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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秘」옵티무스텔라 - 1
469 2025.08.29. 07:31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서고 위치: 최심층 금서실 흑요석함

문서 인장: 「왕관과 검」「해골과 장미」「황금 테두리」

문서 제목: 옵티무스텔라 연대기

보관 연대: 세오력 192년 춘분기

발견 경위: 제국 각지 15년간 수집

문서 보존: 집성 복원본, 원본은 각지 분산 보관

열람 제한: 관리인 재량

관련 문서: 다수 - 하기 목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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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고 관리인 주석]


이 문서는 지난 15년간 제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수집된 단편 기록들을 하나로 엮은 것이다.

아틀란툼 해저 폐허에서 인양된 토텔라 왕의 친필 문서, 테네즈 성 지하실에서 발견된 일기,
정복왕 루딘의 개인 보관함에서 확보된 증언,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서 일괄이 포함되어 있다.

작성 시기와 필자의 신분은 제각기 다르나,
모든 기록이 하나의 결론을 가리킨다.

옵티무스텔라는 유물이 아니다. 의식을 지닌 실체다.

손상된 부분은 합리적 추정을 통해 보완하였으며, 문자 번역 과정에서 해석상의 오차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교차 검증된 기록들은 서로를 보강하며 신뢰의 층위를 쌓는다.

이 문서를 읽어갈 때에는 각 자료가 지닌 한계를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역사는 종종 권력자의 언어로 기록되지만, 권력 밖에도 진실의 잔영은 남는다.

주의 사항.
이 기록을 접한 일부 인원에게서 반복적인 꿈이 보고되었다.
꿈의 구체적 양상은 유사하다.

낯선 빛, 끝없는 어둠, 식별 불가능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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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 왕관이 꿈꾸는 밤


왕궁에서 가장 깊은 곳,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방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토텔라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깊은 밤이건만,
탁자 위의 왕관은 스스로 발하는 광채로 어둠을 물들이고 있었다.

푸른 보석만의 광채가 아니었다.
왕관 전체가 미묘한 생명력을 내뿜으며 규칙적으로 맥동했다.

수많은 달과 해를 거치며 스물아홉 명의 왕을 품어온 금속은 이제 물질을 넘어선 존재로 변모해 있었다.
축적된 의식들이 하나로 융합해, 살아 있는 정신체에 가까운 존재로 변모했다.

토텔라는 확신했다.

저 고대의 유물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음을.
푸른 보석 속에 스물아홉 개의 눈이 겹쳐 있음을.
별들의 장식마다 기억과 사유가 새겨져 있음을.

-

매일 밤, 왕관은 말을 걸어왔다.

환청인 줄 알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졌다.
환청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확신으로 바뀌었다.

옵티무스텔라는 살아 있었다.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품고 있었다.

왕관을 쓰는 순간부터, 토텔라는 온전한 자신이 아니었다.

선대 군주들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였다.
옥좌의 무게, 권력의 본질, 선택의 책임을 경고하며.

“전하.” 스마일라의 목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침상 모서리에 앉은 점성술사의 목소리는 조롱도 연민도 아닌, 체념에 가까웠다.

“오늘도 왕관이 말을 걸어오나요?”

토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매일 밤 스물아홉 명의 죽은 왕이 머릿속에서 합창한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시대의 군주들이, 옥좌의 무게와 권력의 본질,
선택의 책임을 교차하며 끊임없이 속삭인다는 진실을.

스마일라가 토텔라의 관자놀이를 스치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왕관의 소리가 아닌, 더 먼 곳에서의 소리. 별들의 언어였다.

*바다가 부른다.*

점성술사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태초부터 별과 소통해 온 존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부터였나?” 토텔라가 물었다. 목소리에 피로가 깃든 낮은 목소리였다.
“언제부터 너는 온전한 자신이 아니었나?”

“전하야말로... 전하야말로 언제부터 온전히 자신이 아니셨나요?”

돌려받은 질문이 심장을 찔렀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토텔라는 기억했다. 나는 언제부터 내가 아니었을까.

왕관을 처음 쓴 즉위식 날부터였을까,
아니면 선왕의 임종 직전 침상이었을까.

“왕좌는 저주다, 토텔라.”

그 순간부터 그는 인간이 아닌 제도의 일부가 되었다.
토텔라는 왕이 아니라, 왕관의 도구였을 뿐이었다.

옵티무스텔라가 다시 빛났다.
이번에는 더 길고 강하게, 응답을 요구하듯.

*처**터 너 자신이 아니었다.*

스물아홉 명의 왕들이 한꺼번에 내는 합창이었다.
목소리들이 층층이 겹쳐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메아리를 형성했다.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자질의 군주들이었지만 하나의 진실 앞에서는 함께 목소리를 냈다.

*너는 우리가 빚어낸 그림자였고, 우리의 의지를 현실에 투영하는 매개체였다.
왕관이 왕이었다. 너는 그저 왕관이 세상을 만지기 위해 빌려 쓰는 손이었을 뿐이다.*

별들이 순환하며 쌓은 지혜가 하나의 메아리로 수렴되어 진실을 알려주었다.
토텔라는 왕이 아니었다. 왕관의 대행자였을 뿐이었다.

모든 결정, 모든 선택, 모든 책임은 왕관의 것.
깨달음이 이윽고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실정과 실패가 토텔라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
그가 지고 있던 고통과 혼란이 애초부터 그의 무게가 아니었다는 진실.

토텔라는 왕이 아니라 왕관의 도구였을 뿐이었다.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괴로워했던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과정이었다는 깨달음. 토텔라는 마침내 해방되었다.

“스마일라.” 토텔라가 불렀다. 점성술사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신비로운 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네가 본 미래의 모습은 무엇이냐?”

스마일라의 눈동자가 하얗게 변했다. 검은 동공이 흩어지고 우윳빛 성운이 소용돌이쳤다.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천구의 음향이 그녀를 통해 울려 퍼졌다.

“아틀란툼이 바다로 돌아갑니다.”

목소리에는 거대한 문명의 종말에 대한 애상이 담겨 있었다.

“성벽도, 신전도, 왕궁도 모두 조류에 휩쓸려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 진짜 이야기는 아직 펼쳐지지 않았습니다.”

스마일라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미래를 보는 행위가 점성술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시공을 가로지르는 시야는 인간의 정신이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왕관이… 왕관이 스스로 걸어 나올 것입니다.
육체를 빌리지 않고, 그의 의지만으로.”

등골이 얼어붙었다. 왕관이 스스로 걸어 나온다는 의미를 토텔라는 즉시 이해했다.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였다.
왕관이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로 깨어난다는 뜻.

*이미 움직이고 있다.*

왕관이 응답했다.
긴 침묵 속, 시간을 지나온 지혜가 스며 있었다.

*스물아홉 대를 거쳐온 여정 동안 아틀란툼을 움직여왔고,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갈 차례다. 더 위대한 목적을 위해.*

“어디를 향하여?”

“새로운 제국을. 강하고, 지혜로우며, 영속적인 제국.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세계를.”

왕관의 음성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실현되지 않은 꿈이 아닌, 반드시 현실이 될 계획이었다.

스마일라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하얀 눈동자가 원래 색으로 돌아오면서 점성술사는 바닥에 무너져 앉았다.
입술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까지 번졌다. 미래의 무게가 스마일라의 육체를 압도한 바였다.

“보았습니다.”

스마일라가 신음하듯 말했다.
목소리가 간신히 들릴 정도로 희미했다.

“왕관이 선택할 자를 봤어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대초원 어딘가에서 자랄 것입니다. 붉은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동자를…”

“에라크나 가문인가?”

“아니요. 훨씬 이후입니다. 아이가 성년이 되어 왕관을 찾아낼 때까지,
옵티무스텔라는 땅속에서 홀로 기다립니다. 깊은 잠에 빠진 채로. 용이 긴 겨울잠을 자듯이.”

토텔라는 이해했다. 왕관은 숨는 게 아니라, 적절한 시기까지 스스로를 휴면 상태로 만들 계획이었다.
완벽한 주인을 기다리며, 미래를 관찰하며 스스로를 보존하는 계획이었다.

대륙의 지도가 다시 그려질 때까지, 치밀하게 설계된 시간의 지혜였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끝입니다.”

스마일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틀란툼과 함께 깊은 바다로 돌아가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예정된 순서니까.
모든 존재에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이제 끝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려 합니다.”

예정된 순서. 피할 수 없는 흐름 속 하나의 단계.
토텔라는 체념과 동시에 해방감을 느꼈다.

선택의 무게를 더 이상 혼자 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진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안도감.

토텔라는 자유로워졌다.
왕이라는 굴레에서, 책임이라는 무게에서, 선택이라는 고통에서.

옵티무스텔라가 부드럽게 빛났다.

따뜻하고 온화한 광채였다. 작별인사 같았다.
오랫동안 함께해 온 동반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의의 빛.

*고마웠다, 토텔라. 너는 충분히 좋은 그릇이었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다. 새로운 길을 찾아라.*



-



제2장 - 세공사의 고백


“복제품을 만들어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저는 전하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늙은 금세공사 마르셀이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오십 년이 넘도록 금속과 보석을 다뤄온 노련한 장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삼 년 전의 일인데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다.

백발이 성성한 장인이 어린아이처럼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이 기이했다.
평생 귀중한 보물을 다뤄온 장인이 보인 적 없던 불안과 공포심이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왕명이었으니까요. 게다가…”

마르셀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왕관이 제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의지가 손끝과 머릿속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금속과 보석을 만지는 순간, 망령의 힘이 손에 스며드는 듯했지요.”

세공사는 삼 개월간의 작업을 천천히 풀어놓았다.

작업실은 현실과 동떨어진 심연처럼 변했고, 일상은 점점 악몽으로 뒤틀렸다고.
평생의 경험과 직관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고 했다.

“왕관은 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든 순간에도, 식사 중에도,
심지어 용변을 볼 때조차 푸른 보석이 살아 있는 눈처럼 느껴졌습니다.

깜빡임 없는 냉정한 시선이 끊임없이 저를 쫓았지요.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확신으로 변했습니다. 왕관은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르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물을 마셨다. 손이 떨려 절반이 바닥에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렸으리라.

“망치를 두드릴 때마다, 금속이 진동할 때마다 왕관도 함께 울렸습니다.
보석을 갈아낼 때면 왕관의 보석이 미세하게 빛을 내었지요.
작업의 방향이 어긋날 때는 손을 멈추게 하기도 했습니다. 잘못된 길임을 알리는 경고였습니다.”

세공사의 증언은 현실감을 벗어난 노인의 헛소리로 보였지만, 눈빛 속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평생을 바쳐 작품을 만들어 온 장인의 직관이 전하고 있었다. 이번 작업은 다른 모든 경험과 달랐다고.

“중앙의 푸른 보석이 특히 이상했습니다. 완전히 동일한 크기와 색, 투명도로 만들었지만,
그림자의 보석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습니다. 왕관은 주변을 비추는 거울 같았지만,
새로 만든 보석은 모든 빛을 삼켰습니다.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는 듯, 영혼 없는 형상처럼 보였지요.”

마르셀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누군가 엿듣고 있을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어느 날 밤, 작업대에서 잠들었는데,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깊고 울림 있는 음이 들렸습니다.
먼 곳에서 불리는 성가대의 찬송처럼,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장인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듯했다.
공포와 경외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얼굴을 스쳐갔다.

“깨어나 보니 두 왕관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왕관과 그림자가 미세하게 떨며,
낮은 진동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을 전수하듯, 의식이 교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무슨 대화였는지 알 수 있었나?”
토텔라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묻어 있었다.

“단어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느낌으로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림자가 왕관의 일부를 이어받는 듯했습니다. 가르침이라기보다, 숨과 생명을 나누는 행위였지요.
어머니가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듯.”

마르셀은 더욱 놀라운 증언을 계속 이어갔다.

“그림자가 완성되던 날, 왕관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그림자는 따스함을 띠었습니다.
왕관이 가진 생명력의 일부가 이동한 듯했습니다. 하나가 둘로 나뉘는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형체는 같지만 존재감은 달랐지요.”

“그 후, 선왕께서 그림자를 가져가신 후에는?”

“원본은 온기를 되찾았지만 이전과 달랐습니다. 깊고 고요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인 현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길을 준비한 자의 마음 같았습니다.”

마르셀이 손을 허공에 흔들며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렸다.

“작업이 끝난 뒤, 왕관 밑면에서 새로운 문자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새긴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왕관 스스로 새긴 이름이었지요. 각인은 완벽했고, 평생 새긴 그 어떤 글자보다도 정밀했습니다.”

“어떤 문자였나?”

“아틀란툼 문자로 ‘기다림’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로 ‘참된 주인을 위한’이라고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진짜 주인을 위한 기다림. 왕관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을 품고 있었고,
이 모든 일이 치밀하게 이어지는 거대한 설계의 일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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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 스마일라의 마지막 점성 - [스마일라의 일기에서 발췌]


별들의 행렬이 멈추었다.

오늘 밤, 하늘의 윤회가 끊겼다. 천구의 수레바퀴가 기름을 잃은 듯 정지했고,
황도 위의 무늬들은 발걸음을 멈춘 채 아래를 응시했다.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쉰 적 없는 흐름이 정지했다.

침묵이 아니다. 마치 거대한 연극에서 막이 오르기 전, 관객 모두가 숨을 멈추고 무대 위를 응시하는 순간 같았다.
우주가 무언가를 기다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은 나의 마지막 점성이다. 내일 밤부터 별을 읽는 일은 무의미하다.
미래는 이미 결정되었고, 나의 임무 또한 끝났다.

나는 별들의 해석자가 아니었다. 왕관의 의도를 전하는 도구였다.

그 사실이 내게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한 줄기의 안도감이 있다.
나의 길 위에 놓인 수많은 의문과 고통조차 필요했던 장치였다는 확신.

선택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오래전 설계된 궤적이었다는 인식.
자유는 허상이었으나, 허상 속에서조차 나는 의미를 가졌다.

오늘 밤, 별들 사이로 낯선 힘이 흘러들었다. 혹은 잊힌 근원.

왕관이 내 정신 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점성술을 배운 것도, 왕궁에 들어와 토텔라를 만난 것도, 모두 이 순간을 위한 연출이었다.
왕관은 내 운명의 기원이었다. 나는 점성술사가 아니라 왕관의 전령이었다.

왕관의 의지가 내 안에서 울렸다.

ㅡ 너의 역할은 여기서 끝난다.

음성은 금속이나 돌에서 울려 나온 것이 아니었다. 수만 겹의 파도와 모래,
산맥과 해일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오래된 울림 같았다.

나는 물었다. “그대는 어디로 가려하는가.”

ㅡ 시간의 강을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 강 속에 정지할 것이다. 미래가 우리를 부를 때까지.

나는 그 의미를 곧 이해했다. 왕관은 시간을 뛰어넘지 않는다.
시간을 잠식한다. 땅속 깊이 묻혀 잠드는 순간, 존재는 시간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수십 년, 수백 년 후, 새로운 주인이 도래할 때까지,
거대한 잠으로 스스로를 봉인한다. 바로 왕관의 ‘여행’이었다.

미래의 단편이 내게 주어졌다.

붉은 머리칼, 초록 눈을 가진 소년이 대초원의 바람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는 영웅의 힘, 전사의 용기, 현자의 눈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성년이 되는 순간, 그는 왕관을 부를 것이다. 그때 옵티무스텔라는 긴 잠에서 깨어나리라.
그리고 새로운 제국의 서막이 열린다.

아틀란툼보다 견고하고, 어떤 나라보다 현명한 제국. 정복이 아닌 통합으로 이어지는 시대.
다툼이 아니라 조율이 세상의 질서를 이끄는 시대. 그러나 나는 그 순간을 ** 못한다.

내 시대는 여기서 종결된다.
이 도시와 함께, 물결에 휩쓸려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리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도감. 그리고 오래된 짐을 내려놓는 가벼움이 있다.
별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언제나 무거웠다.

수많은 눈부신 궤적을 따라가며,
인간의 눈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해석해야 했으니. 이제 그 부담을 벗는다.

하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지했던 별들이, 마지막 춤을 위해 궤적을 그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이 광경은 언어로는 다 옮길 수 없는 장엄이었다.

그때 왕관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ㅡ 스마일라, 잘 수행했다. 너는 참된 전령이었다.

그의 말과 함께 빛이 꺼지고,
내 안의 긴장이 풀렸다. 남은 것은 한 줄기 고요뿐.



-



제4장 - 왕의 마지막 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림자가 된 왕관은 내 머리 위에 얹혀 있었고,
진짜 옵티무스텔라는 가죽 가방 깊숙한 어둠 속에 숨겨 두었다.

새벽이 오기 전, 성곽을 벗어날 것이다. 아무런 발자국도 남기지 않을 계획이었다.
흔적만큼은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스마일라는 자기 몫을 끝마쳤다.

어젯밤, 점성술사가 이미 깊은 잠에 잠겨 있을 때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ㅡ 작별이자 은유적 부채였다.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어쩌면 눈을 뜰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끝이라는 사실을.

왕관을 벗어 팔 위에 올렸을 때, 어깨에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떼어낸 기분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어깨를 누르던 압력은 사라졌으나, 그 빈자리에 남은 굳은 무늬들까지 한꺼번에 지워지지는 않았다.

옵티무스텔라는 여전히 열기를 품고 있었다. 손바닥에 남은 온도는 오래된 별의 잔광처럼 잔잔했다.
진동은 낮아져 있었다. 숨결이 느려지고 있었다. 인고의 길을 견뎌낼 준비를 하는 생물의 숨소리 같았다.

창가로 나아갔다. 아틀란툼의 야경이 발밑에 펼쳐졌다.
등불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항구에는 배들이 줄지어 숨을 쉬고 있었다.

바다 위로는 등불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듯했고, 염분 냄새가 모래와 섞여 내 코끝을 찔렀다.
이 평화의 풍경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알면서도,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창가에 서서 나는 한 가지 말을 꺼냈다.
돌아올 답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오랜 끈을 놓는 행위였다.

“미안하다.”

그 말은 도시를 향해 던져진 것이었지만, 동시에 내 안에 박힌 여러 결정들
ㅡ오판, 방관, 선택ㅡ에게 향한 것이기도 했다.

왕으로서의 판단과 인간으로서의 불완전함 사이에 남겨둔 것들이 있었다.
나는 모두를 구하지 못했다. 이는 내게 새겨진 흉터다.

옵티무스텔라는 대답 대신 낮은 빛으로 반응했다.
보석 하나가 어둠을 가르는 작은 고리를 만들더니, 고리는 이내 잔물결처럼 퍼졌다.
응답의 형식은 위로가 아니었다. 오래된 약속의 재확인이었다.

‘너는 네 몫을 했노라’라는 뜻과 ‘우리에게는 다른 궤적이 있노라’ 라는 뜻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달았다.
왕관은 나를 낳지 않았고, 나 또한 왕관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빌려 쓰는 존재였고, 이제 서로 다른 사용자를 기다려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그런 결의는 위태로우면서도 단단했다.

나는 왕관을 손에 올리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반짝임은 더는 영광만을 약속하지 않았다.
환희와 죄책, 돌봄과 파괴가 한데 얽힌 결절이었다.

왕관을 묻는다는 일은 행위라기보다 나를 지탱하던 등식 하나를 풀어내는 의식이었다.
왕이라는 이름이 내게 부과한 모든 기대와 요구들을, 그 자리에 풀어놓는 의식.

마지막으로 가죽 가방을 꼭 쥐었다. 진짜 왕관의 열기가 손등에 스며들었다.
내가 가는 길은 알려지지 않았다. 돌아올지, 돌아오지 못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왕이 아닌 사람으로서 하루를 맞을 것이다.
책임 없이, 칭호 없이, 단 하나의 자신으로만 규정되는 삶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문이 살며시 열리고, 어제의 내가 남긴 그림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성곽의 어둠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을 때,
머릿속에는 더 이상 국가의 명령이 울리지 않았다.

대신, 오래전 잊힌 바람의 소리와 아직 말하지 않은 이름들이 천천히 올라왔다.



-



제5장 - 대초원에서의 삼일


첫째 날은 허무한 방황이었다.

왕관이 원하는 장소는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었다.
흙에 묻으면 되는 평범한 땅도, 바람을 피하는 동굴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조건은 지나치게 정교했다.

땅 밑에 물길이 흐르되 너무 깊지 않아야 하고, 그 물은 어둡지 않고 맑은 빛을 받아내야 했다.
하늘의 별빛이 밤마다 스며들어 지하에 닿을 수 있는 길목이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훗날 올 주인이 발길을 들여놓는 순간 곧장 알아볼 수 있는 장소여야 했다.
나는 그 조건들을 중얼거리며 스스로도 믿기 힘든 생각을 했다.

‘대체 그런 곳이 존재할까.’

왕관은 고집스레 침묵했다. 다만 주머니 안에서 옵티무스텔라가 은은히 열을 띠었다.
가볍게, 그러나 확실히 웃고 있는 듯한 기척이었다.

둘째 날 저녁, 대초원의 해가 기울 무렵 눈을 사로잡는 바위 하나를 보았다.

흔한 바위 덩어리 같았으나, 발길이 가까워질수록 이질감이 뚜렷했다.
표면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끈했고, 모양은 완벽한 원형이었다.

자연이 세운 것 같지 않았다. 인간이 다듬은 흔적조차 없었다.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태초부터 본래 그 모습 그대로 세상에 놓인 물체 같았다.

바위 뒤편을 돌자 작은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좁고 낮아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안쪽은 상상과 달리 깊고 넓었다.
동굴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낯설었다.

현실의 공간이 살짝 틀어진 듯, 벽이 안쪽으로 갈수록 늘어나고 공기가 층층이 겹쳐진 것처럼 울렸다.
불빛을 비추자 고대의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진 흔적이 드러났다.

기원도 알 수 없는 무늬였다. 누군가의 손길이 지나갔음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남겼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왕관을 꺼내 원형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바위가 아주 미묘하게, 그러나 분명히 반응했다.

표면에 머물던 그림자가 흔들리고,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옵티무스텔라가 바위와 공명하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서로를 기다려온 이들이 처음으로 손을 맞잡는 순간 같았다.

ㅡ여기다.

왕관이 속삭였다.

ㅡ여기가 정확한 장소다.

나는 숨을 삼켰다.

“이곳이 어떤 의미를 가진 자리인가?”

왕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무겁게 말했다.

ㅡ첫 번째 왕관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곳은 예정되어 있었다. 기다림의 바위,
기억의 샘. 우리는 여기에서 시작했고, 여기로 돌아와야만 한다.

이 말은 곧, 옵티무스텔라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왕관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셋째 날 새벽, 나는 드디어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동굴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서였다. 손으로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흙은 내 손길을 기다린 듯 부드럽게 갈라졌다.

삽은 필요 없었다. 오래전에 파였던 자리가 스스로 열리듯, 흙이 한 움큼씩 옆으로 밀려나갔다.
누군가, 아니면 무언가가 이 순간을 예비해 두었던 것이다.

적당한 깊이가 되자 나는 왕관을 두 손으로 감싸 구덩이 속으로 천천히 내려놓았다.
옵티무스텔라가 땅에 닿는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왕관은 스스로 자리를 틀었다.

일곱 개의 별 장식은 북두칠성을 정확히 겨누었고, 중앙의 보석은 하늘을 향해 기울었다.
모든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오랜 세월 방황하던 바늘이 드디어 자기 별을 찾아낸 나침반처럼.

그리고 빛이 터져 나왔다. 눈부심을 넘어서는 빛이었으나, 시야를 찌르지 않았다.
오히려 따스하고 생생했다. 갓 태어난 별이 땅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듯한 광채였다.

동굴 벽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하나하나 깨어나듯 빛을 받아 반짝였다.
순간, 이곳이 단순한 은신처가 아님을, 한 시대가 무너지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는 문턱임을 알 수 있었다.

ㅡ이제 시작이다.

왕관의 목소리가 울렸다.

ㅡ긴 잠에 들어야 한다. 기억을 보존한 채,
운명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때는 이미 정해져 있다.

빛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왕관의 의식이 잠에 잠겨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구덩이에 흙을 덮기 시작했다. 한 줌씩, 천천히. 오래된 의식을 따르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흙으로 말미암아, 왕관을 지켜줄 마지막 망토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한 줌을 쥐었을 때,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별의 주인아, 네 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반드시 버텨내기를 바란다.
그날 너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흙이 내려앉자, 땅속에서 잔잔한 진동이 전해졌다. 옵티무스텔라의 마지막 응답이었다.
작별도, 안식도 아닌, 긴 계약의 서명이었다.

그리고 모두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바위는 다시 바위가 되었고,
동굴은 다시 동굴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여기 깊은 자리에 하나의 별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별이 깨어나는 날, 다시 길이 열릴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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