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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남겨질 궁리
2590 2025.10.10. 03:48

1993.19
















많이 먹어라, 더 먹어라, 먹고 또 먹으라던.
왜 몰랐을까?
그 말들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

할머니가 떠난 지 오래다.
얼굴은 희미해졌는데, 손등의 온기만은 또렷하다.

정선의 그 부엌, 김이 오른 감자밥, 하얀 밥그릇, 울퉁불퉁한 감자 한 덩이.
할머니는 감자를 밥에 넣었다. 국에도 넣었다.
전을 부치고, 쪄서 으깨고, 그냥 삶아서도 내놓았다.

정선에서는 감자가 안 끼는 곳이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는데, 그 울퉁불퉁한 모양만은 여전히 내 안에 박혀 있다.

준비하지 못했던 이별은 자꾸만 나를 여름밤의 식탁으로 데려가고,
그때마다 나는 감자밥 냄새 속에 웅크린 아이가 된다.

엄마도 그렇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의 마음이 할머니의 자리로 향한다.

-

기억하고 싶다. 밥을 먹자고 깨우던 성가신 새벽을, 둘이 낑낑거리며 깎던 감자를,
솥뚜껑을 열 때마다 쏟아지던 김을, 늘 식탁 한가운데 있었던 감자밥과 감잣국을.

옥수수밭을 해쳐 나오던 할머니의 뒷모습을, 퉁퉁 부은 손과 지팡이 소리,
느린 걸음, 알아듣기 어려운 사투리, 낮은 숨소리까지. 나는 그 모든 것을 아주 자세히 기억하고 싶다.

요즘은 엄마를 본다. 할머니를 닮은 손끝, 감자를 깎을 때의 습관,
혼잣말처럼 흘러나오는 “많이 먹어라.” 그래서 미리, 아주 열렬히 엄마를 그린다.
언젠가 이 부엌에서의 시간도 사라질 것을 알고 있어서.

-

그래서 자꾸 남기고 싶어진다.
식탁 위의 감자 껍질, 김이 서린 창문, 아직 따뜻한 밥 냄새, 이 안에 머물던 목소리.

감자의 울퉁불퉁한 면이 꼭 할머니 같아서,
오늘도 밥을 꼭꼭 *으며 사무친다.

그러니 나는 아주 잘 남겨져야만 한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사랑이 많아서.

할머니가 내게 물려준 그 따뜻함을 문신처럼 품고,
나는 오늘도 잘 남겨질 궁리를 한다.