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
엔드르 유적의 아홉 문 - 1부
서막: 사막의 부름
노엠 사막의 정오는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태양이 하늘 한복판에서 거대한 눈처럼 내려다보며 모든 것을 태워버리려 했다.
마르쿠스의 검은 갑옷은 이제 쇠로 만든 화로나 다름없었다.
로톤 지방에서 특수 제작한 흑철 판금이 사막의 열기에 달궈져 마르쿠스의 살을 지져대고 있었다.
등 뒤의 망토는 진작에 벗어 그롬의 배낭에 쑤셔 넣었지만, 갑옷만은 벗을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적과 마주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사가 갑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어떻게는 참아낼 요량이었다. 매 걸음마다 갑옷 이음새로 들어온 모래가 살을 갉아먹어도,
투구 안이 자신의 숨으로 찜통이 되어도, 그는 묵묵히 걸었다.
“망할 놈의 더위!” 그롬이 말라비틀어진 물주머니를 털어내다가, 모래바닥을 향해 힘차게 내던졌다.
한 방울의 물도 떨어지지 않았다. 타고르 산맥 출신인 그에게 사막은 지옥보다 나쁜 곳이었다.
“차라리 드라코 열 마리랑 맨손으로 싸우는 게 나아. 적어도 거긴 시원하잖아.”
그가 혀로 갈라진 입술을 핥았지만 침조차 말라 있었다.
“마르쿠스, 네 갑옷에서 나는 소리 들려? 지글지글 익는 소리 말이야.”
“닥쳐, 그롬.” 마르쿠스가 대답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실제로 갑옷 안의 가죽 안감이 땀에 절어 썩은 내가 나기 시작했다. 루어스를 떠난 지 열흘,
사막에 들어선 지 사흘째. 보급품은 바닥나가고 있었고, 목적지는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야!” 실비아가 모래언덕 위에서 손짓했다. 이 열기 속에서도 여유가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맨발로 뜨거운 모래를 밟으면서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고,
얇은 사막 복장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구릿빛 피부를 드러냈다.
노엠 사막이 그녀의 고향이었다.
“드디어 찾았어. 늙은 베두인이 말한 ‘신이 만든 우물’이라는 게 바로 저거야.”
마르쿠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그는 숨을 멈췄다. 우물이라고? 이건 우물이 아니었다. 대지에 뚫린 거대한 상처였다.
완벽한 원형으로 함몰된 구멍은 지름이 백 미터는 넘어 보였고,
가장자리는 누군가 거대한 칼로 잘라낸 것처럼 매끄러운 수직 절벽이었다.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깊은 어둠만이 구멍을 채우고 있었고,
가장자리를 도는 바람이 거대한 짐승의 숨소리처럼 으스스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멘트력 847년의 대지진.” 아르카디우스가 헐떡이며 언덕에 도착했다.
그의 등에 멘 가방은 그의 몸집보다 커 보였다. 책들의 무게 때문이었다.
『고대 엔드르 연대기』 전 12권, 『지하 도시의 비밀』, 『곤충 왕국의 신화』,
『멘트 문명 쇠락사』… 학자인 그에게는 무기보다 책이 더 중요했다.
“믿을 수 없군요. 기록이 과장이 아니었어요. ‘땅이 스스로를 삼켰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가 가방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펼쳤다. “여기 보세요. 당시 목격자의 증언입니다.
‘이백 하고도 열한 번의 새벽 동안 동안 땅이 흔들렸고, 마지막 날 거대한 굉음과 함께 도시 전체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구멍뿐이었다.’”
세라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스무 살의 젊은 사제는 이미 지쳐 보였다.
신전에서의 편안한 생활에 익숙했던 그녀에게 사막 행군은 고행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여기 내려가야 하나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가장자리에 다가가 작은 돌멩이를 떨어뜨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바닥에 닿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반 대장님이 여기로 내려가셨다는 확신이 있나요?”
마르쿠스가 품에서 구겨진 양피지를 꺼냈다.
석 달 전, 루어스에 도착한 마지막 전서구가 물어온 편지였다.
양피지는 땀과 모래바람에 바랬지만, 글씨는 여전히 또렷했다. 이반 특유의 각진 필체였다.
‘제국군 사령부 귀하. 우리는 목표 지점에 도달했다. 놀라운 발견을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보고하겠다. 곧 귀환한다. - 조사대장 이반 칼라스’
“그게 마지막이었죠.” 마르쿠스가 양피지를 다시 접으며 말했다.
“그 후로...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죽었을 수도 있잖아.” 실비아가 구멍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람에 그녀의 검은 머리가 방울뱀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구멍에 떨어졌다면 시체도 못 찾을걸. 그냥 실종으로 처리하고 돌아가는 게 어때?”
“이반 대장은 죽지 않았어.” 마르쿠스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루어스 최강의 전사야. 카스마늄 원정에서 홀로 가고일 열두 마리를 상대했고,
동방 반란 때는 적진 한복판에서 사흘을 버텼어. 이런 구멍 따위에 죽을 사람이 아니야.”
“감상적이네.” 실비아가 코웃음 쳤다.
“강한 놈일수록 자만해서 죽기 쉬운 법이야. 특히 미지의 것을 만났을 때는.”
그롬이 밧줄 뭉치를 배낭에서 꺼내며 끼어들었다. “말싸움은 그만하고 일단 준비나 하자.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야 해. 사막의 밤은 낮보다 위험하니까.” 그의 손놀림은 거칠었지만 정확했다.
타고르 산맥에서 수없이 암벽을 오르내린 경험이 있었다.
쇠말뚝을 바위에 박고, 밧줄을 단단히 고정하고, 매듭을 삼중으로 확인했다.
“내가 먼저 내려가 볼게. 바닥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신호를 보내도록 하지.”
“아니다.” 마르쿠스가 밧줄을 잡았다.
“내가 먼저 간다.”
“그 갑옷을 입고? 밧줄이 무게를 못 버틸 수도 있어.”
“이반 대장은 내 책임이야.” 마르쿠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내가 고아가 되었을 때 기사단에 천거해 준 사람이야. 검술을 가르쳐주고,
기사도를 가르쳐주고… 아버지나 다름없었어. 내가 먼저 확인해야 해.”
그롬이 한숨을 쉬며 물러섰다.
“망할 놈. 좋아, 하지만 조심해. 밧줄이 끊어지면 우린 널 구할 방법이 없어.”
아르카디우스가 스태프를 꺼냈다. 백수정이 박힌 끝부분이 희미하게 빛났다.
“잠깐만요. 먼저 빛을 비춰볼게요.” 그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루멘 아듀로 인피니투스!” 봉 끝에서 밝은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빛의 구체가 봉에서 떨어져 나와 천천히 구멍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빛은 한참을 내려갔다. 10미터, 20미터, 30미터…
마침내 50미터쯤 아래에서 무언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바닥이었다. 평평한 바닥이 아니었다. 무너진 건물들, 부서진 기둥들,
그리고 그 사이를 관통하는 이상한 구멍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구멍들은 너무나 매끄럽고 둥글어서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지 않았다.
거대한 무언가가 땅을 뚫고 지나간 흔적 같았다.
“터널이야.” 세라가 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뭔가가 파고 다닌…”
“개미굴이지.” 실비아가 확인사살을 했다. “저 크기로 봐서는 일개미가 송아지만 할 거야.
병정개미는 코끼리만 하고. 여왕개미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네.”
-
제1막: 하강
1층 - 봉인의 문
마르쿠스가 밧줄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거운 갑옷이 밧줄을 팽팽하게 당겼고, 가죽 장갑이 마찰열로 뜨거워졌다.
주변 벽면은 처음 10미터까지는 모래와 사암이었지만,
그 아래로는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바뀌었다.
고대 엔드르의 건축 기술이었다. 벽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부조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개미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개미들이 일하는 모습, 전쟁하는 모습,
그리고 거대한 여왕개미 앞에 무릎 꿇은 인간들의 모습까지.
하강하면서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사막의 열기가 사라지고 동굴 특유의 서늘함이 피부를 감쌌다.
공기는 상쾌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썩은 냄새, 과일이 발효되는 것 같으면서도 시체가 부패하는 것 같은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개미산의 냄새였다. 아주 진한.
마침내 바닥에 발이 닿았다.
돌먼지가 일어났고, 갑옷이 돌바닥과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주변은 아르카디우스의 정령 덕분에 어느 정도 보였지만, 그림자가 춤추고 있어서 불안했다.
마르쿠스는 검자루에 손을 얹고 주변을 살폈다. 지금까지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길했다.
“안전해!” 위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목소리가 지하 공간에 메아리쳤다. “일단 아무것도 없어!”
그롬이 두 번째로 내려왔다. 타고르의 숙련된 전사답게
거침없는 동작으로 밧줄을 타고 내려온 그는 바닥에 닿자마자 도끼를 뽑아 들었다.
“젠장, 이 냄새는 뭐야? 거인이 한 달 동안 씻지 않은 겨드랑이 냄새 같잖아.”
그가 코를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왜 이렇게 조용하지? 개미굴이라면서? 개미 **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
실비아가 세 번째로 내려왔다. 그녀의 하강은 거의 무음이었다.
고양이처럼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그녀는 즉시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 봐.” 그녀가 먼지를 털어내며 가리킨 곳에는 선명한 발자국들이 있었다.
“군화 자국이야. 루어스 표준 규격. 여섯 명이네. 그리고…” 그녀가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싸운 흔적이 있어. 바닥에 긁힌 자국, 검은 얼룩들… 피인지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아르카디우스와 세라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마법사는 내려오자마자 주변의 건축물에 시선을 빼앗겼다.
“놀라워요! 이 석조 기술, 이 문양들! 분명히 엔드르 제3왕조 시대의 것이에요.
책에서만 보던 것들이…” 그가 벽면의 부조를 손으로 더듬으며 감탄했다.
“여기 보세요. 개미를 ‘위대한 스승’이라고 칭하고 있어요.
단순한 숭배가 아니라 실제로 그들에게서 뭔가를 배웠다는 뜻이에요. 건축, 사회 체계, 어쩌면 마법까지도…”
“… 탐구는 나중에 해.” 실비아가 그를 제지했다.
“일단 여기서 뭔가를 찾아야 해.”
-
바닥을 더 자세히 살펴보던 마르쿠스가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검이 한 자루 떨어져 있었다.
은빛 검신에 늑대 머리가 새겨진 자루. 검신에는 고대 룬 문자로 ‘서리의 이빨’이라는 뜻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리늑대』 -
이반이 북방 원정에서 드레이크를 잡은 공로로 드워프의 왕에게 받은 전설의 검이었다.
“대장의 검이야.” 마르쿠스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손에 전해졌다.
미스릴과 한철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검신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시커먼 얼룩들로 더럽혀져 있었다.
칼날 여기저기에 이가 나가 있었고, 특히 검 끝부분은 뭔가 단단한 것과 여러 번 부딪친 흔적이 있었다.
“이반이 검을 버렸다고?” 그롬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인간이 검을 얼마나 아꼈는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닦고, 일주일에 한 번은 벨라르모 축복을 다시 받고…
심지어 검에 이름까지 지어줬잖아.”
세라가 검신의 얼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성직자로서 각종 체액을 다뤄본 그녀의 눈은 정확했다.
“피네요. 하지만 인간의 피는 아니에요. 너무 검고 끈적해요. 그리고 이 냄새…”
그녀가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았다. “개미산이 섞여 있어요. 강한 산성 물질이에요.
이 정도 농도라면 살점도 녹일 수 있을 거예요.”
터널 깊은 곳에서 익숙치 않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소리가 빗방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딱딱한 것이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여러 개가. 그 사이에 섞인 다른 소리. 거대한 가위가 딱딱거리는 것 같은 소리.
“손님이 오는군.” 실비아가 재빨리 허리춤에서 단검 두 자루를 뽑았다.
한 자루는 곧은 칼날에 독을 바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휘어진 곡도였다. “환영식을 준비해야겠어.”
터널의 어둠 속에서 뭔가 번쩍였다.
처음에는 두 개의 붉은 점이었지만,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것이 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겹눈이었다. 수백 개의 작은 렌즈로 이루어진 곤충의 눈이 정령의 빛을 반사하며 불길하게 빛났다.
마침내 불청객의 모습이 전부 드러났을 때, 세라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개미였다. 우리가 아는 개미와는 정말로 다른.
송아지만 한 크기에 온몸이 검고 단단한 외골격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섯 개의 다리는 각각이 창처럼 날카로웠고,
끝부분에는 갈고리 같은 발톱이 달려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머리였다. 거대한 턱은 대장간의 집게를 연상시켰고,
턱이 벌어질 때마다 안쪽의 또 다른 작은 턱들이 보였다.
침이 뚝뚝 떨어졌는데, 바닥에 닿을 때마다 돌이 지직거리며 연기를 냈다.
“일개미들의 경비병이야.” 실비아가 전투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이 정도 크기면 아직 어린 개체야. 완전히 자란 놈들은 이보다 두 배는 커.”
“어린 게 저 정도라고?” 세라가 뒷걸음질 쳤다.
“그럼 다 자란 건 얼마나 크다는 거야?”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개미가 돌진해 왔다.
그놈의 속도는 덩치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여섯 개의 다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움직였고, 거대한 몸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마르쿠스가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단단히 강화한 기사단 방패가 개미의 턱과 충돌했다. 끔찍한 힘이었다.
방패가 움푹 들어가며 마르쿠스의 팔 전체가 저릿했다. 그가 뒤로 밀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젠장!” 마르쿠스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며 검을 뽑았다.
루어스 기사단의 훌륭한 보급품인 더브릴이었지만, 개미의 외골격 앞에서는 둔기나 다름없었다.
검이 개미의 등을 내리쳤지만 미끄러지며 불꽃만 일으켰다.
그롬이 측면에서 공격했다. “타고르의 분노를 맛봐라!” 그의 푸른 전투 도끼
『타고나이트엑스』가 공중에서 호를 그리며 개미의 머리를 향했다.
도끼날이 외골격과 충돌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금이 가며 검은 체액이 새어 나왔다.
“하하! 됐다! 이 놈도 부술 수 있어!”
하지만 기뻐하기엔 일렀다.
상처 입은 개미가 더욱 사나워졌다. 머리를 흔들며 그롬을 향해 턱을 벌렸다.
그롬이 간신히 옆으로 굴렀지만,
개미의 턱이 그가 서 있던 자리의 돌바닥을 물어뜯었다. 돌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관절을 노려!” 실비아가 개미 뒤로 돌며 외쳤다.
그녀의 움직임은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빠르고 예측할 수 없었다.
단검이 번쩍이더니 개미의 뒷다리 관절 사이를 정확히 찔렀다.
부드러운 관절막을 뚫고 들어간 칼날에서 독이 주입되었다.
“외골격은 단단해도 관절은 약해! 거기가 급소야!”
개미가 고통스러운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일반적인 곤충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너무 크고, 너무 높고, 무엇보다 너무 분노에 차 있었다.
뒷다리 하나가 마비되어 움직임이 불안정해졌다.
“플라메라 사지타!” 아르카디우스가 주문을 완성했다.
그의 스태프에서 세 명의 불의 정령이 화살처럼 연속으로 발사되었다.
목표는 개미의 겹눈이었다. 첫 번째 정령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정확히 명중했다.
겹눈의 일부가 타며 진액이 흘러나왔다. “효과가 있어요! 시각을 잃으면 움직임이 둔해질 거예요!”
세라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후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빛이여, 전사들에게 힘을! 엑스벨라룸!” 그녀의 기도와 함께 따뜻한 황금빛이 동료들을 감쌌다.
신성 마법의 축복이 그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상처를 아물게 했다.
특히 마르쿠스의 멍든 팔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전투는 치열했다. 개미는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위험했다.
동물적 본능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한 패턴이 있었고, 가장 약한 상대를 노리는 전술적 판단력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훈련받은 것처럼.
마침내 마르쿠스가 결정적인 일격을 가했다.
실비아가 독으로 마비시킨 관절을 그의 검이 정확히 찔렀다.
이번에는 이반의 검 『서리늑대』를 사용했다.
미스릴 합금의 날카로움이 부드러운 관절막을 쉽게 뚫었고, 검신에 새겨진 서리 룬이 활성화되어 상처를 얼렸다.
개미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검은 체액이 고대 도시의 돌바닥에 웅덩이를 만들며 고였다.
“휴.” 그롬이 도끼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겨우 한 마리인데 이 정도라니. 떼로 몰려오면 어떻게 감당하지?”
그가 도끼날에 묻은 검은 체액을 돌조각으로 닦아냈다. 체액이 닿은 돌이 지지직거리며 연기를 냈다.
“그리고 이 독한 피는 뭐야? 도끼날이 녹아내리는 것 같잖아.”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돼.” 실비아가 귀를 기울이며 경고했다.
사막에서 길러진 그녀의 청각은 예민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미세한 진동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들려? 저 소리.” 그녀가 손가락으로 여러 터널을 가리켰다.
“동쪽 터널에서 셋, 서쪽에서 다섯, 북쪽에서… 젠장,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어.
우리가 방금 죽인 건 정찰병이었어. 본대가 오고 있어.”
정말로 여러 터널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먼 천둥소리 같았지만,
점점 가까워지면서 수많은 다리가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발걸음이 완벽한 리듬을 만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고대 전장의 북소리가 땅을 울리는 것 같았다.
“포위당하기 전에 움직여야 해!” 마르쿠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고대 도시의 잔해들 사이로 여러 건물이 보였지만, 대부분 무너져 있었다.
그러다 북쪽 벽면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저기! 문이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다른 건물들과 달리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석문이 있었다.
높이가 5미터는 넘어 보이는 문은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표면에는 정교한 조각들이 가득했다.
문 위쪽에는 거대한 여왕개미가 알을 낳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일개미, 병정개미, 수개미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고대 엔드르 문자들이었다.
주문처럼 빼곡하게 새겨진 문자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섯 명이 일제히 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때 터널들에서 개미들이 쏟아져 나왔다.
방금 전에 상대한 것과 비슷한 일개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수가 압도적이었다.
검은 파도처럼 몰려오는 개미들의 행렬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그중에는 다른 종류도 섞여 있었다. 날개를 가진 개미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일개미보다 작고 날씬했지만, 이놈들이 가진 비행 능력 덕분에 더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위쪽이다!”
그롬이 도끼를 휘둘러 급강하하는 수개미 하나를 쳐냈다.
도끼에 맞은 수개미가 날개가 찢어지며 땅으로 떨어졌지만,
더 많은 수개미들이 뒤를 이었다. “미친 날벌레들! 끝이 없잖아!”
문 앞에 먼저 도착한 실비아가 재빨리 자물쇠 장치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복잡한 기계장치를 더듬었다.
오랫동안 사막의 고대 유적을 탐험하며 익힌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 자물쇠는 불행히도 특별했다. “젠장, 이건… 이건 내가 아는 자물쇠가 아니야.
다섯 개의 구멍이 있는데, 각각 다른 모양이야. 그리고 이 구멍들이…”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폈다. “개미 모양이야. 각각 다른 계급의 개미 형태로 되어 있어.”
“열쇠가 필요하다는 거야?” 세라가 뒤를 돌아보며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개미들이 이미 수십 미터 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수천 개의 겹눈이 마법의 빛에 반사되어 붉은 별처럼 번득였다.
“지금 열쇠를 찾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아르카디우스가 급하게 문 위의 문자를 읽기 시작했다.
엔드르어는 복잡하고 난해했지만, 다행히 그가 수년간 공부한 언어였다.
“‘다섯 계급의 조화가 문을 여는 열쇠가 되리라.’ 음… ‘일개미의 근면함, 수개미의 용기,
병정개미의 힘, 여왕의 지혜, 그리고…’ 이상하네요. 마지막 하나는… ‘인간의 선택’이라고 되어 있어요.”
“수수께끼는 나중에 풀고, 일단 열쇠를 찾아!”
마르쿠스가 이반의 검을 들고 다가오는 개미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롬도 옆에서 합류했다. 두 전사가 개미 무리의 선봉을 막아서며 시간을 벌기 시작했다.
“서둘러! 오래 못 버텨!”
바닥을 필사적으로 뒤지던 사람들이 하나둘 뭔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먼지와 잔해 사이에 작은 금속 조각들이 숨어 있었다. 세라가 처음으로 하나를 찾았다.
“여기! 이거 봐요!” 그녀가 들어 올린 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일개미의 형태를 완벽하게 재현한 것으로, 실제 개미를 축소한 것처럼 모든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아르카디우스도 무너진 기둥 옆에서 다른 조각을 발견했다.
“수개미 열쇠예요! 날개까지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네요.” 그가 감탄하며 조각을 살펴보았다.
“이런 세공 기술은… 지금은 불가능해요. 고대 엔드르의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제발! 그런 감상은 나중에 하면 안 돼?”
실비아가 다른 조각을 찾으며 외쳤다. “병정개미 것도 찾았어!”
시간이 촉박했다.
마르쿠스와 그롬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지만, 개미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롬의 갑옷 여기저기에 개미들의 턱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르쿠스도 방패를 든 왼팔이 저릿했다. 무엇보다 체력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더 이상 못 버텨!” 그롬이 거대한 일개미 하나를 도끼로 쳐내며 외쳤다.
“빨리 문을 열어!”
그때 실비아가 이반의 검이 떨어져 있던 자리 근처에서 네 번째 조각을 발견했다.
“여왕 열쇠다!” 그녀가 집어 든 조각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크고 정교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고, 여왕개미의 위엄이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가… 인간 모양은 어디 있지?”
모두가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다섯 번째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개미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마르쿠스와 그롬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 세라의 목에 걸린 은제 펜던트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서품 받을 때 대주교가 직접 걸어준 성물이었다.
“이거…” 세라가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만졌다. 펜던트가 따뜻해지더니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태양신의 상징인 원반 모양이었는데, 서서히 작은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변하고 있어요!”
“그거야!” 아르카디우스가 외쳤다.
“인간의 선택! 신앙을 통해 인간임을 증명하는 거예요!”
실비아가 재빨리 다섯 개의 열쇠를 각각의 구멍에 끼워 넣었다.
일개미, 수개미, 병정개미, 여왕개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형된 펜던트를 인간 모양 구멍에 넣었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복잡한 기계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톱니바퀴가 돌고, 쇠사슬이 움직이며, 수천 년 동안 닫혀 있던 빗장이 열렸다.
마침내 거대한 석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들어가!” 실비아가 소리쳤다. “빨리!”
마르쿠스와 그롬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진동이 느껴졌다.
땅이 흔들릴 정도로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이윽고 터널 깊은 곳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병정개미였다. 일반 개미의 세 배는 되는 크기에, 머리에 달린 턱은 정말로 대장간의 거대한 집게 같았다.
온몸이 두꺼운 흑철 같은 외골격으로 뒤덮여 있었고,
여섯 개의 다리는 각각이 신전의 기둥처럼 굵었다.
“저건…” 그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북방에서 온갖 괴물들과 싸워본 그도 이런 압도적인 크기의 적은 처음이었다.
병정개미가 돌진해 왔다. 그 속도는 덩치에 비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거대한 턱을 벌리며 마르쿠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르쿠스가 방패로 막으려 했지만, 충격은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기사단 방패가 산산조각 나며 그가 뒤로 날아갔다. 돌기둥에 등을 부딪치며 피를 토했다.
“마르쿠스!” 세라가 달려가려 했지만 실비아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문 안으로! 지금!” 실비아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사막에서 구한 특수한 연막탄이었다.
검은 가루가 든 작은 주머니를 병정개미 앞에 던지고 단검으로 터뜨렸다.
순간적으로 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들이 보아온 전장에서 사용되는 연기가 아니었다.
사막 전갈의 독과 특수한 허브를 섞은 것으로,
곤충의 예민한 감각기관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병정개미가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다섯 명이 모두 열린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실비아가 마지막으로 들어오며 안쪽에서 문을 닫으려 했지만, 문은 너무 무거웠다.
마르쿠스와 그롬이 합세해서 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육중한 석문이 닫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빗장! 빗장을 걸어!” 아르카디우스가 외쳤다.
거대한 철제 빗장을 찾아 문에 걸었다. 밖에서 병정개미가 문을 들이받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문 전체가 흔들렸지만, 고대의 석문은 견고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문은 병정개미의 공격도 버텨냈다.
모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개미들이 문을 긁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노한 곤충들의 집단적인 울부짖음이 석문을 통해 희미하게 전해졌다.
-
“다들 괜찮아?” 세라가 힐링 마법을 준비하며 물었다.
그녀의 이마에도 땀이 맺혀 있었지만, 동료들의 상처를 먼저 살폈다.
특히 마르쿠스가 걱정스러웠다. 병정개미에게 받은 충격으로 갈비뼈 몇 개가 부러진 것 같았다.
“살아있으니 괜찮은 거지.” 그롬이 찢어진 갑옷을 살피며 대답했다.
왼팔의 사슬갑옷이 개미 턱에 물려 찢어져 있었고, 그 아래의 살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근데 저놈들 정말 질기더군. 도끼로 몇 번을 내리쳐도 겨우 흠집만 났어.”
마르쿠스가 부러진 방패 조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스릴 검이 아니었으면 뚫지도 못했을 거야. 대장님이 이런 것들과 싸웠다면…”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제국 최강의 전사인 이반과 그의 정예들.
그들이 이런 괴물들에게 압도당했을 가능성이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 파악해 보죠.”
아르카디우스가 스태프의 빛을 더 밝게 만들며 주변을 비췄다.
그들이 들어온 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지하 신전이었다.
천장은 어둠에 묻혀 정확한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아르카디우스의 마법이 닿는 곳까지만 해도 20미터는 넘어 보였다.
거대한 석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각각의 지름이 세 명이 팔을 벌려도 안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석주들에는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부조들이 새겨져 있었다.
모두 개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벽면은 더욱 장관이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정교함은 마이소시아의 어떤 예술가도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벽화는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인간들이 개미를 관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학자들이 개미집을 연구하고, 그들의 사회 구조를 기록하고, 행동 패턴을 분석하는 장면들이었다.
그다음 부분에서는 인간들이 개미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제단에 공물을 바치고, 개미 형상의 조각을 만들고, 심지어 개미를 본뜬 건축물을 짓는 모습까지 보였다.
숭배의 의미라기보다, 인간들은 개미로부터 뭔가를 배우고 있었다.
건축 기술, 사회 구조, 언어의 교류까지.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실비아가 벽화 앞에서 숨을 들이켰다. “이건…”
인간이 개미로 변해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마에서 작은 더듬이가 돋아나고, 그다음은 눈이 점차 겹눈으로 변하며,
피부가 검은 외피로 덮이고, 팔다리가 늘어나며, 마침내는 완전한 개미가 되는 끔찍한 변화 과정이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들의 표정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환희에 찬 표정이었다.
마치 오랜 숙원을 이룬 것처럼, 더 높은 존재로 승격하는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변한 거야?” 세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여기 설명이 있어요.” 아르카디우스가 벽화 아래의 문자를 읽었다.
고대 엔드르어로 쓰인 긴 문장이었다. “‘개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집단의 영광으로. 혼란에서 질서로.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우리는 위대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노니, 더 이상 홀로 헤매지 않으리. 하나이면서 전체인 존재로 거듭나리라.’”
“***들.” 그롬이 침을 뱉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벌레가 되겠다니.”
“분명 그들에게는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아르카디우스가 다른 비문을 찾아 읽었다.
“여기 보면… ‘끝없는 전쟁, 배신과 탐욕, 질병과 가난. 인간 사회의 모든 악은 개체성에서 비롯된다.
서로 다른 욕망, 서로 다른 목표가 충돌하며 고통을 만든다. 하지만 개미들을 보라.
완벽한 조화, 완벽한 협력. 개체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개체를 위해. 진정한 유토피아가 아닌가.’”
“그래도 그건 인간이 아니야.” 실비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유 의지가 없다면, 선택할 수 없다면, 그냥 살아있는 기계일 뿐이야.”
-
신전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있었는데, 크기가 작은 건물만 했다.
제단은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표면에는 수천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들에서는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달콤하면서도 역겨운 냄새가 났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움직여!” 마르쿠스가 검을 뽑으며 외쳤다.
제단 위에 있던 것은 조각상이 아니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거대한 형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돌처럼 굳어 있던 관절이 삐걱거리며 풀렸다.
검은 외피로 덮인 거대한 몸통이 꿈틀거렸다. 여덟 개의 다리가 하나씩 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머리가 들려 올려졌을 때, 모두가 숨을 멈췄다.
여왕개미였다.
밖에서 본 병정개미조차 작아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머리만 해도 마차 하나는 될 것 같았고, 배 부분은 작은 창고처럼 부풀어 있었다.
겹눈은 수만 개의 렌즈로 이루어져 있어서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존재가 풍기는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크기만이 아니라, 천년의 세월의 빚어낸 위압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직접 울려 퍼졌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직접 전달되는 사념의 송신이었다.
‘누가… 감히… 나의 성역을… 더럽히는가…’
목소리는 늙고 지쳤지만,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수천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 것 같은 울림이 있었다.
한 개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군락의 의지를 대변하는 목소리였다.
여왕개미가 완전히 깨어났다.
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섯 명의 침입자를 내려다보았다.
겹눈이 각자를 차례로 훑었다. 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 인간들… 오랜만이구나… 얼마나 지났지…
백 년? 천 년? 시간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으니…’
“당신은 누구요?” 마르쿠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두려움을 억누르고 목소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군락의 어머니… 모든 개미의 근원…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왕이 거대한 머리를 마르쿠스 가까이 가져왔다. 썩은 꿀 냄새가 더욱 진하게 풍겼다.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
그 말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이 거대한 괴물이 한때는 인간이었다고?
‘놀랍군… 생각해 보니 백 년이 아니야… 최근에도 인간이 왔었는데…
이반이라는 이름의 전사였지… 용감했다… 그리고 현명했다…’
“이반 대장을 아시오?” 마르쿠스가 급하게 물었다.
“그는 어디 있소? 무사한가?”
여왕이 천천히 앞다리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신전의 옆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다… 그와 그의 동료들… 모두…’
여왕이 가리킨 방향을 보자 신전의 옆문들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존재들을 보고 모두가 경악했다.
반은 인간, 반은 개미인 기괴한 존재들이었다.
얼굴은 분명 인간이었지만, 몸은 진흙 같은 외피로 뒤덮여 있었다.
팔은 네 개로 늘어나 있었고, 각각의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 있었다.
다리도 여섯 개로 늘어나 곤충처럼 관절이 꺾여 있었다.
눈은 부분적으로 겹눈으로 변해서 수십 개의 작은 렌즈들이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들의 움직임이었다.
완벽하게 동조되어 하나의 존재가 여러 개의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루어스의 장군 계급장이 흉측하게 변형된 어깨에 아직도 매달려 있었다.
갑옷은 몸의 변화에 맞춰 기괴하게 늘어나고 찢어져 있었지만,
가슴팍의 루어스 문장은 여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은 반쯤 개미로 변해 있었지만,
턱선과 흉터의 위치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반… 대장…” 마르쿠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분명 이반이었다. 정확히는, 한때 이반이었던 무언가였다.
“마르쿠스…” 이반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금속을 긁는 듯한 거친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 희미하게 익숙한 억양이 남아 있었다.
“왜… 왔나… 경고한다… 다가오지 마라…”
이반이 변형된 팔을 들어 올렸다.
네 개의 팔 중 하나는 여전히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곤충의 앞다리처럼 변해 있었다.
그중 하나의 끝이 날카로운 뼈칼로 변형되어 있었다.
“대장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마르쿠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섰지만, 이반이 뼈칼을 들어 막았다.
“가까이… 오지 마라…” 이반의 겹눈이 희미하게 빛났다.
“이미… 늦었다…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그 말과 동시에 다른 변형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반의 부하들이었다.
한때는 루어스 최정예 전사들이었지만, 이제는 흉측한 혼종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하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섬뜩해서 세라가 뒤로 물러섰다.
성직자인 그녀의 눈에는 저들이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생명력은 있지만 개인의 영혼은 느껴지지 않았다.
‘보아라.’ 여왕의 사념이 득의양양하게 울렸다.
‘이것이 진화다. 개체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들. 더 이상 죽음도 두렵지 않다.
하나가 죽어도 전체는 살아있으니까. 더 이상 외로움도 없다. 항상 함께이니까.’
“이건 진화가 아니라 타락이야!” 실비아가 단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저들은 더 이상 살아있는 게 아니야. 그냥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야!”
‘꼭두각시라…’* 여왕이 거대한 머리를 실비아 쪽으로 돌렸다.
‘그럼 너희는 뭔가? 욕망의 꼭두각시, 감정의 노예가 아닌가?
배고프면 먹고, 화나면 싸우고, 외로우면 울고… 이를 자유라 하는가?’
여왕이 거대한 배를 움직였다. 그곳에서 끈적한 황금색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한 꿀 냄새가 났지만, 그 안에는 뭔가 위험한 것이 섞여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액체가 돌을 녹이기 시작했다.
‘변화의 꿀이다. 마시면 고통스럽겠지만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개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전체와 하나가 되는 충만함을.’
“단단히 미쳤군.” 그롬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누가 그런 걸 마신다고?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싸운다고? 무엇과 싸우겠다는 거지?’* 여왕의 목소리에 조롱이 섞였다.
‘너희가 상대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다. 이 도시의 모든 개미, 모든 변형체가 나의 일부다.
나를 죽여도 소용없다. 의식은 계속된다.’
그때 이반이 움직였다. 변형된 뼈칼이 마르쿠스를 향해 날아왔다.
엄청난 속도였다. 인간의 기술과 개미의 신체능력이 결합된 공격이었다.
마르쿠스가 간신히 검으로 막았지만,
그 힘에 뒤로 밀렸다.
“대장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하지만 이반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네 개의 팔이 각각 다른 각도에서 공격해 왔다.
인간의 검술과 곤충의 본능이 기괴하게 섞인 전투 스타일이었다.
마르쿠스는 바로 그에게 배워낸 기술들로 겨우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반은 상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변형체들도 공격에 가담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는 약했지만, 완벽한 협동 공격을 펼쳤다.
하나가 정면에서 주의를 끌면 다른 하나가 측면을 노렸고, 위에서 아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이 쏟아졌다.
“젠장! 끝이 없어!” 그롬이 도끼를 휘두르며 외쳤다.
변형체 하나를 쓰러뜨렸지만, 다시 일어났다. 머리가 반쯤 잘렸는데도 움직이고 있었다.
“이놈들 불사신이야 뭐야?”
“통증을 못 느끼는 거야!” 실비아가 그림자 속을 누비며 대답했다.
“의식이 없으니까 고통도 없어. 몸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계속 움직일 거야!”
아르카디우스가 화염 마법을 연속으로 시전 했다. “플레어 노바! 플래시스톰 블라스트!”
불꽃이 변형체들을 태웠지만, 그들은 불타면서도 계속 전진했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비명소리는 없었다.
세라는 동료들을 치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나가… 마나가 바닥나고 있어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속된 힐링 마법으로 정신력이 고갈되고 있었다.
전투는 점점 불리해졌다. 변형체들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났고,
여왕은 계속해서 정신 공격을 가했다. 사념으로 그들의 의지를 흔들려했다.
‘포기해라. 저항은 무의미하다. 너희도 결국 우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반의 검끝이 마르쿠스의 심장 한 치 앞에서 멈췄다. 완벽한 기회였건만 일격이 비껴갔다.
의도적이었다. 마르쿠스를 정확히 죽일 수 있는 순간에 빗나가는 공격들. 분명 실수가 아니었다.
“대장님은 아직 여기 있어!” 마르쿠스가 외쳤다.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았어!”
그 순간 이반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겹눈 깊은 곳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인간의 의식이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
“아래로…” 이반이 갑자기 말했다. 거친 목소리였지만 분명 자신의 의지로 하는 말이었다.
“계속… 아래로… 가라… 아홉 번째 문… 서둘러…”
‘닥쳐라!’ 여왕이 분노했다. 강력한 정신파가 이반을 강타했다.
이반이 머리를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이 짧은 순간이 기회였다. 마르쿠스가 신전 바닥을 살폈다.
제단 뒤쪽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저기다! 아래로 가는 길이 있어!”
“하지만 대장님은…” 마르쿠스가 망설였다.
“가라고 하잖아!” 실비아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더 싸워봤자 소용없어!”
여왕이 거대한 몸을 움직여 길을 막으려 했지만, 너무 컸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 틈을 타서 다섯 명이 계단을 향해 달렸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엔도르 전체가 나의 영역이다!
어디로 가든 너희는 나의 자식들을 만날 것이다!’
계단으로 뛰어들면서 마르쿠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반이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변형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그의 한쪽 눈 - 아직 인간의 눈으로 남아있는 - 이 마르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격려와 경고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가라. 그리고 막아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르쿠스는 이반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