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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순례자] - 12장. 그림자의 시험
543 2025.06.01. 23:57

순례자, 그림자의 언약. 13


12장. 그림자의 시험

































1. 복수심이 기도가 되는 시간


첫눈이 내린 지 세 달이 지났다.
타고르의 산자락에 자리한 작은 수도원에서 커넬은 매일을 죽은 자처럼 보냈다.
새벽 기도도, 침묵의 식사도, 끝없는 명상도 모두 의례일 뿐이었다. 진짜 기도는 나오지 않았다.

입에서 나오려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용서가 아니라 복수에 대한 맹세였다.

카이런의 나침반도, 일리아스의 시간 반지도, 세바스티안의 약속 반지도 모두 리카르도에게 빼앗겼다.
스승의 마지막 유품마저 원수의 손에 넘어간 현실이 그를 더욱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직 분노만이, 복수심만이 그의 가슴을 태우며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침반 없이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복수라는 나침반이 항상 루어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반지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과거를 바꾸는 것보다 미래에 복수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스승의 반지가 없어도 약속은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 약속이 균형과 조화가 아니라 피와 복수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세바스티안이 꿈꾸던 세상은 실패했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꿔야 했다. 칼로써, 피로써, 복수로써.

눈 덮인 침묵이라는 말은 거짓이었다.
애초에 고요한 적 없었다. 가슴 안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소리를 냈다.
박동이 아니었다. 더 거칠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밤낮으로 그를 갉아먹었다.

분노가 이를 가는 소리일까.
후회가 벽을 긁는 소리일까.
아니면 복수심이 칼날을 가는 소리일까.

세바스티안이 죽던 그날부터 시작된 소리였다.
루어스 중앙 광장에서 화염이 치솟고 스승이 마지막 숨을 내쉬던 그 순간부터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어둠의 소리였다.

리카르도의 차가운 눈빛이 매일 밤 꿈에 나타나 그를 조롱했다.

한때는 친구였던 자가, 동료였던 자가 이제는 가장 증오스러운 원수가 되어
루어스에서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여기서 무력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그는 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은 가야 한다. 루어스로, 리카르도에게.'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지금, 그에게 무슨 힘이 있다는 말인가.
맨손으로 순수의 검단과 싸울 수 있을까. 그렇게 자문하고, 절망하고, 다시 분노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또 그 악몽이군요."

수도원장 파트리시오 형제가 새벽 종성을 울리며 중얼거렸다.
마흔이 넘은 얼굴에 깊은 피로가 새겨져 있었다. 밤새 잠을 설친 흔적이 역력했다.
눈 아래 검은 그늘이 날마다 짙어져 갔다.

수도원 전체가 무언가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커넬이 가져온 어둠에. 그는 구마사로 왔지만 오히려 악마를 불러들이는 것 같았다.

기도 시간마다 들려오는 것은 찬송이 아니라 신음소리였고,
식사 시간의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억압된 분노로 가득했다.

커넬의 내면에서 새어 나오는 어둠이 수도원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구마사가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파트리시오는 때로 궁금했다.
언제부터 커넬의 눈빛이 이렇게 차가워졌을까. 언제부터 그의 미소에서 온기가 사라졌을까.

처음 수도원에 왔을 때만 해도 그는 여전히 구마사다웠다.
상처받고 지쳤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구하려는 의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난 지금,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의 눈빛이었다.

커넬은 기도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응시했다.
눈 위에 까마귀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겨울 산중에서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수십 마리의 검은 새들이 무언가에 이끌려 모여들었다.

새들의 검은 눈동자가 모두 한 방향을 바라봤다. 커넬을 향해.
그 시선들 속에서 그는 자신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구마사에서 다른 무언가로.
구원자에서 복수자로. 세바스티안의 제자에서 리카르도의 복수귀로.

까마귀들은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을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있었고, 날마다 숫자가 늘어났다.
마치 그의 내면의 어둠이 깊어질수록 더 많은 새들이 모여드는 것 같았다.

수도원의 다른 형제들도 까마귀들을 불길하게 여겼다.

"저 새들이 나타난 이후로 이상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젊은 수도사 바하르가 속삭였다.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 같고..."

하지만 커넬에게는 까마귀들이 불길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숙했다. 자신과 같은 어둠을 품은 존재들 같았다.

"어떤 꿈을 꾸십니까?"

커넬의 목소리가 변해 있었다.
석 달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건조했다. 감정이 빠진, 낡은 나무가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세바스티안이 죽던 날 이후로 목소리에서 온기가 사라져 버렸다.

온기뿐만 아니라 희망이라고 불리던 것도, 자비라고 불리던 것도 모두 그날 화염 속에서 타버렸다.
이제 남은 건 차가운 의지뿐이었다. 복수를 향한 얼음처럼 차가운 의지. 리카르도를 죽이겠다는 확고한 결심.

순수의 검단을 모조리 불태우겠다는 맹세.

그것만이 그를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다른 모든 것은 의미를 잃었다.
구마사로서의 사명도,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이상도, 세바스티안의 가르침도.

오직 복수만이 의미였다. 복수만이 목적이었다. 복수만이 그의 존재 이유였다.

"아이들이 웁니다. 계속 울어요."

파트리시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울음소리가 점점 웃음소리로 변해가더니, 웃음 속에서 세바스티안 주교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왜 나를 구하지 못했느냐'라고 묻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목소리가 원망하는 투가 아니라 격려하는 투였어요."

파트리시오가 잠시 머뭇거렸다. 다음 말을 하기가 두려웠다.

"마치 '이제 복수할 때가 됐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리카르도의 모습도 보였어요.
피에 젖은 검을 들고 웃고 있더군요.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루어스에서, 아니면 마이소시아 전역에서."

파트리시오의 말에 커넬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리카르도. 그 이름만 들어도 피가 끓어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자는 루어스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세바스티안의 이름을 더럽히며, 아벨 교단을 파괴하며, 순수의 검단의 광기를 퍼뜨리며.

"꿈에서 더 본 것이 있나요?"

커넬이 조용히 물었다. 목소리에 위험한 것이 스며 있었다.

"리카르도가... 리카르도가 무언가를 들고 있었어요. 반지들이었어요.
두 개의 반지. 그중 하나에서 빛이 나고 있었는데..." 파트리시오가 떨었다.
"그 빛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어요. 죽어가는 것처럼."

세바스티안의 약속 반지.
커넬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스승의 마지막 유품이 리카르도의 손에서 더럽혀지고 있다니.
그것도 모자라 그 힘마저 악용당하고 있다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커넬이 일어섰다. 눈빛이 변해 있었다. 예전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빛만이 남아 있었다. 구마사의 눈빛이 아니었다. 심판자의 눈빛이었다. 복수자의 눈빛이었다.

"커넬님..."

"이제 결정했습니다."

커넬이 창밖의 까마귀들을 바라봤다.
새들이 일제히 울음소리를 냈다. 그의 결심에 화답하는 것 같았다.

"루어스로 갑니다. 리카르도를 찾아서."

"그건 너무 위험해요. 순수의 검단이 완전히 장악한 곳인데..."

"위험하다고요?"

커넬이 돌아봤다.
그의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것이 번뜩였다.

"저에게 더 이상 잃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파트리시오가 말문이 막혔다. 정말로 커넬에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스승도, 친구도, 소중한 물건들도 모두 잃었다. 남은 건 복수심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커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언가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아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커넬이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뭔가 더 중요한 일이 먼저 벌어져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운명이 그를 잡아끄는 것 같았다.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을 기다리시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때가 올 겁니다. 그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커넬이 다시 기도대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도하지 않았다.
대신 깊은 명상에 빠졌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분노와 복수심의 바다를 헤엄쳐 들어갔다.

그 깊은 곳에서 무언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과 닮은, 하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가.





2. 죽은 자들의 속삭임


커넬은 기도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입에서 나오려는 건 기도가 아니라 저주였다.
축복이 아니라 복수에 대한 맹세였다.

'신이시여, 리카르도에게 복수할 힘을 주소서.'

'신이시여, 순수의 검단을 모조리 불태울 수 있는 권능을 주소서.'

'신이시여, 세바스티안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게 해 주소서.'

이런 기도가 옳은가? 구마사의 기도가 이래도 되는가? 하지만 다른 기도는 나오지 않았다.
용서에 관한 기도는, 평화에 관한 기도는, 균형에 관한 기도는 목구멍에서 막혀버렸다.

그런 단어들이 더 이상 그의 어휘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바스티안의 가르침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균형이니 조화니 하는 말들이 공허하게 들렸다.

현실은 불균형이었다.
악이 선을 압도하고, 거짓이 진실을 짓밟고, 잔혹함이 자비를 조롱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 균형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악과 타협하라는 말인가. 거짓과 조화를 이루라는 말인가. 잔혹함을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창밖의 까마귀 하나가 갑자기 날개를 펼쳤다.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눈 위에 드리워졌다.

그림자. 왜 자꾸 그림자가 보이는 걸까.
자신의 그림자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짙어지는 게 아니라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
독립적인 의지를 갖고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젯밤 꿈에서 본 것이 떠올랐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 눈빛이 차갑고 잔혹한 또 다른 커넬.

복수에 관해서라면 어떤 망설임도 없는 존재.
어쩌면 자신이 진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되어야 하는 모습일지도.

점심시간이 되어도 커넬은 식사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른 종류의 갈증이 배고픔을 압도하고 있었다.

복수에 대한 갈증. 피에 대한 갈증.
정의에 대한 갈증이라고 자신을 속이고 있지만, 사실은 단순한 복수에 대한 갈증이었다.

복수야말로 그에게 남은 유일한 의미였다. 복수야말로 그를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다른 모든 것은 의미를 잃었다.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사명도, 구마사로서의 정체성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오직 리카르도를 죽이는 것만이 의미였다.
순수의 검단을 불태우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세바스티안의 원한을 푸는 것만이 그의 존재 이유였다.

파트리시오가 우려스럽게 찾아왔다.

"식사를 하셔야죠."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몸이 약해지면..."

"몸이 약해진다고요?"

커넬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제 몸이 약해서 세바스티안이 죽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니면 제 마음이 약해서? 제 의지가 약해서?"

파트리시오가 당황했다.
커넬의 목소리에 지금까지 들어** 못한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더 차가운 무언가였다. 계산된 잔혹함이었다.

"제가 더 강했다면, 제가 더 냉정했다면,
제가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세바스티안은 지금 살아있을 겁니다."

커넬이 일어섰다. 눈빛이 변해 있었다.
예전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빛만이 남아 있었다.

"제가 리카르도를 죽였어야 했습니다. 사막에서 만났을 때, 선악의 경계에서 만났을 때,
그때 주저하지 말고 목을 베었어야 했어요. 자비라는 이름의 나약함 때문에 더 큰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커넬님, 그런 생각은..."

"틀렸나요? 정말 틀린 생각인가요?"

파트리시오가 말문이 막혔다.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리카르도를 그때 죽였다면 세바스티안은 살아있을 것이었다.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도 죽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바스티안 주교님이 원하던 길이 아닙니다."

"세바스티안이 원하던 길?"

커넬이 웃었다.
쓰고 차가운 웃음이었다.

"세바스티안이 원하던 길이 뭔지 아십니까? 균형이라고 했죠.
빛과 어둠의 균형. 하지만 지금 보세요. 균형이 어디 있습니까? 어둠이 빛을 완전히 집어삼켰습니다."

커넬이 창밖을 가리켰다.

"세상은 순수의 검단의 광기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어요. 이것이 균형입니까? 이것이 세바스티안이 원했던 세상입니까?"

파트리시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커넬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 세상은 점점 더 어둠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니면 이것도 균형의 일부라고 하실 건가요? 악이 선을 짓밟는 것도 자연의 이치라고?"

"커넬님..."

"제가 보기에는 세바스티안의 균형 철학이 틀렸습니다."

커넬의 말에 파트리시오가 놀랐다. 신성모독에 가까웠다.

"어둠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다가 어둠에게 집어삼켜진 거예요.
정말 균형을 원한다면 어둠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순수의 검단과 같다고요? 아니죠."

커넬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미소에 온기가 없었다.

"저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다만 진짜 악한 자들, 리카르도 같은 자들을 제거할 뿐입니다."

"하지만 누가 진짜 악한 자인지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커넬이 단호하게 말했다.

"세바스티안을 죽인 자들이 진짜 악한 자들입니다."

그 순간 창밖의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수십 마리의 검은 새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 아래로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커넬 자신의 그림자가 벽에 비쳤다.

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더 크고, 더 어둡고, 더 위협적이었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커넬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그리고 웃었다. 복수를 약속하는 듯한 잔혹한 미소로.

오후가 되어 마을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열 명 남짓의 촌민들이 눈길을 헤치고 수도원까지 올라왔다.
얼굴에는 공통적으로 극도의 피로와 공포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커넬의 눈에는 다른 것도 보였다.
이들의 공포 뒤에 숨겨진 또 다른 감정. 분노. 복수심. 자신과 닮은 어둠이었다.
모든 인간이 품고 있지만 평소에는 숨겨두는 원시적 감정들.

커넬의 변화하는 영적 에너지가 이들의 억압된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마사로서의 힘이 역설적으로 어둠을 끌어내고 있었다.

"구마사님, 도와주십시오."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낮에도 환영을 봅니다. 그런데 그 환영들이..."

"어떤 환영입니까?"

커넬이 냉담하게 물었다. 목소리에서 동정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학자가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하는 것 같은 차가운 호기심만이 있을 뿐이었다.

"죽은 소녀가 나타납니다. 흰 드레스를 입고 울면서 '왜 저를 혼자 두었나요'라고 묻습니다."

커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에일린?

"거울을 보면 다른 얼굴이 비칩니다. 무서운 얼굴이요.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포보스.

"춤추는 여인도 나타나는데, 검은 드레스를 입고
'복수만이 진정한 해답'이라고 속삭입니다."

다이애나.

"그리고 오래된 책을 든 남자가 '모든 지식이 거짓이라면 무엇을 믿겠느냐'라고 묻기도 합니다."

타르시우스.

커넬이 일어났다. 얼굴이 창백했지만 표정은 무표정했다.
아니, 무표정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강렬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흥미롭군요."

커넬이 중얼거렸다. 촌민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반응이었다.
구마사라면 걱정하거나 동정해야 할 텐데, 커넬은 연구 대상을 바라보는 학자의 눈빛이었다.

"혹시 그 환영들이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지는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복수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촌민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실제로 그런 메시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말들도 있었습니다. '복수하라', '정의를 실현하라' 같은...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이상하게 편해진다는 거예요."

한 중년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온 무언가가 해방되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저희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는 영주님, 부당하게 곡식값을 깎는 상인들, 우리를 무시하는 귀족들..."

"평소에는 참고 살았는데, 요즘은 그런 생각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요.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다른 촌민이 덧붙였다.

"누구에게 복수하라고 하던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하지만 왠지 우리가 원망하던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커넬이 마을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 깊은 곳에서 무언가 어두운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온 분노와 원망이 서서히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극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커넬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새어 나오는 어둠의 에너지가 다른 사람들의 숨겨진 감정을 깨우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마을로 가보겠습니다."

"정말이세요? 감사합니다!"

촌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커넬의 눈빛을 제대로 봤다면 그렇게 안도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눈빛에는 구원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확인하고 싶다는 의지. 자신의 변화를 확인하고 싶다는 의지.
자신이 진짜 바뀔 수 있는지, 복수자가 될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다는 위험한 호기심이었다.

촌민들이 돌아간 후, 파트리시오가 우려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상태로는..."

"지금 상태라고 하면?"

커넬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세바스티안 주교님이 돌아가신 후로 영적인 힘이 불안정해 보입니다. 내면에 균열이 생긴 듯..."

"균열이라..."

커넬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균열. 정확한 표현이었다. 자신 안에 무언가 갈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빛과 어둠이 분리되고 있다는 느낌. 세바스티안이 말했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아니다. 애초에 균형 따위는 없었다. 있었던 건 억지로 묶어둔 분노뿐이었다.
이제 그 분노가 해방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일일까?

커넬은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구마사가 진정한 힘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일지도.

그날 밤, 커넬은 다시 악몽을 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꿈속에서 그는 루어스에 있었다.

중앙 광장에서 세바스티안이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화형대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대신 리카르도를 향해 달려갔다.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번개처럼 빠른 일격이었다.
리카르도의 목이 땅에 굴러 떨어졌다. 순수의 검단 기사들이 놀라 달려들었지만, 그들도 차례로 베어 넘겼다.

피가 광장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는 행복했다. 마침내 복수를 이뤘다는 환희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세바스티안도 구해냈다. 화형은 중단됐고, 스승은 살아났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커넬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진정한 만족감이었다. 복수야말로 해답이었다. 복수야말로 그가 가야 할 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커넬은 마을로 향했다.

눈길을 걸으며 그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꼈다.
발걸음이 예전과 달랐다. 더 무겁고, 더 결연했다.

복수를 향한 발걸음일까, 구원을 향한 발걸음일까? 이제 그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애초에 둘 다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악을 멸하는 것과 선을 구하는 것, 복수와 정의, 증오와 사랑. 경계가 흐려져 갔다.

마을에 도착하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낮인데도 사람들이 거리를 제대로 걷지 못했다.

무언가에 시달리는 듯 중얼거리고, 허공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어떤 이는 혼자서 대화하고,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는 듯 몸짓했다.

마을 전체가 집단 환각에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커넬에게는 그들이 보는 것이 보였다.

환영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흐릿하게, 그에게는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구마사님!"

촌장이 달려왔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어젯밤에 더 심해졌습니다.
이제는 낮에도 환영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가고 있어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저기! 저기 있어요! 그 소녀가!"

여인이 가리키는 곳에는 평범한 이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커넬에게는 보였다. 흰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에일린이었다.

하지만 예전의 순수했던 에일린과는 달랐다.
더 창백하고, 더 원망스러운 표정이었다. 눈에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절망이 서려 있었다.

'왜 저를 구하지 못했나요?'

에일린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목소리가 예전과 달랐다. 더 원망스럽고, 더 차가웠다.

'왜 저만 구하고 그분은 구하지 못했나요?
진정한 구원이란 악을 뿌리 뽑는 것 아닌가요?'

커넬이 이를 갈았다.

"네가 뭘 안다고..."

중얼거리다가 멈췄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잣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계속하십시오."

커넬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파악했다.
에일린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포보스의 거울이 곳곳에 환영으로 나타나고,
다이애나의 춤추는 모습이 목격되고, 타르시우스가 든 책이 허공에 떠다녔다.

모든 환영들이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왜 우리만 구했느냐?'

'왜 그는 구하지 못했느냐?'

'복수하라.'

'복수만이 답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환영들의 말이 자신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자신이 밤마다 되뇌던 생각들과 똑같았다. 혹시 이 환영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자신의 억압된 감정들이 외부로 투사된 것은 아닐까?
구마사로서의 정체성과 복수자로서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의 내면이 물리적 현실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구마사님, 도와주세요!"

한 젊은 남자가 달려왔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제 아내가... 제 아내가 계속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어떤 소리를?"

"복수하라고, 우리를 죽인 자들을 찾아서 복수하라고...
하지만 우리를 죽인 자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는데..."

남자가 떨었다.

"아내는 계속 말해요. 영주에게 복수하라고,
징수관에게 복수하라고,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자들에게 복수하라고..."

커넬이 남자를 자세히 봤다. 평범한 농부로 보였다.
선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 깊은 곳에서 무언가 어두운 것이 꿈틀거렸다.

분노. 오랫동안 억눌러온 분노.
불의에 대한 분노, 가난에 대한 분노, 무력함에 대한 분노.
모든 인간이 품고 있지만 평소에는 숨겨두는 원시적 감정들이었다.

"혹시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커넬이 물었다.

"원망이라고요?"

"예를 들어,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는 영주라든지.
부당하게 대하는 상인이라든지. 아니면 더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만든 세상 자체라든지."

남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런... 그런 건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죠."

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원망이 깊어지면 복수심이 되고, 복수심이 깊어지면..."

커넬이 말을 멈췄다.
자신도 똑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도에 대한 원망. 순수의 검단에 대한 분노.
세바스티안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

자신이 구원하지 못한 모든 영혼들에 대한 죄책감.
자신도 이 마을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더 깊은 어둠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구마사라는 지위와 책임감이 오히려 그 어둠을 더 짙게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구마사님?"

남자가 불안하게 불렀다.

"아, 미안합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제 아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래요. 모두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고, 피로 갚아야 한다고..."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말을 할 때 아내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는 거예요.
... 마치 진짜 자기 모습을 찾은 것 같다고 할까요?"

커넬이 마을을 둘러봤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모두 어떤 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 억눌러온 원망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얼굴에는 묘한 해방감도 보였다.
오랫동안 숨겨왔던 진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처럼.

복수심이라는 금기를 깨뜨리는 것에서 오는 쾌감.
선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

이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문명과 도덕의 가면 뒤에 숨겨진 야생의 본능일까?

"이것은..."

커넬이 중얼거렸다.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충격적이었다. 이 현상은 자신이 원인이었다.
자신의 변화하는 내면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구마사로서의 영적 힘이 자신의 어둠과 결합해 다른 사람들의 억압된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둠의 마법사가 된 것처럼.
구마사가 아니라 마를 부르는 자가 된 것처럼.





3. 어둠과의 첫 번째 대화


그때 마을 광장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지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거대한 그림자가 땅에서 솟아올랐다.

커넬과 똑같은 모습이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눈빛이 차갑고 잔혹했다. 입가에는 냉소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 못하는 듯했다. 오직 커넬만이 볼 수 있었다.

그림자 커넬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만났군."

목소리마저 커넬과 똑같았다.
하지만 톤이 완전히 달랐다. 더 차갑고, 더 확신에 차 있었다. 망설임이 없었다.

"넌 누구냐?"

"나? 나는 네가 되고 싶어 하는 존재야. 네가 되어야 하는 존재."

그림자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복수를 두려워하는 바보 같은 너와 달리, 나는 확신한다.
리카르도는 죽어야 하고, 순수의 검단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 그것만이 세바스티안을 위한 진정한 추도야."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 웃기는 소리군."

그림자가 비웃었다.

"네 방식으로 뭐가 해결됐지? 세바스티안은 죽었고, 리카르도는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
순수의 검단은 온 대륙을 공포로 물들이고 있고. 네 무력한 자비심이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고 있어."

그림자의 말에 커넬이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망설임과 자비심이 더 큰 비극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리카르도를 죽이지 않은 것이 정말 옳은 선택이었을까?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 진정한 자비일까?

"봐라."

그림자가 손을 뻗자 마을 곳곳에서 환영들이 더 선명해졌다.
에일린, 포보스, 다이애나, 타르시우스. 모든 존재들이 커넬을 응시했다.

"이들은 모두 네가 구한 영혼들이야.
그런데 왜 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지 알겠나? 진정한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야."

에일린이 한 걸음 다가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구마사님, 저를 구해주셨지만 정말 구원받은 건 맞나요? 저와 같은 영혼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어요.
순수의 검단이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거든요. 그들을 막지 않으면 제 구원도 의미가 없어져요.'

포보스의 거울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서 리카르도의 얼굴이 보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를 죽이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길이다. 두려움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비겁함이다.'

다이애나가 춤을 추며 속삭였다.

'복수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에요. 세바스티안에 대한 사랑이라면 당연히 복수해야 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복수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이에요.'

타르시우스가 책을 펼쳐 보였다.

'모든 역사가 증명한다. 악한 자를 용서하는 것은 더 큰 악을 낳을 뿐이다.
지식은 명확하다. 리카르도 같은 존재는 제거되어야 한다.'

커넬의 가슴이 뛰었다.
피가 끓어올랐다. 분노가 치솟았다.

맞다.
이들의 말이 맞다.

복수해야 한다. 리카르도를 죽여야 한다. 순수의 검단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
그것만이 세바스티안을 위한 길이다. 그것만이 진정한 구마사의 길이다.

악을 구마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사명 아닌가?

"이제 알겠나?"

그림자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와 하나가 되어라. 그러면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리카르도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 있는 힘을. 순수의 검단 전체를 하룻밤에 불태울 수 있는 힘을."

그림자가 손을 뻗었다. 그 손에서 어둠의 힘이 뿜어져 나왔다.
강력하고 매혹적인 힘. 복수를 이룰 수 있는 절대적 권능.

커넬이 그 손을 잡으려는 순간.

"아니다."

커넬이 갑자기 손을 멈췄다.

"뭐?"

"아니라고 했다."

커넬이 고개를 저었다.
가슴이 여전히 끓어올랐지만, 머리는 차갑게 돌아갔다.

"세바스티안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세바스티안은 죽었다! 네 무력함 때문에!"

"맞다. 죽었다. 내 무력함 때문에."

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가르침까지 죽은 건 아니다."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균형, 커넬. 빛과 어둠의 균형이야.
어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기억도 떠올랐다.
루어스를 떠나기 전날 밤, 세바스티안과 나눈 마지막 대화.

'커넬, 언젠가 너는 너 자신의 어둠과 마주하게 될 거야.
그때 기억해라. 어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것을.'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세바스티안도 이 순간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커넬은 마을 여관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들자마자 다시 사막에 있었다. 이번에는 자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힘든 하루였군요."

현자가 모래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당신의 그림자를 봤으니까요."

자날이 커넬의 뒤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자신의 그림자가 모래 위에 비쳐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림자가 자신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 크고, 더 어둡고, 더 위협적이었다.

"저것이 제 그림자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억눌러온 모든 어둠이 하나로 뭉쳐진 존재입니다."

자날이 그림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분노, 복수심, 절망, 증오... 모든 부정적 감정이 하나의 인격을 형성한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는 정의감도, 사랑도, 보호 본능도 들어있습니다. 순수한 악이 아니라 복합적 존재죠."

"그게 나쁜 일입니까?"

커넬이 물었다.

"그림자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이죠.
세바스티안도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것을 하나로 묶어냈어요."

"세바스티안에게도 그림자가?"

"물론입니다. 세바스티안 또한 인간이었으니까요. 그의 그림자는 절망이었습니다.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절망, 균형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 하지만 그는 절망을 받아들이고 희망과 조화시켰죠."

자날이 커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떻게 다뤄야 합니까?"

"받아들이세요."

자날의 답변이 단순했다.

"받아들인다고요?"

"그렇습니다. 부정하거나 억압하려 하지 마세요. 당신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세요.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어요."

"하지만 그림자는 복수를 원합니다.
리카르도를 죽이라고, 순수의 검단을 없애라고 합니다."

"당신의 진솔한 감정 아닙니까?"

자날의 말에 커넬이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리카르도를 죽이고 싶지 않으십니까? 정말로 순수의 검단을 없애고 싶지 않으십니까?"

"... 그렇습니다."

커넬이 인정했다.

"매일 밤 꿈꿉니다. 그들을 죽이는 꿈을. 그리고 그 꿈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느껴져요."

"그럼 된 것입니다."

"네?"

"자신의 어둠을 인정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자날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인정한다고 해서 그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은 복수하고 싶어 합니다. 물론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까요. 세바스티안 님에 대한 사랑이 복수심으로 전환된 것이죠."

자날이 일어나서 커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 감정에 지배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을 느끼면서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어떻게요?"

"그림자와 대화하세요. 싸우지 말고, 억누르지 말고, 대화하세요. 그림자의 말을 들어보세요.
왜 복수를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세요."

사막의 모래가 다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기억하세요, 커넬님. 그림자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당신의 일부입니다.
그것을 적으로 만드는 순간 당신은 자기 자신과 싸우게 됩니다."

자날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이해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이것이 세바스티안이 말한 진정한 균형입니다."

"어둠을 부정하려 하지 마세요. 모두가 당신의 일부입니다.
다만 어둠에 지배당하지는 마세요. 조화를 이루세요. 그게 바로 진정한 균형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커넬은 여관방에서 일어나 창밖을 봤다.
마을이 고요했다. 어제와 달리 환영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자는 여전히 보였다.
촛불빛에 비친 그림자가 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그림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대화하고 싶다고?"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렇다."

커넬이 답했다.

"좋다. 그럼 대화해 보자."

그림자가 벽에서 나와 물리적인 형태를 갖췄다.
커넬과 똑같은 모습이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눈빛이 더 날카롭고, 자세가 더 당당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넌 나를 받아들일 수 있나?"

"... 모르겠다."

"정직하군. 마음에 든다."

그림자가 웃었다.

"그럼 질문 하나. 세바스티안이 죽었을 때 네가 느낀 첫 번째 감정이 뭐였지?"

커넬이 잠시 생각했다.

"슬픔이었다."

"거짓말."

그림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첫 번째 감정은 분노였어.
리카르도에 대한, 순수의 검단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커넬이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세바스티안이 화형대에서 불타는 것을 보며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였다. 타오르는 분노였다.

"두 번째 감정이 뭐였지?"

"복수심이었다."

"그렇지. 그리고 세 번째는?"

"... 쾌감이었다."

커넬이 어렵게 인정했다.

"리카르도를 죽이는 상상을 할 때 느꼈던 쾌감."

"바로 그거야."

그림자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복수를 원하고, 그 복수를 상상할 때 쾌감을 느낀다.
그게 네 진짜 모습이야. 숨길 필요 없어."

"하지만 그런 감정이 옳지 않다는 것도 안다."

"왜 옳지 않지?"

"더 많은 고통을 낳을 테니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고,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만들어낸다."

"정말? 리카르도를 죽이면 더 많은 고통이 생길까?"

그림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않을까? 순수의 검단을 없애면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리카르도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어. 너의 망설임 때문에."

"그건..."

커넬이 말을 멈췄다.
그림자의 논리에 반박할 명확한 근거를 찾기 어려웠다.

"아니면 네가 두려워하는 건 고통이 아니라 다른 거 아닐까?"

"다른 거라면?"

"네가 괴물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 아냐?"

그림자의 말에 커넬이 움찔했다.
정곡을 찔렸다.

"맞지? 넌 복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이 괴물 같다고 생각해.
세바스티안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구마사로서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틀렸나?"

"틀렸지."

그림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괴물은 복수하고 싶어 하는 자가 아니야.
복수해야 할 상황에서 복수하지 않는 자가 괴물이지."

"무슨 뜻이냐?"

"리카르도는 계속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어.
너는 악을 막을 힘이 있어. 하지만 막지 않고 있지. 왜? 네 도덕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림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은?
너는 네 손을 더럽히기 싫어서 그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거야."

커넬이 할 말을 잃었다. 그림자의 말이 가슴에 꽂혔다.
정말 자신이 도덕적 순수성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게 정말 세바스티안이 원했던 일일까?
네가 도덕적으로 순수하기를 원했을까, 아니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를 원했을까?"

"세바스티안은... 균형을 말했다. 빛과 어둠의 조화를."

"맞아. 균형 말이야."

그림자가 냉소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넌 세바스티안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
균형이라는 건 선악을 적당히 섞는 게 아냐. 상황에 따라 적절한 선택을 하는 거지."

"그럼 지금 상황에서 적절한 선택은?"

"리카르도를 죽이는 거야."

그림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균형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이는 거지. 네가 괴물이어서가 아니라,
더 큰 선을 위해서라는 걸 받아들이는 거야. 복수가 아니라 구마라는 걸 받아들이는 거지."

커넬이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림자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어쩌면 진정한 구마사는 개인적 복수심을 넘어서서 더 큰 선을 위해 악을 제거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만약... 만약 내가 너를 받아들인다면?"

"그럼 진정한 구마사가 될 수 있어.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구마사가.
필요하다면 악을 멸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구마사가."

"대신 무엇을 잃게 될까?"

"순수함이라는 착각을 잃게 될 거야."

그림자가 웃었다.

"하지만 그게 나쁜 일일까? 애초에 순수한 인간이 어디 있어?
모든 인간은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성인도, 구마사도 마찬가지야."

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럼 결정해. 나를 받아들일 거야, 아니면 계속 싸울 거야?"

그림자가 손을 내밀었다.그 손에서 어둠의 힘이 뿜어져 나왔지만,
동시에 강력한 의지도 느껴졌다. 확고한 신념의 힘이었다.

커넬이 그 손을 바라봤다.
어둠의 손이었지만, 자신의 손이기도 했다. 자신이 부정해 온 또 다른 자신의 손이었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맞닿기 직전에 멈췄다.

"잠깐."

"뭐야?"

"만약... 만약 리카르도도 우리와 같다면?"

"무슨 말이야?"

"만약 리카르도도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다면?
만약 그도 어떤 고통과 상처 때문에 지금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면?"

그림자의 표정이 변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그가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거야."

"정말 상관없을까?"

커넬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도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라면?
만약 우리가 그를 죽이는 것이 또 다른 불균형을 낳는다면?"

"너... 설마..."

"나는 리카르도를 죽이고 싶다. 그건 인정한다.
매일 밤 그의 목을 베는 꿈을 꾸고, 그때마다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커넬이 깊은숨을 쉬었다.

"동시에 그도 구원하고 싶다."

커넬이 손을 내렸다.

"진정한 균형이 아닐까? 복수심을 인정하면서도 지배당하지 않는 것?
어둠을 받아들이면서도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

그림자가 분노했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리카르도는 계속 사람을 죽일 거고, 순수의 검단은 더 강해질 거야!"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바스티안이 원했던 길이다."

커넬이 일어섰다.

"나는 너를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는 않겠다."

"무슨 말이야?"

"복수하고 싶다는 감정은 인정하겠다. 리카르도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도,
순수의 검단을 불태우고 싶다는 충동도 모두 인정하겠다. 하지만 이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겠다."

커넬이 그림자를 바라봤다.

"대신 다른 방법을 찾겠다.
리카르도를 구원할 방법을, 순수의 검단을 바꿀 방법을 찾겠다."

그림자가 웃었다. 하지만 분노한 웃음이었다.

"불가능해. 그런 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해.
악은 선해질 수 없어. 타락은 되돌릴 수 없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

"왜? 왜 그런 어리석은 시도를 하려고 해?"

"왜냐하면..."

커넬이 그림자를 바라봤다.

"너도 구원받고 싶어 하니까."

그 순간 그림자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분노가 사라지고, 슬픔이 드러났다. 잔혹한 미소가 사라지고, 깊은 절망이 얼굴에 스몄다.

"나를... 정말 받아들이겠다고?"

목소리가 달라졌다. 더 슬프고, 더 외로운 목소리였다.
차가운 확신 대신 불안과 갈망이 스며있었다.

"그렇다. 너도 나의 일부니까."

"하지만 나는 어둠이야. 복수심이고 증오야.
네가 부끄러워하는 모든 것들이야."

"그래도 너는 나다."

커넬이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너의 분노도, 너의 복수심도, 모두 사랑에서 나온 거 아니야?
세바스티안에 대한 사랑?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림자가 울기 시작했다. 차가운 어둠이 무너지고,
그 안에 숨겨진 상처가 드러났다.

"나는... 나는 그냥 그가 그리워서...
나는 그냥 더 이상 누군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나도 알고 있다."

커넬이 그림자를 안았다. 차가운 어둠이었지만,
동시에 따뜻한 온기도 느껴졌다. 자신의 또 다른 면이니까. 부정해 온 자신의 진실한 감정이니까.

"우리 함께 가자.
복수가 아닌 구원의 길로. 멸마가 아닌 구마의 길로."

그림자가 커넬의 품에서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커넬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통합된 것이었다.
분리되어 있던 자아의 두 면이 하나가 된 것이었다.





4. 그림자를 안는 자의 탄생


커넬은 거울을 봤다.
얼굴이 변해 있었다. 한쪽 눈이 금색이고 다른 쪽 눈이 은색이었다.

머리카락도 일부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었다. 진정한 균형을 찾은 모습이었다.

더 이상 구마사도 복수자도 아니었다.
그 둘을 모두 포함하면서도 그 어느 것에도 매몰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자신의 어둠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존재.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것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존재.

다음 날 아침, 커넬은 마을 광장으로 향했다.
어제와 달리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음속에서 폭풍이 잦아들었다. 그림자와의 통합이 완료된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받아들인 순간 오히려 평화가 찾아왔다.
분노는 여전히 있었다. 리카르도에 대한 복수심도, 순수의 검단에 대한 증오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 더 이상 자신을 지배하지 않았다.

감정을 느끼면서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강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강물의 흐름을 볼 수 있지만 그 흐름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감정의 파도를 느낄 수 있지만 그 파도에 삼켜지지는 않았다.

이것이 세바스티안이 말했던 균형일까? 빛과 어둠의 조화일까?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랐다. 외모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어제까지 괴롭혔던 환영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공기 자체가 달라졌다. 무겁고 답답했던 분위기가 걷히고, 상쾌한 아침 공기가 흘렀다.

"구마사님!"

촌장이 달려왔다.

"감사합니다! 어젯밤부터 환영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다행입니다."

커넬이 미소 지었다.
예전의 따뜻한 미소도 아니고, 어제의 차가운 미소도 아니었다.

복합적이고 깊이 있는 미소였다.
기쁨과 슬픔이, 희망과 절망이, 사랑과 분노가 동시에 담긴 인간적인 미소였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커넬이 광장을 둘러봤다.

"환영들은 사라졌지만, 그것들을 만들어낸 근본 원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러분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원망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어색해했다.
자신들의 내면이 드러난 것 같아서였다.

"그런 감정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커넬이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인간이 그런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가 자신의 변한 모습을 가리켰다.

"중요한 건 그 감정들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뤄야 하나요?"

한 젊은 여인이 물었다.

"인정하세요. 부정하지 마시고, 숨기려 하지 마시고,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세요."

"그럼 복수해도 되는 건가요?"

"감정을 느끼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릅니다."

커넬이 설명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느낄 수 있지만, 실제로 복수할 필요는 없어요.
분노를 느낄 수 있지만, 그 분노에 지배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른 방법을 찾으세요. 복수 대신 정의를, 분노 대신 용서를, 증오 대신 이해를 추구하세요.
쉽지 않을 겁니다. 저도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이니까요."

커넬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진정한 구원의 길입니다."

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구마사님,
정말 악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순수의 검단 같은..."

"모르겠습니다."

커넬이 솔직하게 답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기하는 순간 정말로 불가능해지니까요."

그때 커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떠올랐다.
세바스티안의 마지막 말. 화형대에서 그가 전한 마지막 메시지.

'리카르도도 언젠가는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해 기다려라.'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세바스티안은 처**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복수가 아니라 구원이 답이라는 것을. 모든 존재가 구원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커넬이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리카르도도 자신의 어둠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도 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조용히 들었다. 복수가 아닌 용서로, 멸마가 아닌 구마로 끝나는 대결을.
어둠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둠에 지배당하지 않는 진정한 균형의 모습을.

그 순간 멀리서 일곱 번째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금색과 은색이 교차하는 이중 불꽃이. 빛과 어둠이 조화롭게 춤추는 균형의 불꽃이.

제7촛불, 균형의 불꽃이 마침내 점화된 것이었다. 커넬의 긴 여정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세바스티안으로부터 시작된 균형의 철학이 커넬 안에서 새롭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제 커넬은 진정한 구마사가 되었다.

빛과 어둠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복수심을 인정하면서도 구원을 선택할 수 있는,
자신의 그림자와 조화를 이룬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 이 균형의 지혜를 전해야 할 것이었다.
세바스티안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원은 계속 돌아간다.

스승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다시 스승으로.
빛과 어둠이 서로를 품고 춤추며, 복수와 용서가 하나의 노래가 된다.

세바스티안이 꿈꾸던 균형의 세상이 마침내 한 사람의 마음에서 완성되었고,
타고르의 아침 공기 속에서 새로운 전설로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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