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
엔드르 유적의 아홉 문 - 4부
8층 - 잠의 강
여덟 번째 층으로 가는 계단은 나선형으로 깊숙이 내려갔다.
벽면에는 기묘한 이끼가 자라고 있었는데,
손을 대면 손가락 끝이 저렸다. 환각을 일으키는 포자를 내뿜는 종류였다.
아르카디우스가 간단한 정화 마법을 유지하며 걸었지만, 그의 얼굴은 피로로 창백했다.
연속된 전투와 마법으로 인해 마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계단 끝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거대한 호수 앞에 서 있었다.
지하 호수라고 하기엔 너무 큰. 저 멀리 반대편 기슭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완벽하게 잔잔한 호수가 그들을 맞이했다. 거대한 거울처럼 조금의 파동도 없었다.
“물이 아니야.” 실비아가 돌을 하나 던졌다. 돌은 수면에 닿자마자 그대로 가라앉았다.
파문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뭔가 다른 거야.”
세라가 물가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멈췄다.
“안 돼… 가까이 가면 안 돼요. 뭔가… 뭔가 잡아당기는 게 있어요.”
아르카디우스가 마법으로 호수를 탐색했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건 물이 아니에요. 액체 상태의 수면 마법이에요. ‘영원한 꿈의 강’이라고 불리는…
한 번 빠지면 영원히 잠들게 되는…”
“그럼 어떻게 건너가?” 그롬이 물었다.
“수영은 당연히 안 되겠고, 날아갈 수도 없고.”
호수 위를 자세히 보니 뭔가 떠 있는 것들이 있었다.
바위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 보니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 형상의 조각상들이었다.
물 위에 누운 채로 떠 있는데, 표정이 너무나 평화로웠다.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저들도 한때는 모험가였겠지.” 마르쿠스가 중얼거렸다. “호수를 건너려다가…”
그때 호수 한가운데서 뭔가 솟아올랐다. 물이 흘러내리며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여인의 상반신이었다. 하반신은 물속에 잠겨 있었지만,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세 길은 넘어 보였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적어도 얼굴은 그랬다.
창백한 피부와 긴 은발, 그리고 꿈꾸는 듯한 표정.
그녀의 몸은 반투명했고, 물처럼 일렁거렸다.
그녀의 품에는 수없이 많은 작은 형체들이 안겨 있었다.
잠든 사람들의 축소된 모형이었다.
“잠의 여신 소마니아…” 아르카디우스가 숨을 들이켰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존재인데… 실재했다니.”
소마니아가 눈을 떴다. 그 눈은 깊고 어두웠다. 밤하늘 보다 더.
그녀의 시선이 닿자 모두가 졸음을 느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몸이 나른해졌다.
“새로운… 꿈꾸는 자들…” 그녀의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부드러웠다.
“… 내 품으로… 오렴…”
“정신 차려!” 마르쿠스가 자신의 팔을 꼬집었다. 통증이 잠시 졸음을 쫓았다.
“저것도 시험이야. 우리를 잠들게 하려는 거야.”
소마니아가 슬픈 듯이 미소 지었다. “시험이라니… 슬픈 말이구나…
나는 단지… 평화를 주고 싶을 뿐인데… 꿈속에서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단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호수의 표면에 영상이 나타났다.
각자의 가장 아름다운 꿈이었다. 마르쿠스는 아버지와 함께 검술을 연마하고 있었고,
실비아는 잃어버린 가족과 재회했으며, 그롬은 복수를 완수하고 평화로운 고향에서 쉬고 있었다.
아르카디우스는 모든 지식을 얻어 현자가 되었고,
세라는 모든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아라…” 소마니아가 속삭였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모든 것이… 너희 것이 될 수 있다… 영원히…”
세라가 호수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그녀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었다.
“정말…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세라!” 실비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실비아도 흔들리고 있었다. 꿈속의 가족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때 들것에 누워있던 이반이 신음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었다.
그 소리에 모두가 현실로 돌아왔다. 이반의 변이는 계속되고 있었고, 그들은 그를 구해야 했다.
“우리는 꿈이 아니라 현실을 선택하겠다.” 마르쿠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소마니아의 표정이 슬픔으로 가득 찼다.
“왜… 왜 고통을 택하는가…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한데…”
“완벽한 꿈보다 불완전한 현실이 낫다.” 마르쿠스가 대답했다.
“꿈은 꿈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소마니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 호수 전체가 출렁거렸다.
“증명해 보아라… 너희의 현실이… 꿈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호수 위에 길이 나타났다. 떠 있는 조각상들이 일렬로 늘어서며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는 불안정했다. 조각상들이 가끔씩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함정이야.” 실비아가 의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다른 방법은 없겠지.” 그롬이 들것을 확인하며 말했다.
“이반이 버틸 시간이 얼마 없어.”
그들은 조심스럽게 조각상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첫 번째 조각상에 발을 디뎠을 때, 환상이 엄습했다.
조각상이 살아있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한 모험가가 보물을 찾아 이곳에 왔다가 호수에 빠진 순간.
물에 잠기며 느낀 평화로움.
그리고 영원한 잠.
“으…” 마르쿠스가 비틀거렸다. 그들의 기억이 너무 생생했다.
“집중하세요!” 아르카디우스가 외쳤다.
“기억에 빠져선 안 됩니다!”
하나씩 조각상을 건널 때마다 새로운 기억이 침투했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가, 어떤 이는 복수를 위해, 어떤 이는 단순한 호기심에.
하지만 모두 같은 운명을 맞았다. 영원한 꿈 속에 갇힌 것이다.
중간쯤 왔을 때, 조각상 하나가 움직였다. 돌처럼 굳어있던 얼굴이 돌아보며 말했다.
“돌아가라… 아직 늦지 않았다…
꿈이… 보다 나으니…”
다른 조각상들도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현실은 고통이다… 꿈으로 오라… 평화를 얻으라…”
그들의 손이 일행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마르쿠스가 검으로 막았지만, 돌처럼 단단한 손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뛰어!” 실비아가 외쳤다.
하지만 이반의 들것 때문에 빨리 움직일 수 없었다.
조각상들이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물속에서 일어나 다리를 붙잡고, 품으로 끌어안으려 했다.
그때 이반이 눈을 떴다.
반쯤 변한 그의 눈에는 아직 의식이 남아 있었다.
“나를… 두고 가라…” 그가 힘겹게 말했다.
“안 됩니다!” 마르쿠스가 외쳤다.
이반이 변이 된 팔로 들것을 붙잡고 일어섰다.
비틀거렸지만, 의지로 버텼다. “내가… 길을 만들겠다…”
그가 개미로 변한 팔을 휘둘렀다. 놀라운 힘이었다.
조각상들이 산산조각 나며 물속으로 떨어졌다. 이반이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대장님!”
“서둘러!” 이반이 고함쳤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되어가고 있었다.
소마니아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고통을 택하는구나… 어리석은 자들…
하지만… 그 또한 하나의 선택이겠지…”
그녀가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호수도 함께 요동쳤다. 조각상의 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빨리!”
마지막 순간, 그들은 가까스로 호수를 건넜다.
뒤를 돌아보니 호수는 다시 거울처럼 잔잔해져 있었다.
소마니아도, 조각상들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이반이 쓰러졌다. 힘을 너무 많이 쓴 것이다.
변이는 이제 그의 몸의 삼분의 이를 잠식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세라가 남은 치유 마법을 모두 쏟아부었다.
변이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속도를 조금 늦출 수는 있었다.
앞에는 마지막 계단이 있었다.
아홉 번째 문으로 가는 계단.
그들은 이반을 다시 들것에 눕히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이반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
9층 - 운명의 심판대
아홉 번째 문으로 향하는 계단에서부터 모든 것이 달랐다.
매 걸음마다 돌계단이 뜨거워졌고, 벽면에서는 증기가 피어올랐다.
지하 깊은 곳의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반의 변이는 이제 극한에 달해 있었다.
네 개의 팔은 모두 개미의 것이 되었고, 여섯 개의 다리 중 다섯 개가 완전히 변했다.
등에서 돋아난 날개는 이제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인간으로 남은 것은 얼굴의 사분의 일과 오른손 일부뿐이었다.
천 개가 넘는 계단을 내려간 끝에, 마침내 그들은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은 검은 흑철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이전 층들의 화려하고 복잡한 문양들과는 정반대였다.
오직 문 앞 바닥에 다섯 개의 원형 받침대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각 받침대에는 깊은 홈이 파여 있었는데, 그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첫 번째는 장검 모양, 두 번째는 쌍단검 모양, 세 번째는 전투도끼 모양,
네 번째는 스태프 모양, 그리고 마지막은 치유의 성배 모양이었다.
“무기를 요구하는 거야.” 실비아가 받침대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홈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오래된 혈흔이 남아 있었다.
“놓는 것보다는… 이 홈의 깊이와 각도를 보면… 꽂아야 해. 힘껏.”
그때 문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문 표면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흑철에 붉은 글씨가 피처럼 번져 나왔다.
『증명하라. 기사는 힘을, 암살자는 정밀을, 전사는 분노를,
마법사는 지혜를, 성직자는 희생을.』
“우리 각자를 지칭하는 거겠죠.” 세라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성배는 이미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지?”
답은 곧 나타났다.
받침대가 빛나기 시작하더니,
각각의 위에 환영이 나타났다.
첫 번째 받침대 위에는 거대한 바위 골렘이, 두 번째 위에는 수십 개의 회전하는 칼날이,
세 번째 위에는 끝없이 솟아나는 적들이, 네 번째 위에는 복잡한 마법진이,
그리고 다섯 번째 위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리의 시험이야.” 마르쿠스가 이해했다.
“각자가 자신의 시험을 통과해야 문이 열리는 거야.”
그들은 각자의 받침대 앞에 섰다. 마르쿠스가 먼저 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힘껏 첫 번째 받침대의 홈에 꽂았다.
검이 바위에 박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변 공간이 변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주위로 투명한 장벽이 생겨나며 그를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바위 골렘이 실체화되기 시작했다.
골렘은 두 길이 넘는 거구였다.
온몸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관절 부분에서는 마그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지면이 흔들렸고,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마르쿠스는 맨몸이었다. 오직 그의 힘과 기술만으로 이 괴물을 쓰러뜨려야 했다.
실비아도 단검을 홈에 꽂았다. 순간 그녀 주위의 공간이 어지럽게 변했다.
수십 개의 회전 톱날이 벽과 천장,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각각의 톱날은 불규칙한 패턴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사이의 안전한 공간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톱날의 속도는 너무 빨라서 은빛 잔상만 보일 정도였다.
방의 반대편에는 작은 보석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가져와야 시험이 끝나는 것이 분명했다.
그롬이 도끼를 내리꽂자, 그의 앞에는 끝없는 전장이 펼쳐졌다.
적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고블린, 오크, 트롤, 그리고 이름 모를 괴물들까지.
그들은 죽어도 계속 나타났고, 그롬은 맨손으로 그들과 싸워야 했다.
힘의 시험이 아니었다. 분노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가의 시험이었다.
아르카디우스가 스태프를 홈에 넣자, 그의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수백 개의 룬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중 일부는 계속 변하고 있었다.
단순한 퍼즐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마법진이었다.
잘못된 룬을 건드리면 폭발할 것이고, 너무 오래 걸리면 마법진 자체가 붕괴할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마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지식과 직관만으로 풀어야 했다.
세라가 마지막으로 성배를 홈에 놓았다.
그녀 앞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상처 입은 병사들, 역병에 걸린 아이들, 독에 중독된 노인들. 모두가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치유의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마력은 고갈되었고, 성배는 깨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
골렘의 첫 번째 공격운 번개처럼 빨랐다.
거대한 주먹이 마르쿠스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바닥이 깊게 패이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르쿠스는 간신히 옆으로 굴러 피했지만,
파편 하나가 그의 뺨을 스쳤다. 피가 흘러내렸다.
골렘은 멈추지 않았다. 왼손이 휘둘러오자 마르쿠스는 몸을 낮춰 피했다.
바람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만약 맞았다면 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관찰하고… 기다려…” 마르쿠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반이 가르쳐준 전투의 기본이었다. 강한 적일수록 성급하게 공격하지 말라고.
골렘의 움직임에는 패턴이 있었다. 오른손 공격 후 0.5초의 틈, 왼손 공격 후 0.3초의 틈,
그리고 양손 동시 공격 후 1.2초의 긴 틈. 마지막 틈이 기회였다.
골렘이 양손을 모아 내려쳤다. 마르쿠스는 뒤로 물러났다.
골렘의 양손이 바닥에 박혔다. 지금이었다!
마르쿠스가 골렘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골렘이 손을 빼려 하지만 깊이 박혀서 쉽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골렘의 어깨까지 올라가서 관절 부분의 마그마가 흘러나오는 틈을 찾았다.
그곳이 약점이었다.
그는 주먹을 모아 골렘의 목 관절을 가격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골렘이 몸을 흔들어 그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마르쿠스는 악착같이 매달렸다.
열 번째 가격에서 드디어 균열이 생겼다. 마그마가 더 많이 흘러나왔다.
골렘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마르쿠스도 함께 떨어졌지만, 굴러서 충격을 완화했다.
골렘이 일어나려 했지만, 목의 손상으로 움직임이 어색했다.
마르쿠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골렘의 다리 관절을 연속으로 공격했다.
무릎, 발목, 모든 관절을 체계적으로 파괴해 나갔다.
마침내 골렘이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이윽고 그 빛이 마르쿠스에게 흡수되었다. 상처가 치유되고, 근력이 증가하는 것을 느꼈다.
-
실비아는 벽에 등을 기대고 톱날들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무작위로 보였지만, 점차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7초 주기로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첫 번째 시도. 그녀는 첫 번째 톱날을 피했지만,
두 번째에서 옷깃이 찢어졌다. 급히 뒤로 물러났다.
두 번째 시도. 이번에는 세 번째 톱날까지 피했지만, 네 번째에서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피가 흘렀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집중해… 7초… 1, 2, 3…”
세 번째 시도. 실비아는 톱날의 리듬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춤추듯이 움직였다. 첫 번째 톱날 아래로 몸을 낮춰 지나가고,
두 번째는 옆으로 피하고, 세 번째는 점프해서 넘었다.
중간지점에 도달했을 때, 톱날의 속도가 빨라졌다.
더 이상 7초 주기가 아니었다. 5초, 4초, 3초로 점점 빨라졌다.
실비아는 새로운 전술을 택했다.
톱날 자체를 발판으로 삼는 것이었다. 위험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한 톱날이 지나간 직후의 짧은 순간을 노렸다.
톱날의 평평한 면에 발을 올리고 즉시 다음 톱날로 뛰어넘었다.
균형을 잃으면 죽음이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사막에서 모래폭풍 속을 헤쳐온 암살자였다.
죽음과의 줄타기는 그녀의 일상이었다.
보석까지 남은 거리가 세 걸음. 하지만 마지막 세 개의 톱날은 다른 방향에서 동시에 회전했다.
위에서, 옆에서, 아래에서. 피할 공간이 없었다.
실비아는 몸을 완전히 수평으로 누이며 세 톱날 사이의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톱날이 그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잘라냈지만, 그녀는 살아남았다.
손이 보석에 닿는 순간,
모든 톱날이 멈췄다.
보석이 빛나며 그녀의 몸에 흡수되었다. 민첩성이 극도로 향상되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녀는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수백 개의 화살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롬의 앞에는 적들이 끝없이 밀려왔다.
처음은 작은 고블린들이었다. 그의 주먹 한 방에 두세 마리씩 날아갔다.
하지만 적들은 계속 나타났다. 고블린이 오크로, 오크가 트롤로, 트롤이 더 큰 괴물로 바뀌었다.
열 번째 적을 쓰러뜨렸을 때, 그롬의 주먹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스무 번째에서는 갈비뼈가 부러졌다. 서른 번째에서는 어깨가 탈구되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더… 더 와라!” 그롬이 포효했다.
고통이 오히려 그의 분노를 키웠다. 북방 전사의 피가 끓어올랐다.
쉰 번째 적은 거대한 미노타우르스였다. 도끼가 그롬의 등을 갈랐지만,
그롬은 돌아서서 미노타우르스의 목을 붙잡았다. 맨손으로 비틀어서 목을 꺾어버렸다.
백 번째가 되었을 때, 그롬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그의 분노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제는 적들이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분노에 찬 그롬의 모습은 악마보다 무서웠다.
이백 번째, 삼백 번째… 숫자는 의미를 잃었다. 그롬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때리고, 부수고, 찢어버렸다. 분노가 그를 움직이는 유일한 연료였다.
천 번째 적을 쓰러뜨렸을 때, 모든 것이 멈췄다.
그롬의 몸에 붉은 문신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분노의 룬이었다.
이제 그의 힘의 근원은 언제까지고 꺼지지 않을 것이었다.
-
마법진의 첫 번째 층은 비교적 단순했다.
기본적인 원소 마법의 룬들이었다. 불, 물, 바람, 흙. 아르카디우스는 신중하게 손을 뻗어 불의 룬을 건드렸다.
룬이 빛나며 다음 층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두 번째 층은 보다 복잡했다. 고대 언어와 마법이 뒤섞여 있었다.
일부는 그가 본 적도 없는 기호였다.
하지만 그는 논리와 추론으로 하나씩 풀어나갔다.
문자 하나하나의 구조를 분석하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의미를 찾아냈다.
세 번째 층에서 막혔다. 모순의 룬이었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마법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 아르카디우스가 중얼거렸다.
“다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그는 모순을 받아들였다. 논리를 버리고 직감을 따랐다. 손을 뻗어 모순의 룬을 건드렸다.
순간 마법진 전체가 빛났다.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이 흘러들어왔다.
모순의 마법,
역설의 힘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
세라의 앞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가장 가까운 아이에게 다가갔다. 한쪽 다리가 심하게 다친 소년이었다.
“아파요… 도와주세요…” 아이가 울먹였다.
세라의 손에는 마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성배도 깨져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빈 손을 아이의 상처에 대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진심을 담아, 간절히.
“제발… 이 아이를 구해주세요…”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떨어졌다. 그 눈물이 아이의 상처에 닿자 기적이 일어났다.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순수한 희생의 눈물에는 어떤 마법보다 강한 치유력이 있었다.
세라는 한 명씩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을 치유했다. 마력 대신 자신의 생명력을 바쳤다.
자신의 피를 나누어주고, 자신의 숨을 나누어주었다.
마지막 사람을 치유했을 때,
그녀는 거의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다.
그때 빛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구한 모든 사람들의 감사가 모여 새로운 힘이 되었다.
그녀의 성배가 다시 태어났다. 이전보다 더 크고, 더 순수한 황금빛으로.
-
다섯 개의 시험이 모두 끝나자, 장벽이 사라졌다.
무기들이 받침대에서 빠져나왔는데, 모두 변해 있었다.
마르쿠스의 검은 미스릴처럼 빛났고, 실비아의 단검은 그림자를 베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롬의 도끼는 붉은 오라를 뿜었고, 아르카디우스의 스태프에는 새로운 수정이 박혀 있었다.
세라의 성배는 황금빛으로 빛났다.
거대한 흑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유황 냄새와 함께 무언가 거대한 것이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가자.” 마르쿠스가 새로워진 검을 들고 말했다.
“끝내야 할 시간이야.”
문 너머는 거대한 구형 공간이었다.
지름이 오백 길은 되어 보였다.
벽면은 모두 살아있는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곳곳에서 형광색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닥은 걸쭉한 점액으로 덮여 있었고, 천장에서는 거대한 육종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여왕개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개미라고 부르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몸길이가 백 길은 넘었고, 수십 개의 다리와 팔이 온몸에서 뻗어 나와 있었다.
머리는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각각이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온몸에서 알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그 알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부화해서 작은 개미들이 되었다.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여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백만 개미들의 집단의식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공간 전체가 그들의 목소리로 진동했다. ‘마지막 제물들. 너희의 정수를 받아 나는 완전해질 것이다.’
“네가 이반을 조종하고 있군!” 마르쿠스가 외쳤다.
‘조종? 아니다. 그는 이미 우리의 일부다. 보라.’
여왕의 거대한 팔 하나가 움직이더니, 천장의 육종 하나를 가리켰다.
반투명한 막 안에 누군가 떠 있었다. 이반이었다. 아니, 이반의 원본이었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뭐야?” 그롬이 혼란스러워했다. “그럼 우리가 데리고 온 이반은…”
‘복제다. 불완전한 복제. 원본은 이미 우리와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의식이 너무 강해서 완전히 흡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복제를 만들어 보냈다.
너희를 여기로 인도하기 위해.’
배신감과 분노가 마르쿠스를 덮쳤다. 하지만 그때 들것 위의 이반 - 복제 이반이 일어났다.
변이가 거의 완성된 그의 모습은 흉측했지만, 남은 하나의 인간 눈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마르… 쿠스…” 그가 힘겹게 말했다. “나는… 복제여도…
그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너를… 아끼는 마음도…”
여왕이 공격을 시작했다. 수십 개의 거대한 팔이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각각의 팔 끝에는 날카로운 낫이나 독침이 달려 있었다.
바닥의 점액이 솟구쳐 올라 촉수가 되어 발목을 노렸다.
천장에서는 산성 체액이 비처럼 쏟아졌다.
마르쿠스가 검을 휘둘렀다. 새로워진 검은 놀라운 절삭력을 보였다.
여왕의 팔 하나를 단번에 베어냈다. 검은 체액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약점을 찾아야 해!” 마르쿠스가 외쳤다.
“저 크기로는 분명 치명적인 부위가 있을 거야!”
실비아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가 여왕의 등 뒤에 나타났다.
강화된 단검이 부드러운 관절을 정확히 찔렀다. 하지만 상처는 금세 재생되었다.
“재생 속도가 너무 빨라!” 실비아가 다시 그림자로 사라지며 외쳤다.
그롬은 포효하며 정면으로 돌진했다. 분노의 룬이 빛나며 그의 근력이 배가 되었다.
붉은 오라를 두른 도끼가 여왕의 다리 하나를 깊숙이 베었다.
하지만 여왕은 비명을 지르며 다른 다리로 그롬을 차버렸다.
그롬이 벽에 부딪혀 피를 토했다.
아르카디우스는 새로운 깨달음을 바탕으로 모순의 마법을 시전 했다.
“카오스 노바! 라그나로크!” 역설의 힘이 폭발하며 여왕의 정신 연결을 교란시켰다.
여왕이 잠시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다른 이들이 공격을 퍼부었다.
세라는 동료들의 상처를 빠르게 치유하며 전장을 누볐다.
새로운 성배는 무한에 가까운 치유력을 품고 있었다.
그롬의 부러진 갈비뼈가 순식간에 붙고,
실비아의 베인 상처가 아물었다.
여왕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계속 강해졌다. 떨어져 나간 부위에서 새로운 팔이 돋아나고,
더 많은 알이 쏟아져 나왔다. 부화한 개미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대로는 안 돼!” 마르쿠스가 개미들을 베어내며 외쳤다. “뭔가 다른 방법이…”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복제 이반이 여왕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변이 된 괴력으로 여왕의 촉수를 찢어내고, 날개로 산성 체액을 막아냈다.
“이반 대장!” 마르쿠스가 외쳤다.
“나는… 선택한다…” 복제 이반이 말했다. “… 나는… 인간의 편이다…”
그의 반란에 여왕이 경악했다. ‘불가능하다! 너는 내 일부다!’
“아니다…” 이반이 여왕의 중추 부위를 향해 돌진했다.
“나는… 이반 칼라스다!”
그가 여왕의 심장부에 돌진하는 순간,
천장의 육종이 깨지며 진짜 이반이 떨어졌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살아있었다.
두 이반이 마주한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이 하나로 융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돼!’ 여왕이 절규했다.
융합이 완성되자, 새로운 이반이 탄생했다.
인간도 개미도 아닌, 하지만 둘 다인 존재. 그는 여왕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제 끝낼 시간이다.” 이반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중으로 울렸지만, 분명 그 자신의 것이었다.
여왕이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 온몸의 팔을 동시에 휘둘렀다.
수십 개의 촉수가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여섯 명이 완벽한 팀워크를 보였다.
마르쿠스의 검이 번개처럼 빛나며 여왕의 머리 하나를 베었다.
실비아가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 중추 신경을 끊었다.
그롬의 도끼가 심장 부위를 갈랐다. 아르카디우스의 마법이 여왕의 재생을 막았다.
세라의 신성력이 여왕의 타락한 생명력을 정화했다. 그리고 이반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융합된 힘으로 여왕의 핵심을 꿰뚫었다.
여왕의 거대한 몸이 경련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럴 수는…’ 여왕의 목소리가 약해졌다. ‘천 년의… 계획이…’
“끝났다.” 이반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왕의 몸이 완전히 무너지자, 전체 구조물이 흔들렸다.
천 년 동안 여왕의 정신력으로 유지되던 지하 도시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장에서 거대한 암석들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바닥은 갈라지며 아래에서 붉은빛이 올라왔다.
지하 깊은 곳의 용암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융합된 이반의 몸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인간과 개미, 원본과 복제의 융합이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여왕의 죽음과 함께 그를 하나로 묶어두던 힘도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 돼…” 이반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유지할 수… 없어…”
마르쿠스가 그에게 달려갔다. “대장님!”
이반이 떨리는 손으로 마르쿠스를 밀어냈다. “가라… 나는… 여기 남겠다…”
“무슨 소리예요! 같이 가야죠!”
이반이 쓴웃음을 지었다. 변형된 얼굴이었지만, 그 미소는 분명 이반의 것이었다.
“이 몸으로는… 어차피 오래 못 가… 차라리… 마지막으로… 쓸모 있게…”
그가 변형된 네 개의 팔을 모두 들어 올렸다. 엄청난 힘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개미의 괴력과 인간의 의지가 합쳐진 최후의 힘이었다. 그는 천장을 향해 뛰어올랐다.
날개가 펼쳐지며 그의 몸이 포탄처럼 날아올라 천장의 약한 부분에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천장이 뚫렸다. 거대한 구멍이 생기며 위층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이반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다.
변형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날개는 찢어졌다.
그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반!” 마르쿠스가 절규했다.
떨어지는 이반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마르쿠스…”
그의 몸이 치솟는 용암 속으로 사라졌다.
제국 최강의 전사, 북방 원정의 영웅, 그리고 마르쿠스의 스승.
그의 마지막은 영웅답게 동료들을 위한 희생이었다.
-
이반이 뚫은 구멍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탈출로였다.
시간이 없었다. 용암이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고, 엔도르의 붕괴도 가속화되고 있었다.
“가야 해!” 그롬이 마르쿠스를 끌었다. “그분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
그들은 이반이 열어준 구멍을 향해 뛰었다.
8층의 잠의 강은 끓어올라 거대한 증기 기둥이 솟아올랐고,
소마니아의 환영은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고 있었다.
수면에 갇혀 있던 석상들이 깨어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이반의 부하들이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잡혀온 루어스의 정찰대들이었던 것이다.
“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한 병사가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마르쿠스가 고개를 저었다. 말로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따라와! 탈출이 먼저야!”
열 명 남짓한 생존자들과 함께 그들은 계속 위로 올라갔다.
7층의 영혼의 거래소는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사령술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6층의 망자의 길에서는 놀랍게도 묘지 관리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끝이 왔구나.” 노인이 평화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천 년의 의무가 끝났다.”
“같이 가시죠!” 세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기 남겠다. 죽은 자들과 함께.
너희는 나아가라. 살아낸 자들의 세계로.”
그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마르쿠스에게 주었다.
“이반의 것이다. 그가 맡겨두고 갔더구나.”
주머니 안에는 작은 휘장들이 들어 있었다.
이반의 부하들의 인식표였다. 죽은 자들의 증거였다.
5층, 4층, 3층을 미친 듯이 뛰어올랐다. 각 층은 연쇄 붕괴로 무너지고 있었다.
2층에 도달했을 때, 바닥이 완전히 갈라지며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아래에서는 모든 것을 삼키는 용암이 치솟고 있었다.
“뛸 수밖에 없어!” 그롬이 먼저 도약했다.
하나둘 절벽을 뛰어넘었다. 마지막에 한 병사가 발을 헛디뎌 떨어질 뻔했지만,
실비아가 재빨리 밧줄을 던져 그를 구했다.
마침내 1층에 도달했다. 봉인의 문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천장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출구가 보였다. 거대한 함몰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었다.
“마지막 전력 질주다!” 마르쿠스가 외쳤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용암이 밀려오고, 위에서는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출구가 점점 가까워졌다. 50미터, 30미터, 10미터…
막 출구로 뛰어나가려는 순간, 거대한 암석이 떨어져 길을 막았다.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롬이 포효하며 전진했다.
분노의 룬이 빛나며 그의 힘이 극대화되었다.
그는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려 옆으로 밀어냈다.
“가! 빨리!”
모두가 좁은 틈으로 빠져나갔다. 그롬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순간, 엔도르의 입구가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모래언덕을 구르며 간신히 안전한 거리까지 도망쳤다.
뒤를 돌아보니, 거대하게 함몰된 구멍이 안으로 꺼지고 있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모래가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갔다.
몇 분 후, 그곳에는 거대한 분화구만 남았다.
천 년의 비밀을 품었던 엔도르 유적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끝났어…” 마르쿠스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이반 부하들의 인식표가 들려 있었다.
열다섯 개의 작은 금속판. 그것이 이번 탐험의 증거였다.
생존자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마르쿠스 일행 다섯 명과 구출된 병사 열한 명.
겨우 열여섯 명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엔도르의 비밀, 그리고 이반 대장의 마지막 희생을.
해가 지고 있었다.
노엠 사막의 저녁은 아름다웠지만, 그들에게는 슬픔의 색이었다.
붉은 노을이 전사자들을 위한 조기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
에필로그
한 달 후, 루어스 제국의 황궁 알현실.
대리석 기둥들이 하늘을 떠받치는 황궁의 대알현실에서는 북소리가 울렸다.
엔도르 원정대의 귀환을 기념하는 의식이었다. 슬레이터가 옥좌에서 일어나 다섯 명의 영웅을 맞았다.
“마르쿠스 지그프리트, 실비아 알사도르, 그롬 아이언피스트,
아르카디우스 멜란토스, 세라 루미너스.” 황제의 목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그대들은 제국의 명령을 받들어 엔도르의 위험을 제거했다.
이는 루어스에 길이 남을 공적이다.”
왈츠 재상이 포상 내역을 읽어 내렸다. 마르쿠스에게는 이반의 뒤를 있는 기사단장의 작위가,
실비아에게는 자유 시민권이, 그롬에게는 명예 시민권이, 아르카디우스에게는 궁정 마법사 지위가,
세라에게는 고위 성직자 지위가 수여되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이반 칼라스를 위한 것이었다. 황제가 직접
『제국의 수호자』 훈장을 꺼냈다. 오직 죽음으로써 제국을 지킨 자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였다.
“이반 칼라스에게 사후 대장군 계급을 추서 하고, 제국의 수호자 훈장을 수여한다.”
이반의 아버지 칼라스 원수가 앞으로 나와 아들의 훈장을 받았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루어스의 장군은 울지 않는다.
공식 의례가 끝난 후,
황제가 옥좌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다가왔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실을 말해주게. 정말로 모든 위험이 제거된 것인가?”
마르쿠스 지그프리트가 답했다. “엔도르는 완전히 봉인되었습니다, 폐하.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남아 있을 겁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자네들이 더욱 소중한 것이지.
루어스는 자네들을 필요로 할 것이네.”
-
황궁 정원에서 다섯 명은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았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오늘은 따뜻한 날이었다. 늦가을의 꽃들이 마지막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기사단장이라니.” 실비아가 지그프리트를 놀렸다.
“그만해.” 지그프리트가 쑥스럽게 웃었다.
“난 여전히 그냥 마르쿠스야.”
“궁정 마법사라니 대단하네.” 그롬이 아르카디우스를 쳐다보았다.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겠어요.” 아르카디우스가 답했다.
“엔도르에서 본 것들을 정리해야 하거든요.”
세라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모두 달라지겠네요. 각자의 길로 흩어져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무겁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슬픔을 견딜 수 있었다.
정원 저편에서 칼라스 원수가 다가왔다. 평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그가 손을 들어 인사를 막았다.
“편하게 있게. 사적으로 찾아온 것이니까.”
그가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이것은 이반이 어렸을 때 쓰던 물건들이네.
자네들이 가지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상자 안에는 어린 시절의 일기장, 첫 번째 훈련용 칼, 그리고 빛바랜 그림이 들어 있었다.
어린 이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서툰 솜씨였지만, 행복이 묻어나는 그림이었다.
“대장님도 아이였을 때가 있었군요.” 지그프리트가 그림을 보며 미소 지었다.
“당연하지.” 원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항상 강한 아이는 아니었네. 겁도 많고, 울보이기도 했지.
하지만 언제부턴가… 남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어.”
그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네들 덕분에 아들이 영웅으로 기억될 수 있게 되었네.
비록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명예롭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위안이 되네.”
칼라스 원수가 떠난 후,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상자 속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보며, 각자 이반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황궁의 첨탑들이 붉은 노을에 물들었다.
정원의 새들이 둥지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우리도 이제 돌아가야겠다.” 지그프리트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도 가끔은 만나자.” 세라가 제안했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좋지.” 그롬이 동의했다. “그때마다 술 한잔하면서 옛날 이야기하는 거야.”
황궁을 나온 다섯 명은 루어스의 대로를 따라 걸었다.
저녁 시장이 열리고 있었고,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활기차게 울려 퍼졌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놀고,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엔도르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저기, 약속의 선술집이야.” 그롬이 간판을 가리켰다.
『영웅의 쉼터』라는 이름의 선술집이었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다.”
선술집 안은 따뜻했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었고,
음유시인이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곧 음식과 술이 나왔다.
타고르식 독한 맥주와 운디네의 포도주, 그리고 푸짐한 고기 요리들.
첫 번째 건배는 당연히 이반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잔을 들어 올리고,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반 대장.”
두 번째 건배는 살아남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앞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할 그들을 위한 격려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이야기꽃이 피었다. 엔도르에서의 모험담은 이제 그들만의 추억이 되어 있었다.
각자가 기억하는 부분이 조금씩 달라서, 때로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억나?” 지그프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롬이 두 번째 층에서 알 하나 밟고 펄쩍 뛰던 거.”
“그건 네가 먼저 발을 헛디뎠잖아!” 그롬이 항변했다.
“그 와중에도 아르카디우스는 책을 버리지 못해서 짐이 두 배였지.
확실히 정상은 아니야.” 실비아가 덧붙였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그들은 선술집을 나섰다. 취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거리는 조용했고,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그럼 곧 보자.” 지그프리트가 작별 인사를 했다.
“꼭이다.” 실비아가 대답했다.
그들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마르쿠스 지그프리트는 기사단으로, 실비아는 노엠으로, 그롬은 타고르로,
아르카디우스는 도서관으로, 세라는 신전으로. 그들은 알고 있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엔도르에서 맺어진 인연은 영원할 것이라는 것을.
마르쿠스가 궁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유난히 밝게 보였다. 이반 대장의 별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좋은 기사가 되겠습니다.”
달빛이 루어스의 지붕들을 비추고 있었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그리고 평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들이 지켜낸 만큼은.
-
3년 후, 루어스 제국 황궁 도서관.
아르카디우스가 깊은 밤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촛불이 희미하게 타오르는 가운데, 그의 앞에는 두꺼운 양피지 뭉치가 놓여 있었다.
『엔도르 원정기』의 마지막 장을 쓰고 있었다.
그는 깃펜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루어스의 밤거리에서 저 멀리 한 집 창문에 불빛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깨어 있었다. 아픈 아이를 돌보고 있을 수도 있고, 내일을 준비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다시 깃펜을 들어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엔도르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괴물이 아니었다. 인간이 만든 어둠이었다.
고대의 사람들이 순수를 버리고 욕망을 택했을 때 태어난 어둠. 엔도르퀸은 단지 그 어둠이 취한 형태일 뿐이었다.
진정한 적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이반 칼라스는 그것을 알았기에 마지막까지 인간이기를 택했다.
그의 선택이 우리 모두를 구했다.”
아르카디우스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도서관 어딘가에서 쥐가 뭔가를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된 책들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촛불이 깜빡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르카디우스가 원고를 정리해 서랍에 넣었다.
내일 아침 서기관들이 와서 정서할 것이다.
그가 촛불을 끄려던 순간, 저 멀리 창문의 불빛도 꺼졌다.
누군가의 밤이 끝났다. 그 또한 좋은 밤이었기를 바라며 아르카디우스도 촛불을 껐다.
어둠이 도서관을 덮었다.
수많은 이야기들과 함께.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