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 13
가끔은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불러내기 위해 이름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권위를 품게 되었고,
권위는 인간의 본질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름을 얻기 위해,
칭호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불태웁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정말로 한 사람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름을 살아내는 태도가 사람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싱클레어는 그런 질문 앞에 선 인물입니다.
그는 학교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 착한 아이로 불렸지만,
그러한 이름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남들이 붙여준 호칭 속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없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데미안은 말합니다.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남이 쥐어준 이름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이 있으며,
나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고.
싱클레어는 이 말을 붙잡고 자기 안의 어둠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지난한 길을 걸어갑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반대편에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요조는 세상으로부터는 인간이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스스로는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웃음으로 가면을 쓰고 남들과 어울리려 하지만, 끝내는 자기기만에 갇힙니다.
이름은 있었지만, 이름에 걸맞은 나는 부재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허무와 붕괴뿐이었습니다.
이름은 있었으나, 정말로 살아내지는 못했을 때.
종국에 자신을 무너뜨리는 무게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줬어요.
펄 벅의 대지 속 왕룽은 또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그는 땅을 얻었습니다.
소유하는 순간, 왕릉은 세상으로부터 주인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하지만 땅은 이름만으로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는 매일 흙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계절의 가혹한 시간을 견디며 땅을 살려냅니다.
땅은 주어진 대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돌봄 속에서만 비옥해집니다.
주인의 손길이 멈추는 순간, 땅은 다시 황폐해집니다.
이름이 아니라,
꾸준한 행위가 가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저는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기사 작위를 물려받은 발리안에게 고드프리가 말합니다.
“적의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며, 용기 있게 선을 행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으라.
언제나 진실을 말하라, 그로 인해 죽게 되더라도.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를 행하지 말라.
그것이 네 소명이다.”
이 순간, 기사라는 화려한 이름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책임의 무게뿐입니다.
작위는 순식간에 주어질 수 있지만, 기사의 삶은 단 하루도 가볍지 않습니다.
발리안을 기사답게 만드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끝내 살아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이름은 모순을 품습니다.
목숨보다 소중할 수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쓰레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름을 빛나게 할 책임은 외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름은 얻는 순간은,
열광 속에서 빛나지만 시간이 흐르면 바래집니다.
그러나 이름을 끝내 살아내는 사람은 잊히지 않습니다.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사람,
주어진 자리를 버리지 않는 사람만이 이름을 진실로 빛나게 합니다.
예전에 들은 말이 있습니다.
자격이나 경력은 자긍심일 수 있으나, 작은 흔적일 뿐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진짜 가치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가에 달렸다는 말이었어요.
우리는 언제나 증표와 본질 사이의 간극에서 흔들립니다.
어떤 이는 증표를 얻고 멈춥니다.
그 이름에 기대어 더 이상 자신을 갱신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는 증표를 얻은 뒤에서야 시작합니다.
이름이 요구하는 무게를 감당하며, 매일 자신을 증명해 나갑니다.
저는 후자가 진정한 삶이라고 믿습니다.
주어진 자리는 우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리를 어떻게 살아내느냐는 전적으로 자기 몫입니다.
남들이 존중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일이 결국 가장 오래 남는 가치가 아닐까요.
시간은 모든 이름을 바꿔놓습니다.
어떤 이름은 남고,
또 어떤 이름은 잊힙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자기 안의 목소리를 따라간 사람,
대지의 왕룽처럼 책임으로 땅을 일군 사람,
킹덤 오브 헤븐의 발리안처럼 맹세를 지켜낸 사람.
그들은 이름을 넘어 행위로써 증명하며 살아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려낸 인물처럼,
자기 안의 공허를 외면하고 이름만을 붙잡은 사람은 끝내 무너집니다.
이름은 바깥에서 주어지지만,
가치는 언제나 자신 안에서 길러집니다.
세상은 오늘도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이름을 따르는 이가 아니라,
이름을 진정으로 살아내는 이만이 진짜 빛을 남깁니다.
가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스스로 정하고,
스스로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