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서고 위치: 제2심층 서해서가 붉은 철함
문서 인장: 「왕관과 검」「술잔과 해골」
문서 제목: 폴라누스의 마지막 잔치
보관 연대: 세오력 79년 추분기
발견 경위: 래비아 폐허의 지하 금고, 깨진 술잔들 사이
문서 보존: 포도주 얼룩처럼 붉게 변색
열람 제한: 글을 아는 자 이상
관련 문서: 「검은 비단과 금화」래비아 멸망 목격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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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고 관리인 주석]
향락의 왕 폴라누스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조롱과 경멸로 가득하지만,
이 문서는 조금 다르다.
왕궁의 시종이었던 자가 래비아의 멸망 직전.
폴라누스 왕의 마지막 밤을 기록한 것으로,
역사가 ‘어리석은 폭군’으로만 기억하는 인물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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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시작]
폴라누스 왕이 마지막 술잔을 주문한 것은,
테네즈의 군대가 성문 밖까지 밀려왔다는 전령이 도착한 저녁이었다.
왕은 보고를 받은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장인을 불렀고,
나는 그때 전하 곁에서 포도주 항아리를 들고 서 있었다.
전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20년간 왕을 모시며 나는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대전쟁이 터졌을 때도, 왕비가 죽었을 때도,
테네즈가 동맹을 파기했을 때도, 전하는 늘 새 술잔을 주문했다.
그의 손은 양피지 위에 술잔에 새길 도안을 그릴 때조차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은으로 만들어라.” 왕은 양피지에 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바닥엔 달을 새기고, 손잡이엔 포도 넝쿨을 감아라. 테두리는...” 그가 잠시 멈춰 창밖을 보았다.
성 밖 멀리서 횃불들이 움직였다. 그 빛은 점점 가까워지며,
어둠 속에서 거대한 짐승의 눈처럼 깜빡였다. “까마귀 깃털 무늬로 하라.”
장인은 고개를 숙였으나, 발끝이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손이 양피지를 쥐고선 떨리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전하.”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흘은 걸릴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서둘러야겠군.” 왕은 침착하게 말했다. “내일 밤 잔치를 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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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이 물러난 뒤 나는 왕에게 포도주를 따랐고,
그는 술잔을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
그것은 십 년쯤 전에 주문한 것으로,
청옥으로 손잡이를 만들고 밑바닥에 제비꽃을 새긴 잔이었다.
촛불이 잔을 통과해 왕의 얼굴에 푸른 그림자를 남겼다.
그 순간, 나는 왕이 늙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위했을 때 열여섯이었던 소년은 이제 쉰셋이었고,
머리칼에는 흰 것이 섞여 있었으며, 눈가에는 주름이 파여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테네즈의 전령이 성문 앞에 섰다.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이었고, 왕은 전령을 알현실로 불렀다.
나는 포도주를 따르라는 명을 받았다.
전령은 붉은 갑옷을 입고 있었고 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ㅡ
이미 수오미를 지나오며 사람들을 베었다는 뜻이었고,
그의 검날에는 아직 핏자국이 마르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테네즈 공께서 전하에게 전합니다.” 전령의 목소리는 젊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성문을 열고 왕관을 내려놓으시면 목숨만은 건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술잔을 들어 빛에 비춰보았고, 포도주가 흔들리며 잔 안쪽에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목숨을 건진다.” 왕이 중얼거렸다. “테네즈는, 그 말의 무게를 아는가?”
전령은 대답하지 않았고 왕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단지 술잔의 포도주를 천천히 마셨다.
“내일 밤 잔치를 연다고 전해라.” 그가 빈 잔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테네즈가 참석하고 싶다면 환영한다. 새 술잔도 준비할 테니.”
전령이 떠난 뒤, 백관들이 전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재상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제발…”
“일어나라.” 왕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웠고 날카로운 모서리가 하나도 없었다.
“너희들은 항상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했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고.”
왕은 빈 잔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고,
그 동작은 마치 누군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틀린 말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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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왕이 수장고로 내려가는 뒤를 따랐다.
횃불 하나만 들고 내려간 창고는 깊고 넓었다.
벽을 따라 선반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그 위에 술잔들이 놓여 있었다.
은으로 만든 것, 금으로 만든 것, 유리로 만든 것, 옥으로 만든 것,
나무로 깎은 것, 뼈로 조각한 것ㅡ전하가 즉위한 날부터 만들어온 술잔들이 거기 있었고,
횃불빛이 닿을 때마다 술잔들이 살아 있는 듯 숨 쉬었다.
왕은 선반 하나하나를 천천히 지나가며 술잔들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어떤 것 앞에서는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으며,
어떤 것은 집어 들어 빛에 비춰보기도 했다.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어.” 왕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며 연인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떠올렸지. 하나하나 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고, 다시 열었다가 닫았으며, 세 번째가 되어서야 말이 나왔다.
“전하.” 간신히 말을 이어간다. “대체 이 술잔들을 왜 만드셨습니까?”
왕은 걸음을 멈췄다.
손에 든 술잔ㅡ첫 번째로 만든 것으로 나무를 깎아 만든 소박한 잔이었다ㅡ을 들어 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전하의 목소리에는 사십 년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열여섯이었고, 왕관은 목을 짓눌렀지.
대관식이 끝난 뒤 혼자 방에 남았을 때 숨이 막혀왔어. 그래서 왕관을 벗고 술을 마셨는데...”
왕이 잠시 말을 멈추고 술잔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이 나무의 결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술잔은 손에 착 달라붙더군. 왕관은 그러지 않았지.”
횃불이 흔들리며 그림자들이 벽을 타고 춤을 춘다.
술잔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날 밤 알았다네.” 왕은 말을 이어갔으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내가 왕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술잔은 들 수 있었지.
그래서 계속 만들었네. 매번 새로운 술잔을 만들 때마다, 이것만큼은 내가 선택한 거라고,
이것만큼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질문하지 않았지만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왕의 웃음 속에는 쓴맛이 배어 있었고 후회가 섞여 있었으며 체념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더군. 백 개를 만들어도, 천 개를 만들어도,
왕관의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왕이 첫 번째 술잔을 제자리에 놓고
다시 걸음을 옮겨 선반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횃불이 절반쯤 타들어갈 때까지 왕은 술잔들 사이를 걸었으며, 나는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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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저녁, 왕은 정말로 잔치를 열었다.
대연회장의 긴 탁자 위에 음식들이 차려졌는데ㅡ성에 남아 있는 식량을 모두 꺼냈을 것이다ㅡ
돼지 통구이가 있었고 포도주 항아리들이 줄지어 있었으며, 술잔들이 놓였다.
그가 지금껏 만든 술잔들이 촛불 아래 놓였고,
은잔과 금잔과 옥잔과 유리잔이 빛을 받아 반짝였으며, 왕은 이 중심에 앉았다.
신하들과 군인들. 이어 성 내의 모든 하인들이 들어와 앉았다.
모두가 제자리에 앉았지만 아무도 술잔을 들지 않았다.
성 밖에서는 북소리가 울렸고, 화살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으며,
군대가 진을 치는 소리가 멀리서 웅웅거렸다.
“마셔라.” 왕은 자신의 술잔ㅡ어젯밤 완성된, 까마귀 깃털 무늬가 새겨진 은잔ㅡ을 들었다.
“마지막 잔치니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재상이 울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가 떨리며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젊은 기사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빼들었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전하.”
“알아.” 왕의 눈이 기사를 훑었으며 그 시선에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너희들은 충직했다. 어리석은 왕을 모시면서도 누구도 떠나지 않았지.”
왕은 술잔을 입술에 갖다 댔지만 마시지 않았고, 단지 테두리에 입술을 댄 채 멈춰 있었다.
“그래서 미안하군. 내가 남겨줄 수 있는 건, 이 술잔들 뿐이니.”
그때 성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갈라지고 쇠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대연회장까지 울려왔고 촛불들이 흔들렸다.
테네즈의 군대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발소리가 복도를 타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며, 죽음이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왕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천천히 일어나 왕관을 벗었다.
“가거라.”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이 술잔들을 가지고 어디든 가서 살아남아라. 그리고...”
왕의 목소리가 갈라졌고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나와 래비아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군.
어리석은 왕이었지만, 술잔만큼은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
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전하 옆에 남았다.
다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ㅡ어떤 이들은 술잔을 들고 도망쳤고,
어떤 이들은 빈손으로 달아났으며, 어떤 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ㅡ대연회장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탁자 위에는 술잔들만 남아 촛불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너는 왜 남았느냐?” 왕이 물었다.
“누군가는 마지막을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왕은 웃었고, 다시 자신의 술잔을 들어 마셨다.
포도주가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갔고, 왕은 눈을 감았다.
한참을 그대로 있던 왕은 마침내 눈을 떴다.
“그럼 너에게 주지.” 그가 빈 잔을 내게 건넸다. “마지막 술잔을.”
문이 부서지며 그들이 밀려들어왔다.
붉은 갑옷을 입은 테네즈의 유령들.
그들의 검에는 피가 묻어 있었으며,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선두에 선 장군이 왕을 향해 칼을 들었고, 칼날이 촛불을 받아 번쩍였다.
“기다려라.” 그의 목소리에는 왕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권위. 근엄함이 섞여 있었다. “이 술잔들을 보거라. 하나하나 내가 직접 도안을 그려 만들게 한 것들이지.”
장군이 잠시 멈칫했고, 그의 눈이 탁자 위를 훑었다.
수천 개의 값비싼 술잔들이 촛불 아래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아름답지 않은가?” 왕의 손이 탁자를 쓰다듬었다.
“나는 래비아를 지키지 못했어. 전쟁을 막지도 못했고, 백성들을 구하지도 못했지.
하지만 이 술잔들만큼은...”
왕은 한 술잔을 집어 들었고 그것을 빛에 비춰보았다. 촛불이 술잔을 통과하며 무지갯빛으로 흩어졌다.
“이들만큼은 내가 만든 거야.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나는 기어코 만들어냈지.”
장군의 칼이 내려왔다. 빠르고 정확했으며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쓰러지며 탁자를 붙잡았다. 술잔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은 조각들이 흩어지며 촛불을 스쳤다. 불빛이 그 위에서 한순간 흔들렸다.
나는 자리에 서서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왕의 피가 탁자를 적시며 흘러내렸고, 술잔들 사이로 번져나갔다.
붉은 액체가 은과 금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피는 뜨거웠고, 증기가 피어올랐다. 포도주 냄새처럼 달콤한 핏내가 코를 찔렀다.
군인들이 술잔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루에 술잔들을 마구 쑤셔 넣었다.
서로 더 많이 가지려고 싸웠으며,
은으로 만든 것과 금으로 만든 것과 보석이 박힌 것들을 가져갔다.
술잔들이 자루 속에서 부딪혀 쨍그랑, 울음 같은 소리를 냈다.
나는 그게 왕이, 래비아가 우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나무로 만든 첫 번째 술잔은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탁자 구석에 놓여 있었던 술잔.
왕의 피가 그 테두리를 적시고 있었으며,
나무가 피를 빨아들이며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는 술잔을 집어 들었고 그가 내게 준 마지막 술잔ㅡ까마귀 깃털 무늬의 은잔ㅡ과 함께 품속에 넣었다.
두 술잔은 따뜻했고 왕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들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날 밤 나는 불타는 성을 빠져나왔다.
뒤에서는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비명.
래비아가 잿더미로 변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불꽃이 하늘을 찔렀다.
성벽이 무너지며 천둥 같은 소리를 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품속의 두 술잔이 걸음마다 부딪혀 미세한 울림을 냈다.
그 소리가, 왕의 마지막 숨처럼 이어졌다. 나는 폴라누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 아름답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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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술잔을 루어스의 박물관에 기증한다.
나는 여든을 넘겼다. 래비아가 멸망한 지 오십 년이 지났고,
폴라누스 왕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으며, 역사는 전하를 방탕한 폭군이라 기록했다.
사람들은 전하의 이름을 웃음거리로 삼는다.
하지만, 그대들은 아는가.
어둠 속에서 촛불처럼 빛나던 술잔들을.
그것들을 하나하나 만들며 왕관의 무게를 견뎌낸 한 남자를.
도망칠 곳 없는 왕좌에서, 술잔이라는 작은 자유를 붙잡으려 했던 그를.
어리석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누가 어리석지 않은가?
왕관을 쓴 자도, 검을 든 자도, 깃펜을 쥔 자도ㅡ결국 모두 왕관으로부터, 전쟁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을 뿐이다.
폴라누스 왕은 술잔을 만들었다. 그가, 래비아가 남긴 전부다.
하지만 가끔, 깊은 밤 이 술잔에 포도주를 따라 마실 때면, 나는 전하가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왕은 말했다. 왕관보다 술잔이 가벼웠노라고.
그것이 전부였는지도. 어쩌면 우리가 견딜 수 있었던 건,
왕관이 아니라 술잔의 무게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처**터 이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술잔을 보는 이들에게 전한다.
폴라누스 왕을 비웃지 마라.
그는 왕관을 쓸 수 없었지만, 술잔을 들 수는 있었다.
그리고 술잔을 들 수 있다는 것은,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까마귀 깃털 무늬가 새겨진 이 은잔을, 여기에 남긴다.
폴라누스 왕의 마지막 술잔을. 그가 마지막으로 입술에 댔던 술잔을.
그리고 첫 번째 술잔,
나무를 깎아 만든 소박한 그것도 함께 남긴다.
시작과 끝. 사이의 짧은 틈에 폴라누스 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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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고 관리인의 마지막 주석]
세오력 79년 겨울.
이 증언을 남긴 시종은,
기증 후 사흘 만에 이아의 품에 안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두 술잔은
루어스 용자의 박물관에 영구 보관된다.
폴라누스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지만,
이 술잔들에 대한 평가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정말로 아름답다는 것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