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그때 저는 아직 교복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방과 후 책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 전원을 켜면,
갑갑한 현실보다 설레는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둠의 전설’이라는 이름의 세계.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
저는 레벨업이나 아이템 수집보다는 전혀 다른 것에 끌렸습니다.
마을 구석구석을 헤매며 인 게임 게시판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특히 ‘시인의 마을’이라는 곳에 자꾸만 눈길이 갔습니다.
게임 속에서 시인이라니,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네요.
이곳에 글을 남기는 ‘시인’이라는 사람들은,
제게는 일종의 이세계 거주자처럼 보였습니다.
누군가는 NPC 캐릭터들 사이의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해 소설로 써 올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우드랜드 깊숙한 곳에서 마주한 죽음의 순간을 재미있는 성찰로 풀어놓았습니다.
그들이 쓰는 짧은 글 한 편이 어떤 비싼 장비보다 더 값지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저에게 그런 글쓰기는
하늘 높은 곳에 있는 별을 맨손으로 따려는 일처럼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자리에 서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 막연한 동경만을 품은 채, 매일같이 게시판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라는 이름의 아저씨가 되어, 여전히 어둠의 전설에 접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마을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새로운 글이 올라오는 주기가 점점 길어졌고, 예전의 활기찬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가끔씩 그곳을 찾아가 가라앉은 옛 글들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는 것처럼, 그 시간들이 주는 특별한 위안이 있었거든요.
어느 날, 문득 저도 무언가를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홈페이지와 카페에 루딘과 테네즈를 소재로 한 짧은 이야기의 습작을 조심스럽게 올려보았습니다.
게임 속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에세이로 엮어보기도 했습니다.
게임에 글을 쓰는 일 자체가 낯설고 떨렸지만, 동시에 어린 시절 느꼈던 그 설렘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7년 만의 현자·시인 재선출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후보가 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제 이야기나 써볼 생각이었는데,
몇몇 분들이 제가 공지 이전부터 글을 올리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셨더군요.
운영진도 그 사실을 좋게 봐준 탓인지,
그렇게 어린 시절 그토록 동경했던 ‘시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린 날의 꿈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 현실이 된 셈이었죠.
하지만 이 순간, 제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책임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내가 시인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지금의 시인의 마을은 제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긴 글보다는 가볍고 오락적인 단문을 선호하고,
“여기에 글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죠.
실제로 조회수도 적고, 반응이 오는 일도 드물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 글을 씁니다.
이유를 굳이 찾자면,
글쓰기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일종의 의식과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혹시 모르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아주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누군가가 제 글을 읽고,
예전의 저처럼 작은 설렘과 동경을 느낄지도 말입니다.
그 누군가가 지금의 저처럼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도 이곳을 기억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전해줄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이어져 내려가는 작은 감동들이 모여서,
언젠가는 다시 시인의 마을에 활기가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모든 활동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게임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고, 제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오늘도 저는 시인의 마을에 한 편의 글을 올립니다.
모니터 앞에서 가슴이 뛰던, 그때의 아이와 함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