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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우리가 함께 걷던 시절이 있었지
1111 2025.09.09. 04:14

1993. 14















처음 마을에 발을 디뎠을 때, 광장은 따뜻했다.


발밑의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도 반가웠고,

옆사람이 내 이야기에 끼어들며 터뜨린 웃음도 자연스러웠다.


서로의 걸음을 맞추는 일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이 평범함이 마음을 이어주는 실처럼 느껴졌다.


많은 시간이 흐르며, 공기는 달라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위에 숫자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서로를 오르내리며 분류했다.


웃음소리는 여전했으나,

무엇인가가 우리를 자꾸 앞으로 밀어냈다.


발걸음은 느슨하게나마 여전히 이어 있었지만,

이제는 한 뼘 차이가 온 세상의 간격처럼 벌어졌다.


옆 사람이 나보다 성큼 걸으면 가슴이 조여왔고,

내가 앞서면 뒤에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웃으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공중에서 무언가를 계산하다가, 이내 몸 쪽으로 돌아가곤 했다.


눈에는 온기가 머물렀으나, 마음에는 가느다란 추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서로를 바라보며 값을 매기고 있었다.


대화가 바스러졌다.


약속의 말들은 흩어지고, 축하는 입술 끝에서 말라버렸다.

옆사람의 기쁨이 내 어두움을 비추었고, 손을 잡아도 온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발을 맞추려 해도 박자가 어긋나기 일쑤였다.


나는 의심했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맨 앞에 선 이도 결국 혼자일 텐데, 고독이 승리보다 클 텐데.

뒤에 늘어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상대를 밟고 올라설 발판으로 여긴 건 아닐까.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곁에 있던 이는 잠깐 멈춘 듯했지만, 곧 발걸음을 재개했다.


멈추면 뒤처진다는 공포가 연민을 집어삼켰다.


나 역시 그를 지나쳤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의 실수를 기회로 보게 되었을까.


언제인지 가끔.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가 함께 걷던 시절이 있었지.”


누구의 말이 바람에 실려 올 때면, 잠시 발걸음이 느려진다.

하지만 기억조차 이내 오늘의 공기에 흡수되어 사라진다.


마을은 여전히 붐비지만, 나는 허무를 감지한다.


웃음, 발자국, 손길… 모든 것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맴돈다.

그림자들조차 서로 겹치기를 거부한다.


밤이 되면 거리감이 더욱 굳어진다.

등불이 켜져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원 안에 갇혀 있고, 발자국 소리만이 공허를 채운다.


나는 알 수 없는 소리들 사이에서, 끊어진 연결고리를 본다.

다시 이을 수 없는.


세월이 흘러도 마을은 변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도 마을의 풍경은 그대로다.


발걸음과 웃음과 손길이 넘쳐나지만, 이 모든 것 사이로 얇은 벽들이 서 있다.

나는 때때로 예전의 온기를 떠올리며,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그리워한다.


“우리가 함께 걷던 시절이 있었지.”


마을은 오늘도 소란스럽다.

나는 이 소음 뒤편에서, 잃어버린 화음을 듣는다.


한때 우리가 함께 만들어냈던 리듬이,

땅 아래 어딘가에서 아직 울리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