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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정오
4478 2025.09.30. 21:54

1993.18
















국밥집의 불은 새벽 네 시에 켜졌다.

뼈를 넣고, 국물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가 시작됐다.


파는 늘 많았다. 손님들이 건져내도, 국물 맛이 쓰다고 불평해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에는 라디오를 켜놓고 뜨개질을 했다.

가삿말을 작게 따라 부르며, 바늘이 스물두 벌의 스웨터를 만들어냈다.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여전히 받지 않았다. 결국 문자가 왔다.


“언니, 제주도에 가자. 같이 가자.”


그녀는 제주에 가지 않았다.

화요일 오전, 국자를 든 채 바닥에 쓰러졌다.

육수가 넘쳐흘렀고, 파의 알싸한 냄새가 가게를 메웠다.

가방 속에서 굴러 나온 바늘. 스물세 번째 스웨터는 소매 하나가 비어 있었다.


-


다른 남자는 늘 기다렸다.

통장 숫자가 여덟 자리가 되면, 그때 사람들 앞에 설 거라고.


지금은 악수도, 웃음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돈이 없으면 친절마저 초라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웃음을 아꼈다.


-


또 다른 여자는 체중계 위에 섰다.

거울 앞에서 제 몸을 지우듯 서 있었다.


살만 빠지면 돼. 그런 다짐으로 오늘을 버텼다.

옷장에는 새 옷이 걸려 있었고, 택은 떼어지지 않았다.


금요일 밤, 거울 속 숫자는 끝내 닿지 못한 채, 그녀는 쓰러졌다.

옷은 여전히 옷장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또 한 남자는 책상에 매여 살았다.

해야 할 일들이 숨을 막았다.


매일 밤 열한 시에 퇴근했고, 주말에도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그를 불렀지만 가지 않았다.

연인이 그를 기다렸지만 가지 않았다.


서랍 깊은 곳엔 사직서가 세 장 있었다. 날짜는 공란이었다.

월요일 아침,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손에 닿지 못한 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또 한 여자는 거울을 피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애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으니까.


언젠가 얼굴을 바꾸면. 뼈를 깎고 살을 채우면. 그때는 세상 밖으로 나가리라.

그전까지 방 안에서 살아야 했다.


-


그리고 또 한 여자는 주방에 서 있었다.

설거지와 빨래, 아이들의 울음과 저녁 준비 사이에서.


그녀의 손은 언제나 젖어 있었다.

아이들이 다 크면. 그때 나를 위해 살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자신의 먼지 쌓인 꿈을 서랍 속에 접어 넣었다.


-


육수는 여전히 끓고 있었고. 거울 속 숫자는 변하지 않았고.

일은 불어나고 있었으며. 옷은 택을 매단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언젠가를 기다렸다.

조건이 맞으면, 때가 되면, 준비가 끝나면. 그때 진짜 삶이 시작될 것이라 믿었다.


웃음은 아껴두었고, 사랑은 미뤄두었고, 자신은 서랍에 접어 넣었다.


그들은 모두 정오에 죽었다.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었고, 아직 하루의 절반도 지나지 않았을 때.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았을 때.


-


장례식장에 놓인 것들.

스물세 번째 바늘. 접어둔 사직서.

택이 달린 새 옷. 읽지 않은 문자. 시작되지 못한 사랑.


누군가 물었다. “고인이 좋아하시던 건 뭐였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이 진정 좋아하는 일은 언제나 나중이었으니까.


-


영정 사진 속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언젠가 웃기 위해 아껴둔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