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게임실행 및 홈페이지 이용을 위해 로그인 해주세요.

시인의 마을 세오
「秘」앨시
612 2025.06.30. 23:57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서고 위치: 제1심층 동방서가, 제라늄 목상자

문서 인장: 「나무와 뿌리」「은 테두리」

문서 제목: 소녀 현자 앨시에 관한 파편적 증언 모음

보관 연대: 세오력 121-207년 (추정 수집기간)

발견 경위: 제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수집

문서 상태: 가을잎처럼 약간 바램, 일부 훼손

열람 제한: 글을 아는 자 이상

관련 문서: 「별과 달」 인장 대현자 실종 조사서



-----



[문서고 관리인 욘의 주석]


기록들은 서로 모순된다.

묘사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평범한 소녀였다 말하며,
또 다른 이는 기이한 초월적인 존재라 적는다.

목소리도, 표정도,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다르게 증언된다.

나이조차 일치하지 않는다. 열 살이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열여섯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다.
키와 몸집, 말투와 행동양식까지 저마다 다른 아이를 본 듯하다.

그러나 단 하나만큼은 모든 기록이 일치한다.
은발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



-----



1. 빌 여관지기의 투덜거림


출처: 운디네 베르디아 ‘춤추는 조랑말’, 사촌에게 보내는 편지
기록일: 세오력 192년 여름



젠장할 비가 또 내리는 날이었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꼬마 하나가 서 있었어.
온몸이 젖어 있었는데 우산도 없이 왔나 보더라고. 나이는… 글쎄, 열 살? 열두 살?
키는 작은데 눈빛은 묘하게 늙어 보였어.

애가 말없이 여관 안을 둘러봤어. 천천히.
그러더니 코를 벌름거렸지.

“여기 술, 왜 이렇게 짜요?”

어? 뭔 소리야?
나는 당황했어.

“짜다고? 넌 술도 못 마시는 애가 뭘 안다고…”

“냄새가 짜요. 바다 냄새 같아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어. 바다? 아, 눈물 말하는 건가?
요즘 술 빚을 때마다… 아내 생각에 자꾸 울게 되거든.

“그럼 다른 데 가.”

“괜찮아요. 짠 술이 더 진짜 같아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서 그냥 일을 계속했지. 아이는 구석 자리에 앉더니 손님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어.
근데 이상하게 봐. 사람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뭔가를 찾는 것 같았어.

로사 할매가 들어왔어. 빵 바구니를 들고 투덜거리면서.

“아이고, 또 안 팔렸네. 뭐가 잘못된 걸까.”

그때 그 애가 물었어.

“할머니, 빵 반죽할 때 누구 생각해요?”

“누구 생각? 그냥 돈 생각하지 뭘.”

“아니에요. 진짜로는 다른 사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할매가 손을 멈췄어.
얼굴이 이상해지더라고.

“옛날에… 죽은 영감이 빵을 좋아했어. 맨날 갓 구운 걸 달라고 했지.”

“그분한테 주려고 만들어보세요.”

“죽은 사람한테 어떻게 줘?”

“빵이 알아요. 누가 진짜 받을 사람인지.”

할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갔어.
그런데 며칠 뒤부터 할매 빵집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더군.

다들 말하더라고. 빵 맛이 달라졌다고,
뭔가 따뜻한 기분이 든다고.

그다음 주였나? 그 애가 나한테 말했어.

“아저씨는 언제부터 울면서 술을 만들었어요?”

가슴이 덜컥했지.

“무슨 소리야?”

“술에서 눈물 냄새가 나요. 슬픈 냄새.”

할 말이 없었어.
들켰으니까.

“아내가… 작년에 죽었어.”

“그래서 혼자 우는 거예요?”

“뭘 어떻게 하라고?”

“손님들한테 나눠주면 돼요.”

“내 눈물을?”

“아저씨 슬픔을요.”

무슨 이상한 소리인가 했는데,
애가 계속 말했어.

“혼자 아프면 썩어요. 나눠야 살아요.”

그날 밤 생각해 봤어.
정말로 손님들이 술에 물을 탄 걸 알면서도 계속 오는 걸까? 내 슬픔을 함께 마시려고?

다음 날부터 조금씩 바꿔봤어. 울면서 빚는 대신에 아내 얘기를 생각하면서 빚었지.
슬픈 기억이 아니라 좋았던 기억을. 웃음소리, 잔소리, 따뜻한 손길.

신기하게도 술맛이 달라졌어.
손님들도 눈치챘지.

“빌, 요즘 술이 다르네?”

“그래? 뭐가?”

“더 맛있어. 기분이 좋아져.”

일주일쯤 지났을 때 그 애를 찾았는데 없더라고.
언제 떠난 건지도 모르게.

하지만 뭔가 남았어. 아내를 그리워하는 방식이 달라졌거든.
슬퍼하는 대신 고마워하게 됐어. 그 사람이 내게 준 것들을.

그 후로 춤추는 조랑말은 바뀌었어.
사람들이 더 오래 머물고, 더 많이 웃어. 나도 그래.

요즘도 가끔 생각해.
그 애는 뭐였을까? 어떻게 그런 걸 알았을까?

답은 모르겠어. 다만 하나는 확실해.
그 애가 가르쳐준 건 슬픔을 숨기는 게 아니라 나누는 거였어.

혼자 아픈 건 병이고, 함께 아픈 건 치료야.



-----



2. 토니 대장장이의 황당한 경험


출처: 로톤 대장간, 화덕 옆 나무판자
기록일: 세오력 181년 가을



그 소녀를 처음 본 건 철이 식어가는 순간이었다.

대장간에는 늘 소음이 가득하다. 망치 소리, 불타는 소리, 쇠가 지글거리는 소리.
그런데 그 아이가 들어오자 모든 소리가 멈춘 것 같았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막 완성한 검을 바라봤다.
오래도록.

“뭘 보는 거냐?”

“저 검이 울고 있어요.”

웃음이 나왔다. 검이 운다니.

“검이 왜 울어?”

“자기가 누굴 지킬지 모르겠대요.”

손이 멈췄다.

“누굴 지킨다고?”

“검은 원래 누군가를 지키려고 태어나잖아요.
그런데 저 검은 아무도 지킬 생각이 없나 봐요.”

그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요즘 내가 만든 검들은 대부분 장식품이었다.
귀족들이 벽에 걸어놓으려고 주문한 것들. 실제로 쓰일 일은 없었다.

그래서 대충 만들었다.
어차피 보기에만 그럴듯하면 되니까.

“그럼 너는 어떤 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소녀가 주머니에서 작은 돌을 꺼냈다.
까만 돌이었는데, 불빛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걸로요.”

“돌로 검을 만들라고?”

“이 돌 안에 누군가가 숨어있어요. 그 사람을 위한 검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돌을 받아 든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뜨거웠다. 살아있는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그 돌을 계속 들여다봤다.
정말로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얼굴이.

젊은 기사였다. 아니,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년이었다.
검을 구하러 아버지와 함께 대장간을 찾았던 아이. 몇 년 전 일이었다.

그때 나는 그 아이에게 말했었다. “좋은 검을 만들어주마.”
하지만 만들어준 건 그저 평범한 검이었다. 그 아이의 간절함을 담지 못한.

그 소년은 지금 북방 변경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만든 시시한 검을 들고.

다음 날부터 나는 달라졌다. 검을 만들 때마다 그것을 쥘 손을 상상했다.
떨리는 손일지, 굳은 손일지. 그 손의 주인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일지.

철이 달라 보였다. 같은 쇠덩어리인데도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였다.
어떤 건 방패가 되고 싶어 했고, 어떤 건 농기구가 되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차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소녀가 생각났다.
언제부터 안 보였나 싶어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늦었다. 바람처럼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검은 남았다. 그 까만 돌로 만든 건 아니었다.
돌은 여전히 내 작업대 위에 있었다. 이제는 차갑게 식어서.

다만 돌이 보여준 얼굴을 생각하며 만든 검이었다.
언젠가 그 소년이 돌아오면 주려고.

검은 울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주인을.

그리고 정말로, 그 소년은 돌아왔다.
겨울이 끝날 무렵에.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나는 그에게 새 검을 건네주었다.
그가 받아 든 순간, 검과 손이 하나가 되는 걸 봤다.

그제야 알았다.
그 소녀가 내게 준 건 돌이 아니라 마음이었다는 걸.



-----



3. 레이몬드 교수의 기록


출처: 루어스 왕립학술원, 금서 보관소 감찰 일지
기록일: 세오력 174년 여름


또 칼드론이다. 지긋지긋하다.

이번 주만 벌써 네 번째 사본이다.
『칼드론의 흑마도서』가 계속 나타난다. 아무리 불태워도 어디선가 새로 생긴다. 끈질기다.

다른 금서들은 한 번 처리하면 끝인데,
이것만은 다르다. 뭔가… 살아있는 것 같다.

오늘도 지하 7층 특수 보관소에서 작업했다.
납 장갑, 성수, 정화 촛불. 30년을 해온 절차다.

그런데 보관소에 누가 있었다.

아이 하나가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은발에 맨발. 옷도 낡았다.

문제는 그 애가 읽던 게 바로 그 책이었다는 거다.
보호구도 없이.

“야!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달려가며 소리쳤다.
금서 노출은 정신을 망가뜨릴 수 있다.

애가 고개를 들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뭐라고? 감히 내게?

“당장 그거 내려놔! 위험하다고!”

“뭐가요?”

“그게 뭔지 알기나 해? 사람을 미치게…”

“아저씨도 미쳤나요?”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이 책을 수십 번 봤는데 멀쩡하다.
아니, 멀쩡할까? 확신이 안 선다.

“그건… 다르다. 나는 훈련받은 전문가니까.”

“전문가가 뭐예요?”

“책을 잘 아는 사람.”

애가 페이지를 넘기며 물었다.

“그럼 이 사람 이름 알아요?”

“칼드론이지. 흑마법사야.”

“아니요. 진짜 이름이요.”

애가 손가락으로 한 줄을 가리켰다.
작은 글씨였다.

‘마르쿠스.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다. 사람들은 칼드론이라 부르지만.’

어? 이런 게 있었나? 이상하다.
분명 이 책을 여러 번 검열했는데.

“아저씨는 못 봤나 봐요. 계속 있었는데.”

정말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나는 항상 마법 공식부터 찾아서 위험도를 평가했다.
이런 개인적인 끄적거림은 넘어갔다.

애가 다른 부분을 보여줬다.

‘신전에서 쫓겨났다. 질문이 많다는 이유로.
하지만 의문을 품는 게 죄인가. 신을 더 알고 싶었을 뿐인데.’

또 다른 페이지.

‘제자들이 하나씩 떠난다. 내 얼굴을 보기 무섭다고 한다.
거울 속 내 모습도 낯설다. 언제부터였을까.’

한 페이지 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반대했다. 흑마법사의 아들이라고.’

이건… 마법서가 아니었다. 일기였다.
한 사람의 절망이 고스란히 담긴.

“마법은 어디 있는 거야?”

“뒤쪽에 조금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별로 무섭지 않아요.”

“뭐가 더 무서운데?”

애가 앞쪽을 가리켰다.

“이쪽이요. 이 사람 너무 외로워요.”

맞았다. 마르쿠스는… 아니, 칼드론은 완전히 혼자였다.
모든 이에게 버림받았다.

책을 계속 넘겼다. 중간중간 마법이 나오기 시작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주문들. 하지만 사이사이에 계속 일기가 끼어 있었다.

‘이것도 아니다.’ ‘또 길을 잃었다.’ ‘내가 찾는 게 뭔가.’

마지막 부분.

‘실패했다. 모든 게 헛수고였다. 신은 끝내 답하지 않으셨다.
내 방법이 틀렸나. 아니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건가.’

그간 나는 이 책을 악마의 서적으로 여겼다.
하지만 전부 읽어보니… 그냥 실패한 사람의 기록이었다. 참혹하게 실패한.

“이름이 뭐니?”

“글쎄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정한다고?”

“진짜 이름을 찾고 있어요.
사람들이 부르는 게 아니라, 정말 제 이름을.”

아이가 책을 덮었다.

“이 사람도 그랬을 거예요.
칼드론 말고 마르쿠스로 불리고 싶었을 거예요.”

며칠 후 그 애는 사라져 있었다.
언제 나간 지도 모르게.

하지만 뭔가 변했다. 부서졌다. 내가 확신하던 것들이.

이제 칼드론의 책을 볼 때마다 혼란스럽다.
이게 위험한 마법서인가, 슬픈 고백록인가. 둘 다인가, 둘 다 아닌가.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맞는 것 같다.
모르는 게 정상인 것 같다.

어쩌면 확신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마법일지도 모른다.



-----



4. 엘리온 상인의 회고


출처: 동방상단 비공식 회의록
기록일: 세오력 190년 봄



사막이 나를 삼키려 했다.

나흘째였다. 낙타는 어제 죽었고, 물은 그제 떨어졌다.
나침반도 모래폭풍에 날아갔다. 이제 내 차례였다.

모래 위에 누워 있는데 그림자가 지나갔다.
죽음의 전령인 줄 알았다.

“아저씨, 뭐 하고 있어요?”

고개를 돌리니 아이였다.
은발, 맨발, 열 살쯤. 사막 한복판에 웬 아이가?

“죽어가고… 있어.”

“왜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왜? 물이 없으니까 죽는 거지.

“물이… 없어서.”

아이가 허리춤 물주머니를 만졌다.

“물 있는데요.”

“줄… 수 있어?”

“돈 있어요?”

장사꾼 본능이 발동했다.
주머니를 확인했다. 금화가 스무 개쯤.

“있어.”

“하나에 물 한 모금이에요.”

...강도였다.
하지만 목이 타들어갔다. 어쩔 수 없다.

“좋아.”

금화를 주고 물을 마셨다.
한 모금으로는 부족했다.

“더.”

또 금화를 줬다.
그렇게 다섯 번 주고받았다.

“비싸네요.” 아이가 말했다.

“뭐가?”

“목숨이요. 겨우 금화 다섯 개예요.”

가슴을 찔렸다. 내 목숨이 고작 그 정도였나.

“아저씨는 돈 많이 벌어요?”

“그럭저럭.”

“뭐 하려고요?”

“먹고살려고.”

“지금 굶어 죽을 뻔인데 돈이 먹여줬어요?”

할 말이 없었다.
돈은 많았지만 물 앞에서는 무력했다.

“아저씨, 꿈에 뭐가 나와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꿈?”

“밤에 자면 뭐가 보여요?”

생각해 봤다.
요즘 꿈에 뭐가 나왔더라.

“집… 아내… 아이들.”

“돈은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꿈에 돈이 나온 적은 없었다.

“그럼 아저씨는 뭘 위해 살아요?”

“돈을… 아니, 가족을 위해서.”

“가족은 어디 있어요?”

“집에.”

“언제 봤어요?”

“2년 전에.”

아이가 모래에 그림을 그렸다.
원 두 개였다.

“여기가 돈이고요.” 한 원을 가리켰다.
“여기가 가족이에요.” 다른 원을 가리켰다.

“어디에 더 가까이 있고 싶어요?”

대답은 뻔했다.
가족이었다.

“그럼 왜 돈이 있는 쪽으로 가요?”

“돈이 있어야 가족을 지킬 수 있으니까.”

“돈 없으면 가족이 죽어요?”

“굶어 죽지.”

“아저씨가 죽으면요?”

생각해 보니 내가 죽으면 가족은 더 위험해졌다.

아이가 두 원 사이에 선을 그었다.

“이게 뭘까요?”

“모르겠는데.”

“아저씨예요. 돈과 가족 사이에서 늘어지고 있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는 늘 그 사이에서 찢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원을 하나로 만들면 돼요.”

“어떻게?”

아이가 두 원을 겹쳐 그렸다.

“돈으로 가족을 지키는 게 아니라,
가족을 위해 돈을 버는 거예요.”

“같은 말 아니야?”

“아니에요. 순서가 달라요.”

무슨 차이인지 몰랐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집이 어디예요?” 아이가 물었다.

방향을 가리켰다.
어림짐작이었지만.

“가요.”

“어떻게? 나침반도 없는데.”

“나를 따라와요.”

아이가 걷기 시작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따라갔다.

하루 종일 걸었다. 아이는 지치지 않았다.
나는 쓰러질 것 같았지만 버텼다.

밤에는 모래 위에서 잤다.

“꼬마야, 넌 뭐야?”

“뭐라고 생각해요?”

“모르겠어. 신기루? 환상?”

“그럼 지금 대화도 환상이에요?”

아니었다.
너무 생생하다.

“그럼 진짜 사람이야?”

“글쎄요. 아저씨가 정하세요.”

이상한 대답이었다.

다음 날 아침, 아이가 없었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혼자 남았다. 길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 방향감각이 생겼다. 저쪽으로 가면 된다는 느낌.

일주일을 걸었다.
물도 떨어졌다. 또 죽을 뻔했다.

그때 상단을 만났다.
그들은 노엠으로 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원래 목적지였으니까.

노엠에서 장사를 했다.
돈도 벌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예전만큼 기쁘지 않았다.

밤마다 꿈을 꿨다. 가족 꿈을. 돈 꿈은 안 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다.
예정보다 일찍.

아내가 물었다. “일찍 오네?”

“보고 싶어서.”

“돈은?”

“적당히 벌었어.”

예전 같으면 “많이”라고 했을 텐데. 이상했다.

“고생했네, 보고 싶었어."

그 후로도 장사는 계속한다. 하지만 조금 달라졌다.
돈을 위해 가족을 버리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적당히 돈을 번다.

그게 그 아이가 말한 ‘순서’의 차이인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답이 뭔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날 사막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가 다른 길을 찾았다.

어떤 길인지는… 걸어봐야 알 것 같다.

그 아이는 누구였을까?
신? 악마? 환상?

모르겠다.
아니, 알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



5. 수녀 엘리자베스의 증언


출처: 베른 수도원 사순기록집 일부
기록일: 세오력 138년 사순절 제6일



그 아이는 처**터 다른 아이였다.

성당 문이 열렸을 때 나는 기도 중이었다.
뒤돌아보니 은발의 꼬마가 서 있었다. 맨발이었고, 옷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성호를 긋지도 않았다. 성수에 손을 적시지도 않았다.
그냥 맨 뒤 벤치에 앉더니 두 눈을 감았다.

기도가 끝나고 다가갔다.

“얘야, 기도는 안 하니?”

“어떻게 하는 거예요?”

“무릎 꿇고 십자가를 보며…”

“꼭 그래야 해요?”

당황스러웠다.
당연한 거 아닌가?

“신께서 좋아하시거든.”

“어떻게 알아요?”

“성서에…”

말이 막혔다.
정확히 어디에 그런 말이 있었나?

“신이 정말 좋아해요?”

이 아이는 왜 계속 묻는 걸까.

“당연하지. 기도는 신과의 대화니까.”

“대화요? 신이 대답해 줘요?”

뜨끔했다.
대답? 신께서 내게 직접 대답해 주신 적이 있었나?

“마음으로… 느껴진다는.”

“지금도요?”

순간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에?

돌이켜보니 최근 들어 기도할 때 공허함만 느꼈다.
말만 하고 있었다. 혼자서.

“때로는… 잘 안 느껴질 때도 있단다.”

“그럼 신이 안 계신 건가요?”

“그런 게 아니야.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듣지 못해요.”

“그럼 왜 여기 왔니?”

“조용하거든요.”

“조용하다고?”

“다른 곳은 시끄러워요. 여기는 정말 조용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그냥 두었다.

그날 밤 악몽을 꿨다. 성당이 텅 비어 있었다.
나 혼자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내 목소리만 허공에 울릴 뿐.

아침에 성당에 가니 그 아이가 또 있었다.
제단 앞에 앉아서 가만히 있었다.

“뭐 하고 있니?”

“있는 거예요.”

“그냥?”

“네.”

“기도는 안 하고?”

“이게 기도인 것 같아요.”

“이게?”

“조용히 있는 거요.”

이상한 기도법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아이는 매일 왔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있었다.

프랑수아 사제님이 물으셨다.

“저 아이는 누구지?”

“잘 모르겠어요. 이름도 안 가르쳐주네요.”

사제님이 아이에게 다가가셨다.

“얘야, 이름이 뭐니?”

“없어요.”

“없다고?”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누가 정하는데?”

“저요.”

사제님이 당황하셨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몰라요.”

“그럼 혼자 사는 거야?”

“아니요. 혼자는 아니에요.”

“누구와 함께?”

아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여기 다 있잖아요.”

“뭐가?”

“보이지 않는 것들이요.”

신부님과 내가 서로를 바라봤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평소처럼 아이가 앉아 있는데 갑자기 말했다.

“수녀님.”

“응?”

“신은 말하지 않아요.”

“뭐라고?”

“말하지 않아요. 하지만 분명 함께 계세요.”

“어떻게 알지?”

“들리거든요. 말이 아닌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더 물으려는데,
아이가 사라져 있었다. 언제 나간 건지도 모르게.

그 후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성당의 촛불이 저절로 켜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불을 붙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 켜져 있었다.

사제님은 기적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어쩌면 원래 불은 항상 있었는데 우리가 못 봤던 건 아닐까.

그 아이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들’처럼.



-----



6. 이교 사제 벨카 룬의 고백


출처: 북부 황혼단교단 금서 『신의 반역자들』 중
기록일: 불명



앨시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또 하나의 ‘기만된 피조물’이라 여겼다.

우리는 그녀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신화에 조금씩 있었다.

태초에 침묵하는 빛,
미래를 엿보고 저주받은 아이,
눈 없는 선견자,
타오르는 저편에서 걸어온 자.

하지만 앨시는 예언을 말하지 않았다.

“예언은 나를 통해 오지 않는다.
나는 예언이 지나간 땅일 뿐이다.”

그녀를 목격한 자들은 모두
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 교단은 그녀를 이단보다 더한 위험이라 봤다.

북방의 한 마을에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시장 구석, 아이들과 돌멩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네가 앨시냐?”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게 사실이냐?”

“못 들어요.”

“그럼 예언은?”

“그런 것도 못해요.”

그녀가 나를 바라봤을 때,
내 안의 모든 신앙이 무너졌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이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벨카님.”

내가 이름을 말한 적 없는데 그녀가 불렀다.

“신이 뭔지 아세요?”

“신에 대해 말하지만, 신을 본 적은 없잖아요.”

“저는 신이 없는 곳을 봤어요.
그래서 알았어요.”

그녀는 사라졌다.
언제 떠났는지도 모르게.

그날 밤부터 나는 무릎을 꿇지 못했다.
어떤 신에게도.

그러나 지금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신을 무너뜨린 자’가 아니라,
신이 도망친 이유였다.

그녀를 본 뒤로 나는 더는 무릎을 꿇지 못한다.

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한 소녀가 이미 말해버렸는데.



-----



7. 잊힌 도시 릴바렌의 마지막 사서의 기록


출처: 『붉은 하늘 아래, 릴바렌 도서관』
기록일: 세오력 121년



우리는 그녀의 발자국을 보존했다.
책 위로, 바닥 위로, 무너진 문장들 사이로.

앨시라는 이름이 처음 기록된 것은 릴바렌이었다.

그녀는 말을 배우지 않고도 읽었다.
그리고, 쓰지 않고도 전했다.

“진실은 쓴 자가 갖는 게 아니라
읽은 자의 눈에 따라 변하는 거예요.”

우리는 겁이 났다.
책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니까.

지식이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키워간다는 사실을 그 애는 알았다.

릴바렌은 그 아이를 위해
도서관을 봉인했다.

더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기로.

그녀가 말하길,
“글은 진실을 죽이기도 해요.
대신, 저는 침묵을 남길게요.”

그녀가 떠난 뒤,
책들은 스스로 닫혔다.

그 해의 가을, 붉은 하늘 아래
우리는 마지막 장을 불태웠다.

그리고 글을 버리고, 기억하기로 했다.



-----



8. 음유시인의 노래 「앨시, 그늘 아래 피는 별」


출처: 잊힌 노래, 래비아 시렌가스 여관 지하에서 채록
채록자: 민간설화 수집가 에렐 딘

※ 다음은 서쪽 변경의 떠돌이 음유시인 ‘칼로 벤슈’가 자주 불렀다는 노래의 채록 기록이다.
가락은 이미 사라졌고, 일부 구절은 지역마다 다르게 전승된다.



1절


바람 부는 흙길 위, 나무 그림자 아래
눈을 감고 앉아있던 아이 하나 있었네

햇살은 꺼졌고, 이름은 잊혔고
말도 없이 돌을 쌓던 작은 손, 앨시



2절


천 명이 물었고, 백 명이 베었네
‘진실은 어디에 있냐’며 칼을 겨눴지

하지만 그녀는 고개만 저었네
“진실은 목소리가 없어요” 그 한마디



3절


왕은 그녀를 금으로 봉했고
주교는 저주라 부르며 땅을 팠네

전쟁은 이름을 걸고 일어났지만
정작 앨시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지



후렴


그녀는 별이었네, 낮에는 숨어
어두운 사람만이 볼 수 있었지

현자도 모르고, 아이도 몰라
단지, 외로운 노래만 따라 불렀지



4절


눈먼 자의 눈을 씻어준 사람
귀먹은 자의 귀에 침묵을 속삭인 자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자신을
예언자라 부르지 않았네



종장


이제 그 이름도, 그 발소리도 없지만
별빛 아래선 누군가 묻는다네

“앨시는 누구였나요?”

그러면 바람이 노래하네
“너도, 나도… 그녀였을지 몰라.”



-----



9. 토렌 수도사의 미망


출처: 루어스 수도원 『현자의 부고록』 미공개 장
기록일: 세오력 139년



나는 그 아이가 남긴 마지막 문장을
지금도 밤마다 되새긴다.

“미래는 저주가 아니에요.
그걸 저주로 만든 건, 예언을 믿은 사람들이죠.”

수도원 안에는 예언서들이 가득했다.
수백, 수천의 ‘미래’가 목소리를 다퉜다.

그 아이는 그것들을
단 한 줄로 정리했다.

“모두 거짓은 아니에요.
다만, 진실이 하나뿐일 거란 생각이 거짓이죠.”

그녀는 오래전부터 ‘예언된 아이’였다.

많은 이가 그녀를 찾았고,
누군가는 죽였으며,
누군가는 믿었고,
누군가는 저주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믿지 않았다.
그것이 유일한 자유라 말했다.

나는 한 장의 문서를 남긴다.

그녀의 마지막 말.
내가 들은 마지막 예언.

“끝은 없어요.
다만, 누군가는 끝이라 부를 뿐.”

사흘 후,
아이는 사라졌다.

그 이후,
수도원은 예언서를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기도문 없는 예배’를 열었다.



-----



[문서고 관리인 기록]


그녀는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모순된 기록들이 퍼즐처럼 흩어져 있으나,
하나의 중심은 분명하다.

‘그녀는 누구였는가?’

아이, 현자, 망령,
또는 신.

누군가는 저주받은 피조물이라 했고,
누군가는 구원자라 불렀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녀는 질문하는 자였다.

기록 너머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다.

신이 침묵할 때,
당신은 무엇을 들을 것인가.

모두가 끝이라 할 때,
당신은 어디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그녀는 예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녀는 의지를 남겼다.



ㅡ 루어스 제국 도서관 비밀문서고
관리인, 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