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승에 머문 시간이 길었던 나는 남들보다 몇배는 늦게 승급 컨텐츠를 경험했다.
강백호에게 슈팅 연습이 즐거운 시간이었듯
채팅과 이벤트만을 반복하던 나에겐 서쪽 대륙에 국적을 구하러 가는 과정조차 즐겁게 느껴졌다.
초원에서 라그샷도 쏴보고.. 비슷한 체마를 가진 유저들과 함께 성장하는 경험도 하고..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퀘스트를 하나 꼽자면 단연 오렌 미궁의 라미아.
즉 [무기업] 퀘스트였다.
무기업 퀘스트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지치는 퀘스트다.
미궁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미로를 반복적으로 통과하며 끈질기게 달라붙는 잡몹을 떼어놓으면
뒤에서 또 한명이 길을 잃고..
그 사람을 챙기러 갔다가 코마가 뜨기도 하고 동선이 꼬이기도 하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채팅을 치는 시간보다, 귓말로 소통하는 시간이 더 길 정도였으니..
정작 하는 건 별거 없는 것 같은데 진이 다 빠지는 그런 퀘스트였다.
힘겹게 클리어하고 난 뒤엔?
각자의 손에는 무기업 제조를 할 수 있는 한번의 기회가 주어지고 끝.
성공하면 험난한 과정도 추억으로 떠올리며 기분좋게 마칠 수 있지만
실패하면 그 노력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시간으로 변하고 만다.
몇시간의 노력이 단 1초만에 결정난단 말이지.
옆에서 무기업에 성공한 파티원들에게 축하 메세지를 건내며 내심 드는 생각
"왜 나만.."
함께 고생하며 올라간 팀원들과의 PK를 유도한 유폐왕 퀘스트도 그렇고
초기 개발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보면 게임에 과몰입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해야할까.
대단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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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두번의 간담회에 참석하며 나에겐 많은 유저분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과정속에서 유저들의 생각이 정말 천차만별이라고 느꼈던 부분이 바로
게임의 [편의성]이다.
이동 속도가 느리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충분히 건의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마치 이동 속도가 느려서 이 게임 전체가 잘못된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편의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게임 자체를 부정하는 풍조는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유저들의 바람을 적극 수용한 운영자는 오랜 고민끝에 [셔스의 혼] 컨텐츠를 내놓게 된다.
단순히 이동 속도를 높이는 게 아닌
셔스의 혼을 파밍해 케릭터의 이동 속도 또한 하나의 스펙으로 만들어 활용한 방법!
그리고 써클별 사냥터에 캡슐을 배치해 추가적으로 부스터를 파밍하는 컨텐츠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컨텐츠에 대한 반응은 최악에 가까웠다.
속된말로 그냥 속도 올려주면 끝날걸 왜 뻘짓을 하냐는 냉담한 반응과 조소.
결국 셔스의혼은 거래가 가능한 아이템이 되었고,
누구나 아이템을 구매하면 스펙업을 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실패한 컨텐츠가 되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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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땐 게임을 하면서 "왜?" 라는 질문을 해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둠의전설이란 세계관이 있고 거기에 아주 작은 내가 들어와
모든걸 배우고, 적응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RPG도 해보고, 게임에 대한 경력이 쌓이면서 하나 둘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더 좋을텐데 왜 굳이.."
이 생각은 때론 내가 게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오만이 되기도 하고
내가 그만큼 좋아했던 이 게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사실 어느쪽이든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확실한 건 모두의 마음에 드는 패치는 없을거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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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어렵게 사냥팀을 구할 필요도 없고 마을에 있는 수로에 들어가
몬스터를 몇마리 사냥하면 바로 풀경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누군가에겐 진입 장벽을 허물고 다시 이 게임에 적응 할 수 있는 좋은 패치였지만
누군가에겐 이 게임을 하는 이유를 잃게 만든 패치일지도 모른다.
얼마전에 사라진 전사, 도적의 기술 퀘스트도 마찬가지.
이젠 불필요한 과정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굳이 과거의 향수를 지워야하냐는 반발도 있었다.
한때는 나도 내 생각만을 고집하며, 이 게임이 잘못됐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곤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과정은 오래된 게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일이 아닐런지..
어느쪽이 옳고 틀린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길 수 밖에 없는 변화였음을.
깨닫기엔 너무 어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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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게임이 더 편해지는 것과, 예전의 감성을 유지하는 쪽이 있다면
어느쪽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기다림의 미학은 단순히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속에서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3존 이상에 가면 마법공격 한방에 내 케릭터가 죽고 아이템을 잃었지만
그런 어려움이 있기에 많은 유저들에게 다양한 에피소드가 생겼던 게 아닐까요.
어둠의전설을 추억하는 영상이나 게시글을 보면 이런 의견이 많더라구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던 게임"
지금 생각해보면 실제 시간을 기다려 배를 타기도 하고
스킬업을 위해 밤새 매크로를 돌려놓기도 하고
무기업을 스무번 넘게 도전하신 분들도 있지만
그로인해 만들어진 추억도 적지 않더라고요.
게임은 앞으로도 계속 변하겠지만
그 시간을 너무 부정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남겨봅니다.
ps
제목을 보고 증강체를 떠올렸다면 당신은 롤체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