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문서 유형: 확인 불가 ㅡ 필사된 사서 개인 비망록
문서 제목:「몸이었던 자」
기록자: 불명(기록자는 자신의 정체를 명시하지 않음)
기록 연대: 후문명기 이전 추정 ㅡ 연대 측정 불가
문서 상태: 햇살처럼 온전함
열람 권한: 특별 관측 문서 / 관리인 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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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경위: 사서 욘이 루어스 제국 서고 북쪽 봉인 구역 내 시간이 끊긴 석문 뒤에서 발견.
문서에는 기록자의 서명이 없으며, 어떤 연대 기록이나 진입 기록도 존재하지 않음.
이 문서는 욘에 의해 일종의 ‘내면적 통과 의례’ 후 채록되었으며,
공식 사료에 등재되지 않았고, 어느 연대기에도 편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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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몸이었던 자」는 그 자체로 한 시대의 목격이 아니라
시간과 인식의 경계를 가로지른 증언으로 간주됨.
내용상 신화 혹은 철학적 우화로 분류될 여지도 있으나,
기록자의 서술 방식은 특정 체험에 바탕한 직접적 진술로 해석됨.
관련 문서: 「별과 갈비뼈의 기록」, 「아벨 건국 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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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도시, 아벨 - 침묵으로 써낸 복음
나는 이 문서를 읽는 이가 신의 현존을 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계시의 기록도, 기적의 증언도 아니다.
말과 빛이 모두 사라진 시대. 살아 있는 자들이 서로를 버리고 죽은 자들의 그림자만이
공동체를 이루던 땅에서 침묵으로 남겨진 한 존재의 흔적, 몸으로 새겨진, 말이 지워진 복음이다.
나는 이것을 사서의 의무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쓰게 되었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끝까지 사라지지 못한 존재의 잔존이, 지금 이 기록을 흔들고 있다.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시대가 아직 침묵을 경전으로 믿던 시대였다.
이름보다 존재가 앞섰고, 누가 먼저 왔는지를 묻는 일이 무의미했던 시간.
그때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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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소시아 대륙 남부, 폐허가 된 샤다크.
한때 별의 사제들이 숨어들던 땅.
그들의 침묵은 지하로 스며들어 바위의 결을 따라 얽혔다.
다섯 번째 성화 전쟁의 최후의 날,
마지막 황녀가 영원의 불 앞에서 “빛은 죽었다"라고 외친 땅.
이후 샤다크는 역사의 모든 연대기에서 지워졌다.
기록이 사라진 곳에는 말이 없었고, 말이 없는 자리에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고, 어디서 왔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거기 있었다.
부서진 광장의 중심에,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것처럼. 시선도, 말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그 존재 하나로 허공에 무게가 생겼다. 하나의 몸이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망각된 땅 샤다크는 다시 어떤 진동을 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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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는 오랫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들짐승조차 망각의 중심을 돌아 지나갔고, 바람은 금이 간 탑을 몇 번이고 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시간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부러진 창 끝, 마법진의 잔재, 꺼진 등불 아래에 서 있던 자들이 천천히,
오래된 명령처럼, 침묵의 둘레로 모여들었다.
구조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살아남았으되 기억을 잃은 자, 혹은 기억을 지닌 채 말을 잃은 자들.
그들은 서로를 바라** 않았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이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 침묵 속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고통이 나눠질 수 있음을 사람은 어떻게 아는가.
그건 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 고통을 바라보고 있다는 단순한,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존재의 진실.
그때부터 그는 신도, 구원자도 아니었다.
그저 곁에 남아 있었던 한 몸, 이 자리에 함께 앉아 있던 온기의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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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오른팔이 없고, 어깨 위로 푸른 불꽃을 이고 온 아이가 그의 곁에 앉았다.
불꽃은 식지 않았고, 살을 태우지도 않았다.
그것은 소멸을 유예당한 저주였고, 살아 있다는 가장 깊은 흔적이었다.
누구도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고, 아이는 누구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몸 곁에 앉아, 작은 어깨로 불꽃을 감싸안았다.
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날 아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통이 함께 살아지고 있다는 감각.
푸른 불꽃의 아이가 처음으로 받아본, 사라지지 않는 구조의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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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많은 이들이 침묵의 둘레로 걸어왔다.
그 누구도 뿌리내리지 않았고, 무덤도 제단도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이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들 가운데엔,
비명을 삼킨 전사,
자식을 묻었으되 울지 못한 노파,
이름을 가라앉힌 채 절망에 쫓긴 사내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 않았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이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 침묵 속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칼은 흙에 묻혔고, 망령은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무릎을 꿇는 자 없었고, 구원을 구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몸 하나 앞에서 모든 것이 서서히 바뀌었다.
이윽고 시간이 그를 무너뜨렸다.
어깨는 휘었고, 뼈는 마르며, 손등엔 오래된 바람의 결이 새겨졌다.
그가 마지막 숨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비웠을 때, 누구도 울지 않았다.
푸른 불꽃의 아이만이 조용히 그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 깎았다.
그 뼈는 지팡이가 되었고, 아이의 작은 손은 그것을 짚은 채 먼 곳을 향해 걸어갔다.
누구도 따라가지 않았고, 누구도 그 길의 끝을 묻지 않았다.
다만, 그가 앉아 있었던 자리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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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닿지 않는 시간의 끝에서, 이 땅은 다시 불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유리처럼 얇은 하늘 아래 빛의 궤적을 따라 도시가 세워졌다.
마법진의 고리와 천 개의 제단, 바람을 기억하는 봉화탑들이 그 자리를 감쌌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곳은 신의 선택지였다고, 성화의 기적이 거기서 시작되었다고.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샤다크는 신이 고른 땅이 아니었다.
신이 없이도 서로의 고통 옆에 머물던 한 존재의 자리에서 비롯된 땅이었다.
이 땅 아래, 뿌리처럼 얽힌 갈비뼈 하나.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침묵의 울림이 지금도 도시의 기초를 지탱하고 있다.
빛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말에서 비롯되지도 않았다.
빛은, 말없이 끝까지 머문 하나의 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위에 도시의 반석을 올렸다.
빛의 도시, 아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