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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순례자] - 11장. 불길 속의 귀환
511 2025.05.25. 23:50

순례자, 그림자의 언약. 12


11장. 불길 속의 귀환

























말발굽이 돌을 깨뜨린다.

커넬은 피에트 산맥의 마지막 고개에서 멈춰 섰다.
발아래 펼쳐진 루어스 대평원ㅡ한때 황금빛 물결로 춤추던 보리밭은 잿빛으로 변해있었다.

도시 위로 떠오르는 연기는 생활의 온기가 아니었다. 살을 태우는 냄새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는 공포가 섞여 있었다. 아니, 공포 그 자체였다.

아름다웠던 루어스의 공기마저 썩어가고 있었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절망의 무게가 말의 목을 눌렀다.
짐승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곳은 더 이상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사흘 전 자날의 차원문을 빠져나온 뒤 그는 잠들지 못했다.
꿈마다 세바스티안이 나타났다. 말없이, 불길에 둘러싸인 채로.

스승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빛만이 절망적으로 빛났다.
깨어날 때마다 가슴에 박힌 불안이 더욱 깊어졌다.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불안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성문 앞에서 병사가 창을 가로막았다.
갑옷의 문양도 달라져 있었다. 교단의 치유의 지팡이가 아니라 피에 젖은 검이 새겨져 있었다.

"신분을 밝혀라."

"구마사 커넬."

병사의 눈이 즉시 날카로워졌다.
구마사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 깃발 아래 있느냐?"

깃발? 커넬은 당황했다. 몇 달 전만 해도 교단은 하나였다.
내부 갈등은 있었지만 완전히 분열될 정도는 아니었다.

"모르겠습니다."

병사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창끝이 커넬의 목을 향했다.
살의가 느껴졌다. 진짜로 찌를 기세였다.

"순수의 검단인가, 타락한 균형주의자인가?"

균형주의자.
경멸이 담긴 목소리였다. 마치 저주를 뱉듯 말했다.

"저는... 오래 떠나 있었습니다. 교단의 상황을 모르겠습니다."

"그럼 빨리 깃발을 택해라." 병사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루어스에는 중립이 없다. 순수의 편에 서거나, 이단의 편에 서거나."

병사는 커넬을 한참 노려보더니 마지못해 길을 비켜주었다.
하지만 경고의 의미로 창끝을 커넬의 등에 가까이 댔다.

"조심해라. 요즘엔 길거리에서도 심문이 벌어진다."

거리로 들어서는 순간 커넬의 가슴이 얼어붙었다.
루어스가 아니었다. 루어스의 시체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아이들의 발걸음도. 상인의 호객 소리도. 모든 소리가 죽어있었다.
대신 속삭임만이 거리를 지배했다.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속삭임들.

모든 얼굴에 의심이 새겨져 있었다.
서로를 적으로 보는 눈빛들.

연인조차 서로를 경계했다. 부모가 자식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자식이 부모를 두려워했다. 형제가 형제를 감시했다.

곳곳에 걸린 십자가들도 변했다.
온화한 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피 묻은 검의 형태로. 날카롭고 위협적이었다.
십자가 아래마다 포고문이 붙어 있었다.

'순수의 검단이 진리를 수호한다.'

'이단의 독을 근절하라.'

'어둠과 타협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균형이라는 거짓말에 속지 마라.'

마지막 문구를 읽는 순간 커넬의 혈관에 차가운 것이 흘렀다.
균형. 세바스티안이 평생에 걸쳐 가르친 철학이 이제 이단으로 규정된 것이다.

광장 한복판. 나무 기둥 주위로 재가 쌓여 있었다.
아직 뜨거운 재. 바람에 날리며 코끝을 찔렀다. 재 속에서 뼈 조각이 보였다. 인간의 뼈였다.

"또 한 명 정화됐지."

지나가는 시민의 말이 들렸다.

"당연해. 어둠의 마법을 쓰려던 놈이었으니까."

"순수의 검단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 지옥에 떨어졌을 거야."

"맞아. 균형이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속을 뻔했어."

"이제야 진정한 평화가 온 거지."

평화. 커넬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포로 지배당한 도시를 평화라고 부르다니.

대성당 앞. 기사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이 달라져 있었다.
교단의 꽃이 핀 올리브 나뭇가지 대신 피에 젖은 검이 번쩍였다. 기사들의 숫자도 평소보다 세 배는 많았다.

"누구냐."

기사 하나가 길을 막았다. 목소리가 기계적이었다.
감정이 완전히 제거된 목소리였다.

"구마사 커넬입니다. 세바스티안 주교를 뵙고자..."

"세바스티안?"

기사가 동료와 시선을 나눴다. 입가에 스민 냉소를 커넬은 놓치지 않았다.
그들에게 세바스티안의 이름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타락한 이단자를 찾는다고? 지하 감옥에 썩고 있다. 하지만 너도 같은 무리라면..."

기사가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커넬."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커넬은 돌아섰다가 경악했다.

리카르도였다.
아니, 리카르도였던 무언가가.

검은 예복은 금실로 치장된 화려한 의식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슴에는 순수의 검단 문양이 크게 수 놓여 있었다. 허리의 검은 의례용이 아니라 진짜 무기였다.
날이 서 있었다. 핏자국도 보였다. 최근에 사용한 듯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이 달랐다. 한때 따뜻했던 갈색 눈동자는 사라지고,
광신의 얼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친구였던 리카르도의 모든 흔적이 지워져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리카르도의 미소는 환영이 아니었다.
사냥꾼이 먹이를 본 표정이었다. 입가에 잔혹함이 스며있었다.

"마침 좋을 때 왔군. 스승을 구하러 온 건가?"

"리카르도, 도대체..."

"도대체 뭐가?"

리카르도가 천천히 다가왔다. 발걸음마다 위협이 묻어났다.
주변의 기사들도 함께 움직였다. 포위하는 형태였다.

"진리가 승리했다. 교단을 좀먹던 독충들이 드디어 박멸되고 있어."

벽에 걸린 명패가 보였다.
'순수의 검단 수석 심문관 리카르도.'

심문관. 언어 자체가 저주였다.
이단 심판소의 악명 높은 직책. 고문과 처형을 관할하는 자의 칭호.

"당신이... 주교님을 고발했습니까?"

"고발?" 리카르도가 웃었다. 웃음소리가 쇠 긁히는 소리 같았다.
"진리를 수호했을 뿐이다."

"무슨 진리를..."

"커넬." 리카르도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위험한 낮음이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세바스티안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리카르도가 커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에서 이상한 열기가 전해졌다.
뜨겁지만 차가운, 모순된 온도였다.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성스러운 마법이 아니었다.

"'빛과 어둠의 균형'이라니. 신성모독도 이런 신성모독이 어디 있나?" 리카르도의 목소리에 광기가 섞였다.
"신의 빛은 절대적이다. 완전하고 순수하다. 어둠과 타협할 수 없고, 타협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균형은..."

"균형?" 리카르도의 눈에 위험한 빛이 돌았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정말 타락했구나. 커넬,
설마 너까지 그런 이단 사상에 물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공기가 차갑게 변했다.
주변의 기사들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위험을 직감했다. 잘못 대답하면 즉시 체포될 상황이었다.
아니, 체포가 아니라 처형될지도 몰랐다.

"저는... 다만 오랜 스승이 걱정되어서..."

"스승에 대한 정은 이해한다." 리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이제 선택할 때다. 절대적 순수의 편에 서거나, 어둠의 오염에 굴복하거나."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웠다. 아니, 타는 듯했다.
리카르도의 눈에서 광기와 확신이 동시에 타오르고 있었다.

"과거의 우정을 생각해서 기회를 준다." 리카르도가 커넬의 턱을 잡았다.
"세바스티안의 독을 토해내고 순수의 검단에 합류하라. 그러면 과거는 모두 용서해 주겠다."

"...거절한다면?"

"거절?" 리카르도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 속에 살의가 숨어있었다.
"거절할 권리는 없다. 순수의 편에 서거나, 이단의 편에 서서 죽거나. 두 가지 선택뿐이다."

커넬은 잠시 침묵했다.

리카르도의 얼굴에서 세바스티안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흔적이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광신자의 확신만이 남아있었다. 한때 함께 웃고 함께 울던 친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을... 주십시오."

"현명하군." 리카르도가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내일 새벽 전에 답을 들려줘."

뒤돌아가던 리카르도가 멈춰 섰다.

"참, 세바스티안을 보고 싶다면 오늘 밤 기회를 주겠다."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지막 작별이 될 테니까."


-


저녁이 되었다.
커넬은 예전 자신의 방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방이지만 감옥 같았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지만,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 너머로 순수의 검단 순찰대가 지나다녔다.
규칙적이고 위압적인 발소리. 점령군의 행진이었다. 횃불을 든 그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보였다.

커넬은 손에 끼어진 약속 반지를 만졌다. 세바스티안과의 연결고리.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스승의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커넬이 긴장했다.
순수의 검단이 마음을 바꿔서 체포하러 온 것일까?

"들어오십시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한 남자가 들어왔다.
한때 당당했던 구마사의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고, 눈가의 주름도 깊어졌다. 몇 달 사이에 십 년은 늙어 보였다.

"커넬..."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문을 닫았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살아 돌아왔군. 무사할 줄 몰랐어."

"카엘 신부님."

커넬이 그를 알아보았다. 세바스티안과 함께 아벨에서 온 신부 중 하나였다.
온화하고 학구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쉿." 카엘이 손가락을 입에 댔다. 그리고 벽에 귀를 대보았다.
"벽에도 귀가 있다. 아니, 정말로 있을지 모른다. 요즘엔 누구도 믿을 수 없거든."

카엘이 커넬 옆에 앉았다. 더욱 작은 목소리였다.
거의 입 모양으로만 말하는 수준이었다.

"석 달 전부터 시작됐어. 에드릭 왕이 갑작스레 쓰러지신 후부터."

"전하께서 쓰러지셨다고요?"

"공식 발표는 병환이었지. 하지만..." 카엘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독살설이 돈다."

커넬의 등에 차가운 기운이 흘러내렸다.

"누가 감히..."

"모른다. 하지만 전하가 쓰러지신 그날 밤, 순수의 검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카엘의 목소리가 더욱 작아졌다. "마치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순수의 검단이 뭔가요?"

"원래는 교단 내 극소수 강경파였어.
대주교 블라시우스가 이끌던 집단이지. 들어봤나?"

커넬은 고개를 저었다.

"광신적인 인물이야. '절대적 순수'를 추구한다며 모든 타협을 거부하는 자였어.
에드릭 왕이 살아계실 때는 견제당해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카엘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횃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하가 쓰러지자마자 블라시우스가 '임시 섭정'을 자처했어.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교단의 모든 요직을 순수의 검단 인물들로 교체했지."

"그럼 리카르도는..."

"처음엔 저항했어." 카엘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리카르도는 원래 온건파였거든. 세바스티안 주교님을 존경했고, 균형의 철학도 이해하고 있었어."

"그럼 어떻게..."

"가족을 위협당했다는 소문이 있어." 카엘의 목소리가 더욱 작아졌다.
"아내와 두 딸들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됐다가 돌아왔는데, 그 후로 리카르도가 완전히 달라졌어."

"협박을 당한 건가요?"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가족들이 돌아온 후에도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
카엘이 한숨을 쉬었다. "리카르도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순수의 검단에 가담했을 수도 있어. 아니면..."

"아니면?"

"정말로 그들의 사상에 물들었을 수도 있어.
블라시우스는 뛰어난 설득자거든.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데 천재적이야."

카엘이 창밖의 화형대를 가리켰다.

"다른 구마사들 상황은 어떤가요?"

"완전히 갈라졌어." 카엘의 목소리에 절망이 섞였다.
"절반은 순수의 검단에 가담했고, 나머지는 침묵하거나 숨어있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은... 저렇게 된다."

"주교님은 언제부터 감옥에?"

"한 달 전." 카엘이 눈을 감았다.
"처음엔 '사상 교정'이라는 명목으로 연금당했어. 균형 사상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려 했지.
하지만 주교님은 절대 굽히지 않으셨어."

카엘의 목소리에 존경과 안타까움이 섞였다.

"결국 '악마 숭배' 혐의로 체포됐어. 말도 안 되는 죄목이지만, 지금은 걔들이 법이니까."

"증거라도 있나요?"

"증거?" 카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순수의 검단에게 증거는 필요 없어.
의심만으로도 충분하거든. 아니, 의심조차 필요 없어. 그들이 이단이라고 말하면 이단이 되는 거야."

"주교님의 상태는?"

카엘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모든 걸 말해줬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매일 심문받고 계셔. 고문도..." 카엘이 눈을 감았다.
"리카르도가 직접 담당하고 있어. 하지만 주교님은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고 계신다."

"처형일은?"

"모레 정오. 공개 화형."

커넬의 주먹이 떨렸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절망도 밀려왔다.

"막을 방법은 없나요?"

"없어." 카엘이 절망적 표정을 지었다.
"순수의 검단은 루어스 전체를 장악했어. 시민들까지 완전히 넘어갔다고."

"시민들이 순수의 검단을 지지한다고요?"

"처음엔 아니었어. 하지만 블라시우스가 교묘했지.
'이단자들이 어둠의 마법으로 도시를 오염시키려 한다'라고 선전했어. 그리고 실제로 몇 번의 '사건'을 조작했지."

"사건이요?"

"마법으로 만든 괴물들이 시장을 습격한다든지,
어둠의 기운이 우물을 오염시킨다든지... 물론 모두 순수의 검단이 꾸민 일이겠지만, 시민들은 믿었어."

커넬은 카이런의 나침반을 떠올렸다.
하지만 카엘 앞에서 직접적으로 꺼내 보이지는 않았다. 신중해야 했다.

"아직 주교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죠?"

"몇 안 돼. 다섯, 여섯 명?" 카엘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모두 목숨을 걸고 있어. 발각되면 즉시 화형대행이거든."

"그분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위험해. 하지만..." 카엘이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교님을 구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충분합니다."

커넬이 일어났다.

"오늘 밤 주교님을 만난 후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커넬, 무모한 일은 하지 마." 카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교님께서도 원하지 않으실 거야. 너까지 잃고 싶어 하지 않으실 거라고."

하지만 커넬의 의지는 확고했다.
스승을 구하는 것. 그것이 자신이 여기 돌아온 유일한 이유였다.


-


자정이 넘었다.

커넬은 리카르도가 보낸 기사를 따라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축축한 냄새와 고통의 기운.
하지만 더 음침한 무언가가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의가 돌 틈새마다 스며들어 있었다.
순수를 추구한다는 자들이 만들어낸 지옥이었다.

복도의 횃불이 흔들렸다. 그림자들이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벽에는 고문 도구들이 걸려 있었다. 쇠사슬, 채찍, 뜨겁게 달군 인두... 모두 최근에 사용된 흔적이 있었다.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대부분 성직자들이거나, 균형 사상에 동조했던 시민들일 것이다.

"15분만 허락한다."

기사가 가장 안쪽 감옥 앞에서 멈춰 섰다.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기계처럼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커넬은 감옥 안을 들여다보았다.
숨이 막혔다.

세바스티안이 거기 있었다. 정확히는... 세바스티안이었던 것.

위엄 있던 주교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수염은 더러워져 엉켜있고, 옷은 찢어져 누더기가 됐다. 손목과 발목의 쇠사슬 자국은 화농이 돼 있었다.
온몸에 고문 상처가 덧나 있었다. 채찍 자국, 화상, 멍든 자국들이 곳곳에 보였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건 눈이었다.
한때 지혜와 자애로 빛나던 눈동자가 깊이 꺼져 있었다. 영혼 일부가 빠져나간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은 의지가 남아있었다.

"세바스티안..."

목소리가 떨렸다.

세바스티안이 고개를 들었다. 커넬을 보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 속에 여전히 스승의 사랑이 남아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온화함이었다.

"커넬... 돌아왔구나."

쉰 목소리였지만 따뜻했다.
긴 고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자를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자날을 만났겠구나."

"어떻게 아시는..."

"너의 눈이 달라졌어. 이제 진정한 균형이 무엇인지 아는구나."
세바스티안이 힘겹게 일어나 다가왔다. "진정한 구마의 힘을 배웠느냐?"

"예. 자날에게서 구마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습니다. 멸(滅)이 아닌 균형의 힘을."

"좋다." 세바스티안의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스쳤다.
"그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세바스티안이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커넬, 대성당 지하 고서보관소로 가라.
'배반당한 수호자의 고백' 뒤편에 숨겨둔 게 있다."

"무엇이 있습니까?"

"진실이다."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마왕 뮤레칸과 7 정신의 실제 관계, 그리고 아벨 교단이 수백 년간 숨겨온 비밀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세바스티안이 커넬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떨리는 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따뜻한 힘이 느껴졌다.

"순수의 검단이 추구하는 건 순수가 아니다.
독선이며, 균형의 파괴다. 걔들이 성공하면..."

"성공하면 어떻게 됩니까?"

"마왕 뮤레칸이 부활한다."

충격이었다.
커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빛만 남고 어둠이 사라진 세상. 그런 세상에서 어둠은 더욱 강렬하게 되돌아온다."
세바스티안의 눈이 절망적으로 빛났다. "균형이 완전히 깨진 세상에서 마왕은 이전보다 수십 배 강력해질 거다."

세바스티안의 약속 반지가 미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커넬의 손목에 있는 반지와 공명하며 진동했다.

"커넬, 약속해다오. 내가 죽어도 균형의 길을 잃지 않겠다고."

"죽는다니요? 제가 구해드릴..."

"아니다."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이미 늦었다. 내 몸은... 한계에 왔다."

세바스티안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검은 핏줄 같은 게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심장 부근이 가장 검게 변해있었다.

"이건... 저주인가요?"

"리카르도가 어둠의 마법을 썼다. 나를 더 고통스럽게 고문하기 위해서."
세바스티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순수를 추구한다면서 어둠의 힘을 빌리다니. 얼마나 모순적인가."

"치료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자날이라면..."

"없다." 세바스티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독이 심장에까지 퍼졌어. 하지만 괜찮다. 죽음도 또 하나의 균형이니까."

세바스티안이 커넬을 깊이 바라보았다.

"내 마지막 가르침을 받아라.
진정한 빛은 어둠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포용할 때 가장 밝게 빛난다는 걸."

약속 반지가 더욱 강하게 빛났다.
빛이 커넬의 마음속으로 스며들면서 세바스티안의 마지막 지혜가 전해졌다.

균형의 진정한 의미, 생과 사의 순환,
빛과 어둠의 조화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한순간에 전해졌다.

"시간 다 됐다."

기사가 뒤에서 재촉했다.

"주교님..."

"가거라. 그리고 기억해라."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진정한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


다음 날 새벽. 커넬은 대성당 지하 고서보관소로 향했다.
다행히 이곳은 아직 순수의 검단의 철저한 감시를 받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안전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배반당한 수호자의 고백' 은 먼지 쌓인 책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표지 안쪽을 뒤지자 얇은 양피지가 숨어있었다. 세바스티안이 직접 숨겨둔 것이었다.

양피지를 펼치는 순간 커넬은 숨이 멎었다.

마왕 뮤레칸과 멘탈로니아 7 정신의 진정한 관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원의 도서관에서 보아온 진실이 다시금 드러났다.

마왕 뮤레칸은 원래 악이 아니었다. 그는 균형의 8번째 존재,
빛과 어둠 사이의 조화를 담당하는 존재였다. 멘탈로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대 멘트 문명이 몰락할 때, 인간들이 절대적 선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완전히 배제하려 했고, 그로 인해 균형이 깨어졌다. 뮤레칸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고 타락하게 되었다.

'순수한 빛만을 추구하는 자들이야말로 마왕을 만들어낸 진정한 원인이다.'

세바스티안의 필체로 적힌 문장이 커넬의 가슴을 찔렀다.

'순수의 검단이 추구하는 절대적 순수는 결국 뮤레칸의 완전한 부활을 불러올 것이다.
균형이 파괴된 세상에서 어둠은 더욱 강력하게 되돌아온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커넬이 돌아보니 카엘과 몇 명의 구마사들이 서 있었다.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다.

"찾았군."

카엘이 양피지를 받아들였다.
읽기 시작하자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런... 이게 진실이라면..."

"우리가 믿어온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뜻이지." 구마사 루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순수의 검단이 하는 일은..."

"마왕의 부활을 앞당기는 일이야." 커넬이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 이 진실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수백 년간 믿어왔던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교님을 구해야 합니다." 커넬이 말했다.
"그분만이 이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구마사 마르코가 의문을 제기했다.
"감옥은 철통 같고, 내일이면..."

커넬은 조심스럽게 카이런의 나침반을 꺼내 보였다.
신기들을 무기처럼 쓰지 않고, 은밀하게 활용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길을 알려줄 겁니다."

"그게 뭐야?"

"동쪽 땅에서 얻은 보물입니다. 잃어버린 길을 찾아주는 마법 나침반이에요."

일리아스의 시간 반지도 함께 보여줬다.
"이건 시간을 조작할 수 있고."

세바스티안의 약속 반지까지.
"이건 스승님과의 영적 연결을 유지해 줍니다."

구마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물건들을 어디서..."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것들이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이에요."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하지만 실패하면..."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커넬의 목소리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주교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이 있어요. 그분을 구하는 것도 사명의 일부예요."

계획이 세워졌다.

다음 날 밤 자정, 화형 준비로 바쁜 틈을 타서 지하 감옥으로 침입한다.
카이런의 나침반으로 최단 경로를 찾고, 일리아스의 시간 반지로 필요하면 시간을 조작한다.
세바스티안의 약속 반지로 스승과의 영적 연결을 유지한다.

위험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다.


-


다음 날 밤. 커넬과 다섯 명의 동료들이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모두 얼굴에 긴장과 결의가 어려 있었다.

"모두 준비됐나?"

"준비됐다." 카엘이 대답했다.
"하지만 커넬,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 이 계획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나?"

"해야만 합니다."

카이런의 나침반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바늘이 지하 감옥 방향을 가리키며 미세하게 빛나고 있었다.

"따라오세요."

교단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평소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통로였다.
나침반 안내에 따라 이동하니 순찰 기사들을 피하기가 쉬웠다.

지하 입구 도착.
예상대로 두 명의 경비가 서 있었다.

"잠깐."

시간 반지를 은밀하게 만졌다. 차가운 빛이 발하며 주변 시간이 미세하게 느려졌다.
경비들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조심스럽게 사이를 지나갔다.

지하 복도는 어제와 똑같이 어둡고 음산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평소보다 경비가 적었다.

"너무 쉬운 것 같은데..." 마르코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해." 카엘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죄수를 이 정도로만 지킬 리가 없어."

커넬도 동의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세바스티안의 감옥 도착. 놀라운 광경이었다.
감옥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이동시켰나?"

동료들이 당황하며 중얼거리는 순간,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하다. 정말 훌륭해."

돌아보니 리카르도가 서 있었다.
뒤로는 수십 명의 순수의 검단 기사들이 무장하고 늘어서 있었다. 완벽한 매복이었다.

"예상한 그대로군. 커넬, 너는 정말 예측하기 쉬운 친구야."

리카르도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승리의 미소였다.

"함정이었군."

커넬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함정이라니. 그런 저속한 표현은 쓰지 말자."

리카르도가 천천히 다가왔다.
기사들이 함께 움직이며 완전히 포위했다.

"나는 단지 옛 친구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야.
하지만 결국 이 길을 택했구나."

"세바스티안 주교는 어디 있습니까?"

"안전한 곳에. 걱정 마라. 내일 예정대로 화형이 진행될 테니까."

리카르도는 커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에서 기이한 열기가 전해졌다.
마법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성스러운 마법이 아니었다.

"커넬, 마지막 기회다. 지금이라도 순수의 검단에 합류한다면 과거는 모두 용서해 주겠다.
세바스티안의 독에 물든 것도, 이런 어리석은 구출 작전을 시도한 것도."

"거절합니다."

커넬의 대답은 단호했다.

"세바스티안 주교는 이단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구마의 길을 걸어온 분이에요."

"진정한 구마의 길?"

리카르도가 비웃었다.

"어둠과 타협하는 게 진정한 길이라고? 커넬, 완전히 타락했구나."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검날에 신성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빛이 차갑고 무자비했다.

"아쉽다. 정말 아쉬워. 하지만 이단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순간 커넬은 세바스티안의 약속 반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스승의 목소리가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커넬, 지금은 때가 아니다. 살아남아라. 진정한 싸움은 나중에 온다.'

하지만 커넬은 물러설 수 없었다.
동료들이 함께 있었고, 무엇보다 스승을 구해야 했다.

"카엘, 모두 뒤로."

커넬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세 신기를 무기로 쓰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구마의 힘을 끌어올렸다.

자날에게서 배운 균형의 진정한 의미가 그의 온몸을 감쌌다.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형태의 신성마법이었다.
순수한 빛도 어둠도 아닌, 두 힘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힘이었다.

"오, 뭔가 달라졌군."

리카르도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어디서 그런 힘을 배웠나? 설마 정말로 어둠의 마법을..."

"어둠의 마법이 아닙니다." 커넬이 단호하게 말했다.
"균형의 힘이에요. 진정한 신성마법입니다."

커넬의 몸 주변에 오로라 같은 빛이 흘렀다. 금색과 은색이 교차하며 아름다운 광휘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는 강력한 힘이 숨어있었다.

"불가능해!" 리카르도가 외쳤다.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

"존재합니다." 커넬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이 잊어버린 것뿐이에요."

전투가 시작되었다.

커넬은 지난 몇 달간 배운 새로운 구마술을 사용했다.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의 힘이 주변을 감쌌다.
순수의 검단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을 막아내고, 마법으로 반격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도 수십 명을 상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카엘과 다른 동료들도 용감하게 싸웠지만 순수의 검단 기사들은 훈련받은 전사들이었다.
게다가 무기와 갑옷에는 구마사의 힘을 억제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군."

리카르도가 냉소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검에 어둠의 마법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순수를 추구한다면서 어둠의 힘을 쓰시는군요."

커넬이 지적했다.

"이것은 필요악이다." 리카르도가 대답했다.
"이단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된다."

리카르도의 검이 검은 불꽃에 휩싸였다. 그리고 커넬을 향해 돌진했다.

두 힘이 충돌했다.
균형의 빛과 순수한 어둠이 만나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지하 복도가 흔들렸다.

하지만 결국 수의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하나둘 동료들이 쓰러져갔다.
카엘이 검에 찔려 피를 흘리며 무너졌고, 마르코는 기절한 채 포박당했다.

"항복하라, 커넬!"

리카르도가 외쳤다.

"더 이상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둬!"

하지만 커넬은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 반지를 사용해 적들의 움직임을 늦추고,
나침반으로 탈출 경로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함정에 빠진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커넬도 압도적인 수의 열세에 무릎을 꿇었다.
여러 곳에서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진 그 앞에 리카르도가 다가왔다.

"안타깝다, 정말."

리카르도가 커넬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네가 이렇게 고집스러울 줄은 몰랐어. 하지만 이제 끝이다."

커넬의 가슴에서 신기를 하나씩 뜯어냈다.

"이것들도 압수한다.
이단의 도구는 신성한 불로 정화되어야 해."

"리카르도..."

커넬이 피를 토하며 말했다.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야.
당신이 진정으로 섬기는 게 누구인지 깨닫게 될 때."

"후회?"

리카르도가 웃었다.

"내가? 절대 진리를 위해 싸우는 내가?"

하지만 그의 웃음 속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커넬의 말이 마음 한구석을 건드린 것 같았다.

일어서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커넬도 세바스티안과 함께 화형대에 올린다.
내일 루어스의 모든 시민이 이단자들의 최후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


다음 날 아침. 루어스 중앙 광장은 인파로 넘쳐났다.
순수의 검단이 선전해 온 '이단자 처형'을 보기 위해 시민들이 몰려든 것이다.

광장 중앙에는 두 개의 화형대가 세워져 있었다.
굵은 장작들이 쌓여 있었고, 나무 기둥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기름이 발라진 장작에서는 독한 냄새가 났다.

커넬은 다른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 일찍 광장으로 끌려왔다.
손은 뒤로 묶여 있었고, 온몸은 구타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관심은 온통 다른 화형대에 있었다.
거기에는 세바스티안이 서 있었다.

며칠간의 감금으로 더욱 야위어진 스승이지만,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군중들의 야유와 저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평온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세바스티안!"

커넬이 외쳤다.

세바스티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이 계획대로다.'

커넬은 의아했다. 계획대로라니? 무슨 뜻인가?

리카르도가 높은 단상에 올라 군중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루어스의 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군중들이 박수를 쳤다.

"저 두 사람은 우리 교단에 독을 퍼뜨린 이단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성한 빛과 더러운 어둠이 같다고 주장했으며, 악마와 타협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군중들의 야유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오늘, 순수의 검단이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신의 거룩한 불로 그들의 이단 사상을 영원히 정화할 것입니다!"

리카르도는 커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특히 저 젊은 구마사는 한때 우리의 동료였습니다. 하지만 스승의 독에 물들어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단 사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커넬은 군중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받으며 화형대에 올랐다.
세바스티안과는 몇 미터 떨어진 거리였지만, 눈이 마주쳤다.

'괜찮다.'

세바스티안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진정한 시작이다.'

집행관들이 다가와서 커넬을 나무 기둥에 묶기 시작했다.
쇠사슬이 팔과 다리에 감겼고, 주변에는 기름이 발라진 장작들이 쌓였다.

"마지막 유언이 있으면 말하라."

리카르도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세바스티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루어스의 시민 여러분."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또렷했다.

"저는 이단자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진리를 추구했을 뿐입니다."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빛과 어둠이 대립한다고 믿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지입니다.
빛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하며, 어둠은 빛이 있기에 의미를 갖습니다."

"닥쳐라, 이단자!"

군중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세바스티안은 계속했다.
목소리가 점점 강해졌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순수의 검단은 어둠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를 고문할 때도, 여러분을 조종할 때도 어둠의 힘을 빌렸습니다."

군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순수를 추구한다면서 어둠의 힘을 쓰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이단이 아니겠습니까?"

리카르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만! 더 이상 이단 사상 유포는 허용하지 않겠다!"

집행관에게 신호를 보냈다.
횃불을 든 집행관이 세바스티안의 화형대 아래로 다가갔다.

"스승님!"

커넬이 절규했다.

그 순간, 세바스티안의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커넬만 들을 수 있는 작은 기도였다.

"멘탈로니아의 7 정신이여, 그리고 균형의 8번째 존재여.
이 죽음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소서."

횃불이 장작에 닿았다.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불길이 세바스티안을 태우는 대신,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보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뭐야, 저게?"

"불길이 이상해!"

군중들이 술렁거렸다.

세바스티안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화염의 빛이 아니라, 더욱 깊고 신성한 빛이었다.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의 빛이었다.

"리카르도."

세바스티안이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젠가 너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신성함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네가 진짜로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지를."

그리고 커넬을 바라보았다.

"제자여, 내 마지막 선물을 받아라. 균형의 진정한 힘을."

세바스티안의 몸에서 나온 빛이 갑자기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빛이 커넬에게까지 닿았고, 순간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들이 녹아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커넬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힘이 솟아올랐다. 세바스티안이 전해준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균형의 진정한 힘, 빛과 어둠을 모두 품을 수 있는 구마의 궁극적 경지였다.

"불가능해!"

리카르도가 외쳤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어!"

하지만 기적은 계속되었다. 세바스티안의 몸은 불길 속에서 사라졌지만,
영혼은 빛의 형태로 남았다. 빛은 커넬을 완전히 감쌌다.

커넬은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스승의 마지막 힘이 그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었다.

"세바스티안!"

커넬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하지만 빛의 형태가 된 스승은 이미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며 사라져 갔다.

광장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들이 방금 일어난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커넬은 스승이 준 힘으로 광장을 벗어났다.
공중을 날아 루어스 성벽 너머로 사라져 갔다.

뒤에서는 리카르도의 절규가 들려왔다.

"저 이단자를 잡아라! 절대 놓치지 마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커넬은 사라졌고,
세바스티안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제자에게 새로운 힘을 전해주었다.


-


루어스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커넬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세바스티안의 마지막 힘으로 여기까지 날아왔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몸의 상처도 상처였지만, 마음의 상처가 더 깊었다.

스승이 죽었다.

그 사실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제 정말로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렸다.

커넬은 숲 속에서 며칠을 방황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그저 걸었다. 목적지도 없이, 방향도 없이.

분노가 끓어올랐다. 리카르도에 대한 분노, 순수의 검단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막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복수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리카르도를 죽여야 한다. 순수의 검단을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세바스티안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진정한 빛은 어둠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포용할 때 가장 밝게 빛난다.'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커넬은 갈등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정의를 위해 복수해야 할까.

일주일 후, 그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동정했다. 한 노파가 그에게 음식과 물을 주었다.

"젊은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많이 다쳐 보이는군요."

커넬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이단자로 몰려 도망친 구마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길을 잃었을 뿐입니다."

"길을 잃었다고요?"

노파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가려고 했는데요?"

커넬은 잠시 생각했다.
정말로, 그는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모르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노파는 며칠간 그를 자신의 집에 재워주었다.
그동안 커넬은 조금씩 몸의 상처를 치료했지만, 마음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만 갔다.

어느 날 밤, 그는 꿈에서 세바스티안을 만났다.

"스승님..."

"커넬."

세바스티안이 빛의 형태로 나타났다.

"너는 아직도 복수를 생각하고 있구나."

"스승님을 죽인 그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바스티안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복수가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균형을 찾아라."

세바스티안이 말했다.

"너의 분노도, 너의 슬픔도 모두 받아들여라.
하지만 그것에 지배당하지는 마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세바스티안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해라. 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것을.
진정한 빛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꿈에서 깨어난 커넬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스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복수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며칠 후, 그는 노파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마을을 떠났다.

목적지는 마이소시아 대륙 북부의 타고르였다.
거기서 시간을 갖고 자신을 돌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타고르. 잊힌 영웅들의 전설이 잠든 땅. 많은 이야기가 묻힌 곳.
그곳에서 그는 진정한 자신을 찾을 것이다.

길을 떠나며 커넬은 주머니에서 세바스티안이 남긴 책자를 꺼냈다.
'균형의 진리'라는 제목의 그 얇은 책.

첫 페이지를 넘기며 그는 스승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었다.

'커넬,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라. 그리고 복수를 꿈꾸지도 마라.
진정한 승리는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균형을 찾아라.
그것이 네가 걸어야 할 길이다.'

커넬은 책을 가슴에 품고 걸음을 계속했다. 앞으로 얼마나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알았다.

복수가 아닌 균형.

증오가 아닌 이해.

타고르로 향하는 길 위에서,
잊힌 영웅들의 전설이 잠든 그 땅에서 그는 진정한 자신을 찾을 것이다.

세바스티안이 그에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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