슬픔은 무엇이 되었을까?

책장을 넘겼다. 마을에서 얻은 낡은 마법서였다.
촛불 아래 멘트 문명의 흔적을 더듬던 손이 멈췄다. 거기 있었다. 기억의 감옥.
아니, 원래는 '기억의 동굴'이란 이름이었다.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한 주술.

그러나 슬픔이란 불순물과 뒤섞이면서 변질되었다.
기억을 지키는 마법이 기억을 가두는 감옥으로.

해결책이 필요했다. 다이애나를 풀어줄 방법. 그리고 이는 조나단의 해방 역시 의미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감옥이었다. 복수와 회개가 만든 감옥.

커넬은 또 다른 책을 펼쳤다.

구마의 기술에 관한 서적이었다. 마지막 장에는 가장 위험한 의식이 있었다.
'공감의 춤'이라 불리는 의식. 구마사가 악령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이었다.
매우 위험한 의식이었다. 악령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면 구마사의 영혼이 파괴될 수도 있었다.

"공감의 춤..."

커넬은 중얼거렸다. 그가 집으로 여기는 교단에서 세바스티안은 절대로 이 의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너무 위험하다고. 그러나 지금 그가 알고 있는 다른 방법으로는 다이애나를 구할 수 없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끝없이 추락하는 꿈.
그리고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커넬은 다이애나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잃은 고통.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절망.
그리고 그 슬픔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하는 집착.

그는 자신의 슬픔을 헤아렸다. 열두 살에 부모와 헤어져 교단에 맡겨진 상처.
살아가면서도 늘 따라다니는 뿌리 뽑힌 듯한 외로움. 그러나 그의 슬픔은 다이애나의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의 꿈에 다이애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혼자서. 조나단은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형상은 끊임없이 변했다.
때로는 잘생긴 장교로, 때로는 썩어가는 시체로, 때로는 연기처럼 형체 없는 존재로.

"다이애나."

커넬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춤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돌아왔나요? 당신은 자유로운데."

"당신의 춤에 함께하고 싶어서요."

다이애나의 얼굴에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보았다.
두려움? 희망? 의심?

"나와 춤을 추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요."

"알고 있습니다."

다이애나가 손을 내밀었다.
커넬이 그 손을 잡으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커넬의 가슴속은 이미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밤, 다시 베일라드 저택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무도회에 함께할 것이다.
공감의 춤을 통해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고, 그녀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비록 그 대가가 자신의 자유일지라도.


-


"주교님께서 '기억의 감옥' 마법을 처음 경험하신 거군요."

리나의 목소리에 커넬 주교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들은 여전히 작은 방에 앉아 있었다. 촛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세 개가 이미 꺼져 있었고, 네 개는 아직 불타고 있었다.

그중 하나ㅡ자주색 불꽃ㅡ가 이제는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커넬 주교가 대답했다.
"베일라드 저택은 내가 진정한 공감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배운 곳이었다.
슬픔에 갇힌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슬픔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은 슬픔을 이해하셨나요?"

커넬의 눈이 깊어졌다. 아주 오랜 기억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가슴을 더듬었다.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상처가 있었다.

"이사벨라의 슬픔은 내게 남았다, 리나. 내 가슴에 영원히 새겨진 상처로."

리나의 눈이 커졌다. "어떤 상처인가요?"

커넬 주교는 자주색 촛불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그의 눈을 비추었고, 리나는 그 눈에서 오래된 슬픔의 잔영을 보았다.

"너도 곧 알게 되겠지."

그의 손이 자주색 촛불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끄려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촛불을 향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자주색 불꽃이 잠시 흔들렸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미세한 불꽃만이 남았다. 완전한 소멸이 아닌 변형.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나. 다만 형태가 바뀔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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