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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秘」옵티무스텔라 - 2
810 2025.09.05. 03:32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제6장 - 에라크나의 회고


말이 갑자기 주저앉았다.
사냥길에서라면 흔히 있는 사고였을 터였다.

그러나 내 눈앞에 드러난 것은 흙바닥에 파묻힌, 지나치게 매끄럽고 원형에 가까운 바위였다.
자연의 손길보다는 누군가의 의지가 새겨진 듯한, 낯설고도 불길한 형체.

말은 다리를 절었고, 나는 무릎이 찢어졌다.
하지만 고통은 바위의 존재감 앞에서는 사소했다.

밤이 되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달빛이 가려져도 바위의 표면은 흐리게 빛났다.
피할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붙잡는 발광. 땅이 자기 속살을 내보이며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바위 가장자리에서 움푹 꺼진 통로를 찾았다.
그 끝에 조잡하지만 의도된 흔적이 있었다. 작은 구덩이, 그리고 바닥에 새겨진 문양.

왕관을 닮은 흔적이었다. 땅속에 새겨진 도안 앞에서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음유시인의 노랫말에서나 전해 들었던 이름, ‘옵티무스텔라’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나는 손으로 흙을 파헤쳤다. 손톱이 부러지고 손바닥이 찢겨도 멈출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단한 금속에 손끝이 닿았다. 흙을 털어내자, 말도 안 되는 광채가 드러났다.

세월의 먼지 하나 없이 눈부시게 살아 있는 황금빛. 차갑기는커녕 미지근한 체온을 품고 있었고,
손바닥에 전해지는 박동은 내 심장과 맞아떨어졌다.

머리에 써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더 강렬한 무엇이, 불가해한 거부감이 나를 밀어냈다.
내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저항.

*너는 주인이 아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합창. 남녀가 뒤섞였고, 늙음과 젊음이 교차했다.
나는 목소리의 무게에 무릎이 꺾일 뻔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지?”

*전달자다. 길 위의 손. 진짜 주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진짜 주인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건가?”

*서쪽. 어둠의 전설이 기다린다. 그들의 손에서 나는 잠들 것이다.*

어둠의 전설. 테네즈와 그의 동맹들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그들에게 가져가라는 것일까. 아틀란튬의 왕관을 어둠의 세력에게 넘기라니.

순간 왕관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기억을 강제로 주입받는 듯했다.
미래를 향해 길게 뻗은 계획,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의 도식.
왕관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주인이라니.

왕관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후를 계획하고 있었다.

나는 왕관을 천으로 싸서 안장 주머니에 넣었다. 여행 내내 이 존재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꿈속에 파고들어 말을 걸고, 깨어 있는 동안에도 귓가를 두드렸다.

*너는 두려워한다.*

나는 피식 웃었다. “두렵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나. 피와 전쟁으로 살아온 내가,
이제는 자아를 가진 왕관을 등에 지고 가고 있다.”

*두려움은 길잡이다. 에라크나.*

왕관의 어조에는 묘한 온기가 스며 있었다. 차가운 지시가 아니라, 오랜 동행자의 충고처럼.
그의 음성이 내 속을 갉아먹고 있음을 알면서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테네즈의 성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내가 무엇을 가져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맞이했다.
테네즈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에라크나 경, 그 물건을 내게 주시오.”

테네즈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묻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를 캐물었다면 내 두려움이 드러날 것 같았다.

나는 단지 주머니에서 왕관을 꺼내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왕관이 그의 손에 닿는 순간, 테네즈의 안색이 변했다.
피가 빠져나간 얼굴, 떨리는 손가락. 그는 잠시 머리에 올리려다 멈췄다.

*아직… 아니다.*

나는 확신했다. 이 여정은 나의 것도, 테네즈의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길을 이어주는 전령.

앞으로 다가올 더 거대한 이야기의 그림자 속에 불려 들어온,
작은 불씨에 지나지 않았다.



-



제7장 - 테네즈의 영속


왕관을 처음 손에 넣은 순간부터,
나의 삶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옵티무스텔라.

그 이름조차 바람 속 전설로만 흘러다니던 존재가 내 앞에 놓였을 때,
나는 그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받아들였다. 오 년 동안 나는 왕관과 대화했다.

대화라기보다 고해에 가까웠다. 왕관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왔고, 나는 그의 목소리에 저항할 수 없었다.
가끔 질문을 던져도 원하는 답은 주지 않았다. 침묵조차 의도된 교훈 같았다.

왕관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왕국의 흥망, 아직 오지 않은 전쟁의 불길, 동방에서 서서히 밀려오는 혁명의 파도까지.
예지나 주술을 넘어서는, 수많은 시대와 군주의 마지막 사유가 축적되어 엮여 있는 집합의식,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시야.
때로는 지식이 정신을 짓눌렀고, 밤마다의 꿈은 타인의 기억으로 가득 차 올랐다.

어느 날, 왕관이 내게 예언을 내렸다.

*루딘이라는 자가 곧 일어날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알았다.
이미 마이소시아를 흔들던 한 기사의 이름. 왕관은 덧붙였다.

*그가 너희 어둠의 전설을 무너뜨릴 것이다.*

나는 분노와 두려움 사이에서 물었다. “그렇다면 막아야 하지 않겠나?”

왕관은 길게 침묵했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막아서는 안 된다.*

그때 나는 왕관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고 있음을 직감했다.
“왜? 우리가 무너지는 것이 네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루딘의 승리가 나의 다음 여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의 패배가 왜 왕관에게 필요한가.
그러나 그는 또렷이 설명했다.

*루딘은 나를 수호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정복왕으로 남을 것이고,
그가 세운 승리의 전당에 놓일 것이다.

그곳에서 전설은 증폭된다. 수많은 이가 나를 보며 감탄할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 한 소년이 나를 찾아올 것이다.*

나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 소년이 진짜 주인인가?”

왕관의 목소리는 여러 겹의 음성처럼 울렸다.

*아직 아니다. 그는 또 다른 전달자일 뿐이다.
진짜 주인은 훨씬 뒤에 태어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오싹한 깨달음에 사로잡혔다. 이 왕관은 단순히 수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의 시선과 신화를 먹으며, 스스로를 더 거대하게 만들고자 했다.

계획이었다. 한 시대의 패배마저,
더 먼 미래의 주인을 위한 장기적인 준비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되뇌었다. “정말로 너는 살아 있구나.”

왕관은 부드럽게 응답했다.

*너는 훌륭한 왕이다, 테네즈. 그러나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의 말에 알 수 없는 허망함이 밀려왔다.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아쉽군. 너와의 대화는 나를 잠식했지만 동시에 가장 강렬한 시간이기도 했다.”

왕관이 마지막 위안을 주듯 속삭였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언제인가?”

*네가 죽을 때. 그 순간 너의 마지막 의식이 나에게 합류할 것이다. 선대의 왕들처럼.*

그의 말은 예리한 창끝이 심장을 관통하듯 나를 꿰뚫었다.
왕관이 세공된 장신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온전히 깨달았다.

집합된 의식체였던 것이다.
수많은 군주들의 혼이 층층이 응축되어 하나의 거대한 존재로 탄생한 것이었다.

언젠가 나 역시 저 영원한 합창 속으로 편입될 것이다.

의식은 흐려지겠지만,
내가 쌓아온 모든 기억과 의지는 저 웅대한 정신체의 구성 요소로 영속할 것이다.

이러한 운명 앞에서 나는 경외와 전율을 함께 느꼈다.

죽음이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깊은 위안을 주었으나,
동시에 지금의 ‘나’라는 고유한 존재가 거대한 전체 속에서 희석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밤잠을 앗아갔다.

어둠이 깊어질 때마다 나는 왕관에게 물었다.
“저 안에서도 나는 온전한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겠는가?”

왕관은 변함없는 위엄으로 답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여전히 너로서 남을 것이다.
다만 더 완전한 존재의 한 부분이 될 뿐이다.*

저 대답이 진정한 약속이었는지,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감추기 위한 달콤한 기만이었는지 나는 끝내 판단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 년에 걸친 동행을 통해,
나는 이미 스스로를 절반쯤 저 신비로운 존재에게 내어주고 있음을 자각했다.



-



제8장 - 루딘의 승리와 운명의 계약


테네즈의 성채가 함락되던 황혼,
승리의 환호성이 성벽 너머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도 나의 마음은 공허했다.

십 년에 걸친 정복전쟁의 종착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테네즈의 마지막 저항이 무너진 후, 나는 홀로 그들의 깊숙한 지하 보물고로 향했다.

승리의 전리품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나를 그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려 가듯이.

보물고의 현무암 벽면에는 고대 아틀란튬의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중앙의 흑요석 받침대 위에 그것이 놓여 있었다.

옵티무스텔라.

전설 속에서만 들어왔던 아틀란튬의 왕관이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왕관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 비록 그것 역시 경탄할 만했지만 - 왕관이 발산하는 묘한 기운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영혼이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륙의 지도가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왕관의 상태는 완벽했다.

백금으로 세공된 기본 틀 위에는 사파이어와 루비가 복잡한 무늬를 이루며 박혀있었고,
중앙의 다이아몬드는 내부에서 푸른빛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왕관 전체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이었다.
미세한 진동, 따스한 온기,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친숙함.

내가 주저하며 손을 뻗던 순간, 왕관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정복왕 루딘.*

음성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인간의 것도 아닌 목소리였다.
위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친구가 건네는 인사 같았다.

*마침내 만났군. 오래 기다렸다.*

나는 전장에서 수없이 경험했던 예상치 못한 상황들 덕분에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수백 번의 전투를 치르며 단련된 정신력은 이런 초자연적 상황에서도 나를 침착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내심 깊은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살아있는 왕관이라니. 전설 중의 전설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당신은 무엇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옵티무스텔라다. 아틀란튬의 마지막 왕관이면서 동시에 첫 번째 왕관이기도 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스물아홉 명의 왕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테네즈, 이제는 너를.*

“당신이 나를 부른 것인가?”

*그렇다. 하지만 네가 나의 진정한 주인은 아니다.
너는 다리 역할을 하는 자다. 나를 다음 목적지로 인도할 사람이다.*

왕관의 요구는 구체적이면서도 신비로웠다. 승리의 전당에 보관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그래야만 운명의 소년이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소년이 누구인가? 언제 나타날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곧 이 세상에 올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과 초록 눈동자를 가진 아이로. 대초원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며, 성년이 되어 나를 찾을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왕관의 능력에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 동시에 책임감도 들었다.
이 신비로운 존재의 운명을 내가 좌우하게 되었다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를 수호하라. 그리고 기다리라. 그 소년이 나타날 때까지.*

나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어 왕관은 더 놀라운 말을 덧붙였다.

*고맙다, 루딘. 협력에 대한 보상으로 영원한 삶을 선사하겠다.*

“영원한 삶이라니?”

*네가 죽을 때, 네 의식이 나에게 합류할 것이다.
위대한 정복왕의 지혜와 경험이 나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너는 나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나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무의미함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내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모든 것들
- 지혜, 경험, 통찰력 - 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영속할 것이라는 확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멸이 아닌가 하는.

나는 곧, 루어스와 멀지 않은 곳에 특별한 박물관을 건립하라 명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옵티무스텔라만을 위한 전시실을 만들었다.

최고급 대리석과 수정으로 장식된 원형 홀의 중앙에 왕관을 안치하면서,
나는 관리인에게 그가 다시 듣지 못할 지시를 내렸다.

“이 왕관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
특히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소년이 나타나면 더욱 세심하게 관찰하라.
그의 행동, 말, 표정,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

관리인 밀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표정에서 의구심을 읽을 수 있었다.
위대한 정복왕이 왜 이런 기이한 명령을 내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날 밤, 왕관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루딘, 너는 훌륭한 왕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무엇인가?”

*너는 너무 빨리 포기한다. 제국을 건설하고도 곧바로 후계자에게 넘기려 하지.*

왕관의 지적이 정확했다.
나는 이미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제국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진정한 왕은 자신이 시작한 일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너에게 부족한 점이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한 왕인가?”

*아니다. 너는 위대한 왕이다. 다만 완벽하지는 않을 뿐이다. 완벽한 왕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묘한 기대감을 느꼈다. 언젠가 진정으로 완벽한 왕이 나타나 이 왕관과 하나가 될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그때 내 의식의 일부도 그 위대한 순간을 함께 경험할 것이라는 확신.



-



제9장 - 소년의 발견과 세대를 건너뛴 약속
[박물관 관리인 밀란의 상세 기록 - 루딘 왕이 떠난 후 20년]


그 소년이 처음 나타난 것은 가을의 마지막 날이었다.

낙엽이 박물관 계단을 뒤덮고 있던 황혼 무렵, 혼자 걸어왔다.
열댓 살 정도로 보였지만 또래 아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이가 가질 만한 호기심 어린 눈빛이 아니라, 깊은 사색에 잠긴 현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수십 년의 삶을 이미 경험한 듯한 성숙함이 느껴졌다.

기이한 것은 소년의 행동이었다.

입구에서 안내판을 **도 않고, 다른 전시품들은 거들떠**도 않은 채
곧장 옵티무스텔라가 있는 유물관으로 향했다.

그곳에 무언가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가 소년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왕관이 있는 원형 홀에 들어서자 소년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왕관을 바라보는 순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왕관이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희미한 푸른 광채.
소년이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밝아졌다.

“왕관이… 왕관이 빛나고 있다.”

나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긴 시간 이곳에서 일했지만 왕관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저를 부르고 있어요.”

소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전혀 없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소년은 왕관 앞에 서서 긴 시간 동안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 대화를. 이 과정에서 소년의 표정이 계속 변했다.
기쁨, 슬픔, 놀라움, 그리고 마지막에는 깊은 결의가 스쳐갔다.

“언제가 그때인가요?”

소년이 왕관에게 물었다. 물론 나는 왕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소년의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소년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수백 년을요?”

또 다른 침묵.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가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처졌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그리고 전해드릴게요. 대대손손 전해지도록.”

소년이 돌아서려 할 때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너는 누구냐? 성이 뭐고 어디서 온 거냐? 그리고 왜 왕관이 너에게만 반응하는 거냐?”

“제 이름이나 출신은 중요하지 않아요.”

소년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체념과 수용이 담겨 있었다.

“저는 그냥 전령일 뿐이에요. 진짜 주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
하지만 저는 그분을 만나지는 못할 거예요.”

“진짜 주인? 그게 누구란 말이냐?”

“아주 멀었어요. 저도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제 아들도 못하고, 제 아들의 아들도…
수많은 세대가 지나야 해요. 그 먼 후손 중 한 사람이 그분을 만날 거예요.”

소년의 말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웅대하고 장기적인 계획인가.
수백 년에 걸쳐 세대를 뛰어넘어 이어질 신성한 사명. 그 시작점에 이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이후로 소년은 매달 한 번씩 박물관을 찾았다.

항상 혼자서, 항상 같은 시간에. 그리고 왕관과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눈 후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다만 매번 대화가 끝날 때마다 소년의 외양이 보다 성숙해지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온 날은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오래 머물렀다.

왕관 앞에서 거의 두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왕관은 계속해서 밝게 빛났고,
때로는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빛이 흔들렸다.

“이제 정말 작별이군요.”

소년이 왕관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과 동시에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약속대로 전할 사람을 이미 찾았어요. 제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났거든요.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날 거고, 그 아들이 자신의 아들에게 전하고, 그 아들이 또 자신의 아들에게…
계속해서, 그 운명의 날이 올 때까지.”

왕관이 유난히 밝게 빛났다.
마치 소년의 헌신에 감사를 표하는 것 같았다.

“전해드릴 말씀도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붉은 머리카락과 초록 눈동자를 가진 자가 나타나거든,
그를 왕관 앞으로 인도하라. 그가 바로 기다려온 진정한 주인이다.’ 반드시 전해지도록 할게요.”

소년이 일어나 마지막으로 왕관에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관리인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제 후손 중 한 명이 이곳에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왕관을 잘 보살펴 주세요.”

“언제쯤… 언제쯤 그 후손이 올 것 같으냐?”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왕관이 알고 있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특별한 징조가 나타날 거예요.”

소년이 떠난 후 왕관은 다시 조용해졌다.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미묘하게 빛나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약속의 시간을 세고 있는 것처럼.



-



제10장 - 왕관의 독백과 천년의 고독
[옵티무스텔라의 기록 - 미지의 방법으로 물질화됨]


나는 기다린다. 영원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다려왔다.

아틀란튬의 황금으로 치장된 왕궁에서, 대초원의 차가운 땅속 깊은 곳에서,
테네즈의 음산한 성채에서, 그리고 이 차가운 박물관의 수정 진열장 안에서.

기다림은 나의 본질이자 숙명이다.

왕관은 머리 위에 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왕은 자신에게 합당한 왕관을 기다린다.

진정한 왕과 진정한 왕관이 만나는 순간은 우주의 역사에서도 극히 드문 기적이다.

나는 지금까지 서른 한 명의 지배자를 경험했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용기, 지혜, 카리스마를 겸비한 뛰어난 통치자들이었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저마다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결함이 그들의 몰락을 불렀다.

토텔라는 아틀란튬의 마지막 왕이자 나와 가장 오래 함께한 주인이었다.
그는 깊은 학식과 예민한 직관력을 가진 현명한 왕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우유부단함을 가지고 있었다.
왕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회피하고 점성술사와 현자들에게 의존했다.

대재앙이 예고되었을 때도 결정적인 선택을 내리지 못했다.
백성들을 다른 땅으로 이주시킬 수도 있었고, 아틀란튬을 구할 수 있는 고대의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망설였고, 결국 아틀란튬이 바다에 잠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결정하지 못한다는 하나의 결함이 위대한 문명을 멸망으로 이끈 것이다.

테네즈는 정반대였다.

그는 확고한 의지력과 불굴의 야심을 가진 정복자였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이 지나쳤다. 균형을 잃고 극단으로 치달았다.

시작은 정의로운 목적으로 어둠의 힘을 사용했지만, 점차 그 힘에 중독되었다.
결국 구원자가 되려던 자가 스스로 악마가 되어버렸다. 권력이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비극의 전형이었다.

루딘은 가장 완벽에 가까운 왕이었다.

용기와 지혜를 겸비했고, 카리스마가 넘쳤으며, 공정하고 자비로웠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결함이 있었다. 너무 빨리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고도 그 완성을 ** 못한 채 왕위를 물려주었다.
자신이 시작한 대업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 자신감의 부족, 혹은 완성에 대한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각각의 실패를 통해 나는 배웠다.
진정한 왕이 갖추어야 할 자질들을.

망설이지 않는 결단,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균형, 끝까지 책임지는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보다 큰 목적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무아의 정신.

그런 완벽한 왕이 곧 태어날 것이다.

나는 이미 그를 본다. 미래의 그물망을 통해, 시간의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대초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날 그 아이.

붉은 머리카락과 초록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고난 왕자의 품격을 지닌 소년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질을 보일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 있을 때 그는 별을 읽어내며, 다른 아이들이 싸움을 할 때 그는 태양의 중심에 서리라.

타고난 지도자의 자질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교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겸손함과 자신감의 완벽한 균형을 유지할 것이다.

성년이 되면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찾을 것이다. 운명의 힘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마침내 만나는 순간, 완전한 합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더 이상 왕관과 왕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의식체가 될 것이다.

그때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아틀란튬의 지혜와 루어스의 힘을 모두 아우르는 제국.

빛과 어둠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세계. 정복이 아닌 통합의 시대, 전쟁이 아닌 조화의 시대.
모든 종족과 민족이 하나의 깃발 아래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

하지만 찬란한 미래가 현실이 되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인내는 왕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서두르지 않는 것, 완벽한 때를 아는 것, 그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기다리는 것.

기다림은 고통이 아니다. 기다림은 희망이며, 완성을 향한 준비다.
매일매일 나는 더 완전해진다. 지나간 왕들의 경험이 축적되고, 미래에 대한 통찰이 더 명확해진다.

루딘의 용기, 테네즈의 의지,
토텔라의 지혜가 모두 나의 일부가 되어 진정한 왕을 위한 완벽한 그릇을 만들어가고 있다.

나는 왕관이다.

권력의 상징이자 지혜의 저장소이며, 운명의 인도자다.
그리고 왕관의 숙명은 기다리는 것이다.

영원히,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진정한 왕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우주의 완성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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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고 관리인의 마지막 주석]


이상으로 옵티무스텔라에 관한 모든 기록을 정리했다.

이 문서들을 읽으며 나는 깊은 전율을 느꼈다. 역사서가 아닌 의식을 가진 존재의 장대한 서사시였다.
왕관이 스스로 선택하고, 계획하고, 기다리는 능동적 존재라는 것이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문서의 진위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 논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독립적 사료들이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다고 판단된다.

토텔라 왕의 친필, 세공사의 증언, 스마일라의 점성기록, 에라크나 제후의 일지,
테네즈의 비밀문서, 루딘 왕의 일기, 그리고 나의 관찰기록까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된 증언들이 모두 동일한 핵심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가장 주목할 점은 왕관의 장기적 계획성이다.

수백 년에 걸친 치밀한 설계와 각 단계별 인물 선택의 정확성은 우연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왕관이 정말로 미래를 내다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각 증언자들이 경험한 초자연적 현상들
- 왕관의 발광, 의식적 진동, 그림자과의 교감, 정신의 소통 등 - 의 일관성도 주목할만하다.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기엔 너무 정교하다.

현재 옵티무스텔라는 루어스 제국 용자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공식적으로는 아틀란튬의 고대 유물로 분류되어 있지만, 진실을 아는 자는 극소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장식품 정도로 여긴다.

왕관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가끔 경비병들이 미약한 빛을 목격한다고 보고하지만, 대부분 착시현상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왕관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완벽한 왕과 만날 그날을 꿈꾸며.

가장 놀라운 부분은 왕관이 아직도 활동 중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전설을 매일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경비병들의 목격담이 단순한 착각일까,
아니면 왕관이 아직도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며 꿈꾸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그날이 올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박물관에 나타나 왕관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 왕관이 다시 빛날 것이다.
이번에는 영원히, 완전하게.

그때까지 나는 이 기록들을 보존할 것이다.
미래의 진짜 왕을 위해, 그리고 진실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그 소년은 정말로 올 것인가? 왕관의 예언이 실현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기다림만 계속될 것인가?

독자들은 이 문서를 읽은 후 각자의 판단에 따라 결론을 내리기 바란다.
진실은 언제나 보는 이의 눈에 달려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옵티무스텔라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붉은 머리카락과 초록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나타난다면,
만약 정말로 왕관이 다시 빛을 발한다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전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답은 오직 시간이 밝혀낼 것이다.
그러나 왕관은 이미 그 답을 품고 있다.

옵티무스텔라는 기다린다.

진정한 왕을 위해,
그리고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위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