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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늘어난 티셔츠와 설렘 50초
2674 2025.09.24. 14:53

1993.17















어깨를 다치고 나니 가장 곤란한 건 옷 입는 일이다.

팔이 잘 올라가지 않으니 티셔츠에 팔을 끼워 넣는 게 고문이다.
매일 아침이 원시인 복장 체험 시간이 된다.

옷걸이에 걸린 티셔츠들을 보니 목이 하나같이 늘어나 있다.

억지로 머리를 욱여넣다 생긴 참사다. 괜히 미안하면서도 씁쓸하다.
멀쩡했던 옷들이 모두 거북목 환자가 되어버렸다.

‘앞으로는 오픈카라 셔츠만 입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곧 그만둔다.
단추 잠그는 것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

지퍼는 어떨까.
하지만 지퍼 티셔츠라니, 중년의 위기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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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 구령 맞추듯 팔을 들어 올리는 재활 덕분일까.
두 달쯤 지나자 티셔츠와의 전투가 조금 수월해졌다.

오, 젠장. 당장 버릴 필요는 없겠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설렌다.
여름은 거의 끝나가지만, 장바구니에 오래 담아둔 티셔츠 하나쯤은 결제하기로 한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이 말했다.
하루가 고단하면, 설레는 순간 5분만 채워가라고. 그 말이 맞다.

티셔츠가 목 늘어나지 않고 매끈하게 입혀지는 것만으로도 50초는 설렜다.
어깨 다친 사람만 아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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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은 멀쩡한 게 다행이지, 하고 중얼거리며 집을 나선다.
그 생각으로 10초 더 채운다.

왼손으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솜씨도 제법 늘었다는 걸 깨닫자 또 10초.
어느새 70초다. 당분간 백수라는 것도 다행이다.

오늘도 나는 간다.

영화관이든, 도서관이든, 어디로든.
어떻게든 남은 4분을 채우러.

목이 늘어나지 않은 새 티셔츠를 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