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 15
당신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눈을 뜨고도 한참 동안 이불속에서 숨을 고르다가,
천장을 오래 바라보다가, 그제야 몸을 일으킨다.
물 한 모금을 마시는 일도,
손끝에 머문 기억이 겹겹이 흘러내리듯 천천히 이어진다.
문을 나서는 발걸음도, 밀린 메시지에 답을 남기는 손끝도,
늘 뒤늦게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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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느림이 답답했다.
모든 게 조금만 더 빠르면 좋을 것 같았고,
당신의 시간에 내가 맞춰야 한다는 게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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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지켜보니 알게 되었다.
세상이 앞다투어 달려가도 당신은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한 번 더 생각하고, 그제야 나아가는 것을.
느림이, 당신을 지켜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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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묻고 싶다.
당신의 느림 속에 나를 함께 두어줄 수 있냐고.
잠시 머뭇거리는 틈에, 오래 고민하는 정적 속에,
내가 끼어들 자리가 있는지.
당신이 아껴 쓰는 그 시간을,
나도 조금은 나눠 받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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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거창한 말도,
요란한 몸짓도 아니다.
다만 당신이 조심스레 흘려보내는 순간들을 받아내고 싶다.
당신의 숨이 고르게 이어지는 밤이면,
곁에 나도 조용히 눕고 싶다.
불빛이 꺼진 방 안에서, 서로의 느린 맥박이 겹치는 동안,
시간을 함께 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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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당신이 늘 해오던 것처럼 늦어도 괜찮다.
나는 느림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당신의 시간을,
조금은 나의 몫으로 남겨 달라.
나에게 너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