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그림자의 언약. 11
10장. 지식의 수호자
계단 끝에서 아이샤가 잠깐 멈춰 섰다.
그녀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커넬은 그동안 내려온 게 몇 시간인지, 하루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 인식 반지의 푸른 선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입니다." 아이샤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 경외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스승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분만 들어갈 수 있어요."
허락? 커넬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특별한 허락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몰랐다.
그저 서방에서 온 평범한 구마사일 뿐인데. 아니, 정말 평범한가? 커넬은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구마들을 떠올려봤다.
다른 구마사들과 뭔가 달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악마를 멸하려 했지만, 커넬은 항상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균형의 서를 품고 있는 팔이 무거웠다. 아니, 무겁다기보다는 그 무게가 계속 변하고 있었다.
깃털처럼 가벼워졌다가 갑자기 바위덩이처럼 무거워졌다가. 책 자체가 살아서 호흡하는 것 같았다.
페이지들이 바람도 없는데 살랑거렸다. 뭔가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런의 나침반을 조심스럽게 꺼내보니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바늘이 하나가 아니었다. 둘, 넷, 여덟. 여덟 개의 바늘이 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서남북은 물론이고 위아래, 그리고 어떤 이름도 없는 방향들까지.
과거를 가리키는 바늘, 미래를 가리키는 바늘도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군요." 커넬이 중얼거렸다.
"정상입니다." 아이샤가 대답했다.
"이곳에서는 방향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르거든요. 공간도, 시간도."
약속의 반지가 뜨거웠다. 평소의 은색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의 이름이 그 속에서 맥박치는 것 같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잘못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들어가 봅시다." 아이샤가 말했다.
-
한 걸음 내딛자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큰 방'이라는 표현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방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했다.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공간이었다. 바닥은 검은 대리석 같았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은빛 물결이 일었다.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가 사라졌다.
그 물결이 퍼져나가는 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천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면 무한한 어둠 속에서 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별들이 그냥 반짝이는 게 아니었다. 별자리를 만들었다가 해체했다가,
새로운 형태를 그렸다가 다시 지웠다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커넬은 그 별자리들이 뭔가를 말하려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대의 언어로.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공중에 떠 있는 대륙들이었다.
마이소시아가 거기 있었다. 진짜 마이소시아가. 실제 크기로, 실제 모습으로.
피에트 산맥 위에 구름이 걸려 있고, 미카엘 분지를 따라 강물이 흘렸다.
아벨 구릉지대의 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곳에 정말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커넬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방의 여러 섬나라들도 각자의 궤도를 그리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남쪽의 광대한 사막 지역에서는 모래바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북방의 얼음 대륙에서는 빙하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각 대륙마다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어떤 곳은 낮이고 어떤 곳은 밤이었다.
그런데 마이소시아 대륙에 이상한 검은 얼룩들이 보였다.
자연스러운 어둠이 아니었다. 무언가 병적이고 왜곡된 어둠이었다.
그것이 점점 번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잉크가 물에 퍼지는 것처럼. 그 어둠의 중심에... 루어스가 있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커넬이 물었다.
아이샤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몇 달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스승님께서 매우 걱정하고 계세요."
공간의 중앙에 일곱 개의 제단이 완벽한 원을 그리며 배치되어 있었다.
각각에서 서로 다른 색깔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화염의 제단에서는 붉은 빛이, 물의 제단에서는 푸른 빛이, 대지의 제단에서는 갈색 빛이 춤을 추었다.
바람의 제단은 은빛으로, 빛의 제단은 금빛으로, 어둠의 제단은 깊은 자주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제단만은 비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빛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한 어둠도 아니었다. 이상한 공허함이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그리고 커넬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빈 제단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커넬의 세 물건이 모두 격렬하게 반응했다. 나침반의 여덟 바늘이 일제히 중앙의 제단들을 향해 돌았다. 시간 반지의 푸른 선이 완전히 정지했다. 약속의 반지는 거의 하얗게 달아올랐다. 손가락에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목소리가 사방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그리고 커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나이를 특정할 수 없었다.
어린 아이 같기도 하고 늙은이 같기도 한, 모든 연령대를 아우르는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만 들어도 이 존재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곱 제단의 정중앙에서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점차 형태를 갖춰갔다.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변화했다.
젊은 남자에서 중년의 여자로, 어린 소녀에서 늙은 현자로. 하지만 눈만은 변하지 않았다.
우주 전체를 담고 있는 것 같은 깊고 넓은 눈이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커넬은 압도당했다.
"자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 존재가 말했다.
"저는 도서관의...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도서관 자체입니다."
아이샤가 깊숙이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자날의 시선이 커넬에게 내려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커넬이 소지한 세 아이템에.
그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놀라움, 기쁨, 그리고 깊은 슬픔이 연속해서 그의 얼굴을 스쳐갔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것은... 어떻게..." 자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런 가문의 운명 나침반이군요. 그리고 이것은... 일리아스가 만든 시간의 고리. 그리고 약속의 인장까지."
그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믿을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한 사람에게 모두..."
커넬이 놀라서 물었다. "일리아스를 아십니까?"
자날의 형태가 깊은 슬픔에 잠긴 중년 남자로 바뀌었다.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직접 그를 가르쳤어요.
세바스티안의 스승이었던 그를." 잠깐의 침묵이 흘렸다. "그는...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마지막 인간이었습니다."
"마지막이라니요?"
"그 이후로는 아무도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세바스티안조차도... 일부만 받아들였을 뿐이었어요."
약속의 반지가 더욱 뜨거워졌다. 이제는 커넬의 손가락을 태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빼낼 수가 없었다. 살과 하나가 된 것처럼.
"세바스티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커넬이 다급하게 물었다.
자날이 허공에 손을 흔들자 서방 대륙의 모습이 더 크게,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검은 얼룩들이 여러 도시들을 덮고 있었다. 그 어둠의 중심에... 루어스가 있었다.
도시 전체가 불길한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자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벨 교단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어요. 그리고 세바스티안은... 이단으로 고발당했습니다."
"이단이라니요? 세바스티안 대주교가요?" 커넬은 믿을 수 없었다.
세바스티안이야말로 교단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 중 하나인데.
"일리아스가 그에게 전수한 가르침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균형의 법칙에 대한 진리를 말이에요. 그것을 위험한 사상으로 여기는 자들이 교단의 실권을 쥐었습니다."
자날이 한숨을 쉬었다. "리카르도라는 자가 주동하고 있어요."
리카르도. 커넬은 그 이름을 기억했다. 한때 세바스티안의 제자였던 자.
하지만 권력욕이 강했고, 융통성이 없었다. 그가 세바스티안을 고발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제가 즉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자날이 커넬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전에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그를 구하려면, 아니 이 세상 전체를 구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이."
커넬이 주저했다. "그 진실이라는 것이..."
"당신이 평생 믿어왔던 모든 것을 뒤흔들 진실입니다." 자날이 엄중하게 말했다.
"선과 악에 대한, 신과 악마에 대한, 구마에 대한 모든 것을."
"듣겠습니다."
자날이 커넬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으십시오. 진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경고해드릴 게 있어요. 한 번 알게 된 진실은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다시는 예전의 당신이 될 수 없어요."
커넬이 한순간 주저했다.
하지만 세바스티안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결심하고 자날의 손을 잡았다.
-
그 순간 의식이 폭발했다.
아니, 폭발했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커넬의 마음 자체가 완전히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었다.
수천 년, 수만 년의 기억이 한순간에 그의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역사가, 비밀이, 감춰진 진실들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를 덮쳤다.
멘트 문명의 황금기가 생생하게 펼쳐졌다.
신들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울려 살던 시절. 멘탈로니아의 일곱 정신이 인간들을 돌보고 가르쳤던 때.
그때는 정말로 지상낙원이었다. 질병도 전쟁도 기근도 없었다.
누구도 굶주리지 않았고, 아무도 외롭지 않았다. 죽음조차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전환이었다.
커넬은 그 시절의 인간들을 직접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순수함이 있었다. 악의도, 탐욕도, 질투도 없었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낮과 밤,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까지도.
하지만 그 완벽한 평화가 서서히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는 모습도 보였다.
일곱 정신이 인간들을 너무나 깊이 사랑한 나머지, 그들의 모든 고통을 없애려 했다.
슬픔을, 분노를, 두려움을, 절망을.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선의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자날의 목소리가 커넬의 의식 속에서 울려 퍼졌다.
"우리는 인간을 사랑했어요. 너무나 깊이. 그래서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커넬은 보였다. 일곱 정신이 하나씩 인간의 고통을 가져가는 모습을.
슬픔의 신이 모든 슬픔을 가져가고, 분노의 신이 모든 분노를 가져가고, 두려움의 신이 모든 두려움을 가져가는 모습을.
"하지만 잘못이었습니다." 자날이 계속했다.
"불완전함이야말로 완전함의 조건입니다. 어둠 없는 빛은 빛이 아니고,
슬픔 없는 기쁨은 기쁨이 아니며, 죽음 없는 삶은 삶이 아닙니다."
커넬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고통과 기쁨, 어둠과 빛,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의미가 없었다.
"우리가 인간들에게서 빼앗은 것들... 그것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새로운 영상이 펼쳐졌다. 인간들에게서 빼앗긴 모든 어둠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슬픔, 분노, 두려움, 절망, 그리고 죽음. 그것들이 점점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더니,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존재가 되었다.
"마왕 뮤레칸?" 커넬이 경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마가 아닙니다." 자날의 목소리에 깊은 연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우리가 버린 것들의 수호자입니다.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으려는 자.
진정한 의미에서 멘탈로니아의 제8정신이에요."
커넬은 뮤레칸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다.
흉악한 괴물이 아니었다. 슬프고 고독한 거대한 존재였다. 모든 어둠을 품고서도 빛을 그리워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커넬의 세계관이 뿌리째 흔들렸다.
"제가 평생 쫓아내고 정화해온 것들은..."
"본래는 신들이었습니다." 자날이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멘탈로니아의 일곱 정신이 인간 세상을 떠난 후, 일부 신성이 균형을 잃고 비틀어진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당신이 '악마'라고 불러온 존재들이에요."
커넬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봤다.
에일린, 포보스, 다이애나, 타르시우스... 그들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정들을 기억했다.
혐오나 미움이 아니었다. 연민이었다. 안타까움이었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려 했고, 그들을 구하려 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자날이 커넬의 생각을 읽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들이 진정한 악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당신의 구마가 다른 구마사들과 달랐던 것입니다."
"다르다니요?"
"다른 구마사들은 '멸마'를 추구합니다. 악마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죠.
하지만 당신은 달랐어요. 당신이 행한 것은 '구마'였습니다. 그들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
자날이 커넬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당신이 에일린을 대했을 때를 기억해보세요.
단순히 없애려 한 게 아니라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려 했죠."
맞았다. 커넬은 에일린의 슬픔을 느꼈고,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
포보스의 두려움을 이해하려 했고, 다이애나의 절망에 공감했다.
자날이 허공에 고대 문자들을 그려 넣었다.
멘탈로니아의 성스러운 언어였지만, 신기하게도 커넬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악마란, 인간이 버려둔 신의 이름이다.'
"이것이 모든 것의 핵심입니다." 자날이 설명했다.
"당신이 평생 해온 일이 바로 이것이었어요. 버려진 신들에게 다시 이름을 주는 것.
잃어버린 자리를 찾아주는 것. 진정한 구마사의 역할 말입니다."
커넬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진정한 구마란 무엇입니까?"
"보여드리겠습니다." 자날이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해해야 할 것이 있어요. 구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멸마와 구마. 지금까지 교단에서 가르친 것은 멸마였어요.
악을 완전히 없애는 것. 하지만 이것은 균형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가 커넬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서 특별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지개빛이었지만 일반적인 무지개와는 달랐다. 모든 색깔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놀랍게도 그 사이사이로 어둠의 색채까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손을 내미십시오."
커넬이 손을 내밀자, 자날이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새로운 에너지가 커넬의 몸 전체로 흘러들어왔다. 이전까지 사용해온 빛의 힘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빛이었다.
하지만 순수한 빛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 어둠도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서로를 밀어내거나 삼키려 하지 않고, 하나의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었다.
조화였고, 균형이었고, 완전함이었다.
커넬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꼈다.
이전의 빛의 힘이 어둠의 힘과 만나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갈등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서.
"진정한 구마의 힘입니다." 자날이 설명했다.
"어둠을 태워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균형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주의 근본 원리에요."
커넬의 양 손끝에서 경이로운 빛이 피어올랐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모든 스펙트럼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어둠의 색채들도 자연스럽게 흘러들고 있었다. 하나의 완전한 원을 이루고 있었다.
"놀랍습니다." 커넬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런 힘이 정말 존재했다니."
"이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직접 실습해보십시오." 자날이 허공에 작은 어둠의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상처받은 영혼의 형태였다. 분노와 절망, 원한과 슬픔이 뒤엉킨 복잡한 모습이었다. "이것을 정화해보세요."
커넬이 새로 얻은 힘을 그 어둠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산했다.
무지개빛이 어둠을 둘러쌌다. 하지만 이전처럼 태우거나 파괴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이해했다. 위로했다.
어둠이 처음에는 거칠게 저항했다. 세기를 다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지개빛은 강제로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다. 단지 기다렸다. 인내했다. 사랑했다.
점차 어둠이 빛의 따뜻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거부당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받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커넬은 그 어둠의 근원을 보았다. 그것은 한 아이의 혼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사랑받지 못한 아이. 그 상처가 분노로, 절망으로, 어둠으로 변한 것이었다.
"괜찮다." 커넬이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이제 혼자가 아니야."
천천히 변화가 일어났다.
검은색이 회색으로 변하고, 회색이 은색으로, 은색이 투명해졌다.
마침내 어둠은 빛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간 것이었다. 아이의 혼이 평화를 찾은 것이었다.
"완벽합니다!" 자날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당신은 원래부터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어요.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제 더 도전적인 것을 해보십시오."
그가 다시 허공에 손을 흔들자, 이번에는 훨씬 더 거대한 어둠이 나타났다.
뮤레칸의 일부분이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절망이 하나로 응축된 형태였다.
그것이 커넬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집어삼키려는 듯이.
커넬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 어둠은 이전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수천, 수만 명의 고통이 뒤엉킨 것이었다. 하지만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자날의 가르침을 기억했다. 어둠을 적으로 ** 말고,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존재로 보라고.
양손을 앞으로 뻗어 새로 습득한 힘을 최대한 발산했다.
무지개빛의 파동이 거대한 어둠을 감쌌다.
그 순간 커넬은 깨달았다. 이 어둠은 악이 아니었다. 상처였다. 외로움이었다.
버려지고 거부당한 모든 것들의 집단적 울음소리였다. 사랑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한 모든 존재들의 절규였다.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한, 기근으로 죽은 농민들의 절망, 병으로 고생하며 죽은 아이들의 슬픔.
모든 것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뮤레칸이 있었다. 모든 어둠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존재가.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다." 커넬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도 고통을 알고, 절망을 안다. 함께 나누자."
그는 어둠을 밀어내려 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을 열어 받아들였다.
조건 없이 포용했다.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절망을 나누어 가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둠이 울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천 년이 넘도록 참아온 울음을. 그리고 서서히 빛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치유되었다. 평화를 찾았다.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마지막에는 뮤레칸의 형상이 보였다. 더 이상 무시무시한 마왕이 아니었다.
슬프고 외로운, 하지만 고귀한 존재였다. 그가 커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움의 표시였다.
"이제 당신은 진정한 구마사입니다." 자날이 깊은 만족감을 담아 말했다.
"어둠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줄 아는 자. 균형을 되찾는 자."
커넬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무지개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이제 완전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원래부터 자신의 일부였던 것처럼.
"감사합니다, 자날." 커넬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제 세바스티안을 구하러 가야겠습니다."
"잠깐만요." 자날이 커넬을 불러 세웠다.
"떠나기 전에 더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특히 아이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아이샤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스승님... 제가..."
-
"그녀도 한때는 당신과 같았습니다." 자날이 설명했다.
"서방에서 온 구마사였어요."
커넬이 놀라서 아이샤를 보았다. "정말인가요?"
아이샤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진짜 이름은... 이사벨입니다. 베일라드 가문의 이사벨."
커넬의 눈이 커졌다. "혹시 미쳐버린 저택의 그 이사벨? 베일라드가의 시조 이사벨 베일라드?"
"네. 바로 그 이사벨입니다." 아이샤가 쓰게 웃었다.
"제가... 초상화로만 남은 그 이사벨 말이에요."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천 년 전, 젊은 구마사 이사벨은 이상한 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꿈에서 그녀는 동방의 어떤 도서관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모든 답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샤가 말했다.
"하지만 점점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 도서관의 모습이, 거기 있는 책들이, 그리고... 스승님의 얼굴이."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는 홀로 동방으로 향했다.
위험천만한 여행이었다.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기도 하고, 사막에서 길을 잃어 며칠간 헤매기도 했다.
산적떼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몇 번이나 돌아가려고 했어요." 아이샤가 회상했다.
"특히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그때마다 꿈에서 본 그 목소리가 들렸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마침내 그녀는 영원의 도서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날을 만났다.
"처음 스승님을 뵈었을 때의 그 감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아이샤가 자날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평생 찾던 아버지를, 아니 집을 찾은 것 같았어요."
자날이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여기서 지식을 얻어 서방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이곳에 남아 도서관의 수호자가 되든지.
"저는 고민했어요. 정말 오랫동안." 아이샤가 계속했다.
"서방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있었고, 제가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쓸쓸해졌다. "가족들은 이미 저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었고,
제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제가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여자와 약혼했더군요."
"그래서 남기로 하셨군요."
"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삶이 좋았어요. 처음에는." 아이샤가 한숨을 쉬었다.
"무한한 지식이 있었고,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들이 있었으니까. 시간이라는 속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인간적인 것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변화하는 계절, 늙어가는 것,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들. 심지어 죽음까지도.
"불멸이라는 것이... 축복인 줄만 알았어요." 아이샤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저주이기도 해요. 영원히 같은 곳에 머물러야 하는 저주."
"그럼 왜 떠나지 않으셨나요?" 커넬이 물었다.
"책임감 때문이에요.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아이샤가 자날을 바라봤다. "그리고... 스승님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었어요."
자날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 때문에 그녀를 붙잡아 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아니에요, 스승님." 아이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후회하지 않아요. 다만... 때때로 궁금하죠.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커넬이 깊이 공감하며 말했다.
"우리 모두 그런 순간들이 있죠.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니까."
"주교님도 지금 바로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서 있어요." 아이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세바스티안을 구하러 가시면... 예전의 당신으로는 절대 돌아올 수 없을 거예요."
자날이 커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또 다른 지식의 흐름이 전달되었다.
세바스티안의 정확한 현재 상황, 그를 구출하는 구체적인 방법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커넬 자신이 직면하게 될 위험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세바스티안은 지금 루어스의 지하 깊은 곳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단 심문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교단의 실권을 장악한 리카르도와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공개처형하려 계획하고 있었다.
화형대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세바스티안 주변에 모여들고 있는 어둠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가 교단의 박해와 배신을 겪으면서 마음 깊은 곳에 쌓인 분노와 절망이 실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구하는 일은 단순히 감옥에서 빼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날이 엄중하게 경고했다.
"그의 내면에 쌓인 어둠까지 정화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이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커넬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어떤 희생이든 감수하겠습니다."
자날이 깊고 슬픈 눈으로 커넬을 바라봤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것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나요?
당신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당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세바스티안은 저에게 단순한 스승이 아닙니다." 커넬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저에게 구마사가 되는 길을 가르쳐준 분이에요. 그분 없이는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겁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자날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가르침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때로는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이 그를 잃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때로 놓아주는 것이라는 것을."
커넬이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자날이 차원 관문을 가리켰다. 이제 완전히 안정화되어 있었다.
눈부신 빛의 통로가 마이소시아를 향해 열려 있었다.
"갈 시간입니다." 자날이 말했다.
"더 늦으면 안 됩니다. 세바스티안에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어요."
아이샤가 홀의 한쪽 벽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녀가 벽에 두 손을 올리고 복잡한 주문을 외우자 벽면에 빛의 균열이 생겼다.
차원과 차원을 가로지르는 관문이었다.
"문을 통과하면 마이소시아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아이샤가 설명했다.
"하지만 매우 위험합니다. 차원 이동은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분해했다가 다시 재조립하는 과정이거든요.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상관없습니다." 커넬이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어요."
커넬이 관문 앞에 섰다. 그 순간 그는 정말로 모든 것이 바뀔 것임을 실감했다.
이 관문을 통과하면 이전의 자신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커넬이 뒤돌아서 자날에게 말했다.
"왜 하필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세상에는 저보다 훌륭한 구마사들이 많은데."
자날이 잠깐 생각한 후 대답했다. "선택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균형 그 자체가 당신을 선택한 거예요.
당신이 가진 세 가지 물건이 그 증거이고,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구마가 그 증명입니다."
커넬이 카이런의 나침반을 바라봤다.
여덟 개의 바늘이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관문을 향해서.
"가세요." 자날이 말했다. "그리고 기억하세요.
진정한 승리는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되찾는 것입니다. 세바스티안을 구하되, 자기 자신을 잃지는 마세요."
"언젠가 다시 뵙겠습니다." 커넬이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럴 수 있기를." 아이샤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돌아오신다면, 서방의 소식을 들려주세요. 그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커넬이 관문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순간 온 몸이 빛으로 분해되는 것 같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의식이 산산조각 났다가 재구성되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흐려졌다가 다시 분명해졌다.
차원을 가로지르는 여행은 죽음과 재생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이었다.
어둠이 있었다. 그 다음에 빛이 있었다. 그 다음에 다시 어둠이 있었다.
커넬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바스티안이라는 이름만은 계속 마음속에서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마이소시아 대륙에 서 있었다.
밤이었다.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동쪽으로는 불길한 어둠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자연스럽지 않은, 왜곡된 어둠이었다. 그 중심에 루어스가 있었다. 커넬의 고향이, 세바스티안이 있는 곳이.
커넬은 손을 들어 새로운 힘을 확인했다.
무지개빛이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빛과 어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힘이었다.
이제 그는 진정한 구마사였다. 균형의 복원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고난에 찰 것인지를.
세바스티안을 구하는 것이 단순히 그를 감옥에서 빼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자날의 경고가 마음속에서 울렸다. "때로는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이 그를 잃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커넬은 결연한 표정으로 동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어스를 향해서. 세바스티안을 향해서.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향해서.
-
리나는 여전히 '균형의 서'를 읽고 있었다.
이제 책 전체에서 은은한 빛이 나고 있었다. 더 많은 페이지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글자들이 페이지에서 솟아오르듯 선명해졌다.
"주교님." 리나가 놀라서 말했다. "여기에 아이샤라는 사람 이야기가 나와요.
영원의 도서관의 수호자라고... 그런데 이상해요. 그녀의 원래 이름이 이사벨이었다고 하는데..."
커넬 주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섯 번째 촛불이 이제 거의 다 타들어가고 있었다. 희생의 불꽃이 마지막 순간까지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샤." 그가 그 이름을 되뇌었다. 목소리에 깊은 그리움이 섞여 있었다.
"정말 오랫동안 들어** 못한 이름이구나."
"주교님께서 아시는 분인가요?"
"그녀는 나를 영원의 도서관으로 안내해준 사람이야."
커넬 주교의 눈에 멀리 있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빛이 어렸다.
"천 년 동안 그곳을 지키고 있는 수호자. 그녀도 한때는 우리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이지."
"그 분은 지금도 그곳에 계신가요?"
"그럴 거야. 아마도." 커넬 주교가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가끔은 그리워할 거야.
변화하는 계절을, 늙어가는 기쁨을, 그리고... 사랑을."
리나가 책의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여기에는 자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요. 멘탈로니아의 일곱 정신 중 하나였다고... 정말인가요?"
"그렇다." 커넬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서 내가 진정한 구마의 의미를 배웠지. 어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을. 균형을 되찾는 것을."
"그럼 주교님께서 그 힘을...?"
커넬 주교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미약한 무지개빛이 흘러나왔다.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빛이었다. 방 안의 그림자들조차 그 빛에 평화로워 보였다.
"놀랍네요." 리나가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이런 힘이 정말 존재한다니."
"하지만 이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커넬 주교가 진지하게 말했다.
"균형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어."
리나가 책을 덮으려 하자 커넬 주교가 말렸다.
"아직 읽을 게 더 있지 않니?"
리나가 다시 책을 펼쳤다.
새로운 페이지에 새로운 글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욱 선명하게.
"진정한 구마사의 길은 외롭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야말로 세상과 하나 되는 방법이다."
리나가 읽었다. "빛과 어둠을 모두 품은 자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그 평화의 대가는... 때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클 수 있다."
커넬 주교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
"때로는 그 대가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클 때가 있단다." 그가 여섯 번째 촛불을 바라보았다.
희생의 불꽃이 마지막 순간까지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세바스티안을 구하러 갔을 때... 나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지."
"세바스티안 대주교님을 구하셨나요?"
커넬 주교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눈에 깊은 슬픔과 평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그리움, 후회, 자부심, 그리고... 사랑.
"구했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었어. 나는 그를 구했지만, 동시에... 그를 영원히 잃었지."
리나가 무엇인가 더 묻고 싶어 했지만, 커넬 주교의 표정을 보고 말을 삼켰다.
그의 얼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섯 번째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며 꺼져갔다.
희생의 불꽃의 시간이 끝난 것이었다.
방 안에는 이제 일곱 번째 촛불만이 남아 있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마지막 촛불이.
"이제 마지막 이야기만 남았구나."
커넬 주교가 중얼거렸다. "가장 어려운 이야기가."
리나가 '균형의 서'를 조심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책은 여전히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주교님." 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후회하세요? 그때의 선택을?"
커넬 주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세월의 무게와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동시에 여전히 타오르는 신념의 불꽃도 있었다.
"후회란 무엇일까." 그가 반문했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바스티안은? 너는? 지금 이 순간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야."
"그것만으로 충분하신가요?"
커넬 주교가 잠깐 생각했다. "충분하냐고? 글쎄...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야.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계속 나아가는 것."
리나가 또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이번에는 달랐다. 글자들이 금빛으로 빛나며 나타났다.
"이상해요." 리나가 말했다. "여기 쓰인 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같은데요?
'마지막 촛불이 켜질 때, 진정한 균형의 의미를 알게 되리라. 스승과 제자의 순환은 끝나지 않고,
빛은 어둠을 품으며 영원히 이어지리라.'"
커넬 주교의 눈이 빛났다. "그래, 바로 그것이야. 내가 너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정한 메시지가."
"저도 주교님처럼... 그런 선택을 해야 할 날이 올까요?"
"언젠가는." 커넬 주교가 따뜻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너는 알게 될 거야.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일곱 번째 촛불을 바라봤다. "선택이 두려워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지."
"무섭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의 시작이란다."
일곱 번째 촛불이 홀로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이야기를,
가장 중요한 진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넬 주교와 리나는 촛불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방 안에는 깊은 고요가 흘렸다. 하지만 끝의 정적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침묵이었다.
마지막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숨고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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