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그림자의 언약. 09
8장. 서쪽으로의 항해
촛불은 이제 단 하나의 방향을 가리켰다.
어제까지 광풍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사방으로 흔들리던 푸른 불꽃이 이제는 안정을 찾아 서쪽을 향해 타올랐다.
다섯 번째 촛불의 변화를 리나는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방 안으로 바다 냄새가 밀려들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므로, 이 냄새는 커넬 주교의 기억에서 떠오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촛불이 방향을 찾았군요." 리나가 말했다.
커넬의 깊게 주름진 얼굴에 그림자와 빛이 교차했다. 주름 하나하나가 세월의 지도처럼 그의 삶을 기록하고 있었다.
촛불의 빛이 그의 눈동자에 비쳐 수면에 떠도는 별처럼 반짝였다.
"방향을 찾는 것은 먼저 길을 잃는 일에서 시작된단다." 주교의 목소리는 오래된 종소리처럼 깊게 울렸다.
"모든 이정표가 사라진 순간에야 비로소 나침반이 작동하지."
리나는 노인의 손에 들린 작은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녹슬고 낡았지만, 바늘은 흔들림 없이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나침반은 항상 서쪽을 가리키나요?"
커넬은 나침반을 천천히 움직였지만, 바늘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향했다.
"이건 방위가 아니라 목적지를 가리키는 법이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아르고스호에서의 두 번째 날, 나는 시간이라는 바다에서 내 영혼의 나침반을 찾아냈다."
촛불이 한순간 높이 타올랐다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
그 불빛 속에서 젊은 날의 커넬이 떠올랐다.
-
시간의 감옥 속 새벽은 환상에 불과했다.
커넬은 반쯤 열린 눈으로 선실 천장의 나무 결을 따라갔다.
이곳에서 시간은 물속에 갇힌 숨방울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빛은 새벽처럼 보였으나, 아르고스호에서 그것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 새벽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안개는 전날보다 더 짙어져 있었다. 마치 시간 자체가 응축되어 안개가 된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자 가슴속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베일라드 저택에서 다이애나의 슬픔으로 응결된 얼음 결정이 작은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이 배 위에서 모든 것이 멈췄음에도, 다이애나의 상처만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갑판 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커넬은 귀를 기울였다. 아르고스호에서 들리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그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갑판으로 올라갔을 때, 마르코는 이미 뱃머리에 서 있었다.
안갯속에서 그의 실루엣은 옛 화가의 수묵화처럼 흐릿했다.
갑판을 가로지르는 동안, 커넬은 얼어붙은 선원들 사이를 지나갔다.
돛을 조정하던 손, 하늘을 가리키던 팔, 명령을 외치던 입ㅡ모든 움직임이 허공에 걸린 채 정지해 있었다.
그들은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았고, 죽었되 죽지 않았다. 시간의 가장자리에 걸린 영혼들이었다.
"안개가 달라졌어요." 마르코가 커넬의 발소리를 듣고도 돌아** 않은 채 말했다.
커넬은 그 옆에 서서 함께 안개를 바라보았다. 세바스티안의 은반지가 손가락에서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반지 속에 있는 푸른 선이 서쪽을 가리키며 고동쳤다.
"단단히 얼어있던 안개가 이제 흐르기 시작했군." 커넬이 중얼거렸다.
이전에는 불가침의 장벽처럼, 또는 얼어붙은 시간의 벽처럼 느껴지던 안개가 이제는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안에서 희미한 형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른 시간대의 유령들이 손짓하는 것 같았다.
"화물칸을 살펴봐야겠어." 커넬이 결심한 듯 말했다.
"타르시우스가 남긴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마르코의 눈에 희망이 빛났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어젯밤 자정에 선원들이 잠시 깨어났을 때,
몇몇이 화물칸으로 향하는 것을 본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좁은 계단을 따라 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멈춘 복도는 영원의 어스름처럼 어두웠다.
벽에 매달린 등불은 불꽃이 한순간에 얼어붙은 듯 깜박이지 않았다. 공기는 오래된 서적처럼 무겁고 건조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화물칸으로 가는 문은 묵직한 참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 표면에는 서로 얽힌 세 개의 원이 조각되어 있었다ㅡ멘탈로니아의 세 시대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이 문은 단단히 잠겨 있어요." 마르코가 말했다.
"어떤 선원들도 열지 못했을 거에요."
커넬이 문에 손을 대자,
나무에 새겨진 세 개의 원이 푸른빛을 발했다.
그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가 문양과 공명하며 울렸다.
두 시간대가 만나 교차하는 것 같은 기이한 울림이었다. 그러자 무거운 문이 천천히 열렸다.
화물칸 안은 미로처럼 넓었다.
상자와 짐더미 대신, 방의 중앙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원형 제단이 있었고,
그 주위로 일곱 개의 기둥이 도열해 있었다. 각 기둥 위에는 서로 다른 동물의 머리를 한 청동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맹수의 머리를 한 인간의 형상, 새의 머리를 한 여인, 뱀의 머리를 한 현자,
그리고 얼굴이 없는 마지막 형상.
"멘탈로니아의 일곱 정신..." 커넬의 음성이 경외심에 떨렸다.
마르코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럼 전설은 사실이었습니까?"
"전설은 시간 위에 흐르는 진실의 강줄기일 뿐이야." 커넬이 대답했다.
"우리가 전설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시간이 기억의 모서리를 닳게 한 역사에 불과하지."
커넬은 조심스럽게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 위에는 여러 물건이 질서 있게 놓여 있었다.
수정으로 만든 작은 피라미드, 황금 원반, 검은 옥으로 조각된 인형,
그리고 가장 중앙에는 이상한 형태의 나침반이 놓여 있었다.
유리 구체 안에는 푸른빛의 줄기가 액체처럼 흐르며 회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의 실타래처럼 끊임없이 꼬이고 풀리며 움직였다. 커넬은 즉시 이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시간의 나침반..." 그가 숨을 죽였다.
마르코가 호기심에 가득 차 물었다. "이게 배와 모든 사람들을 가둔 건가요?"
"그런 것 같아." 커넬이 주위를 살폈다. 벽에는 낯선 기호와 함께 별자리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는 어떤 하늘과도 다른 별자리였다. 다른 시대, 혹은 다른 세계의 하늘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타르시우스가 멘트 문명의 유물을 사용해 서쪽 대륙을 찾으려 했던 거야.
길을 찾다가 걸려든 함정이지.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선원이..."
커넬은 제단 가장자리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커넬이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펼쳤다. 시간의 풍화를 이겨낸 글자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영원의 도서관..." 커넬이 읽기 시작했다.
"서쪽 대륙의 심장부에 위치한 이 도서관에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지식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에 도달한 자는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힘을 얻으리라..."
마르코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선장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려 했던 거군요? 하지만 왜...?"
"사랑 때문이었을 거야." 커넬이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젯밤 선장실에서 그의 일지를 읽었어. 타르시우스는 아내를 잃은 후,
그녀에게 돌아가기 위해 시간의 문을 찾아 서쪽으로 항해했던 거야."
마르코가 갑자기 제단 아래쪽을 가리켰다. "이것 좀 보세요!"
제단 밑부분에 숨겨진 작은 서랍이 있었다. 그 안에는 가죽으로 장정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표지에는 '타르시우스의 항해일지 - 서쪽 항로의 비밀'이라고 씌어 있었다.
마르코가 흥분에 차 말했다. "아버지의 일기에서 언급하셨던 책이에요.
선장이 밤마다 쓰던 비밀 일지라고..."
커넬은 조심히 책을 펼쳤다.
종이들은 오래되었지만 놀랍도록 보존 상태가 좋았다. 마지막 부분에 그의 시선이 멈췄다.
"나침반이 나를 배신했다. 영원의 도서관을 찾아 엘리자베스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나침반은 나와 내 선원들을 시간의 틈새에 가두어버렸다. 나의 슬픔이 너무 깊어 시간마저 왜곡시켰다.
아내를 되찾으려던 내 욕망이 모든 이를 희생시켰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서쪽으로 나아가는 것뿐.
시간의 안개를 뚫고 나가면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르코는 일지를 읽은 후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의 얼굴이 변했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
"제가 아버지를 구해야 해요." 마르코가 말했다.
"저쪽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린다면... 제가 아버지 대신..."
커넬은 마르코의 의도를 즉시 알아챘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누군가가 대신 갇혀야 한다는 법칙은 없어."
마르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에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어떻게 확신하죠? 시간이든 공간이든, 모든 균형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아닌가요?"
"균형이란 희생이 아니라 조화야." 커넬이 마르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아버지를 대신해 갇힌다면, 그건 또 다른 불균형을 만들 뿐이야.
균형을 이루는 것은 무엇을 잃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지."
"삼십 년이에요!" 마르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 인생 전체가 기다림이었어요.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저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 못했어요.
이제 와서 모두를 구할 방법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기적이 가능할까요?"
커넬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마르코의 분노와 절망이 이해되었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은 그저 숫자가 아니라, 한 인생의 대부분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내 직감은 말해. 시간의 나침반이 이들을 가두었다면,
동일한 나침반이 이들을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고."
마르코는 의심에 차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요?"
"시간의 춤..." 커넬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영감이 빛났다.
"다이애나가 그랬지. 시간도 춤을 춘다고. 그 리듬에 맞춰..."
마르코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선장실로 가자." 커넬이 결연히 말했다.
"시간의 나침반을 더 자세히 연구해야 해."
-
타르시우스의 선실은 배의 다른 부분과 달랐다.
이곳에는 미묘한 생명력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유일한 공간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아주 미세하게 변화했고, 바다의 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벽에는 항해도와 별자리 지도가 걸려 있었다. 서랍장 위에는 여러 항해 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모든 것 너머로 커넬은 타르시우스의 깊은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선장은 선원이 아니라 탐험가였고, 지식을 추구하는 학자였다.
"선장실만 시간의 왜곡이 덜한 것 같군." 커넬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타르시우스가 나침반을 계속 가까이 두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의지가 너무 강해서 시간의 구속을 완전히 받지 않았던 걸까?"
선장의 책상 위에는 또 다른 시간의 나침반이 놓여 있었다. 화물칸에서 본 것보다 작고 정교했다.
유리 구체 안의 푸른 줄기는 똑같이 회전하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더 생생하고 활력이 넘쳤다.
커넬은 나침반을 집어 들었다. 손에 닿는 순간, 세바스티안의 은반지가 강하게 진동했다.
반지와 나침반 사이에 가느다란 푸른빛이 이어졌다.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같았다.
"저것은..." 마르코가 놀라 물었다.
"세바스티안 수도원장님이 주신 반지야. 시간의 방향을 감지한다고 하셨지."
커넬이 설명했다. "나침반과 반응하고 있어."
커넬은 반지를 낀 손으로 나침반을 완전히 감쌌다.
그 순간, 모든 감각이 변화했다.
온몸을 통해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 귓가에 파도소리처럼 울리는 시간의 소리,
피부를 스치는 무수한 시간의 파편들. 주위의 공기가 물결치듯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
벽과 바닥, 천장이 투명해지는 듯했고, 그 너머로 무수한 시간의 층이 겹쳐 있는 것이 보였다.
창문 너머로 안갯속에서 희미한 형체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과거의 유령, 미래의 환영, 결코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그림자들이 춤추고 있었다.
"사제님, 괜찮으세요?" 마르코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커넬에게는 다른 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간이라는 베일이 걷히고, 그 이면이 드러난 것 같았다.
안갯속에서 무수한 시간의 선들이 보였다ㅡ
과거, 현재, 가능성의 미래들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풀리며 춤추고 있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야." 커넬이 천천히 말했다.
"시간은 춤추는 강물이야. 흐르면서도 회귀하고, 나뉘면서도 합쳐지는.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강에서 우리가 타고 내려가는 하나의 물결에 불과해."
커넬은 책상 서랍에서 타르시우스의 또 다른 일지를 발견했다.
페이지를 넘기며 나침반에 관한 기록을 읽었다.
"시간의 나침반은 멘트 문명의 고위 현자들이 만든 도구다.
그들은 시간을 단순한 흐름이 아닌, 탐험할 수 있는 풍경으로 보았다.
나침반은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고 조절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위험이 따른다.
사용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왜곡을 일으킬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사용자와 주변인을 시간의 틈새에 가두어버릴 수 있다.
모든 시간 여행에는 대가가 따른다. 시간의 법칙을 거스르려 할 때, 균형은 항상 회복된다."
마르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럼 희망이 없다는 말씀인가요?
균형을 위해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아니." 커넬이 일지를 계속 읽었다.
"나침반은 양날의 검과 같다. 시간을 가두는 힘이 있다면, 시간을 풀어주는 힘도 있을 거야."
마지막 페이지에는 특별한 내용이 있었다.
"매일 자정, 나침반의 힘이 약해진다.
이때가 우리가 시간의 안개를 뚫고 나갈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배를 서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서쪽으로... 시간의 문을 향해.
그곳에서 나는 엘리자베스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게 속삭인다. 시간의 장벽 너머로. 내가 너무 갈망했기에,
그것이 우리 모두를 가두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커넬은 책을 덮고 마르코를 바라보았다.
"오늘 자정에 시간의 구속이 약해진다. 그때 우리는 배를 서쪽으로 움직여야 해."
"정말 가능할까요?" 마르코의 눈에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
"가능하게 만들 거야." 커넬이 결연히 말했다.
"구마 의식을 준비해야겠어. 시간의 춤을 추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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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것인지,
아니면 안개가 더 짙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배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커넬은 자정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가슴속 얼음 결정이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시간을 알려주었다.
갑판 위에서 커넬과 마르코는 의식을 준비했다.
선원들의 얼어붙은 형상들 사이로 공간을 확보하고, 커넬은 흰 분필로 넓은 원을 그렸다.
정확한 균형을 위해 그는 원의 지름을 발걸음으로 측정하고, 원의 둘레를 따라 일곱 개의 작은 원을 배치했다.
각각은 멘탈로니아의 일곱 정신을 상징했다ㅡ칸, 세오, 세토아, 로오, 이아, 메투스, 셔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원은 공백으로 남겨두었다. 뮤레칸, 마왕의 자리였다.
원의 중앙에는 세바스티안의 은반지가 놓였고, 그 옆에는 선장실에서 가져온 시간의 나침반이 자리했다.
두 물건 사이에는 이미 미세한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의식을 위해 커넬은 화물칸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을 원 주위에 배치했다.
수정 피라미드는 동쪽, 황금 원반은 남쪽, 검은 옥 인형은 북쪽,
그리고 서쪽은 비워두었다ㅡ미지의 공간,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둔 것이다.
"이 의식이 정말 성공할까요?" 마르코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신이란 건 결국 믿음에 불과해." 커넬이 대답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아버지에 대한 네 사랑이 이 의식의 핵심이 될 거라는 것."
자정이 다가오자 배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돛대가 신음하고, 바닥이 끼익거렸다.
얼어붙었던 선원들의 모습에서 희미한 떨림이 일어났다. 그들의 윤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먼바다에서는 종소리 같은 울림이 들려왔다.
"네 아버지와의 연결이 필요해." 커넬이 마르코에게 말했다.
"원 밖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있어줘. 너는 시간을 건너는 다리가 될 거야."
마르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원 바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희망, 어떤 결의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결코 **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했던 그 얼굴, 단 한 장의 낡은 초상화로만 알고 있던 그 미소,
어린 시절 꿈속에서 만났던 그 목소리.
커넬은 원 중앙에 서서 눈을 감았다.
베일라드 저택에서 다이애나의 슬픔을 받아들였던 때의 감각을 소환했다.
당시의 경험은 기억이 아니라 그의 육신에 새겨진 경험이었다.
가슴속의 얼음 결정이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았지만, 점점 강해져 그의 심장 박동에 맞춰 빛났다.
"시간이여, 너의 춤을 보여다오." 커넬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막힌 흐름을 열어라. 잃어버린 방향을 찾아라. 네 본연의 리듬을 되찾아라."
커넬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혈관이 시간의 물질로 채워진 것처럼.
세바스티안의 은반지와 시간의 나침반 사이에서 푸른 실과 같은 빛이 이어졌다.
그 빛은 점점 강해지며 원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갑판 위의 공기가 두꺼워지고 무거워졌다.
호흡할 때마다 마치 물속에서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간이라는 바다에 잠겨 가라앉는 듯했다.
커넬이 눈을 뜨자,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푸른빛으로 변해 있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단순한 시각이 아닌, 다른 차원의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었다.
주위로 시간이 형체를 갖고 나타났다. 고랑처럼 파인 시간의 층들,
강물처럼 흐르는 순간들, 바람결에 흩어지는 가능성의 가지들이 투명한 베일처럼 중첩되어 보였다.
"시간은 층이다." 커넬의 목소리가 변했다.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여러 목소리가 중첩된 것처럼 울렸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풍경이다. 우리는 그 풍경 속을 여행할 뿐."
마르코는 놀란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시야에도 희미하게 시간의 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의 층에서, 그는 어린 소년의 얼굴을 발견했다ㅡ태어나기 전의 자신이었다.
다른 층에서는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그 너머로 그가 결코 태어나지 않은 세계,
아버지가 항해를 떠나지 않은 세계도 있었다.
커넬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시간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듯했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시간의 층들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그것은 격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시간 자체와 대화하는 듯한, 시간의 물결에 몸을 맡기는 듯한 춤이었다.
"시간은 춤춘다. 그 리듬에 맞춰..." 커넬이 낮게 속삭였다.
"모든 순간은 영원히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이 다를 뿐."
그의 가슴속 얼음 결정이 점점 더 강하게 빛났다.
다이애나의 슬픔을 담은 이 결정은 이제 시간의 흐름을 읽고 조절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슬픔의 결정은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물에 떠 있는 빙산 조각 같았다.
얼음 속에 갇힌 다이애나의 기억이 지금 커넬을 시간의 춤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커넬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들을 보았다.
어린 시절 방황하며 거리를 헤매던 날들, 교단에 들어가 수련하던 젊은 날,
카르토 마을에서 에일린을 만난 순간, 포보스 신전에서 두려움의 정체를 깨달은 때,
베일라드 저택에서 다이애나의 아픔을 받아들인 순간. 수천 개의 기억이 한순간에 넘쳐났다.
시간의 나침반이 갑자기 공중으로 떠올랐다.
나침반 안의 푸른 줄기가 미친 듯이 회전하더니, 마침내 한 방향을 가리켰다ㅡ서쪽.
커넬은 두 손을 들어 올려 나침반을 감쌌다. "모든 시간은 흐른다. 멈추지 않고, 돌아오지 않고,
오직 흐를 뿐. 모든 시간은 자유를 갈망한다. 닫힌 문을 열고, 막힌 길을 뚫어라!"
갑자기 나침반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눈부시게 밝아 잠시 모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빛은 원을 넘어 갑판 전체를 뒤덮었고,
얼어붙은 선원들에게까지 도달했다.
커넬의 의식이 배 전체로 확장되었다.
마치 그의 정신이 배의 모든 구석까지 뻗어나가는 듯했다.
모든 선원의 의식과 연결된 느낌이었다. 시간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그들의 고통,
의식은 있으나 행동할 수 없는 그 이상한 상태를 느꼈다. 그들 각각의 기억과 꿈,
희망과 두려움이 모두 커넬에게 쏟아졌다.
그중에서 마르코의 아버지를 찾아냈다.
카이런. 그의 의식은 삼십 년 전에 멈춘 채 깊은 꿈속을 떠돌고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가진 젊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
다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열망,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커넬은 마르코의 마음과 카이런의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마르코의 그리움과 카이런의 그리움,
서로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두 감정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간의 고리가 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한 번도 ** 못한 아들의 갈망과, 아들을
한 번도 안아** 못한 아버지의 후회가 맞닿은 순간, 시공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간의 족쇄여, 부서져라."
커넬의 목소리가 갑판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침반에 가느다란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리 표면을 타고 거미줄처럼 번져가는 실금들. 그 틈새로 푸른빛의 줄기가 흘러나왔다.
감금된 강물이 제방을 무너뜨리듯, 시간의 본질이 유리의 감옥을 부수고 자유를 찾았다.
줄기는 공중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며 갑판 전체를 뒤덮었다.
액체화된 시간이 선원들의 얼어붙은 형체 위로 흘러내렸다.
순간, 동상처럼 굳어 있던 선원들의 몸에 미세한 움직임이 일었다.
처음에는 눈꺼풀의 떨림, 손가락 끝의 경련, 가슴팍의 희미한 오르내림.
그들의 움직임은 수십 년의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동물처럼 느리고 어색했다. 몸이 기억하는 법을 잊은 듯했다.
커넬은 시간의 층들 사이에서 마르코와 카이런의 연결을 더욱 강화했다.
가슴속 얼음 결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부자 사이에 은빛 다리를 만들었다.
이 다리를 통해 삼십 년의 시간 간극이 메워졌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부자의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이었다.
나침반의 균열이 커지면서 내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이 강렬해졌다.
갑판 전체가 푸른 불길에 휩싸인 듯 빛났다. 커넬의 온몸은 시간의 전류가 흐르는 도관이 되어 격렬하게 떨려왔다.
고통스러웠으나, 동시에 새로운 생명력이 그를 관통하는 희열도 느껴졌다.
"묶인 영혼들이여, 자유를 찾아라. 잃어버린 흐름이여, 다시 흘러라."
커넬의 입에서 아벨 교단의 고대 언어가 울려 퍼졌다. 그 말은 공기 중에 실체를 띠고 진동했다.
소리 자체가 물질이 되어 시간을 움직이는 듯했다.
마르코의 아버지 카이런이 가장 먼저 완전히 깨어났다.
삼십 년 동안 같은 순간에 갇혀 있던 그의 의식이 이제야 현재로 돌아왔다.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원 바깥에 무릎 꿇고 있는 마르코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 카이런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악기처럼 거칠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마르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마르코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카이런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그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깊은 혼란으로 채워졌다.
"내 아들...? 하지만 내 아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 삼십 년이 지났어요." 마르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는 시간에 갇혀 계셨던 거예요."
카이런은 말 그대로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삼십 년...?"
다른 선원들도 하나둘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혼란, 충격이 교차했다. 누군가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
삼십 년이라는 시간의 틈새를 건너온 그들의 정신은 깨어진 거울처럼 산산조각 나 있었다.
커넬은 시간의 나침반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서 나침반이 완전히 금이 가며 빛을 발했다.
균열 사이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빛은 눈부시게 강렬해져 갑판 전체를 새하얀 광휘로 뒤덮었다.
그 순간, 배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흩어지기 시작했고,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ㅡ뤼케시온 항구의 등대였다.
갑판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타르시우스 선장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시간에 갇힌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위로는 여전히 희미한 안개가 맴돌고 있었다.
마치 그만은 여전히 반쯤 시간의 안갯속에 있는 듯했다.
"당신이 해냈군." 타르시우스가 커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경이로움과 감사가 담겨 있었다. "시간의 사슬을 풀어냈어."
커넬은 지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온몸은 마력이 고갈된 듯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남긴 단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타르시우스는 나침반의 깨진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슬픔과 해방감이 뒤섞여 있었다.
"엘리자베스를 되찾으려던 내 광기가 모든 이를 삼십 년이나 시간의 감옥에 가두었소."
타르시우스의 목소리는 깊은 후회로 가득했다. "미래를 쫓다 현재를 잃었지."
커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를 되찾으려는 욕망이 때로는 현재를 희생시키죠. 그것이 시간의 역설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이해의 침묵이 이어졌다. 주위로는 깨어난 선원들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음도 이 순간만큼은 멀게 느껴졌다.
"내 선원들은 돌아갈 수 있을까요?" 타르시우스가 마침내 물었다.
커넬은 점점 옅어지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가 걷히고 있어요. 우리는 현실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타르시우스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돌아갈 수 없소. 내 시간은 이미 지나갔어."
"당신은 다른 길을 택하셨군요." 커넬은 그의 선택을 이해했다.
"서쪽으로 가야 해." 타르시우스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내 운명은 항상 그곳에 있었소."
선장은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꺼내 커넬에게 건넸다.
"이건 영원의 도서관으로 가는 정확한 항로요. 젊은이, 당신이 가야 할 길일지도 모르오."
커넬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왜 저에게 이걸 주시는 거죠?"
"당신은 시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소. 영원의 도서관에는 당신이 찾는 답이 있을 거요."
타르시우스가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기억해 주길 바라오.
나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도록."
선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며 뤼케시온 항구의 윤곽이 선명히 보였다.
하지만 타르시우스 주위로는 여전히 안개가 맴돌고 있었다. 그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는 듯했다.
"난 이 배와 함께 남겠소." 타르시우스가 결연히 말했다.
"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커넬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타르시우스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선실 쪽으로 걸어갔고,
그의 주위로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이내 그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르고스호는 이제 뤼케시온 항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선원들은 모두 갑판 난간에 몰려 자신들이 돌아가는 항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삼십 년이라는 시간의 틈새를 건너온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복잡한 감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르코와 카이런은 난간 가까이에 서 있었다.
카이런은 아직도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의 눈은 마르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아들..." 카이런이 마르코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말했다.
그의 손은 아들의 얼굴 윤곽을 더듬으며 현실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아들이 나를 구하러 왔구나."
마르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네 아버지는 별을 품은 눈을 가졌다'라고 말씀하셨죠. 지금 보니 정말 그렇네요."
카이런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카르멘은... 어떻게 지냈니?"
마르코는 잠시 침묵했다. "어머니는...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마지막까지 아버지가 돌아오실 거라 믿으셨어요."
카이런의 얼굴에서 모든 생기가 사라졌다.
삼십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한순간에 그의 어깨를 누르는 듯했다.
"내가 약속했었는데... 꼭 돌아오겠다고..."
마르코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는 행복하셨어요.
그리고 지금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예요."
카이런은 주머니에서 작은 나침반을 꺼냈다.
시간의 나침반이 아닌 평범한 나침반처럼 보였지만, 바늘은 북쪽이 아닌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네 어머니에게 주려고 했던 건데..."
카이런이 중얼거렸다. "이제 네게 주마."
항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삼십 년 전에 사라진 '유령선'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부둣가로 모여들었다.
기다림에 지친 노인들, 아버지를 잃고 자란 자녀들, 오래전 이별한 연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희망에 찬 표정으로 기다렸고, 어떤 이들은 불안한 얼굴로 서성거렸다.
커넬은 갑판 중앙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가슴속 얼음 결정은 이제 고요했지만, 여전히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력의 파동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그의 내면에서 일렁였다.
배가 천천히 항구에 접안했다.
선원들은 일제히 난간으로 몰려왔다.
그들 중 일부는 환희에 찬 얼굴로 가족을 알아보았지만,
더 많은 이들은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익숙한 이를 찾지 못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지는 재회와 실망의 장면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의 풍경이었다.
어떤 선원은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에 대해 듣고 무릎을 꿇었고,
어떤 선원은 성인이 된 자녀들을 만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울었다.
젊은 아내를 두고 떠났던 한 선원은 이제 백발이 된 노부인이 된 아내를 만났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시간의 강이 놓여 있었다.
어떤 선원은 항구 어디에도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아르고스호의 선미는 여전히 안갯속에 남아 있었다.
타르시우스의 선실이 있는 부분이었다. 배의 대부분이 항구에 도착했음에도,
그 일부는 마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선장님은..." 마르코가 안갯속 배의 일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자신의 길을 선택했어." 커넬이 대답했다.
"서쪽으로... 영원의 도서관을 향해."
카이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시우스는 항상 별난 선장이었지.
우리가 바다를 항해할 때, 그는 시간을 항해하려 했어."
항구에서의 혼란이 점차 정리되었다.
뤼케시온의 관리들이 도착해 삼십 년 만에 돌아온 선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시간의 간극을 넘어온 사람들을 현실로 재통합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로 돌아가려 했고, 일부는 너무나 달라진 세상에 공포감을 느꼈다.
커넬은 타르시우스가 준 두루마리를 다시 한번 살폈다.
서쪽 대륙으로 가는 항로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지도 가장자리에는 "영원의 도서관ㅡ모든 시간의 지식이 보관된 곳"이라는 문구가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시간은 원이다. 우리가 찾는 것은 이미 우리를 찾고 있다."
-
다음 날 아침, 커넬은 아벨 교단의 세바스티안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의 가방에는 타르시우스의 지도와 시간의 나침반 파편이 들어 있었다.
세바스티안은 그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해서 들었다.
노년의 수도원장은 커넬이 시간의 고리를 푼 이야기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시간의 나침반..." 세바스티안이 중얼거렸다.
"멘트 문명의 유물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지.
그들은 시간을 물리적 법칙이 아닌, 조작할 수 있는 마력의 한 형태로 여겼으니까."
"주교님," 커넬이 망설이다 말했다.
"서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영원의 도서관을 찾고 싶습니다."
세바스티안의 깊은 주름진 얼굴에 의외의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그런 요청을 할 줄 알았다, 커넬."
"허락해 주실 건가요?"
"구마사의 임무는 단순히 악마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지."
세바스티안이 대답했다. "멘트 문명의 유물들은 위험하지만, 그 지식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해.
네가 균형의 본질을 이해했다면, 나는 네 여정을 축복하마."
커넬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쳤다. "감사합니다, 주교님."
"하지만 서쪽 대륙은 미지의 땅이다." 세바스티안이 경고했다.
"많은 탐험대가 그곳을 찾아 떠났지만, 돌아온 이는 거의 없었어."
"알고 있습니다." 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 길이 그곳에 있다고 느낍니다."
세바스티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서랍에서 낡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낡은 은반지가 놓여 있었다. 커넬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했지만,
이것은 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반지는 내 스승님이 남긴 것이다." 세바스티안이 말했다.
"그도 한때 서쪽 대륙을 탐험하려 했었지. 이 반지는 돌아오라는 약속의 증표였어. 이제 네게 주마."
커넬은 경외감에 차 반지를 받아들었다.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수도원장님."
-
일주일 후, 커넬은 서쪽 대륙을 향한 항해 준비를 마쳤다.
그는 작은 무역선 '새벽의 날개'호를 타고 떠나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날, 그는 항구에서 마르코와 카이런을 만났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시간의 감옥에 갇혀 있었을 거예요."
카이런이 커넬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어요." 마르코가 말했다.
"항구 근처에 작은 조선소를 열었죠. 언제든 배가 필요하시면 찾아오세요."
커넬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게. 아마도 서쪽에서 돌아오는 길에."
카이런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고 섬세한 나침반이었다.
보통의 나침반과 달리 바늘이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카이런이 나침반을 커넬에게 건넸다.
"전설에 따르면, 이 나침반은 항상 당신이 가장 찾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커넬은 감사의 마음으로 나침반을 받아들였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당신이 찾는 것이 당신을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르코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안개 가득한 항구에서 '새벽의 날개'호가 출항했다.
커넬은 갑판에 서서 서서히 멀어지는 뤼케시온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속 얼음 결정은 이제 완전히 녹아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다른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ㅡ
시간의 감각, 흐름을 읽고 그 속에서 길을 찾는 능력.
배가 안갯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커넬은 아르고스호의 안갯속에 남은 부분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타르시우스의 존재가 희미하게 감지되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이 잠시 교차한 것이었다.
"서쪽으로..." 커넬이 중얼거렸다.
"영원의 도서관을 향해."
수평선 너머로 아침 햇살이 그를 맞이했다.
새로운 항해,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
"그때 난 시간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했단다."
노년의 커넬 주교가 말했다.
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푸른 촛불이 안정된 빛을 발하며 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놓인 나침반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타르시우스는..." 리나가 조용히 말했다.
"서쪽으로 가서 결국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그녀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질문 속에 이미 답이 들어 있는 듯했다.
커넬의 눈에 깊은 추억의 빛이 어렸다.
평소와 달리 그는 즉답을 피했다.
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아벨의 밤이 창 너머로 검게 빛났다.
"저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스승님의 이야기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그녀는 돌아서서 커넬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때로 길을 잃어야만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맞게 이해한 건가요?"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젠 내게 묻지 않아도 스스로 답을 찾는구나."
커넬은 테이블 위에 놓인 또 다른 촛불ㅡ아직 불이 붙지 않은 황금색 촛불ㅡ을 집어 들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은 지식의 불꽃이다." 그가 중얼거렸다.
"서쪽 대륙의 영원의 도서관... 그리고 내가 거기서 발견한 것과 잃은 것에 대한 이야기."
리나는 주교의 손에 들린 황금 촛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불을 붙여 주세요. 준비되었습니다."
푸른 촛불이 마지막으로 환하게 타오르더니,
커넬의 입김에 흔들리며 고요히 꺼졌다.
그러나 그 빛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커넬의 눈동자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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