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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안개가 걷힐 때까지
2637 2025.09.16. 05:20

1993.16

















고베의 아침은 항구에서 밀려오는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등대가 먼저 보이고, 이어 정박한 배들이,
그다음 부두 위 벤치와 가로등이 윤곽을 갖춥니다.

안개는 이 도시의 일부입니다.

아침마다 바다에서 밀려들어 거리를 덮고,
오후가 되면 바다로 돌아갑니다.

-

메리켄 파크의 작은 카페,
찻잔보다도 더 차가운 마음을 품고 앉아 있습니다.

식은 커피 냄새가 공기 중에 번집니다.

어제 마지막 전차를 놓쳤습니다.
그 후로 저는 계속 이곳에 있습니다.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보내며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의 밤은 길었습니다.

깊은 밤, 전화기 속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나면 전화할게요.”

통화음이 끊기자 바다 바람이 유리창을 흔들었습니다.
첫새벽 기차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이 떨렸습니다.

적막함이 방 안을 채우고,
벽시계만 어둠 속에서 똑딱거렸습니다.

-

서른 살이 넘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향한 기다림만이 곁에 남아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저는 그날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에 닿습니다.
창밖 항구의 불빛이 일렁입니다.

서른이라는 나이.

한 발짝씩 나아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제자리에 멈춰 뒤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떠나간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로.

당신과 걸었던 고베의 거리는 그대로입니다.

하루카스 빌딩의 높은 창문들은 아침 햇살에 빛나고,
메리켄 파크의 나무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삐 오갑니다. 거리의 간판들은 밤이면 불을 밝힙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 오직 당신만 없습니다.

-

당신이 없는 이 자리에서,
저는 어제 문 앞에 서 있던 내 모습을 떠올립니다.

303호 앞에서 망설이던 순간들,
초인종에 손을 뻗었다 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하던 시간들.

당신이 미소 지으며 문을 열어줄 것만 같았던
그 착각의 순간들이 가슴을 적십니다.

먼지를 훔치던 손을 거두었습니다.

‘편지가 계속 쌓여서요.’

배달부의 말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귓가에 박힙니다.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안갯속에서 도시가 형체를 갖추는 동안 내 안의 무언가가 사라져 갑니다.

당신을 찾아 이 낯선 도시에 발을 들인 지 사흘째입니다.
우편함에는 서울에서 보내온 여섯 통의 편지가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달 전에 이사하셨어요.’

집주인의 무심한 한마디가
두 달간의 기다림을 한순간에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서울의 방에서, 창가에서, 카페에서, 오며 가며 들렀던 우체국에서…
답장을 기다렸던 그 시간들은 결국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

세 번째 커피를 주문합니다.

종업원은 눈빛만으로 처지를 짐작하고,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내옵니다.

어제도, 그제도 이 자리에 앉아 있던 나를 기억하는 걸까요.

창가에 앉아 노트를 꺼냅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펜은 종이 위에서 멈춰 있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까요.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리 없는데.

-

시간은 흐르는데 이곳만 멈춰있습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떤 사람의 걸음은 어떤 사람을 향해 이어지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의 기다림이 시작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이 창밖에서 펼쳐집니다.

출근하는 직장인들,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젊은 부부.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걸음은 모두 어딘가를 향해 있습니다.
오직 나만이 아무 곳도 향하지 않습니다.

-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를 기억합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산노미야 역에서 내려걸었던 길.
낯선 도시의 공기가 설렜습니다.

당신은 고베의 구석구석을 알고 있었습니다.

좁은 골목길의 라멘 가게, 드러나지 않은 작은 신사,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비밀스러운 전망대.

당신 덕분에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신에게 빠진 것인지,
고베라는 도시에 빠진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릅니다.

-

종업원이 새로운 커피를 내오며 미소를 건넵니다.
매일 이 자리에서 저를 지켜보았을 눈이 따뜻합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킵니다. 당신과 처음 만났던 시간입니다.
기억하나요? 산노미야 역 앞 서점에서 같은 책을 고르던 우리.

우연히 부딪혀 떨어뜨린 책을 동시에 집으려다 마주친 시선.
그때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카페는 사람들로 채워집니다.

숟가락 소리,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가 공간을 메웁니다.
당신과 처음 마주 앉았던 이 자리, 지금은 빈 의자만이 놓여있습니다.

테이블 위 작은 꽃병에 꽂힌 카네이션이 시들어갑니다.
그날의 대화들이 다시 들리는 듯합니다.

도쿄에서 온 당신이 고베를 좋아하게 된 이유,
항구 도시의 낭만과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쓰고 싶다던 당신의 꿈.

처음으로 당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들.

서울에서의 학창 시절, 일본 문학을 좋아하게 된 계기,
고베에서 언어 교사가 되고 싶다던 꿈.

모든 것이 시작되던 그날의 대화들.
지금은 빈 공기만이 남았습니다.

-

오후의 항구에서는 배들이 떠나고 돌아옵니다.

철제 난간에 기대어 저 멀리 수평선을 봅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바다를 보고 있을지.

갈매기들이 하늘을 가르고, 부서지는 파도가 시선을 붙잡습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이곳에선 모든 것이 그날 그대로입니다.

대형 화물선이 항구를 빠져나갑니다.
목적지는 어디일까. 당신이 떠난 곳과 같은 방향일까.

떠나는 배를 보다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도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이 기다림의 항구에서.

-

항구에서 돌아오는 길, 당신의 아파트 근처를 지납니다.
생각 없이 걷다가 303호가 있는 건물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발길이 자꾸 이곳으로 향합니다.
현관문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 들어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골목을 걸으며 지난날들을 떠올립니다.

당신과 함께했던 순간들, 나눴던 대화들, 계획했던 미래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무엇이 당신을 떠나게 했을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답은 오지 않습니다.

-

해가 저물어가고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켜집니다.
마지막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저는 돌아갈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이 떠난 이 도시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서울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다른 도시로 떠나야 할까.
아니면 그냥 이곳에 남아 당신이 떠나간 자리를 지켜야 할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저녁노을이 바다 위로 번지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집니다.

-

밤이 깊어갑니다.

전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다시 한번 당신의 아파트 앞에 섭니다.
303호의 창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달빛이 창틀 위 빗물에 비쳐 반짝입니다.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가 멀어져 가고, 밤공기가 차갑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냅니다.

당신에게 주려던 편지입니다. 읽히지도 않을 편지를 왜 쓰려했을까요.
어쩌면 당신이 아닌 제 자신에게 쓰는 편지였는지도 모릅니다.

구겨진 종이를 펴서 한 번 더 읽어봅니다.

“당신을 찾아 고베에 왔습니다. 당신은 이미 떠났지만, 저는 여전히 이곳에 있습니다.
당신이 좋아했던 이 도시에서, 당신의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겠지만, 그래도 찾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는 당신을 찾는 게 아니라, 당신과 함께했던 저 자신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편지는 당신에게 보내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떠나야 할 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안녕히, 당신이 좋아했던 고베여. 안녕히, 당신을 기다리던 나의 모든 날들이여.”

-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립니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저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고베의 아침을 기다립니다.

안개가 걷히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때까지,
당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리에서.

구겨진 편지를 주머니에 다시 넣습니다.

이 편지는 보내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다음 전차가 언제 떠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전차를 기다리기보다,
이곳의 아침 속에 남아 당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