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
엔드르 유적의 아홉 문 - 3부
제2막: 시련
5층 - 살아있는 심장의 방
다섯 번째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돌로 만들어진 계단이 아니었다. 벽면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세라가 균형을 잃고 벽에 손을 댔을 때,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따뜻해요.” 그녀가 손을 뗐다. 끈적한 점액이 손바닥에 묻어 있었다.
“… 뛰고 있어요. 심장처럼.”
아르카디우스가 벽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댔다. 분명했다. 거대한 심장의 고동소리가 돌 너머에서 울려왔다.
“우리가 뭔가의 몸속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살아있는 거대한 존재의.”
“그럼 우리가 먹혀버린 건가?” 그롬이 도끼 자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그들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섯 번째 층은 거대한 생명체의 내부였다. 벽과 천장이 모두 붉은 살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굵직한 혈관들이 그물처럼 뻗어 있었다. 혈관 안으로는 푸른빛이 도는 액체가 맥박에 맞춰 흘러갔다.
방 한가운데는 무언가 떠 있었다.
거대한 살덩어리가 공중에 부유하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작은 언덕만 했다.
표면에서는 수없이 많은 끈 같은 것들이 뻗어 나와 사방의 벽에 연결되어 있었다.
끈들은 생명력이 흐르는 듯 꿈틀거렸고,
때때로 번개 같은 빛이 그 안을 달려갔다.
“저건…” 아르카디우스가 숨을 죽였다.
“지배자의 뇌입니다. 모든 개미들을 조종하는 마왕의 뇌.”
거대한 뇌는 숨을 쉬듯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연결된 끈들을 따라 색색의 빛이 번쩍였다.
파란불, 녹색불, 붉은 불이 복잡한 무늬를 그리며 흘러갔다.
“손대지 마.” 실비아가 경고했다. “정체를 모르는 것은 위험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뇌에서 뻗어 나온 끈 하나가 뱀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세라를 향해 뻗어오자 끝부분에 가시 같은 것이 돋아났다.
“세라! 피해!” 마르쿠스가 검으로 그 끈을 쳐냈다.
잘린 끈은 순식간에 다시 자라났다. 그뿐만 아니라 수십 개의 다른 끈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방향에서 끈들이 춤추며 그들을 노렸다.
“등을 맞대!” 마르쿠스가 외쳤다.
다섯 명이 서로 등을 기대고 둥글게 서서 각자의 무기로 다가오는 끈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끈들은 너무 많았다. 게다가 한 번 공격이 막힐 때마다 다른 각도, 다른 방식으로 시도했다.
학습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 끈 하나가 세라의 팔을 스쳤다.
아주 살짝, 가시가 피부를 건드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세라의 눈빛이 변했다. 동공이 풀리고 초점을 잃었다.
“세라?” 마르쿠스가 걱정스럽게 불렀다.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치유의 성스러운 힘을 쓰기 시작했다.
동료들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잘려나간 끈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뭘 하는 거야!” 실비아가 세라를 잡으려 했지만,
세라가 평소답지 않은 힘으로 그녀를 밀쳐냈다.
“지배!” 아르카디우스가 깨달았다.
“저 끈이 세라의 마음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뇌와 직접 연결된 거예요!”
세라의 손에서 황금빛 치유의 힘이 쏟아져 나왔다.
잘려나간 끈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굵고 활발해졌다.
세라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몸은 조종당하고 있지만 정신은 저항하고 있는 듯했다.
“세라를 막아야 해!” 마르쿠스가 외쳤지만, 끈들의 공격이 더욱 격렬해졌다.
세라가 그들을 강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롬이 도끼 자루로 세라를 기절시키려 했지만,
그녀가 놀라운 민첩함으로 피했다. “젠장! 평소보다 빨라졌어!”
“세라의 몸도 강화된 겁니다!” 아르카디우스가 화염 마법으로 끈들을 태우며 설명했다.
“저 마왕의 뇌가 세라의 몸을 조종하고 있어요!”
실비아가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여 세라 뒤로 돌아갔다.
특수한 마비독이 묻은 침을 목덜미에 찔렀다. 하지만 세라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돌려 실비아를 공격했다.
성직자의 스태프가 도끼처럼 휘둘러졌다.
“독도 안 통해!” 실비아가 간신히 피하며 외쳤다.
그때 마르쿠스가 깨달았다.
“뇌를 공격해야 해! 저 덩어리를 직접 공격하면 연결이 끊어질 거야!”
하지만 거대한 뇌는 너무 높이 떠 있었고, 주변의 끈들이 철벽처럼 보호하고 있었다.
게다가 세라가 계속 치유하고 있어서 어떤 손상도 금세 회복됐다.
“저 높이까지 어떻게 올라가?” 그롬이 답답해했다.
아르카디우스가 주문을 준비했다.
“공중부유 마법으로… 아니다, 마력이 부족해요. 아까 너무 많이 썼어요.”
상황이 점점 나빠졌다. 끈들이 다른 사람들도 감염시키려 했다.
만약 한 명이라도 더 조종당한다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었다.
그때 실비아가 벽면의 굵은 혈관들을 발견했다.
“저 혈관들이 뇌로 연결되어 있어! 혈관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지도!”
“진심이야?” 그롬이 물었다.
“저게 무슨 액체인지도 모르는데?”
“다른 방법은 없어!” 실비아가 단검으로 가장 가까운 혈관을 찔렀다.
푸른빛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냄새는 역겨웠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르쿠스가 결단했다. “내가 올라간다. 방어는 맡겨.”
그가 찢어진 혈관을 통해 벽을 타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살점 때문에 어려웠지만, 갑옷의 가시와 검을 이용해 조금씩 올라갔다.
푸른 액체가 온몸에 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래에서는 전투가 계속됐다. 그롬과 실비아, 아르카디우스가 필사적으로 끈들을 막았다.
세라는 여전히 조종당하며 적을 돕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반쯤 올라갔을 때, 거대한 뇌가 그를 눈치챘다.
성벽만 한 살덩어리가 진동하며 강력한 마음의 파동을 발산했다.
마르쿠스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멈춰라… 나는 질서다… 나는 조화다…
나를 파괴하면 혼돈만이 남는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계속 올라갔다.
파동이 더욱 강해졌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이반 대장을 떠올렸다.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 그를 지탱했다.
마침내 거대한 뇌의 높이에 도달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기괴했다.
표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구멍이 있었고, 그 구멍들에서 끈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뇌 자체가 반투명해서 내부의 복잡한 구조가 보였다.
번개 같은 빛들이 미로 같은 길을 따라 번쩍였다.
“미안하지만…” 마르쿠스가 검을 높이 들었다.
“우리는 질서보다 자유를 택하겠어!”
검이 거대한 뇌에 깊숙이 박혔다.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끈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축 늘어졌고, 벽의 살점들이 떨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라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어… 어떻게…” 세라가 혼란스러워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가 왜…”
“나중에 설명할게!” 실비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마왕의 뇌가 죽어가고 있었다. 거대한 살덩어리가 검은색으로 변하며 썩어가기 시작했다.
마르쿠스가 급히 뛰어내렸다. 그롬이 그를 받아 안았다.
“잘했어, 이 ***아!”
하지만 뇌가 죽으면서 방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살아있던 벽과 천장이 급속도로 썩어가며 무너져 내렸다. 푸른빛 액체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빨리 나가야 합니다!” 아르카디우스가 출구를 가리켰다.
다행히 반대편에 문이 있었다. 다섯 명이 전력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드라코만 한 살덩어리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간신히 문을 통과했을 때,
뒤를 돌아보니 다섯 번째 층 전체가 붕괴하고 있었다.
“휴…” 마르쿠스가 푸른 액체를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아찔했네.”
“고마워요.” 세라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손으로 적을 돕고 있었어요. 정말 끔찍했어요.”
“괜찮아.” 마르쿠스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야.”
그들이 쉬고 있는 동안 아르카디우스가 주변을 살폈다.
“여섯 번째 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어요. 그런데…” 그가 계단 입구의 문양을 가리켰다.
“이건 경고입니다. ‘죽은 자들의 안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쓰여 있어요.”
“죽은 자들?” 실비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언데드?”
“아마도요.” 아르카디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엔도르 문명은 죽음에 대한 연구도 활발했으니까.
시체를 보존하고 되살리는 기술도 있었을 거예요.”
“좋아.” 그롬이 도끼를 두드렸다.
“언데드든 뭐든, 부숴버리면 되지.”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갈수록 위험은 더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세 개의 층이 더 남아 있었다.
-
6층 - 망자들의 안식처
여섯 번째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차가웠다.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서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벽면에는 서리가 끼어 있었고, 계단은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무엇보다 공기가 달랐다.
생명이 없는 공기. 오직 죽음만이 머무는 곳의 공기였다.
“춥다.” 세라가 떨며 말했다.
“이렇게 추운 건 자연스럽지 않아요.”
아르카디우스가 간단한 온기 마법을 시전 했지만, 효과가 미미했다.
“뭔가가 열을 빨아들이고 있어요. 대량의 언데드가 있다면 주변의 생명력을 흡수할 테니까요.”
계단 끝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거대한 지하 묘지였다.
시야가 닿는 곳까지 석관들이 늘어서 있었다.
수천, 아니 수만 개의 석관이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석관들 중 많은 수가… 열려 있었다.
“빈 관이 너무 많아.” 실비아가 긴장하며 말했다.
“원래 있던 것들이 다 어디로 간 거야?”
답은 곧 나타났다. 석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형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자인 줄 알았지만, 가까이 오자 정체가 드러났다.
시체였다.
정확히는 움직이는 시체였다. 더 큰 문제는 평범한 좀비가 아니었다.
반은 인간, 반은 개미인 언데드들이었다.
부패한 살점 사이로 검은 딱지가 보였고, 텅 빈 눈구멍에서는 희미한 녹색 빛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침입자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개미 좀비라니.” 그롬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것보다 더 역겨운 게 있을까?”
“실험의 실패작들일 겁니다.” 아르카디우스가 추측했다.
“인간을 개미로 바꾸려다가 죽은 시체들을 되살린 것 같아요.”
언데드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느려 보였지만 의외로 위협적이었다.
죽은 몸이라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머리를 잘라도 계속 움직였다.
게다가 개미의 습성 때문인지 서로 협력하며 공격했다.
마르쿠스의 더브릴이 언데드 하나를 베었지만, 잘린 부분에서 구더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살아있는 구더기들이었는데, 그것들도 공격에 가담했다.
“으악! 이게 뭐야!” 세라가 비명을 질렀다.
“구더기야!” 실비아가 화염 단검으로 구더기들을 태웠다.
“불에 약해! 불을 써!”
아르카디우스가 화염 마법을 연달아 시전 했다.
“타오르는 불길이여! 불꽃의 창이여! 플레어!”
불꽃이 언데드들을 태웠지만, 너무 많았다.
게다가 태워도 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들도 있었다.
전투 중에 마르쿠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언데드들 중 일부가 루어스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낡고 찢어졌지만 분명 제국군 장비였다.
“이반 대장의 부하들이야!” 그가 깨달았다.
“이미 죽어서 언데드가 된 거야!”
정말로 그중 한 명의 얼굴이 익숙했다. 이반의 부관이었던 레온이었다.
한쪽 눈이 없고 턱이 떨어져 나갔지만, 틀림없었다.
“레온…” 마르쿠스가 잠시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화근이었다.
언데드 레온이 날카로운 뼛조각으로 마르쿠스의 가슴을 할퀴었다. 갑옷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정신 차려!” 그롬이 도끼로 레온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저건 더 이상 네가 아는 사람이 아니야!”
묘지 깊은 곳에서 더 큰 움직임이 감지됐다.
거대한 석관 하나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또 다른 언데드가 나타났다.
다른 것들보다 훨씬 컸고, 보존 상태도 좋았다. 놀랍게도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사령술사!” 아르카디우스가 경악했다.
“언데드 마법사! 조심해요, 마법을 쓸 수 있어요!”
사령술사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목소리는 무덤에서 나는 바람소리 같았다. “죽음의 안개여… 생명을 거두어라…”
검은 안개가 퍼져나갔다.
안개에 닿은 곳마다 식물이 시들고, 바닥의 이끼가 검게 변했다.
안개가 세라에게 닿자,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다.
“세라!” 마르쿠스가 달려갔지만, 안개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다.
“성스러운 힘이 필요해요!” 아르카디우스가 외쳤다.
“언데드에게는 신성력이 가장 효과적이에요!”
하지만 세라가 쓰러진 상태에서는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마르쿠스의 가방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가 급히 확인해 보니, 루어스를 떠나기 전에 챙긴 성수병이 빛나고 있었다.
“성수다!” 그가 병을 꺼내 사령술사를 향해 던졌다.
성수가 사령술사에게 닿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령술사의 로브가 타들어가고, 썩은 살이 녹아내렸다. 죽음의 안개도 성수에 닿자 정화되며 사라졌다.
세라가 겨우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아… 살았어요…”
사령술사가 분노하며 더 강력한 주문을 준비했다.
“성스러운 묘지를 더럽힌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하지만 그때 묘지 깊은 곳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낮고 무거운 종소리였는데,
그 소리에 모든 언데드가 동작을 멈췄다. 사령술사조차도 당황한 것 같았다.
종소리가 계속되자 언데드들이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각자의 석관으로 기어들어갔다.
“뭐야?” 실비아가 당황했다.
“왜 갑자기…”
묘지 끝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검은 로브를 입은 인물이었는데,
얼굴은 후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 손에는 종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거대한 책을 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손님이 왔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말했다.
목소리는 늙었으나 인간의 것이었다. “살아있는 자들이 망자의 안식처를 찾다니.”
“당신은 누구요?” 마르쿠스가 물었다.
인물이 후드를 벗었다. 놀랍게도 평범한 노인이었다.
주름진 얼굴에 하얀 수염, 그리고 슬픈 눈.
“나는 이곳의 관리인이다. 시간이 스스로를 세 번 태우고 모래로 돌아갈 동안,
죽은 자들의 안식을 지켜온 자지.”
“시간?” 아르카디우스가 놀랐다. “그럼 당신도 언데드인가요?”
노인이 쓸쓸하게 웃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다. 그저 의무에 묶여 있을 뿐이지.”
그가 책을 펼쳤다. “여기 모든 망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최근에 추가된 이름들도 있지.”
그가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이반 칼라스의 부하들. 레온, 마커스, 실라, 토마스, 그레이스.”
“모두 죽었단 말인가요?” 세라가 슬프게 물었다.
“그들의 몸은 죽었다. 하지만…” 노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반 칼라스의 이름은 없다. 그는 아직 산 자들의 세계에 있다.”
마르쿠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대장님이 살아계신다고요?”
“하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노인이 경고했다.
“그도 곧 완전히 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죽은 것과 다름없다.”
노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너희가 정말로 그를 구하고 싶다면,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 가야 합니까?” 마르쿠스가 물었다.
노인이 묘지 끝을 가리켰다. “저 검은 문 너머로 가거라. 일곱 번째 층으로 가는 길이다.
하지만 조심해라. 그곳에는…”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엿듣고 있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다. 영혼을 거래하는 자가 있으니.”
노인이 품에서 낡은 은빛 부적을 꺼냈다.
부적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서로 얽힌 영혼들의 형상이었다.
“이것을 가져가라. 완벽한 보호는 아니지만, 최악의 순간에 한 번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르쿠스가 부적을 받아들였다. 차가운 금속이 손 안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노인의 눈에 깊은 슬픔이 스쳤다. “나도 한때는 동료를 구하러 왔던 자였다.
엔도르의 성벽에 눈이 내릴 때, 나도 너희처럼 희망을 품고 이곳에 왔었지. 하지만…”
그가 쓸쓸하게 웃었다. “실패했고, 대가로 영원히 이곳에 묶이게 되었다.
너희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말기를.”
“무슨 실수를 하셨는데요?” 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래를 했다.” 노인이 대답했다. “일곱 번째 층의 주인과 거래를 했고,
그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기억해라. 그가 무엇을 제안하든, 거절해라. 아무리 달콤해 보여도 말이지.”
검은 문은 거대했다. 높이가 세 길은 되어 보였고,
표면에는 기괴한 조각들이 가득했다.
고통받는 영혼들, 비명 지르는 얼굴들, 그리고 그 위에서 춤추는 악마의 형상들.
문손잡이는 해골의 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음산하네.” 그롬이 문을 살피며 말했다.
“이런 문을 만든 놈은 취향이 독특해.”
실비아가 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함정은 없는 것 같은데… 너무 쉬워서 오히려 불안해.”
아르카디우스가 문의 조각들을 연구했다.
“이 문양들… 영혼 결속 마법진이에요. 문을 통과하는 순간 뭔가 계약이 시작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가야지.” 마르쿠스가 결심했다.
“이반 대장을 포기할 수는 없어.”
그가 해골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망자들의 한숨 같은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
제3막: 각성
7층 - 영혼의 거래소
일곱 번째 층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거대한 원형 홀이었는데, 중앙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제단이 솟아 있었다.
제단 주변으로는 일곱 개의 기둥이 둘러서 있었고, 각 기둥 꼭대기에는 해골이 놓여 있었다.
해골들의 눈구멍에서는 녹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가장 불길한 것은 제단 위에 떠 있는 수정구였다.
거대한 검은 수정구 안에 무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영혼들이었다.
수백, 수천 개의 영혼이 수정구 안에 갇혀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저게 뭐죠?” 세라가 숨을 들이켰다.
“저 안에 있는 건…”
“영혼의 감옥입니다.” 아르카디우스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을 가두어 놓는 장치예요. 금지된 마법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제단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마른 체구의 인물이었다.
뒤돌아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풍기는 기운은 압도적이었다.
죽음과 부패, 그리고 절대적인 힘의 냄새가 났다.
“드디어 왔구나.” 그 인물이 돌아섰다.
얼굴이 드러났는데, 한때는 인간이었을 것 같지만 지금은 반쯤 해골이 된 상태였다.
살이 붙어 있는 부분도 썩어서 검게 변해 있었고,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빈 눈구멍 깊은 곳에서 붉은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영혼들을.”
“사령술사…” 아르카디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6층보다 더 강력한 죽음의 마법사야. 조심해요, 언데드를 다루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사령술사가 웃었다. 턱뼈가 덜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령술사? 그런 하찮은 호칭으로 부르지 마라. 나는 영혼의 중개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거래를 하는 자지.”
“거래?” 마르쿠스가 검을 뽑으며 물었다.
“무슨 거래를 말하는 거지?”
“오, 관심이 있나?” 사령술사가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수정구를 가리켰다.
“저 안에는 수천 년 동안 모은 영혼들이 있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지불한 자들이지. 그리고 난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었다.”
그가 손짓하자 수정구에서 영상이 나타났다.
과거의 모습들이었다. 병든 아이를 살리려는 어머니, 전쟁에서 이기려는 왕, 영생을 원하는 마법사…
그들 모두가 사령술사와 거래를 했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영혼을 잃었다.
“이반도 거래를 했나?” 마르쿠스가 날카롭게 물었다.
사령술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는 거절했다. 어리석은 자였지.
부하들을 살릴 기회를 줬는데도 거절하다니.”
“부하들을 살릴 수 있었다고?”
“물론이다. 내 힘으로는 죽은 자도 되살릴 수 있다. 완벽하게, 예전 그대로.
단지 그의 영혼을 대가로 요구했을 뿐인데, 그는 거절했다.” 사령술사가 아쉬워하는 듯 혀를 찼다.
“그래서 그는 혼자 살아남았고, 부하들은 언데드가 되었지.”
“이반 대장은 올바른 선택을 한 거야.” 마르쿠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그럴까?” 사령술사가 다가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로브 아래에서 뼈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너희도 선택해야 한다. 원하는 것이 있지 않나? 예를 들어…” 그가 마르쿠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죽은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지 않나?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마르쿠스가 흔들렸다. 정말로 그의 가장 깊은 소망이었다.
어린 시절 전쟁에서 죽은 아버지.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리고 너.” 사령술사가 실비아를 향했다.
“가족을 찾고 있구나. 사막에서 잃어버린 여동생.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지?”
실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한 번도 남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사령술사는 차례로 모든 사람의 가장 깊은 욕망을 들춰냈다.
그롬이 복수하고 싶어 하는 고향의 원수, 아르카디우스가 갈망하는 궁극의 지식,
세라가 되돌리고 싶어 하는 실패한 치유.
“모두 가능하다.” 사령술사가 팔을 벌렸다.
“단지 작은 대가만 지불하면 된다. 영혼? 그게 뭐가 중요한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닥쳐!” 그롬이 도끼를 들고 돌진했다.
“구차한 유혹은 집어치워!”
하지만 사령술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롬이 공중에 멈췄다.
보이지 않는 힘에 붙잡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성급하구나. 좋다, 그럼 힘으로 결정하자.”
사령술사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죽은 언어로 된 주문이었는데, 소리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썩어가는 것 같았다.
제단 주변의 해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둥에서 내려와 뼈만 남은 몸으로 일어섰다.
“수호자들이야!” 아르카디우스가 경고했다.
“위층의 언데드와도 달라요! 마법 저항력이 있고 재생도 해요!”
일곱 구의 언데드가 무기를 들고 공격해 왔다.
녹슨 검과 도끼를 휘두르는 그들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생전의 기술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전투가 시작됐다.
마르쿠스가 해골 하나를 베어 쓰러뜨렸지만, 흩어진 뼈들이 다시 모여 일어났다.
그롬의 도끼도,
실비아의 단검도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었다.
“뼈를 완전히 부숴야 해!” 실비아가 외쳤다.
하지만 사령술사는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가 새로운 주문을 외우자 바닥에서 검은 촉수들이 솟아올랐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촉수들이 일행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암흑 구속이야!” 아르카디우스가 해제 주문을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너무 강해요!”
세라가 신성력으로 언데드를 공격했다. “거룩한 빛이여! 홀리블로우!” 밝은 빛이 해골들을 강타했다.
성스러운 힘에는 확실히 약했다. 뼈가 타들어가며 재로 변했다. 하지만 사령술사는 끄떡없었다.
“성스러운 힘? 귀엽구나.” 그가 비웃었다.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했으니까.”
사령술사가 수정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진짜 힘을 보여주마. 검은 강이 두 번 바다로 길을 바꾼 세월 동안 모은 영혼의 힘을!”
수정구가 진동하며 검은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사령술사에게 흡수되자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키가 커지고, 뼈에 검은 갑옷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빈 눈구멍에서는 붉은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강화된 사령술사가 손을 휘두르자 죽음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파동에 맞은 사람들이 생명력을 빨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세라가 쓰러지고, 아르카디우스도 무릎을 꿇었다.
“안 돼!” 마르쿠스가 필사적으로 돌진했지만,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혔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해가던 그때, 마르쿠스의 품에서 은빛 부적이 빛나기 시작했다.
묘지 관리인이 준 부적이었다. 빛이 점점 강해지더니 보호막을 형성했다.
“뭐?” 사령술사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 부적은… 설마 그 늙은이가 아직도…”
부적의 빛이 죽음의 파동을 막아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도 보호막이 씌워졌다.
일시적이었지만, 반격할 기회였다.
“지금이야!” 마르쿠스가 외쳤다.
그때 홀 입구에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었는데, 갑옷은 찢어지고 온몸에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이반 대장!” 마르쿠스가 놀라서 외쳤다.
정말로 이반이었다. 아직 완전히 개미로 변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변화는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팔 하나는 이미 개미 다리로 변해 있었고,
얼굴 절반에는 딱딱한 껍질이 돋아 있었다.
“마르쿠스…” 이반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아직 인간의 것이었다.
“왜… 위험하다고… 했는데…”
“대장님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반이 쓸쓸하게 웃었다. “너무… 늦었다… 하지만…” 그가 사령술사를 노려보았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사령술사가 흥미로운 듯 이반을 바라보았다.
“오, 이반 칼라스. 다시 생각이 바뀌었나? 아직 늦지 않았다. 거래를 하면…”
“닥쳐!” 이반이 검을 뽑았다. 그의 또 다른 검에, 아직 날이 서 있었다.
“내 부하들을… 가지고 놀았겠지… 이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이반이 놀라운 속도로 돌진했다. 반쯤 개미로 변한 몸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다.
사령술사가 마법으로 막으려 했지만, 이반의 검이 먼저 닿았다.
검이 사령술사의 가슴을 관통했다. 하지만 사령술사는 웃었다.
“소용없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니까.”
“알아.” 이반도 웃었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
이반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유리병이었는데,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그가 병을 깨뜨리며 사령술사에게 뿌렸다.
“이건…” 사령술사의 표정이 공포로 변했다.
“성화 가루! 어떻게…”
“신전 지하에서… 찾았다…” 이반이 거칠게 숨을 쉬며 말했다.
“네놈을 위해… 아껴뒀지…”
성화 가루가 사령술사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언데드에게는 치명적인 물질이었다.
사령술사가 비명을 지르며 이반을 밀쳐냈지만, 이미 늦었다.
“죽어라! 다 같이 죽어라!”
사령술사가 최후의 주문을 외웠다.
수정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갇혀 있던 수천 개의 영혼이 한꺼번에 해방되면서 엄청난 에너지가 분출됐다.
홀 전체가 흔들리고, 천장에서 돌덩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너진다!” 그롬이 외쳤다.“나가야 해!”
하지만 이반이 쓰러져 있었다.
마르쿠스가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대장님!”
“어서 아래로 가라…” 이반이 약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안 됩니다! 같이 가야 해요!”
이반이 마르쿠스의 손을 잡았다.
반은 인간, 반은 개미의 손이었지만, 악력은 여전히 강했다.
“마르쿠스… 좋은 기사가… 되었구나… 자랑스럽다…”
“대장님…”
“여기 두고 가라… 명령이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롬과 함께 이반을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출구를 향해 뛰는 동안, 두 전사는 스승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너지는 홀을 빠져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뒤에서는 여전히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일곱 번째 층 전체가 붕괴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안전한 곳에 도착했을 때, 이반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변이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살아있어요.” 세라가 맥박을 확인했다.
“하지만… 변이를 막을 방법이…”
“아홉 번째 문이야.” 실비아가 말했다.
“카이라가 말했잖아. 아홉 번째 문에 답이 있다고.”
마르쿠스가 이반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가자. 끝까지 가는 거야.”
이반의 호흡은 거칠었다. 인간의 폐와 개미의 기관이 뒤섞여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변이 된 팔은 이제 완전한 개미 다리가 되어 있었고, 등에서는 딱딱한 껍질이 돋아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들것을 만들어야겠네.” 그롬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상태로는 걸을 수 없어.”
그들은 부서진 문짝과 찢어진 천조각으로 들것을 만들었다.
이반을 조심스럽게 옮기는 동안, 그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뼈가 재배열되는 소리, 살이 변형되는 소리.
그의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